* 역시  Multudes에 실린 글인데,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에서 <다중>의 문제가 어떻게 제기되고 있는지 검토하고 있다.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제시해주는 좋은 글인데, 다만 다중을 <주체>라 부르는 것은 동의하기 어려운 발상이다. 이는 비주체적인 정치학을 사고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한 사례인 것 같다. <multitude>라는 용어는 <다중>으로 번역했고, 본문에서 한 번 등장하는 <masse>라는 용어는 <대중>으로 번역했다. 이 글 역시 출판을 염두에 둔 게 아니고 충분한 교열을 거치지도 않았기 때문에, 공적 매체에 무단으로 인용하는 것은 불허한다. 인용을 원하는 분들은 역자에게 미리 허락을 얻기 바란다. 

 

Fillippo Del Lucchese, “S'accoutumer à la diversité: Figures de la multitude chez Machiavel et Spinoza”, Multudes 13, 2003.

상위성(相違性)에 익숙해지기: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에서 대중의 형상들

 

평민들(plèbs)에게 인간의 악덕을 한정시키는 자들의 견해에 대해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가 보여준 불신에서 출발하여 이 논문은 두 철학에게 정치의 토대를 이루는 다중의 이론적 지위를 검토한다. 한편으로는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태도가 강조되는데, 두 사람 모두 다중을 그 자체로 찬양하지 않고 그 부정적 측면, 곧 마치 자신들의 구원이라도 되는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투쟁하려는 인간들의 성향을 포착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합리성의 가장 거대한 표현으로서 다수의 개인적 주체의 구성이 강조된다. 이 논문은 독특한 개인(le singulier)에 대한 다자(le multiple)의 우월성이라는 관념 및 갈등적인 질서와 협동에 관한 마키아벨리의 이론 사이의 연계를 보여주고, 이것들이 스피노자 사상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끝을 맺는다.

***

    마키아벨리에게 역사가들의 견해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는 이들의 결론이 취약하거나 근거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주저 없이 비판한다. 특히 의미심장한 비판은 “다중보다 더 변덕스럽고 지조 없는 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에 대한 비판이다. 이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마키아벨리는 “문사(文士)들이 대중에 관해 비난하는 이러한 결함들은 모든 사람들, 특히 군주들에 관해서도 똑같이 비난할 수 있다.”
    유비적인 방식으로 『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다중에 관해 품고 있는 부정적 선입견을 벗겨내기가 어려움을 시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서술한 내용은, 모든 유한자에게 고유한 악덕들을 평민들에게만 한정시키는 사람들에게는 조롱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모든 사람은 똑같은 하나의 본성(자연, nature)을 갖고 있다. 권력과 교육이 우리에게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뿐이다.”[『정치론』 7장 27절]
    다중을 지조 없고 신뢰할 수 없으며 악덕에 잘 끌려다니고 본성적으로 반항적인 존재로 지각하는 전통에 맞서 스피노자는 새로운 관점을 구성하는데, 여기에는 다자(le multiple)와 독특한 개인(le singulier) 사이의 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다중은 독특한 개인들의 권리-역량[역량으로서의 권리]이 자기 조직화되는 내재적 과정을 통하여 국가의 역량과 덕목을 표현한다. 계약론자들이 말하는 일자로의 환원(reductio ad unum), 다자로서의 다자의 통일적인 종합에 맞서, 스피노자는 동일성의 관개체적(貫個體的, transindividuelle) 구성과정을 통해 독특한 개체들로 구성되는 복합적 개체의 합성을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스피노자는 1) 자연법과 다른 법들에 호소하지 않고서도, 곧 국가를 자연과 관련하여 국가 속의 국가인 것으로(tamquam imperium in imperio) 간주하지 않고서도, 국가의 형성과 삶, 해체를 설명할 수 있다. 2) 마키아벨리가 제기했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 갈등을 먼 과거의 자연상태로 몰아내거나 가둬두지 않고 계속해서 [국가를] 위협하는 것으로 고려할 수 있다. 3)독특한 권리-역량들이 합성되는 내재적 과정이라는 관념 및, 다중을 합성하는 다양한 독특성들, 상위성들, 갈등들을 유덕하게 관리한다는 관념, 한 마디로 말하면 독특한 개체에 대한 다자의 우월성이라는 관념을 가공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이 주제들에 관해 성찰할 때, 그에게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논거들은 말 그대로 진정한 개념적 ‘도구상자’로 제시된다. 그는 단지 홉스를 반대해서만이 아니라 특히 마키아벨리의 가장 독창적인 입장들 중 몇 가지를 재-가공함으로써, 다양성의 윤리를 구성한다.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가 일치하는 첫 번째 요소는 정치적 주체로서 다중을 구성하는 데서 모든 단순화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역시 여기서 구성적인 양가성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한다. 마키아벨리는 특히 행위 및 예견의 불확실성과 관련하여, 정치 행위에서 일체의 궁극적 보증의 부재와 관련하여 그렇게 한다. 다중은 참주들과 지배자들이 설파하는 환상들에 사로잡혀 있다. 다중은 역설적이게도 또는 기회주의적이게도, 예속들 중에서도 가장 가혹하고 가장 비극적인 예속 안에서 자신의 생존의 이유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예속의 관념이 지니고 있는 적극적인 요소 중 어떤 것도 자유의 현존만으로는 그 자체로 제거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다중이 겪는, 하지만 또한 때로는 다중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통해 이와 유비적인 주제들을 깊이 탐구한다. 예컨대 대중은 미신과 무지, 거짓 종교(vana religio)의 가공할 만한 도가니이다.
    다중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탐구는 심화되고 명시화된다. 두 저자 각각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지배적인 정치 이데올로기(적자들, 소수의 엘리트들(petit en tant que petit)의 유덕함 내지는 자유주의적인 사법적 기획이 추구하는 백인 성인 남성 소유자 개인의 유덕함)를 뒤집거나 부정하는 것만이 아니다. 반대로 이는 정치적 현실의 새로운 원리의 구성을 긍정하기 위해, 특히 유토피아적인 정치적 주체성의 목적론적 구성이라는 환상적 기획이 대표하는 함정을 피하기 위해 양가성들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고 약점들을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다중의 부정적 면모에 대한 서술은, 그로부터 출발하여 특히 정치의 차원에서 다자의 덕목을 드러낼 수 있는 첫 번째 요소로서 필수적이다. 예컨대 스피노자에 따를 경우 민주주의적으로 정돈된 상태에서 부조리한 행태를 두려워할 소지는 줄어드는데, 왜냐하면 “큰 회의체에서 다수가 동일한 한 가지 부조리한 짓을 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민주주의에서는 부조리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이는 허황된 생각이다). 하지만 이는 덜 해롭게 될 텐데, 왜냐하면 이성은 다수의 판단들 및 이 판단들 사이의 대결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합리성은 다중의 몸체 자체 내에서 작용하는 다수 개인들의 자기 구성의 동역학 내에서, 그리고 이 동역학에 의해 탄생한다. 양(量)의 윤리와 정치는 숫자로부터 생겨나는 이성과 역량을 표현한다. 하지만 다자로부터 생겨나는 합리성은 단순히 독특한 개인이 표현하는 합리성보다 더 큰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관계의 관념이 일차적인 것으로 부각되고 다중 개념에 대한 정의 자체를 위해 결정적이게 된다. 다중 내부에서, 다중을 통해 현실화되는 합리성은 정확히 말하면 다양성의 표현인 한에서 우월한 역량을 구성하는 것이지, 그 집합적이고 복수적인 차원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아니다. 독특한 개인의 경우 합리성이 정서들의 다수성을 희생한 댓가로 긍정되지 않고 오히려 정서들의 동역학과 갈등들 및 차이들을 조직하는 데 기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자 안에서 규정되는 갈등들 및 차이들은 다중의 복합적 몸체의 역량―매우 많은 방식으로 변용하고 변용되는 방식―을 배가시킨다.      
    여기서 마키아벨리 사상과의 ‘마주침’은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들을 낳는다. 다중의 범주는, 이 범주를 스피노자 정치 사상의 중심축들 중 하나이자 근본적인 혁신점들 중 하나로 만드는 실정적, 정초적, 구성적인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마키아벨리는 대의(代議) 및 다자의 규율화, 그리고 다자의 단일화라는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홉스가 원했듯이 다중의 인민으로의 전환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맞선 도구로 활용된다. 모든 목적론은 포기된다. 이는 상이한 통치[정부]형태 사이의 형식적 선택에 따른 포기가 아니라, 인간들로부터 확정적으로 그들의 역량 및 자연권을 박탈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따라나오는 포기이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적 지평에서, 상위성들의 종합과정으로, 갈등들의 정상화로, 차이들의 승화로 이해된 대의/대표(tamquam imperium in imperio)는 불가능해진다. 『정치론』에서 계약론이 포기되는 것과 평행적으로 우리는 다수적 개체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다중에 대한 가치부여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 스피노자가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러한 독해를 가공할 수 있게 해준 논거들을 명료하게 살펴볼 시간이 되었다.

복수화(plusieurs)하기: 다자의 표현으로서 정치적 합리성

    『군주론』을 시작하면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인민, 곧 “신분이 낮고 비천한”(『군주론』 강정인 옮김, 까치, 2003(제 2판), 10쪽) 사람들에 속함을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적-정치적 전장(戰場, Kampfplatz)을 공개적으로 선택한다. 그는 인민에서 발견되는 오류들 및 결함들을 잘 의식하고 있다. 자주 눈앞의 이득의 신기루에 눈이 먼 이들은 희망과 공포, 오만과 회한의 포로이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들의 책임은 일방적으로 인민에게만 전가되어서는 안된다.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토대 위에서 그는 소수의 지혜에 맞서, 다자들에게 전가된 전통적인 무능력을 거부할 수 있게 된다. 전통적인 정치사상가들이 인민과 평민에 대해 표명하는 불신에 반대하고, ‘군주의 이성’ 및 귀족들의 지혜에 대한 평행적인 변호론에도 반대하여 마키아벨리는 두 가지 원칙을 강력하게 긍정하고 있다. 첫번째 원칙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간에 인간들 사이에는 아무런 본성적 차이도, 후자보다 전자가 우월한 존재들로 고려될 수 있게 해주는 아무런 본성적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번째 원칙은 인간들의 행동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단지 교육에만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합한 일련의 제도들로 인민들 및 군주들에서 나타나는 결함들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군주들은 법에 의해 ‘규제’된다면, 유덕하게 통치한다. 하지만 다중 역시 일단 법에 의해 ‘규제’되면, 동일한 유덕함을 보여줄 것이다. 따라서 오래된 편견은 뒤집어지고, 우호적인 조건들―곧 다중이 좋은 법률로 규제되는 경우―에서는 정확히 로마 인민이 그랬듯이 다중이 “비굴하게 예속되지도, 무례하게 지배하지도 않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에게 좋은 법률이란 갈등에서, 곧 귀족들 및 군주들의 야심과 억압에 대한 다중의 저항 운동에서 생겨나게 된다는 점은 굳이 환기시킬 필요가 없다. 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민주주의 이념을 구성하기 위해 다시 취하고 있는 다중의 역량/유덕함의 자기 조직화와 긍정의 내재적 원리이다.
    따라서 만약 자연이 모든 인간에게 똑같다면, 만약 군주가 우월한 합리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면, 이는 다중이 다른 행위자들(배우들, acteurs)과 동등하게 정치의 무대에 등장할 권리를 옹호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곧 다중에게 존엄성과 정치적 합리성을 부여했다는 점에 “불경한” 마키아벨리의 경악할 만한 가르침들 중 하나가 있다.  
    『피렌체의 역사』에서 분석은 좀더 심화된다. 마키아벨리가 3권에서 치옴피의 소요[1378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일어난 하층노동자의 반란을 가리킨다. 치옴피(Chiompi)는 세모(洗毛), 소모(梳毛) 등 모직물 공업의 준비 공정 작업을 하는 종속 노동자를 의미한다―역자] 당시 익명의 연사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유명한 연설을 예로 들어보자. 이는 귀족들 및 군주들이 참칭하고 있는 지혜의 우월성에 기초하고 있는 질서를 전복하는 데 적합한 편파적(partial)이고 혁명적인 연설이며, 유일한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이고 무조건적인 긍정이다. 이 무명의 평민이 마키아벨리의 언어로 발언하고 있다는 사실은, 마키아벨리 자신이 인민과 평민을 새로운 정치의 주체들로서, 더 이상 사려깊거나 유덕한 군주의 인정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율적이고 열렬하게 정치의 무대로 진입하는 정치적, 사회적 형태들을 표현하는 심급들로서 인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자신의 말을 인용해보자.

그들의 기원이 오래되었음을, 그들이 우리와 대립함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기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똑같이 오래 되었고, 본성상 동일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오. 우리 자신을 벌거벗겨 본다면, 우리 모두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요. 우리가 그들의 옷을 입고 그들이 우리의 옷을 입는다면, 우리는 분명 귀족들처럼 보일 것이고, 그들은 귀족들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오직 가난과 부만이 우리를 불평등하게 만들기 때문이오.

    익명의 연사의 문채(文彩, figure)는 추상성의 위험을 피하면서 인민 주체의 정치적 중심성의 획득과 군주 내지는 귀족에 대한 인민의 우월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는 모든 정치 질서의 필연적 우연성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적 질서의 이름 아래 존경과 복종을 요구하는 귀족정의 로고스는 인간들의 공통의 본성에 대한 인정에 의해 실격되고 있다. 랑시에르가 정당하게 쓰고 있듯이 “이 최초의 로고스는 최초의 모순에 의해 물어뜯기고 있다. 사회에는 질서가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한 부류는 명령하고 다른 부류는 복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질서에 복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점이 요구된다. 곧 질서를 이해해야 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당신들은 당신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와 이미 동등해야 한다. 이러한 동등성이야말로 모든 자연적 질서를 갉아먹는다. 분명 거의 모든 경우에 열등한 자들은 복종한다. 그렇다 해도 이 사실에 의해 사회 질서는 자신의 궁극적인 우연성으로 반송된다.”[Rancière, La Mésentente, p. 39.]
    이렇게 해서 정치적 합리성[이라는 단수 표현]은 복수로 어미변화된다. 이는 다자의 표현인 반면, 정확히 말하면 군주의 모습을 띤 그 개인적 형태는 추상에 불과하며, 그것이 주장하는 우월성의 허상은 힘에 의해 벗겨진다.
    게다가 마키아벨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하나의 본성이라는 관념 및 개인에 대한 다자의 우위라는 관념을, 시간들의 변화 및 지배력(empire)이라는 질문과 연결시킨다. 이 질문은 인간 본성 및 그것이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모든 관점에 대해 중심적인 문제이다. 시간들이 극도로 가변적이듯이 인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의 견해를 바꾼다고 마키아벨리는 쓰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단지 가변성을 수동적으로 겪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가변성을 하나의 덕목으로, 시간의 변화 가능성에 맞서 ‘작용’(유희, jouer)하기 위한 전략적 원천으로 활용한다. 곧 이는 세계 및 자연의 가변성에 맞선 정념들 및 행동방식의 가변성이다. 이것들을 모방함으로써 사람들은 이것들의 덕목 및 역량을 모방한다. 우리는 바로 정치적 차원에서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심오한 표현을 발견하게 되는데, 개별 신체에 대한 다수의 신체의, 다중의 우월성을 긍정하는 원리가 그러하다.
    개별 신체[물체]들 및 혼합 신체[물체]들은 사실 모두 자신들의 퇴락을 막아주고 계속해서 새로운 힘들을 주입해줄 수 있는 작용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는 두 경우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혼합 신체[물체]가 개별 신체[물체]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와 달리 자신들의 시초로 되돌아가서 쇄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사론』에서 이러한 관념은 갈등 이론 및 귀족들과 심지어 군주들에 대한 인민의 우월성의 긍정을 통해 설명되고 있다. 반대로 『군주론』에서는 이 증명이 군주라는 개별 형상의 다양성 및 가변성을 미덕으로 제시하는 이론의 측면에서 제시되고 있다. 다중이 자신의 다수적 구성에 의해 획득하는 결과들을 군주는 끊임없이 변이에 적응함으로써 얻게 된다. 군주에게 요구되는 자질들은 상이하고 심지어 서로 대립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군주의 덕목을, 모든 유형의 성질을 제시하고 다변화하는 자연의 모방에서 찾게 만든다. 하지만 이는 또한 그의 한계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정확히 바로 여기서 그의 개별적인 본성은 상이한 ‘자질들’의 현행화의 한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한계와 목표, 위기와 역량은 마키아벨리의 담론에서 서로 뒤섞인다. 바로 여기에 켄타우로스 은유의 의미가 존재한다. 인간에게 키론[Chiron; 켄타우로스 중 하나로, 다른 켄타우로스와 달리 선량하고 정의를 존중했음―역자]은 장애물들을 분쇄하고, 자연의 변화들 및 다변성에 적응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한정하는 것에 굴하지 않으려는 시도를 표상한다. 곧 자연의 무한하고 다양한 가변성에 대립하는 개인적 다양성의 형상인 것이다. 이는 시점들(point de vue) 및 경험들을 다양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독특한 개인에게 이는 다자화함을 의미하며, 일자에게는 복수화함을 의미한다.

갈등적 협동에서 다중의 역량으로: 마키아벨리적인 도구상자

    하지만 이 원칙은 바로 가장 강력하고 가장 다면적인 주체는 다중임을 확언한다. 다중은 가장 커다란 정치적 합리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동시에 시간의 변화에 저항할 수 있고, 상황들 및 형세들의 무한한 변이에 적응할 수 있다.
    다자는 “시간의 변이들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다. 다자는 시간들의 변이 앞에서의 우월한 태도를 표현하는데, 왜냐하면 시민들, 체질들(humeurs) 및 정서들의 상이성은 자연의 상이성을 더 잘 반영하며, 이를 ‘모방하는’ 데서 훨씬 잘 성공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마키아벨리에서 다자의 형상의 구성 및 스피노자에서 이 형상의 활용에 관한 이 짧은 고찰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이 두 저자를 서로 접근시키고, 정치적-철학적 근대성과 관련한 이들의 독창성 및 이들의 전복적인 이례성을 심층적으로 고찰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다른 요소를 강조해 두기로 하자.
    『로마사론』 1권 20장에서 마키아벨리는 한 국가가 다수의 유덕한 군주들의 계승을 통해 일정한 수준의 유덕함과 역량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만약 유덕한 군주들의 계열이 중단되지 않는다면, 유덕함은 안정되고 사회의 정치적 삶도 안정시켜 줄 것이다. 공화국은 군주정에 비하면 이러한 안정화에 도달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 사실 공직자들의 다양한 가변성 덕분에 이 계열이 중단될 위험성은 최소로 줄어들고, 심지어 소멸된다.
    더욱이 자신의 갈등 이론, 곧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긍정성에 대한 명시적 확언을 통해 마키아벨리는 또한 덕목에 대한 두번째 긍정 원칙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키아벨리의 책 중에서 가장 갈등론적 입장이 잘 드러나고 있는 구절들에서 이 두번째 원칙은 사회적 체질들 사이의, 귀족과 인민 사이의 대결로부터 직접 탄생한다. 덕목은 더 이상 유덕한 세대의 선형적 계열에 따라 긍정되지 않고, 정치적 갈등으로부터 직접 탄생한다. 만약 전자의 경우 덕목이 다자에게 동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왜냐하면 세대의 계승을 통해 거대한 공직자들이 생겨나리라고 기대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후자의 경우에 덕목은 외부에 실존하는 게 아니라 이러한 다양성 내에서,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에 의해 실존한다. 덕목은 다양성의 직접적 산물이며, 체질과 의견, 갈등의 상이성의 직접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이한 모델이 스피노자에서도 발견된다. 민주주의는 여러 통치 형태들 중 한 가지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다중의 역량의 연속적인 자기-조직화와 절대적으로 절대적인 긍정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항상 열려 있는 이 과정―마키아벨리에서 권리와 갈등, 위기와 역량을 연결하는 회귀적인 동역학과 유비적인―은 필연적으로 갈등들을 포함한다. 다중의 다자적인 개별적 신체는 단지 정치적 갈등의 무대일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의 합리적 표현이기도 하다. 이는 이 신체가 자신을 합성하는 개체들 사이의 갈등적인 협동으로 살아감을 의미한다. 이는, 정치적 합리성이 복잡화하고 현행화되는 연속적 과정 중에 이 갈등들 안에서, 그리고 이 갈등들에 의해 살아간다.
    독특한 개인에 대한 다자의 우월성, 시간의 변화에 대한 다자의 적응 능력의 탁월성이라는 마키아벨리의 관념은 자연의 복잡성 및 가변성을 이해하려는 기획 내부에 기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특히 정치적 갈등에서 생겨나는 것으로서의 덕목이라는 관념―갈등적 질서에 관한 이론―은 이 동일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마키아벨리 사상의 지적 도구 상자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다중의 역량 위에 절대적으로 절대적인 통치[곧 민주주의―역자]를 정초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들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결함이 아니라 정치의 속성으로서 간주하려는, 따라서 이를 제거하거나 몰아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이를 고려하고, 이를 자신의 정치철학 전체의 기본 요소 중 하나로 만들기 위한 이론적 요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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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ria 2004-03-22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좋은 글 많이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공부가 짧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두고두고 생각할 문제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관개체성에서 '관'의 한자어를 '關'으로 쓰셨는데, 저번에 한번 뵜을 때 '관' 개념이 '貫'(그게 논어의 '오도는 일이관지'하고 관련이 있다고 말씀하셔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이라고 말씀하신 게 기억이 나서요. 제가 무슨 의견이 있는 건 아니고, 저번에 말씀하신 것과 다른 부분이 있어 혹시 생각의 변화가 있으셨던 건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이건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던 건데, 내친 김에 같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스피노자와 정치'에 다른 번역글도 들어간다면, '지적 차이'에 관한 글이 함께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발리바르가 문화혁명과 스피노자를 경유하면서 정식화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그 자신이 별로 사고를 전개시키지 않아서인지 국내에 소개가 많이 되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역사유물론의 전화'와 '마르크스의 철학' 외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글이 있다면 그걸 소개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제 생각에는 '역사유물론의 전화'에 실린 글을 재번역해서 싣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책 자체가 절판되었는데다가 아무래도 번역에 문제가 있을 테니까요. 최근에 다시 읽어본 인상에 따르면, 이 글은 스피노자 독해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은 것 같고, 또 이 문제가 당대의 정치적 쟁점과 어떤 식으로 연관되는지를 밝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글의 배경과 관련한 선생님의 역주와 함께 다시 번역된다면, '스피노자와 정치'를 읽는 이들이 그 작업의 정치적 의미를 가늠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물론 짧은 생각이고 출판의 포맷도 있을 테지만, 한 명의 '독자'로서 의견을 밝혀 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balmas 2004-03-22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자를 '關'으로 쓴 건 제 실수입니다.^^ <관계> 개념과의 관련성을 염두에 두다 보니까 무심결에 그렇게 쓴 것 같군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논문집>(아직 제목이 미정입니다)에 지적 차이에 관한 글을 수록하자는 제안은 생각해 볼 만한 제안인데, 현실적으로는 조금 어려움이 있을 것 같군요. 이 책에는 <스피노자와 정치> 외에도 3편의 글이 추가되는데, 출판사 쪽에서 애써서 3편의 글을 별도로 계약해 준 마당에 다른 글들을 더 싣자고 요구하는 게 좀 미안하기도 하고, 내용상으로도 이번에 묶는 글들은 직접 스피노자와 관련된 글들인데, 스피노자 철학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직접 스피노자 철학을 다루지는 않는 글을 포함시키는 건 책의 일관성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부담스럽군요.
내년 쯤 발리바르의 Nous, citoyens d'Europe(2001)을 번역, 출판하고(이 책은 <후마니타스>라는 신생 출판사에서 나올 예정입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발리바르의 책이나 글들을 꾸준히 소개할 생각인데, 언젠가 지적 차이에 관한 글들도 함께 묶어서 소개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