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연구] 제27호(2010년 6월)에 실린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제 학위논문 3장의 일부를 다소 손을 본 뒤에 발표한 글입니다.  

혹시 인용하시거나 논평하실 분은 [헤겔연구]에 수록된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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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용과 연관의 인과론―스피노자 인과 이론에 대한 한 가지 해석

 

 

I. 머리말

 

스피노자의 인과 이론은 그의 철학 체계의 다른 부분들에 비해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예컨대 근대 철학의 인과론을 다루는 책(Nadler 1993)의 「서문」에서 스티븐 내이들러는 근대 철학의 인과론을 데카르트의 상호작용론과 기회원인론,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론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스피노자의 인과론에는 아무런 자리도 마련해 놓지 않고 있다. 또 그의 인과론에 대해 논의하는 경우에도 다소 막연하거나 모호한 주석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갈릴레이에서 흄에 이르는 근대 철학에서 인과론의 문제를 다루는 책에서 엘하난 야키라(Elhanan Yakira)는 스피노자를 말브랑슈, 라이프니츠와 더불어 근대의 기계적 인과론에 대한 “반대자”(dissidents)로 분류하면서 그의 인과론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지만, 형이상학적 차원의 몇 가지 언급에 그치고 있다.[Yakira 1994, pp. 80 이하 참조.] 근대 철학에서 인과론 논쟁에 관해 최근에 출간된 또 다른 개론서의 경우는 “원인들과 충족 이유”라는 제목이 붙은 한 장에 걸쳐 스피노자를 라이프니츠와 더불어 다루고 있지만, 라이프니츠와 달리 스피노자의 인과론에 대해서는 간략한 요약 정도로 그치고 있다.[Clatterbaugh 1999. 이 책은 서양근대철학에서 인과이론을 개관하는 데 상당히 유용한 책이지만,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에 대한 전형적인 오해 중 한 가지를 반복하고 있다.]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논문이나 저서에서도 스피노자의 인과론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 드문 편이다. 스피노자의 인과론만을 전적으로 다루는 글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편이고, 몇몇 연구서나 주석서를 제외하면, 스피노자의 인과론을 독립적인 주제로 논의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Gueroult I, 8-10장 ; Donagan 1988 중 6장 1-4절; Macherey 1992a 등 참조. 그 이외에 Deleuze 1999의 “자기원인” 항목도 참조. ] 그리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스피노자의 인과론에 대한 여러 주석가들의 논의에는 상당한 오해가 담겨 있다. 이처럼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에 관한 논의가 드물 뿐만 아니라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스피노자가 자연철학에 관한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근대 철학에서 인과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것은 갈릴레이의 물리학 혁명이 계기가 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인과론에 대한 논의는 주로 자연학과 관련하여 전개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스피노자 철학에 체계적인 자연철학이 부재하다는 사실은 스피노자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인과론을 지니고 있었는지 의심해 볼 만한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근대 철학에서 인과론의 또 다른 쟁점은 신체와 정신, 물질과 사고의 관계에 대한 문제였다. 데카르트가 신체의 형상으로서 영혼/정신이라는 중세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사유와 연장을 엄격하게 구분한 이후, 인간이라는 하나의 통일체(적어도 우리의 경험에 의거했을 때)를 이루는 두 부분인 신체와 정신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새롭게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해 데카르트가 제기한 해법, 곧 신체와 정신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해법이 내포하는 애매모호함 때문에, 스피노자와 말브랑슈, 라이프니츠 같은 철학자들은 각자 이 문제에 대해 독자적인 대안을 모색했다. 하지만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스피노자는 신체와 정신을 하나의 통일체로 간주했기 때문에, 적어도 인과론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리 주목을 끌 만한 입장이 되지 못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Della Rocca는 정신과 신체의 동일성에 관한 스피노자의 주장은 그의 인과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Della Rocca 1991 참조.]

그러나 이런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 철학에는 인과론에 대한 매우 체계적인 관점이 담겨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스피노자의 인과론은,[이하에서 스피노자 저작은 다음과 같은 약어로 표시하겠다. 스피노자 전집은 G라는 약칭 아래 권 수는 로마자로, 페이지 수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할 것이다. 스피노자의 각각의 저작 및 󰡔윤리학󰡕의 정의와 공리, 정리, 증명, 주석 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시한다.
󰡔지성개선론󰡕: TIE, 󰡔소론󰡕: KV,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PPD, 󰡔윤리학󰡕: E
정의: D, 공리: A, 정리: P, 증명: d, 따름정리: c, 주석: s, 보조정리: L
E II P29s → 󰡔윤리학󰡕 2부 정리 29의 주석
KV II, 17, §5 → 󰡔소론󰡕 2부 17장 5절
]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E I P18)
내재적 인과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 “내재적”이라는 관형어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 밝혀내는 일이다. 왜냐하면 대개의 주석가들은 내재적 인과관계를 협소하게 해석하여 유한 양태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른바 “타동적”) 인과관계와 대립하는 것으로, 또는 그것과 외재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인과론이 내재적 인과론이라고 해서, 이를 근대 자연과학에서 확립된 외재적 인과관계(상대성 이론적 인과론이라는 의미에서)와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내재적, 외재적이라는 용어를 상식적인 관점에 따라 잘못 이해하는 것일뿐더러, 자칫 전근대적인 자연학으로 후퇴할 위험을 안고 있다.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론은 갈릴레이 이후 확립된 상대론적 인과론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를 동역학적 관점에서 발전시키려는 시도로 간주되어야 한다.

따라서 스피노자 인과론의 쟁점은 외재적 인과론을 수용하면서 어떻게 각각의 물체들에게 내재적인 인과역량을 부여할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 있으며, 우리가 보기에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변용(affectio)과 연관(connexio)이라는 두 개념에서 찾아야 한다. 변용이라는 용어는 󰡔윤리학󰡕에서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고 존재론에서 인간학에 이르는 스피노자 철학 체계의 일관성을 파악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동안 주석가들에 의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한 연관—또는 연쇄(concatenatio)—이라는 개념은 빈도가 매우 드물긴 하지만, 스피노자의 용어법들이 대개 그렇듯이 매우 전형적이고 일관된 용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개념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내재적 인과론이, 내면적 인과론 내지는 신과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수직적 인과론이라기보다는 유한 양태들의 외재적이고 무한한 변용의 인과연쇄를 통해 전개되는 인과론이라는 점을 밝혀줄 수 있다.

 

II. 내재적 원인과 타동적 원인

 

1. 초기 저작의 인과론

 

인과론과 관련하여 초기 저작과 󰡔윤리학󰡕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초기에 사용되던 스콜라철학적 용어법이 󰡔윤리학󰡕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며, 더 나아가 용어들이 상당히 단순해졌다는 점이다. 초기 저작 가운데 인과론에 관한 용어법들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곳은 󰡔소론󰡕 1부 3장이다. 스피노자는 여기서 8가지 측면에서 작용인을 구분하면서 신이 어떤 원인인가를 밝히고 있다.

 

작용인을 여덟 개의 부분으로 나누는 게 관례적이므로, 이제 신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원인인지 탐구해보기로 하자.

 

1. 우리는 신이 그의 행위의 유출적 또는 생산적 원인(uytvloejende ofte daarstellende oorzaak/emanantive or productive cause)이며, 행위의 발생과 관련해서는 능동적 또는 작용적 원인(doende ofte werkende oorzaak/active or efficient cause)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를 한 가지로 취급하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서로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2. 그는 내재적 원인(inblyvende oorzaak/immanent cause)이지 타동적 원인(overgaande oorzaak/transitive cause)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실행하지 자기 바깥에서 실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다(왜냐하면 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3. 신은 자유 원인이지 자연적 원인이 아니다. [...]

4. 신은 자기 자신을 통한 원인(oorzaak door zig zelfs/cause through himself)이지 우연적 원인(toeval oorzaak/accidental cause)이 아니다. [...]

5. 신은 그가 직접 창조한 결과들(물질 속의 운동 등과 같은)의 주요 원인이며, 여기에는 부차적 원인을 위한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차적 원인은 특별한 실재들로만 한정된다(신이 강한 바람으로 바다를 마르게 할 때라든가, 이와 유사한 자연 중의 다른 모든 특별한 실재들의 경우처럼). [...]

6. 우리의 앞선 증명들로부터 명백하듯이, 신만이 최초의 또는 창시적인 원인(eerste ofte beginnende oorzaak/first or initiating cause)이다.

7. 신은 또한 일반적 원인이지만, 이는 그가 상이한 실재들을 생산한다는 관점에서 그럴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신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결과를 생산하기 위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8. 신은 무한하고 부동적인, 그리고 우리가 그가 직접 창조했다고 말하는 실재들의 가까운 원인(naaste oorzaak/proximate cause)이지만,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특수한 실재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원인(laaste oorzaak/remote cause)이다.(KV I 3 §2; G I 35-36)

 

“관례적”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과론에 대한 이러한 구분은 당대의 강단철학의 용어법들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에 따라 얼마간 변형된 것이다.[게루에 따르면 이는 Adrien Heereboord라는 레이든 대학의 철학교수의 󰡔논리학 해설󰡕(Hermeniea Logica)(1650)이라는 책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책은 그의 스승인 Franco Bürgersdijk의 󰡔논리학 개요󰡕(Synopsis Burgersdiciana)에 대한 해설이다. Gueroult 1968, p. 245-46의 주 7) 참조.] 게루에 따르면 이 구분법은 6가지 측면에서 독창적인데, 이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세 가지 점이다. 첫째, 스피노자는 여기서 이미 신의 내재성을 확립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내재성은 “단지 원인과 결과가 동일한 존재 안에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열이 불 안에 포함되어 있고 빛이 태양 안에 있듯이 결과가 원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에, 모순에 빠지지 않고서는 하나 없이 다른 것을 정립할 수 없다는” 점까지 함축한다(Gueroult 1968, p. 250). 따라서 이는 󰡔윤리학󰡕에 나오는 내재적 원인 개념과 거의 동일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신을 자유 원인으로 규정하되, 이를 자연의 필연성과 대립시키지 않고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셋째, 강단철학자들이 기초로 삼던 아리스토텔레스식의 4원인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스피노자가 작용인만을 유일한 원인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용어법들 중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내재적 원인과 타동적 원인, 자유 원인과 떨어져 있는 원인/가까운 원인뿐이며, 나머지 용어들은 더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더욱이 떨어져 있는 원인/가까운 원인은 󰡔소론󰡕보다 훨씬 더 내재적인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 가령 우리가 뒤에서 살펴볼 󰡔윤리학󰡕 1부 정리 28의 주석의 용법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윤리학󰡕의 용어법은 󰡔소론󰡕보다 훨씬 더 단순해졌을 뿐만 아니라, 원인의 내재성을 좀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2. 󰡔윤리학󰡕에서 내재적 원인과 타동적 원인

 

따라서 내재적 원인과 타동적 원인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리 1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Deus est omnium rerum causa immanens, non vero transiens).[이와 거의 동일한 표현이 73번째 편지에도 나온다. “왜냐하면 저는 신은 만물의 타동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G IV 307.]

 

이 정리는 보통 스피노자의 인과론이 내재적 인과론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전거로 많이 활용된다. 그런데 이 정리에서 좀더 주목해야 할 점은 뒷부분에 나오는 “타동적 원인”의 의미가 무엇이며, 내재적 원인과 타동적 원인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곧 신이 내재적 원인이라면, 따라서 신과 양태들 사이의 관계가 내재적 인과관계라면, 반대로 양태들, 특히 유한 양태들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타동적인 인과관계인가? 만약 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는 신과 양태들 사이에 성립하는 내재적 인과관계와 유한 양태들 사이에 성립하는 타동적 인과관계라는 이중적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인가? 하지만 󰡔윤리학󰡕 어디에서도 유한 양태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타동적 인과관계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사실 “타동적 원인”이라는 표현은 󰡔윤리학󰡕에서 단 두 차례, 곧 1부 정리 18과 그 증명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타동적 인과관계의 원래 의미, 곧 “타동적 원인은 자기 바깥에 결과들을 생산하는 것이다”(causa transiens est quae producit effectum extra se)라는 의미를 생각했을 때, 만약 유한 양태들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가 타동적 인과관계라면, 유한 양태들은 자신들이 지닌 원인으로서의 지위를 어떤 타자, 곧 신에게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신은 정리 18에서 내재적 원인으로 제시되기는 하지만(또는 오히려 바로 그 때문에), 데카르트의 신과 마찬가지로 피조물 또는 유한 양태들의 인과적 힘을 독점하는 존재자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Clatterbaugh는 바로 이런 관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특수한 실재들의 영역에서는, 각각의 특수한 실재의 과거와 미래에까지 미치는 신을 넘어서는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가 존재한다. 데이비드 사반(David Savan)이 지적하듯이 “각각의 유한 양태는 이러한 두 가지 인과적 축의 교차(intersection다).” 이러한 “교차”를 의미 있게 생각하려면, 신과 창조의 관계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점은 데카르트의 협력론과 아주 강한 유사성을 띠어야 한다.”(Clatterbaugh 1999, p. 136)] 또한 이는 스피노자가 연장에 내적인 역량을 부여하고 운동과 정지를 연장의 무한 양태로 만들어, 자연 안에서 작용하는 힘을 자연에 내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사실과 어긋날 수밖에 없다.[스피노자는 연장을 신의 속성 중 하나로 격상시킴으로써 데카르트와 달리 연장을 단순한 “길이, 넓이, 깊이”가 아니라 “연장하는 행위”(actum extendendi)(PPD II D1)로 이해할 수 있었으며, 연장에 독자적인 역량을 부여할 수 있었다. 취른하우스(Tschirnhaus)에게 보내는 81번째 편지에서 스피노자가 명시하고 있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스피노자에서 연장의 지위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Jaquet 2004; Matheron 1998 참조.] 따라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타동적 원인이라는 개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과 내재적 원인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지가 해명되지 않는 한, 스피노자의 인과론을 정확히 해명하는 일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3. 타동적 원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윤리학󰡕 1부 정리 28

 

이 문제와 관련하여 중심적인 논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윤리학󰡕 1부 정리 28이다. 왜냐하면 여러 주석가들은 이 정리에서 타동적 인과성이 예시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정리가 타동적 인과성을 제시한 것이라면, 스피노자 철학에는 신과 양태들 사이에 성립하는 내재적 인과성과 유한 양태들 간에 성립하는 타동적 인과성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인과성이 존재하는 셈이 되며, 그 경우에는 이 두 종류의 인과성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지 해명하는 것이 주석가들의 주요 과제가 된다. 반면 우리가 이를 타동적 인과성을 예시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 정리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해명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여기 제시된 인과성이 내재적 인과성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역시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1부 정리 28을 살펴보자.

 

모든 독특한 실재, 곧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는(Quodcumque singulare, sive quaevis res, quae finita est),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nisi ad existendum et operandum determinetur ab alia causa),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 후자의 원인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et sic in infinitum).

 

이는 얼핏 보기에는 하나의 유한양태가 다른 유한양태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는 관계가 무한한 수의 유한 양태에 이르기까지 계속 선형적으로 지속되는 양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가장 탁월한 스피노자 연구자들까지도 이 정리를 일종의 “악무한”의 한 형태, 곧 유한한 실재들 사이에 존재하는 외재적 인과론 내지 타동적 인과론의 전형적인 양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이러한 경향은 Joachim 1901, pp. 70 이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며, 게루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Gueroult 1968, pp. 338 이하 참조). 게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특한 실재들은 이중의 필연적 규정―하나는 신에게 유래한 규정(정리 26-27)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 원인들에서 유래한 규정(정리 28)―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완전히 규정되어 있다.”(같은 책, p. 340) 그리고 매우 미묘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들뢰즈(Deleuze 1969)나 마슈레(Macherey 1992b; 2010)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문제는 (1) 여기서 나타나는 외재적 인과론과 다른, 좀더 본질적이고 좀더 동역학적인 인과론의 모델을 찾아내고 (2) 이러한 인과론의 모델에 기초하여 외재적 인과론, 타동적 인과론의 한계를 평가하는 게 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견해가 이런 관점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일시적 연쇄의 각각의 고리는 독특한 실재의 한 관념이며, “각각의 독특한 실재는 [...] 다른 독특한 실재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어야 하며, 이 후자의 실재 역시 다른 실재에 의해 규정되어야 하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윤리학󰡕 1부 정리 28) 이러한 “무한히”는 하나의 포괄적이고 일관된 전체를 지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내재적인 관념들의 연쇄의 무한성은 전혀 상이한 종류의 것이다. [...] 내재적 연쇄의 무한성은 실재의 포괄적이고 통합된 측면을 지시한다. [...] 내재적 연쇄는 하나의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은 그의 속성들의 양태들인 모든 특수한 실재의 원인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 타동적 인과 연쇄의 고리들은 기껏해야 원인들의 집계(aggregate)를 구성하는 반면, 내재적 인과 연쇄의 고리들은 일관된 총체적 체계를 구성한다.(Gilead 1990, p. 456)

 

흥미 있는 것은 이런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1부 정리 25의 주석의 의미도 이원론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 마디로 말하면, 신은 자기원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또한 만물의 원인이라고 말해야 한다(ut vero dicam, eo sensu, quo Deus dicitur causa sui, etiam omnium rerum causa dicendus est).(E I P25s)

 

다시 말해 그들은 “신은 자기원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또한 만물의 원인”이라는 명제의 의미를, 타동적 인과연쇄와 구분되는 내재적 인과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인용한 주석가는 이 점에서도 전형적이다. 그는 1부 정리 25의 주석에 준거하면서 “내재적 연쇄는 하나의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은 그의 속성들의 양태들인 모든 특수한 실재의 원인이라는 점을 가리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타동적 인과연쇄는 무엇인가? 내재적 인과관계가 이미 신과 만물의 인과관계를 포괄한다면, 이는 신과 무관한 연쇄란 말인가? 다시 이를 해석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첫 번째 부류는 이러한 인과연쇄를 가상이나 착각에 불과한 것으로, 곧 인간의 유한한 인식의 결과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요아힘과 같은 관념론적 입장의 해석가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관점이다. 다른 한편 이러한 인과연쇄를 단순한 가상이나 착각으로 간주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진정한 인과관계, 신와 양태들 사이의 내재적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외재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이 있다. 이들에 따르면 신과 양태들 사이의 내재적 인과관계가 양태들의 본질의 질서를 표현한다면, 이러한 타동적 인과관계는 양태들, 특히 유한 양태들 사이의 실존의 질서를 표현한다. 들뢰즈나 마슈레의 저작 일부에서 이런 입장을 엿볼 수 있다.[Deleuze 1969, pp. 179 이하; Macherey 2010, 252-53쪽 이하.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자. “모든 유한 양태는 무한한 원인들의 연쇄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유한한 규정이 자신의 내재적 원인―이는 실체 자체다―의 무한한 역량에 의해 무한한 동시에 자신의 타동적 원인들의 무한한 다양성에 의해서도 무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같은 책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구절과 어긋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무한자와 유한자의 절대적 동일성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무한자와 유한자는 그 사이에 대응이나 종속 관계만 확립될 수 있는 두 개의 독립적인 질서가 아니다. 이 둘을 분리시키는 상상의 추상적 관점이 아닌 다음에야 다른 것 없이는 나머지 하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이것들은 각자의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규정 개념에 대한 헤겔 식 해석은 마치 변용들은 실체의 불변적 본질에 비한다면 작위적인 실존자들에 불과하다는 듯 실체와 변용들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해석은 유지될 수 없다.”(같은 책, 261쪽) ]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내재적 인과관계의 내재성을 부단히 강조하면서도 결국 진정한 인과관계로서 내재적 인과관계와 대립 상태에 있는 외재적 인과관계를 설정하며, 이렇게 해서 스피노자의 인과관계를 이원론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우리가 보기에 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자연학 및 인과이론에서 전제하고 있는 근대 물리학의 상대성 이론의 관점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결과인 것 같다.[주지하다시피 상대론적 인과론이란 갈릴레이(및 데카르트)가 정식화한 등속직선운동 개념에 입각하여 뉴턴이 제시하고 아인슈타인이 이론적으로 완성한 것을 의미한다. 관성원리에 따르면 모든 물체는 외부의 작용이 없는 한 계속해서 등속직선운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외부 원인이 작용할 경우 이러한 운동은 방해를 받아 직선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운동의 방향이 변화된다. 직선에서의 이러한 일탈은 마치 직선에 접한 원의 곡선과 같은 궤도를 따라 움직이게 되는데, 뉴턴은 계속해서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힘” 개념을 도입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식화한 바 있다. “뉴턴의 목표는 다음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우리 행성계 천체들의 한 순간의 운동 상태가 알려지면 이 천체들의 운동을 완전히 계산해낼 수 있는 단순한 규칙이 있는가? [...] 뉴턴의 운동 법칙은 다음 질문에 답하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질점의 운동 상태가 외력의 영향 하에서 무한히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변화하는가? 뉴턴이 모든 운동에 적용되는 공식에 도달한 것은 무한히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것을 고려함으로써(미분법칙) 이루어진 것이었다.” Einstein 2003, 303-304쪽(강조는 인용자) 스피노자는 아직 뉴턴적인 의미의 “힘” 개념을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뉴턴-아인슈타인적인 의미의 상대론적 인과론을 정식화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갈릴레이가 정식화한 등속직선운동 개념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이 점에 대해서는 Lécrivain 1977; 1978 참조),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내재적 인과론을 정식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갈릴레이가 발견해낸 등속직선운동, 곧 관성 원리와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론을 대립시키는 것은 스피노자 인과론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된다.]

 

III. 변용과 연관: 1부 정리 28의 인과론적 의미

 

1. 󰡔윤리학󰡕 1부 정리 28 해석의 쟁점

 

다시 1부 정리 28로 돌아가 보면,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독특한 실재들의 인과연쇄가 신과 유한 양태들 사이의 내재적 인과연쇄와 다르지 않다는 점은 1부 정리 26에 의해 간단히 입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스피노자는 “어떤 것을 작업하도록 규정된 실재는 필연적으로 신에 의해 그렇게 규정된다(a Deo necessario sic fuit determinata)”고 말하기 때문이다. 곧 정리 26은 “실재들이 작업하도록 규정하는” 원인을 신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정리 28에서는 이 동일한 실재들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하는 원인을 다른 독특한 실재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곧 정리 28에 나오는 무한하게 많은 독특한 실재들이 적어도 다른 실재들이 실존하고 작업하는 것을 규정하는 원인이라는 점에서는 신과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1부 정리 26의 증명에 따르면 이처럼 “실재들이 그에 따라 어떤 것을 작업하도록 규정된다고 이야기되는 것(Id, per quod res determinatae ad aliquid operandum dicuntur)은 필연적으로 실정적인 어떤 것(quid positivum)이다.”(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정리 28에 나오는 각각의 독특한 실재들은 단순한 착각이나 가상이라고 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내재적 인과관계 바깥에 있는 타동적 원인들로 간주할 수도 없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개의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게루나 들뢰즈, 마슈레 같은 스피노자 연구의 대가들도 이 간단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해서 1부 정리 28에 제시된 인과관계를 타동적 인과관계로 간주하고, 그리하여 스피노자의 인과론을 내재적 인과론과 타동적 인과론이라는 이중적 인과론으로 해석하는 것인가? 이는 너무 안이한 생각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보기에 주석가들의 이런 경향은 1부 정리 24 및 그 따름정리의 내용을 본질과 실존의 이원론의 방향에서 해석하는 데서도 유래하지만,[들뢰즈는 정리 24와 정리 25에 근거하여 양태의 본질이 양태의 실존과 구분되는 본질만의 독자적인 실존을 지니고 있다는 특이한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Deleuze 1969, pp. 174 이하) 이는 들뢰즈의 스피노자 독해의 라이프니츠주의적 성격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정리 24와 정리 25는 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비창조론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반증하는 것 그 이상이 아니며, 이를 본질과 실존의 이원론적 사고를 위한 지주로 활용하는 것은 스피노자 철학의 고유성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또한 근대 물리학이 이룩한 상대론적 함의를 과소평가하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갈릴레이와 데카르트가 제시하고 있는 관성 원리를 단순히 기계적인 인과”을 나타내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는 물체들이나 유한 양태들은 자기 내부에 인과적인 힘을 지니지 못한 채 외부 원인의 작용에 따라 타동적이거나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유한 양태들 사이의 인과성을 제시하고 있는 1부 정리 28이 타동적 인과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 스피노자 철학이 이러한 인과론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주석가들이 될 수 있는 한 1부 정리 28의 의미를 축소하고 그 대신 신과 유한 양태들 사이의 내재적 인과론을 부각시키려고 애쓰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스피노자 철학과 근대 물리학의 이론적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은 더욱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으며, 내재적 인과론이라는 미명 아래 오히려 운동의 상대성 원리 이전의 자연학으로 후퇴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신과 유한 양태들 사이의 인과론과 유한 양태들 사이의 인과론을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해석하지 말고, 또 이들 각각을 내재적 인과론과 타동적 인과론으로 해석하지도 말고, 오히려 둘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 더 나아가 동일성을 보여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2. ‘자연학 소론’

 

이를 위해서는 우선 1부 정리 28이 운동의 상대성 원리나 관성 원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는 이미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정리 14와 15에서 관성 원리를 간결하게 제시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동역학적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시도한다.[정리 14는 관성 운동을 하고 있는 물체에서 속도의 지속을 가리키며, 정리 15는 운동 방향의 지속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원리󰡕에서부터 이미 갈릴레이와 데카르트의 운동학적 관점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동역학적인 관점에서 변형시키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2부 정의 8의 두 번째 논평에서 운동과 힘을 분리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난다. 레크리뱅은 이를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다. “운동 개념과 힘 개념의 분리는 갈릴레이 작업의 엄격한 연장선상에서 힘은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방식으로 운동의 원인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운동을 변용시키는 변화들, 곧 가속, 감속, 방향의 변화의 원인으로 간주되어야 함을 보여준다.”(Lécrivain 1978, p. 113―강조는 인용자)] 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원리󰡕는 데카르트의 자연학에 대한 해설이라는 틀 안에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에,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을 충분히 담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스피노자의 독자적인 관점을 파악하려면 󰡔윤리학󰡕 2부의 「자연학 소론」을 검토해봐야 한다.

스피노자는 보조정리 3과 그 따름정리에서 1부 정리 28에 나오는 인과성 모델을 관성 원리와 결부시켜 논의한다. 우선 보조정리 3은 1부 정리 28을 운동과 정지의 관점에서 다시 서술한다.

 

보조정리 3

운동중이거나 정지해 있는 물체는 다른 물체에 의해(ab alio) 정지하거나 운동하도록 규정되었어야 했으며, 이 다른 물체 역시 다른 것에 의해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규정되었고,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et sic infinitum).

 

이 정식과 1부 정리 28의 유일한 차이점은, 여기서는 운동 중이거나 정지해 있는 물체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고찰되는 반면, 1부 정리 28에서는 독특한 실재로서의 유한 양태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고찰된다는 점이다. 곧 여기서 고찰되는 물체들은 부분들을 갖고 있지 않고 부분들 사이의 관계도 갖고 있지 않은 단순 물체들이다.[이는 실제로 단순 물체들, 또는 “가장 단순한 물체들”이 실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물체들은 복합 물체, 곧 개체가 운동과 정지의 관점에서 추상적으로 고찰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물체들은 운동이나 정지와 같은 한 가지 상태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는 운동의 상대성 원리나 관성 원리와의 관련성을 좀더 정확히 보여준다.

이 물체들이 단순하다는 것, 곧 이 물체들이 한 가지 상태로만 특징지어진다는 것은 이 물체들은 아직 자신의 본질, 자신의 내면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물체들은 외부의 물체들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이 물체들은 그 자체로 외재성의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물체들은 운동하고 있느냐 정지하고 있느냐에 따라서만 구분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갈릴레이가 확립한 운동의 상대성 원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물체의 운동이나 정지는 그 본성에 따라 규정되지 않고 다른 운동체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규정된다는 점에 있다. 운동은 어떤 물체의 본성과는 무관한, 다른 운동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존재하며, 그 속에서만 식별될 수 있다(동일한 운동도 우리가 어떤 좌표계를 택하느냐에 따라 운동하거나 정지하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두 체계에 관한 대화󰡕(1632)에 나오는 둘째 날 대화에서 살비아티(Salviati)와 심플리키오(Simplicio), 사그레도(Sagredo) 사이에서 전개되는 논쟁의 핵심 쟁점이 바로 이것이다. Galilei 1967, pp. 116 이하 참조. 이에 관한 좋은 주석으로는 Balibar 1983 및 Koyré 1966 참조.] 이런 의미에서 운동은 물체의 본성과 무관하다는 의미에서 외재적이며, 또 다른 운동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관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보조정리 3에서 제시되는 인과관계는 바로 이러한 두 가지 특성, 곧 운동의 외재성과 관계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는 1부 정리 28의 독특한 실재들은 이런 의미의 단순한 물체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자신의 본질을 지니며 자신을 합성하는 부분들도 지닌 존재자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조정리 3으로부터 1부 정리 28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아직 몇 가지 측면을 더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자연학 소론」에서 개체, 곧 복합 물체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개체를 정의한다.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제약되어/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 우리는 이 물체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으며, 이것들 모두가 단 하나의 물체 또는 개체를 합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개체는 물체들 사이의 이러한 연합에 의해 다른 모든 개체들과 구분된다.(G II 99-100)

 

이 정의에 대한 좀더 자세한 분석을 위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므로 여기서는 간단하게 이 정의의 핵심 논점만 추출해보자. 이 정의에 따르면 개체는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는 복합 물체이며, 개체의 개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전달하는”(ut motus suos invicem certa quadam ratione communicent) 부분들이다. 곧 개체의 개체성은 단순히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운동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또는 보조정리 5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동과 정지의 관계”(motus & quietus rationem)를 지닌다는 점에서 성립한다. 따라서 복합 물체들이나 독특한 실재들 일반의 개체성은 부분들이 서로 주고받는 운동과 정지의 어떤 관계에 의거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체들 자체도 또한 서로 일정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맺게 되면, 새로운 개체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개체의 부분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러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는 폐쇄적인 관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학 소론」의 요청 3에 따르면, 물체를 이루고 있는 개체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인간 신체의 경우에는 매우 많은 방식으로) 외부 물체에 의해 변용되기 때문이다.[“요청 3. 인간 신체를 합성하는 개체들, 따라서 인간 신체 그 자체는 매우 많은 방식으로 외부 물체들에 의해 변용된다.”] 또한 요청 4에 따르면 개체는 자신의 보존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물체들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다른 물체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되기 때문이다.[“요청 4. 인간 신체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매우 많은 수의 다른 물체들을 필요로 하며, 이것들은 말하자면 인간 신체를 지속적으로 재생시킨다(a quibus continuo quasi regeneratur).” 예컨대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이나 음식물을 통해 양분을 섭취하는 것 등이 이것의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개체를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는 처음부터 외부 물체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외부 물체들과의 관계가 개체의 보존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개체의 개체성, 곧 개체의 내면성은 항상 이미 외재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복합 물체인 개체들의 본질을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처음부터 외부 물체들과의 관계를 함축한다면, 보조정리 3에서 본 것처럼 가장 단순한 물체들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운동의 외재성과 연관성은 여전히 복합 물체들의 차원에서도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3. 변용과 연관의 인과론

 

여기서 다시 1부 정리 28로 돌아가서, 지금까지의 논의에 근거하여 그것이 제시하는 인과관계의 특성을 검토해보자. 1부 정리 28에 제시된 인과관계는,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외재성과 연관성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독특한 실재는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의 역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독특한 실재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이 후자의 독특한 실재 역시 다른 독특한 실재에 의해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실재들 사이의 인과관계는 외재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독특한 실재들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하나의 독특한 실재의 실존과 작업을 규정하는 원인 역시 다른 원인에 의해 항상 이미 규정되어 있는 한에서 선형적일 수 없으며, 또한 폐쇄적인 것도 아니다.

1부 정리 28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두 가지 특성을 가장 정확하게 지적해주는 사람은 에티엔 발리바르다. 그는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였던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이 20세기 중반 전기공학 이론을 “변조”(modulation) 이론으로 재구성한 데서 실마리를 얻어,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을 변용의 인과이론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의 핵심 논점은 󰡔윤리학󰡕 1부 정리 28을 비선형적인 인과도식으로 재해석하는 데 있다. 그는 1부 정리 28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자고 제안한다.

 

실존하기는 작업하기(opérer), 또는 다른 실재들에 대해 활동하기(agir)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작업 자체는 항상 필연적으로 다른 실재 또는 원인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원인 짓기”는 다른 사물이 작업하는 (또는 결과를 생산하는) 방식 자체를 변양시키는 (또는 시몽동이 신호이론의 어휘를 빌려와서 말하듯이 “변조하는”) 사물의 작업이다. 이 때문에 원인들의 무한한 연관은 독립적인 선형적 계열들의 추가나 원인과 결과의 계보(A는 B를 “원인 짓고”, B는 C를 “원인 짓고”, C는 ... )가 아니라, 독특한 변조들의 무한한 연관망에 의해서만, 또는 변조하면서 동시에 변조되는 활동들의 동역학적 통일성에 의해서만 제대로 표상될 수 있다(어떤 A의 작업에 대한 B의 변조 활동은 어떤 C들의 활동에 의해 변조되며, C들은 어떤 D들의 활동에 의해 또한 변조되고 ...).(Balibar 2005, 216-17쪽)[이는 Balibar 1996, 217쪽, 주 135)에 나오는 도식을 통해 좀더 간명하게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1부 정리 28이 제시하는 스피노자의 인과론 도식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 위상학은 비선형적이다. 곧 다수의 항들의 상호작용은 여기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인과 활동의 “기본 구조” 안에 항상 이미 함축되어 있는 원초적인 것이다. 둘째, 이 위상학을 구성하는 “연관의 질서”(ordo et connexio 또는 concatenatio)는 원자적인 항들(이것이 대상들이든 사건들이든 아니면 현상들이든 간에) 사이에서가 아니라, 사실상으로는 항상 개체들인 독특한 실재들(res singulares) 사이에서 확립된다.(Balibar 2005, 215-16쪽)

 

사실 1부 정리 28에 따르면 어떤 독특한 실재가 실존하고 작업하기 위해서는, 곧 원인으로서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 실재는 먼저 다른 독특한 실재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어야 한다. 예컨대 A가 원인으로서 작용하기 위한 조건은 A가 B의 결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A는 결과일 때, 오직 그 때에만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 이는 자연 안에는 절대적인 원인, 곧 어떤 무엇의 결과도 아니고 스스로 원인인 그런 존재자 내지 실재는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물론 자연 그 자체인 실체는 예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실체는 하나의 존재자나 실재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떤 존재자나 실재도 절대적 원인일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는 인과 연쇄의 최초의 항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데, 왜냐하면 최초의 항은 정의상 결과 없는 원인, 다른 어떤 것의 결과가 아닌 원인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정리 28에서 제시하고 있는 연쇄는 선형적인 연쇄라기보다는 구조적인 연관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개념적으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스피노자의 인과론 개념은 일차적으로 연관의 인과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연관의 인과론이라는 말은 단순히 동어반복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인과론은 기본적으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 따라서 인과 연관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관”(connexio 또는 concatenatio)이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이 좀 강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1) 연관이라는 개념은 무엇보다도 개체들은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에서 독립하여 성립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곧 관계들 이전에 미리 이러저러한 개체들이 존재하고 그 이후에 비로소 이 개체들이 서로 인과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은 관계들을 통해 성립하며 관계들을 통해 자신을 재생산하고 존속할 수 있다. 연관의 인과론에서는 최초의 개별적인 항이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으며, 항상 이미 (무한하게) 많은 원인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함축하는 반목적론의 또 다른 측면이다. 왜냐하면 목적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창조나 기원이라는 개념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과관계에서 이러한 기원이나 시초는 결과 없는 원인, 최초의 원인이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따라서 역으로 목적론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원이나 시초를 전제하지 않아야 하며, 더 나아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선형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2) 연관의 인과론은 또한 외부와 내부의 구분이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함축한다. 「자연학 소론」의 요청 3이나 요청 4가 잘 보여주듯이 개체는 관계를 통해 성립하며, 개체의 내면성을 이루는 관계들은 외부의 물체들이 지니고 있는 관계들로부터 계속 충원되고 대체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관계들은 각각의 개체들의 본질을 형성하기 때문에, 각각의 개체가 지니고 있는 인과 역량, 가장 내밀한 개체의 본질은 항상 이미 외재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내재적 인과성과 외재적이거나 타동적인 인과성을 대립시키는 주석가들의 관점은 스피노자 인과론이 본질적으로 연관의 인과론이라는 점을 간과한 데서 비롯한다.

우리는 위에서 “A는 결과일 때, 오직 그 때에만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말을 강조했는데, 이는 각각의 독특한 실재들이 지니고 있는 내적 본질 또는 내적 인과 역량의 원천이라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다. 물체의 역량, 독특한 실재가 지닌 인과역량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단순한 수준에서, 곧 기초적인 관성 원리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자신이 수행하는 운동을 지속하고, 또 자신이 멈춰 있는 상태에서 계속 멈춰 있을 수 있는 힘이다. 따라서 기초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물체가 지닌 인과 역량은 사실 그것이 지닌 운동의 외재성 및 연관성과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외재성 및 연관성과 동일한 차원에 놓여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복합 물체의 수준, 독특한 실재의 수준에서는 달라지는가? 복합 물체 또는 독특한 실재가 자신의 고유한 내면성이나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는 분명히 단순한 물체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단순 물체의 수준에서 자신의 운동을 지속하고 또 정지의 상태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은 주어져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데 반해, 복합 물체의 수준에서 이는 그 물체 자체의 내적 본질, 내적 역량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합 물체나 독특한 실재 일반의 본질 내지 역량은 바로 그 물체의 부분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서 생겨나고 이러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는 외부 물체들과의 끊임없는 재생을 통해 유지된다면, 사실 독특한 실재가 지닌 내적 역량은 여전히 외재적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더 나아가 그것에 의해 증대하거나 감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특한 실재의 인과 역량의 원천은 외부와 대립하는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이루어진 내부, 내면성 속의 외재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반대로 데카르트는 신에 의해 실재들이 보존되는 방식과 실재들이 서로를 규정하는 방식을 분리시킨다. 󰡔세계󰡕의 한 구절은 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오직 신만이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운동―그것들이 실존하는 한에서, 그리고 직선적인 한에서―의 작자(auteur)다. 하지만 물질의 다양한 성향이 이 운동들을 불규칙적이고 곡선적인 것으로 만든다.”(AT XI 46)]

이러한 해석은 좀 멀리 떨어져 있지만, 4부 정리 29 및 그 증명에서도 확인된다. 4부 정리 29에서 스피노자는 이로움과 해로움의 조건은 본성의 공통성에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의 본성과는 전혀 다른 어떤 독특한 실재는 우리의 행위 역량을 북돋울 수도 저해할 수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실재가 우리와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좋거나 나쁠 수가 없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증명을 제시한다.

 

어떤 독특한 실재, 따라서(2부 정리 10의 따름정리에 따라) 인간이 실존하고 작업하는 역량은 다른 독특한 실재에 의해서만 규정되는데(1부 정리 28에 따라), 이 다른 독특한 실재의 본성은(2부 정리 6에 따라) 인간의 본성이 인식되게 해주는 것과 동일한 속성에 의해 파악되어야 한다.(강조는 인용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독특한 실재의 역량은 다른 독특한 실재에 의해서만 규정된다는 문장이다. 바로 1부 정리 28에 준거하는 이 문장은 1부 정리 28에서 제시된 인과연쇄가 일체의 힘을 결여한 순수하게 타동적인 인과론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을 입증해준다.

 

IV. 맺음말: 스피노자 인과론의 윤리적 함의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스피노자의 인과론을 내재적 인과론과 타동적 인과론으로 분리해서 다루는 주석가들의 공통적인 문제점 중 하나는 그들이 스피노자에서 변용과 수동성을 혼동한다는 점이다. 사실 변용은 매우 다양한 차원에서 활용되는 스피노자 철학의 근간 개념 중 하나다. 이 개념은 󰡔윤리학󰡕 1부에서는 양태, 따라서 독특한 실재들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는 일의적으로 규정되기보다는 주목할 만한 이중성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어떤 경우에는 변용들이 지니는 의존성, 따라서 수동성을 부각시키며, 반대로 다른 경우에는 변용들을 신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그것이 지닌 능동성, 또는 적어도 작용성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가령 전자는 1부 정의 5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양태를 실체의 변용들로, 곧 다른 것 안에 있으며, 이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으로 파악한다.”(E I D5) 또한 후자의 용법은 1부 정리 25의 따름정리에서 볼 수 있다. “특수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들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신의 속성들의 변용들 또는 양태들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이중성은 변용의 동사적 형태로는 “변용되기”(affici)와 “변용하기”(afficere)로 표현된다. 변용되기가 다른 개체들에 대한, 타자들에 대한 개체의 의존을 표현한다면, 변용하기는 각각의 개체가 다른 개체들에 대해 행사하는 작용, 영향력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가 이 개념을 통해 양태들의 역량의 형성과 증대/감소의 문제를 사고한다는 점이다. 이는 위에서 인용한 4부 정리 29의 증명에서 잘 나타날 뿐만 아니라, 2부 정리 14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인간 정신은 매우 많은 수의 실재들을 지각할 수 있는 소질을 지니고 있으며(apta est plurima percipiendum), 그 신체가 매우 많은 방식으로 배치될 수 있으면 있을수록 이러한 소질은 더욱 커진다(eo aptior quo ejus corpus pluribus modis disponi potest).

 

증명에서 요청 3과 요청 6에 준거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자연학 소론」의 결론에서 직접 따라 나오는 정리다. 이 정리가 첫 번째로 지적하는 것은 매우 많은 실재들을 지각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소질이나 능력은 신체가 매우 많은 방식으로 배치되는 능력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곧 신체가 외부 물체들로부터 많은 방식으로 변용되고(요청 3) 이를 통해 얻은 변용의 역량으로 매우 많은 방식으로 외부 물체들을 변용하고 배치할 수 있게 되면(요청 6), 그만큼 정신의 지각의 능력도 증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의 능력은 신체의 능력에 비례하며, 신체의 능력은 변용되는 능력과 변용하는 능력의 증대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정신의 지각 능력과 신체의 변용 능력이 스피노자에게는 양태의 인과 능력을 형성한다. 따라서 게루나 들뢰즈, 마슈레를 비롯한 해석가들이 사고하듯이 유한 양태들의 역량은 타동적 인과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신과의 내적 인과론을 통해 양태들에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다른 양태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증대/감소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인과론을 이원적으로 해석하는 주석가들은 이러한 변용을 곧 수동성과 같은 것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변용 그 자체는 수동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수동성과 능동성으로의 분화를 가능하게 하는 일반적인 존재론적, 인식론적 범주임에도 불구하고, 타자에 의해 변용된다는 사실을 수동성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역으로 능동성은 타자에 의해 변용되지 않는 것으로, 곧 타자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사고될 수밖에 없으며, 유한 양태들이 지니는 인과 역량 역시 독특한 실재들 사이의 변용과 무관한 관계, 곧 (양태들과 독립해 있는) 신과의 직접적인 관계(그들은 이것이 내재적 인과론의 의미라고 이해한다)를 통해서 획득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스피노자의 인과론이 근대 물리학의 이론적 핵심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의 인간학 및 윤리학의 특징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든다. 왜냐하면 능동성과 수동성 또는 적합성과 부적합성은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윤리학의 핵심 범주들인데, 이 범주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변용 개념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변용을 수동성과 동일시하게 되면, 끊임없는 변용하기-변용되기의 관계 속에서 실존하는 인간의 삶 자체에서 어떻게 합리적인 인식의 형성이 가능하고 또 실존 조건들에 대한 능동적인 개조가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스피노자를 숙명론자나 신비주의자로 해석하는 대개의 관점들은 바로 여기서 생겨나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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