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님의 "관계론, 대중들, 민주주의-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

답변이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사실 질문들이 상당히 좋고 근본적인 쟁점들에 관한 것이어서, 답글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사실은 "스피노자와 푸코에서 통치의 문제"라는 논문을 한편 쓰고 있는 중인데, 그 논문에 제기하신 질문 중 일부에 대한 답변이 담길 것 같습니다.  

첫번째 질문의 경우가 그런데요,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 사고한다는 것이 장점이 될 수 있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더욱이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는 전쟁으로서의 정치의 문제가 "반동 귀족"인 불랭빌리에와 관련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장점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셨죠. 이 질문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세 가지 답변만 드릴게요.  

(1)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 본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글의 맥락에서 제가 이 점을 장점이라고 본 이유는, 바로 이러한 관점 때문에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근대 사회계약론의 맹목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회계약론이 정치의 궁극적인 지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당연히 장점이 될 수 없겠지만, 그것이 지닌 한계 내지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회계약론 전체를 파괴한다거나 배척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2) 불랭빌리에에 관한 쟁점인데요, 불랭빌리에는 사실 스피노자주의자였습니다. 프랑스어로 스피노자 저작을 번역하기도 했죠.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를 단순히 "반동 귀족"이라고 보는 건 좀 성급할 수 있습니다.  

(3) 스피노자와 푸코의 사상을 전쟁으로서의 정치학, 또는 정치를 갈등과 적대로 보는 두 가지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지만 또 상당한 차이점도 있죠.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는 문제는 현대 정치 이론의 쟁점들을 해명하는 데도 꽤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질문은, 민주화로서의 스피노자주의가 현재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질문하셨죠. 그건 한 마디로 답변드리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만 제가 질문을 잘 이해했다면, 질문의 핵심 논점은 국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와 결부돼 있는 것 같습니다. 곧 국가는 기본적으로 지배의 도구로서 국가장치인가 아니면 국가는 시민들의 자기-통치 제도인가와 관련된 문제죠. 원칙적으로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점은 국가를 지배의 도구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스피노자가 의미가 있다면 국가의 양면성, 따라서 해방 또는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잘 이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관한 질문을 하셨는데, 그건 오역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요? 왜 그걸 오역이라고 느끼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피노자의 사상"이 아니라 "스피노자"라고 해서 그렇게 생각하신 건지요?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2010-03-03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제가 아직 학부생인지라 표현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확히 질문드리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는 큰 두가지 방법, 법-철학적 접근과 역사-정치적 접근 두 가지가 그려졌었죠. 하지만 사실 제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굉장히 의아하게 느꼈던 것은 푸코가 역사-정치적 접근을 '찬양한다'고 말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러한 전쟁으로서의 정치가 푸코는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던 불랭빌리에와 인종주의라는 최악의 결과물을 낳을 수 있는데도 그것이 찬양된다고 한 부분이지요. 오히려 제 의문은 푸코가 서술한 이 두가지 방법 외에 다른 어떤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최소한 그것에 대한 필요성은 있지 않은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읽은 네그리는, 혹은 네그리가 빌려 쓴 가타리의 전망은 바로 이 필요성에 훌륭하게 답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불랭빌리에에 관한 부분은 제가 푸코가 말한 면만을 봤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쩌면 제가 푸코가 말한 것을 오독했을 수도 있겠지요...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3)에 대한 의문도 드는데요, 그렇다면 전쟁으로서의 정치와 갈등과 적대로서의 정치 사이에 중요한 에피스테메 상에서의 차이가 있다고 봐도 되는건가요?

얼핏 느끼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는 폴리비오스의 반복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마키아벨리와 가깝기 보다는 오히려 폴리비오스에 가깝다고 생각이 듭니다. 과정으로서의 민주화를 생각한다면, 그러한 과정 자체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지금 우리가, 또는 당시의 스피노자가 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요? 발리바르가 본 스피노자의 생각이 정치적으로 현행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제가 네그리의 책을 읽지 않아 확신이 없긴 합니다만, '철저하게 정치적인 한에서의 스피노자'라는 말은 스피노자가 말한 내용 그 자체의 타당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기 보다는 그것의 현재적 활용에 보다 더 큰 의의를 둬야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철학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는 말은 스피노자가 어떤 내용을 말했고 그 내용 전체가 정치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제가 지금 단순히 생각하기에는 네그리가 스피노자에게서 분절을 발견하고 한 쪽에 다른 쪽보다 더 큰 의의를 부여한다면 전자가, 그렇지 않고 연속적인 것으로 본다면 후자가 더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스스로 공부해야 할 부분을 너무 많이 묻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바쁘실텐데 시간을 훔쳐가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 2010-03-10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역사적 변화를 만들어내고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주체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체'라는 범주란 무엇이며 주체로 호명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누가 "시민"이라는 주체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민"이라는 범주란 무엇이며 "시민"이라는 주체로 호명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시민"이라고 呼名하는가?

우물 안 개구리 2010-03-1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발마스 님(또는 스피노자)은 국가를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구성요소로 보고 계시는 건가요? 가령 로빈슨 크루소와 프라이데이, 이 둘밖에 없는 섬에서도 국가가 민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구성요소인가요? 그 주장이 맞다면 민주주의란 영원히 실현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요? 항상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과정"이 민주주의라는 것은 사실상 "미완"의 과정이 되는 것이 아닐런지? 아마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흐름과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흐름이 밀고 당기기를 지속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물 안 개구리 2010-03-10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위에 계신 ...님이 혹시 전에 그건 푸코적이지 않다고 얘기한 그 분인가요? 푸코를 아주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저는 ...님이 제기하시는 '좋은' 질문과 '근본적인' 쟁점들에 관한 것을 건드릴 능력이 없습니다. 역사학의 인습적인 개념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게 해준다는 면에서 푸코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죠. 아마 ...님은 이런 문제에 관심 없을 겁니다. ...님에게 한 마디 하자면 무엇이 옳으냐 마느냐 어떤 주장과 해석이 맞느냐 틀리냐는 별로 안 중요합니다. 어떤 이론이나 학설들의 기저에 놓여있는 사유방식과 이데올로기가 무엇인가 하는 거죠. 그 사유방식이 형성된 맥락과 그 사유방식이 무엇을 배제하거나 삭제하느냐가 더 중요한 거죠. 발마스 님 얘기도 그렇게 들어야 합니다.

... 2010-03-11 00:5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실상 푸코의 팬이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푸코가 쓴 책은 거의 다 읽었고, 요즘엔 강의록들을 재밌게 보고 있죠. 개인적으로는 지식의 고고학이 다시 출간됬으면 좋겠어요. 전 영어는 읽어도 한문은 못 읽는 녀석인지라... 그걸 못 봤거든요. 아무튼 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그것 역시도 타당성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할 겁니다. 다양한 타당성들이 있는거죠. 정치적인 타당성, 논리적인 타당성, '반복'적인 타당성, 역사적인 타당성... 왜냐하면 푸코만을 따라가면 푸코에게 고유한 아포리아들에서 멈춰설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푸코도 푸코주의자들을 바라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물 안 개구리 2010-03-10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발마스 님도 결국은 새로운 개념이나 담론을 생산하려고 시도하는 분이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옳다 그르다는 어디까지나 그 다음입니다. "시민"이라는 개념만 해도 그렇습니다. 언어가 기표와 기의의 차이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면 "시민"이라는 개념도 모호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 발화될 때 권력이 작동한다는 말이죠. 가령 진보적인 역사담론을 생산한다고 해서 그 담론의 소비자들의 수많은 차이들을 억압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거죠. 중요한 것은 발마스 님(또는 스피노자)의 담론이 무엇을 넘어서고자 시도했고 어떤 한계에 봉착했느냐는 거죠. 그 외에 다른 것은 그 다음입니다. (따져 보지 말라는 얘기는 안 했습니다. 우선 순위가 그렇다는 겁니다.)

우물 안 개구리 2010-03-10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유럽의 근대 과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을 뒷받침하는 수학적 기초를 확립한 것이고 데카르트가 정초한 근대 철학은 사실상 자아/타자의 인식론적 권력관계를 확립한 것입니다. 저는 스피노자와 푸코가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푸코는 스피노자의 주장 뿐 아니라 다른 주장들에 대해서도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으니 좀 답답할 거 같고 스피노자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발마스 님이나 ... 님이 문제의식 중에 이런 것이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누구한테 도움을 받아야 하나?

우물 안 개구리 2010-03-10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리고 사족으로 스피노자가 살았던 시기에 "근대 국가"는 없었습니다. 절대주의 시대와 겹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제도적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근대 국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아니죠. 그저 과도기일 뿐.... 그렇게 보면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반드시 "근대 국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자, 쓸데없는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프리즘 총서가 나오는 것을 다시 축하드립니다. 다만 개정판 나올 때마다 과거의 오역이나 실수를 바로 잡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저는 오히려 우울합니다. 미리 산 사람들이 손해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죠. 다시 들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만...

2010-03-12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3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10-04-01 18:55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댓글을 이제서야 봤습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지금 수정판을 내기 위해 준비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리시면 새로운 판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