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에서 펴내는 {철학논집}이라는 학술지에 실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작년에 우리나라를 크게 뒤흔들었던 촛불집회를 배경으로 하여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다중의 정치학을 

스피노자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한 글입니다. 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볼 겸, 촛불집회 및 대중의 정치학에 관한 

논쟁을 시작해볼 겸, 비판적인 시각에서 써본 글입니다. 이 주제에 관해 앞으로 몇 편의 글을 더 발표할 생각인데   

이 주제에 관해 많은 비판적인 문제제기와 토론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아직 {철학논집} 해당호가 발간되지 않아서 인터넷 서비스가 되지 않을 텐데, 이 글에 관한 논평이나 토론은  

해당 학술지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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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정치란 무엇인가? 다중의 정치학에 대한 스피노자주의적 비판 
 

[이 글은 2008년 10월 6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단의 제35차 월요모임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여러 가지 좋은 논평을 해주신 연구단 선생님들과 익명의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I. 대중의 시대에서 다중의 시대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촉발되어 작년 5월부터 국내 정치를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었던 촛불 시위는 새로운 시위 형태를 선보이면서 다수의 언론 및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일부 언론과 학자는 이들의 시위가 새로운 정치 주체로서 이른바 ‘다중(多衆)’의 등장을 입증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그 사례로는 정인경 2008, 박영균 2008 및 조정환 2009를 참조.] 이러한 해석을, 일시적인 현상에 대한 지나친 호들갑이라고 넘겨버릴 수도 있지만, 이번 촛불 시위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양상을 보여준 바 있다는 점에서 일축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촛불시위의 양상과 의의에 대한 평가로는 권지희 외 2008 및 다양한 계간지 특집을 참조.]

촛불시위는 네 가지 주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촛불시위의 가장 큰 특징은 지도부 없는 시위, 이른바 “배후” 없는 시위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런저런 반정부 집회나 시위 또는 노동조합 중심의 집회는 운동 단체들이나 노조 단체가 지도부를 구성하고 조직 대중을 동원함으로써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작년 시위는 이른바 “운동권” 활동가들이 시인하듯 운동권의 동원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통제나 지도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던, 그럼에도 이전 어느 때보다 거대한 군중이 모여 정권에게 큰 위협을 주었던 시위였다. 따라서 대중들의 자발적 참여야말로 촛불시위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촛불시위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참여한 개인 및 집단의 다양성을 들 수 있다. 촛불시위는 이른바 ‘운동권’ 단체들이 주도한 것도 아니고 운동권에 속한 개인들 및 단체들이 주류를 이룬 것도 아니다. 중고등학생에서부터 직장인과 가정주부, 노동단체 및 사회단체,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참여했고, 극좌파 운동단체를 비롯 중도적이거나 우익적인 정치 단체(예컨대 창조한국당이나 박사모 회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가담했다.

셋째, 인터넷과 디지털 매체를 통한 운동 방식을 꼽을 수 있다. 촛불시위는 인터넷을 비롯한 디지털 매체가 정치적 문제에서 얼마나 커다란 동원력과 파급력을 지니고 있는지 잘 보여준 사례다. 시위를 촉발한 직접적 계기도 문화방송의 PD수첩이었으며, 이 프로그램에 공감한 사람들이 집회를 조직하고 시위에 참여하는 데에도 인터넷에서의 여론 조성이 큰 힘을 미쳤다. 이는 이후에 시위가 확산되는 데에도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했다. 더 나아가 개인적인 디지털 매체를 활용한 시위현장의 생중계를 통해 거대 언론 매체와 다른 시각으로 시위를 보도하고 또 거기에 많은 대중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데에도 인터넷을 비롯한 디지털 매체가 큰 역할을 했다. 아마 인터넷이 없었다면 촛불 시위는 위력과 지속성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촛불시위의 또 다른 특징은 비정치적인 정치성으로 꼽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촛불시위는 겉보기에는 정치와 거의 관계가 없어 보이는 문제, 곧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에서 촉발되어, 대운하와 공공 부문의 사유화, 교육 문제, 한미 FTA 문제 등과 같은 다양한 쟁점들로 이슈가 확산되었으며, 그 결과 출범한지 불과 100여일밖에 되지 않은 이명박 정권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 이후 미국과의 쇠고기 추가 협상이 진행되고 공권력을 강경하게 발동함으로써 눈에 띄게 약화되었으나, 촛불시위는 생활상의 구체적인 문제들이 정치적 쟁점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시위였다.

이런 특징들은 촛불시위의 두드러진 차별적 요소들로 간주되어 여러 논객들 및 언론으로부터 주목과 찬사를 받았다. 실제로 이런 특징들이 촛불시위를 돋보이게 만든 요인인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또한 이번 촛불시위가 지난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최대의 대중적인 민주주의 투쟁 중 하나라는 점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표현인지, 또 더 나아가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고하는 징후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것은 촛불시위가 지니는 긍정적인 측면을 축소하거나 부인하자는 뜻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낭만적인 이상화가 낳을지도 모를 위험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보기에 촛불시위를 해석하고 평가하기 위한 기준의 하나로 다중(multitude)이라는 용어가 널리 운위되고, 그 용어를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철학을 구축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저작들이 거론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단지 네그리와 하트의 작업이 대중운동과 대중 민주주의의 기초를 재구성하기 위한 대표적인 작업 중 하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의 자발성 및 그것이 이룩한(또는 이룩했다고 간주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에 대한 찬사와, 네그리ㆍ하트의 다중의 정치학 속에는 대중과 대중운동을 보는 어떤 공통 관점이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러한 공통 관점이 무엇인지, 그것의 이론적 요소들은 어떤 것이고 또 그 강점과 난점은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기 위한 시도다.

 

II. 네그리ㆍ하트의 다중의 정치

 

1. 제국의 세 측면

 

[제국]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자신들의 저작의 목적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 번째는 세계화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일반적인 권력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권력이 행사하는 “공통적인 착취 및 억압 형태”들에 맞선 “해방과 민주주의를 향한 공통적인 가능성들을 창조”([제국], 11쪽)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목표는 이 책의 두 가지 중심 개념, 곧 제국과 다중을 중심으로 구현되고 있다.

 

1) 혼합정체로서의 제국

 

제국은 네그리와 하트에게 세계화된 질서를 가리키는 개념이며, 세 가지의 특징을 지닌다. 첫째는 “혼합정체(mixed constitution)”라는 특징이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폴리비우스에게 빌려온 이 개념은 제국을 구성하는 세 가지 권력의 층위를 표현한다. 여기서 군주정은 제국의 외교와 통화, 문화 통제를 위한 일련의 국제기구들(유엔, 세계은행, IMF, WTO, G8 등)을 가리키고, 귀족정은 자원 분배와 교환의 네트워크로서 다국적 기업이 구조화하고 국민국가의 영토적인 조직에 의해 매개된다. 그리고 민주정은 대중적인 대표 제도와 의사소통의 메커니즘을 담당하는 집단들로, 대중 매체와 문화산업 및 다수의 비정부조직들(NGO)이 그것들이다. 이들에 따르면 이러한 혼합정체로서의 제국은 영토적인 논리에 종속되어 왔던 국민국가 중심의 국제질서 또는 제국주의적인 국제질서가 종식되고 탈영토화된 범세계적인 제국적 주권이 성립되었음을 보여준다([제국], 248쪽 이하).
 

2) 통제사회로서의 제국
 

두 번째 특징은 제국적인 질서에서는 자본주의의 실질적 포섭이 확립됨에 따라 사회가 규율사회에서 통제사회로 이행했다는 점이다. 푸코가 말하는 규율 권력은 근대의 자율적인 주체가 실은 감옥이나 학교, 병원, 군대, 공장 등에서 권력의 메커니즘에 의해 제작된 예속적 개인들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제시된 개념이며, 들뢰즈의 통제사회라는 개념은 20세기 이후 이러한 규율권력이 한층 더 강화되고 있음을 해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반대로 네그리와 하트는 이 개념들을 빌려오면서도 그것을 전도시켜서 활용하고 있다.[이는 1960년대 이래 라니에로 판지에리(Raniero Panzieri)와 마리오 트론티(Mario Tronti) 등이 주도했던 “오페라이스모(operaismo)”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는, 마르크스의 실질적 포섭 개념에 대한 재해석과 같은 노선에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Bowring 2004 참조.] 다음 구절은 이를 잘 보여준다. “실질적 포섭이 사회의 경제적 차원이나 문화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명체 자체에 스며드는 것으로 이해될 때, 그리고 실질적 포섭이 규율성 그리고/또는 통제의 양태들에 주의를 기울일 때, 실질적 포섭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 발전의 직선적이며 전체주의적인 형상을 분쇄한다. 시민사회는 국가 속에 흡수되지만, 이러한 흡수의 결과, 전에는 시민사회에서 조정되고 매개되던 요소들이 [이제는 국가 속에서] 폭발한다. 저항들은 더 이상 주변적이지 않고 네트워크 속에서 열리는 사회의 중심에서 활동한다. 즉 개별적인 지점들은 천 개의 고원에서 독특화된다. 그러므로 푸코가 암묵적으로 구축한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분명하게 만든) 것은 [...] 최대한의 복수성과 구속할 수 없는 독특화라는 새로운 환경―사건의 환경―을 드러내는 권력의 역설이다.”([다중], 55쪽) 어떻게 이러한 전도가 가능할까? 그것은 그들이 제국에 대한, 주권적 권력에 대한 다중의 역량의 존재론적 우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
 

이러한 다중의 역량은 비물질적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정보적이고 소통적이며 정서적인 노동력의 확산 및 헤게모니화로 표현되며, 이를 바탕으로 공산주의의 새로운 전망이 열리게 된다는 것이 [제국]의 세 번째 근본 전언이다. 이들이 말하는 비물질적 노동이란 “서비스, 문화 상품, 지식, 또는 소통과 같은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같은 책, 382쪽)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컴퓨터와 연결되거나 컴퓨터를 작동모델로 삼는 노동, 곧 정보처리 및 소통기술과 관련된 노동과 더불어 상징적ㆍ분석적 노동, 곧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를 명시하며 전략적으로 중개하는 활동들”이 존재하며, 또한 정서의 생산과 처리를 포함하는 정서노동도 여기에 속한다.

비물질적 노동의 중요성은 이러한 노동의 각 형태 속에는 “협동이 노동 자체 속에 완전히 내재한다”는 점, 곧 “비물질적 노동은 직접적으로 사회적 상호작용과 협동을 포함한다”([제국], 386쪽)는 데에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에 비물질적 노동의 협동적인 측면은 더 이상 이전의 노동형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외부에서 부과되거나 외부에 의해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 활동 그 자체에 완전히 내재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노동이 더 이상 자기 외부의 적대적 타자인 자본에 의해 가치증식(valorizaion)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가치화(이것 역시 valorization이다)할 수 있게 되며, 이는 곧 공산주의의 가능성이 이미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음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의 창조적 에너지를 표현하는 데서, 비물질적 노동은 일종의 자생적이고 초보적인 공산주의를 위한 잠재력을 제공하는 것 같다.”([제국], 387쪽)

하지만 이는 현재 모든 노동이 비물질적인 노동으로 바뀌고 있다거나 또는 과반수 이상의 노동이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네그리와 하트가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비물질적 노동이 “질적인 면에서 헤게모니적인 것이 되었고, 다른 노동형태들과 사회 자체에 대해 그런 경향을 부과해왔다”(Hardt & Negri 2008, 146쪽―강조는 네그리ㆍ하트)는 점이다.[[제국]에서는 마치 비물질노동이 전반적으로 확산된 것처럼 말하고 있으며, 이는 브레넌(Brennan 2007)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비판받은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제시된 “질적인 헤게모니”라는 관점도 여전히 난점을 안고 있다. 비물질노동론에 관한 좀더 상세한 비판으로는 Camfield 2007 참조.]

 

2. 해방과 변혁의 주체로서 다중
 

[제국]이 제목이 시사하듯 새로운 제국적 질서의 개념화와 서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다중에 대해서는 마지막 한 장만을 할애하고 있다면, [다중]에서는 2부와 3부에 걸쳐 다중이 좀더 상세하고 세심하게 개념화되고 있으며, 다중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양상들이 논의되고 있다. [다중]의 핵심 문제는 제국의 질서에 맞선 저항과 투쟁, 변혁의 주체인 다중은 누구이고, 다중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성격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오늘날 인민의 주권에 의존하지 않고 그 대신 다중의 생명정치적인[번역본에서는 “삶정치”라고 번역된 이 개념의 원어는 “biopolitics”이며, 이와 대비되는 개념은 “biopower”, 곧 “삶정치” 내지는 “삶권력”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과 [다중]에서 “생명권력”과 “생명정치”라는 개념쌍을 주요한 이론적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데, 전자가 다중의 생산력을 포섭하는 자본의 지배장치를 표현한다면, 후자는 이것에 저항하는 다중의 생산적 역량을 나타낸다. 이 두 개념은 [성의 역사 1권. 앎에의 의지](1976) 및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인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1976)에서 유래한 것들이며, 푸코에게서는 거의 등가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네그리/하트의 용법과 차이를 지닌다. 푸코의 생명권력/생명정치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6 참조.] 생산성에 기초를 두는 새로운 정당화 과정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한가? 저항과 봉기의 새로운 조직형식들이 마침내 근대적 투쟁의 계보학 전체에 내재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가? 민주주의, 평등 그리고 자유에 기초를 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다중의 투쟁 속에, 어떠한 초월적 권위에도 호소하지 않으면서 무력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내재적 메커니즘이 존재하는가?”([다중], 114쪽)
 

1) 다중의 의미
 

[제국]에서 다중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규정되었다. 하나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로서의 다중이라는 규정이다. 곧 다중은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 규범들에 의해 착취되고 그 규범들에 종속되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범주”(Hardt & Negri 2001, 91쪽)로 규정된다. 이는 산업 노동자 계급과 프롤레타리아를 구분하고, 다중을 새로운 종류의, 일반적인 프롤레타리아로 규정하려는 두 사람의 의도를 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다중은 제국과 관련하여 존재론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규정된다. 네그리와 하트에게 제국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제국은 영토적인 논리의 한계에 매어 있던 국민국가 및 제국주의적인 한계를 넘어서 생산력의 탈영토화와 다양하고 독특한 주체성들 사이의 소통의 가능성 및 주권의 범세계적 보편성을 확립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무수한 얼굴을 한 대중운동이 지닌 이러한 구성적 측면은 실제로 제국의 역사적 건설이 지닌 긍정적 지형이다.”(같은 책, 102쪽) 두 사람은 이런 의미에서 제국과 다중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에 비유할 만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제국이 흡혈귀처럼 다중의 산노동의 피를 빨아먹어야 생존하는 단순한 포획장치에 불과한 것에 비해 다중은 제국 안에서 제국에 반대하는 세력이며, “우리의 사회 세계의 실질적인 생산력”이다. 따라서 제국적 질서가 이전 시대에 비해 무언가 성취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중의 생산력, 생명정치의 결과이며, 제국은 이러한 존재론적 기초로서 다중에 기생하는 흡혈귀에 불과하다.

이처럼 [제국]에서 다중에 대한 규정이 개략적인 소묘에 그쳤다면, [다중]에서는 (여전히 불충분하고 빈틈이 많기는 하지만) 좀더 명확한 개념적 내용을 부여받고 있다. 우선 다중은 존재론적으로 좀더 정확한 규정성을 얻는데, 이는 이전까지 정치의 주체들로 간주되어 왔던 상이한 집단들과 다중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해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다중과 인민(people)의 구별은 네그리와 하트가 가장 중시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인민은 서양 정치철학사의 근간 개념 중 하나이며, 더욱이 초월적인 주권과 맞짝을 이루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민과의 차이점이 분명히 제시되어야만 다중이 갖는 존재론적 지위 및 정치철학적 함의가 분명히 드러난다.

인민은 우선 통일성과 환원의 원리로 제시된다. 곧 수없이 다양한 개인들과 계급들에게 통일성 내지 정체성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초월적인 주권 아래로 복속시키는 원리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인민이다. 이러한 인민에 대한 규정에서 이들이 가장 많이 의존하는 것은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모델이다. 이는 홉스가 인민과 다중의 차이를 명확히 규정하면서 국가를 구성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중을 해체하여 인민으로 형성하는 일이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Hardt & Negri 2001, 149쪽 이하. 네그리 이외에도 비르노 역시 홉스를 인민과 다중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한 준거로 삼는다. Virno 2004 참조.]

“인민은 하나(일자)이다. 물론 인구는 수없이 다양한 개인들과 계급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인민은 이 사회적 차이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종합하고 환원한다. 이와 달리 다중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복수적이고 다양한 상태로 남아 있다. 정치철학의 지배적 전통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인민이 주권적 권위로서 지배할 수 있고 다중이 그럴 수 없는 이유이다. 다중은 독특성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독특성은 그 차이가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주체, 차이로 남아 있는 차이를 뜻한다.”([다중], 135쪽―강조는 네그리ㆍ하트)

그러나 다중이 이처럼 복수적이고 어떤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 불가능하다고 해서 다중이 보통 이야기하는 대중(mass)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네그리와 하트에게 인민과 대중은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인민이 주권의 기계로 포섭되어 획일적인 동일성을 지닌 집단을 가리킨다면, 대중은, 이러한 포섭을 전제한 가운데 동질적이고 분산되어 있는 개인들의 집합으로 해체된 인민을 가리킨다. 네그리와 하트에 따르면 대중의 특징은 단지 파편적이거나 무차별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서로 “지리멸렬하여 공통적으로 공유된 요소들을 인정하지”(같은 책, 136쪽) 않는 상이한 개인들이나 집단을 가리킨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이나 군중 또는 폭도는 “스스로 행동할 수 없고 오히려 지도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수동적이다.”(같은 곳)

다중은 통상적인 의미의 노동계급과도 차이를 지닌다. 다중 개념과 구별되는 노동계급 개념의 근본 특징은 배제에 기초를 둔 제한된 개념이라는 점에 있다. 반면 다중은 어떠한 배제나 우열도 전제하지 않은 “개방적이고 확장적인” 개념이다. “다중은 프롤레타리아 개념에 그 가장 풍부한 규정, 즉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 노동하고 생산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규정을 부여한다.”([다중], 143쪽) 하지만 그렇다고 다중이 무정형적인 집단 일체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 역시 하나의 계급 개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중이 계급 개념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를 뜻한다. 첫째, 이는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 개념의 제한성과 배타성을 쇄신하고 계급의 외연과 내포를 좀더 확장하기 위해 제시된 개념이다. 둘째, 다중 개념은 마르크스의 정치적 기획과 단절하지 않고 새로운 조건 속에서 그것을 쇄신하기 위해 제시된 개념이다. “다중 개념은 계급투쟁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치적 기획을 다시 제시할 수 있기 위한 것이다.”([다중], 142쪽)
 

2) 주권에 대한 다중의 존재론적 우월성

다중 개념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주권에 대한 다중의 존재론적 우월성을 표현한다는 점이다. 이는 [제국]에서도 명시적으로 지적되었으며, [다중]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된다. “[주권권력의]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한계는 노동 및 사회적 생산과 관련해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노동은 자본에 종속될 때조차도 언제나 자신의 자율성을 반드시 유지한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노동의 새로운 비물질적이고 협력적이며 협동적인 형태들에서 훨씬 더 명백하게 나타난다.”(같은 책, 87쪽)

더 나아가 주권과 다중의 존재론적 차이는 주권의 양면성을 통해 표현된다. 주권의 양면성이란 주권은 자율적인 실체가 아니며 결코 절대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주권은 자신이 지배하는 피지배자들과의 관계, 보호와 복종, 권리들과 의무들 사이의 관계로 구성된다. 따라서 이러한 주권의 양면성은 일차적으로 무력에 의한 주권의 통치의 한계를 내포하며, 피지배자, 신민들의 동의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이는 자유주의적인 이론가들만이 아니라 마키아벨리나 스피노자 같은 현실주의 사상가들도 폭넓게 공유하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네그리와 하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권의 양면성은 “하나의 관계일 뿐만 아니라 또한 부단한 투쟁”이라는 것, 그리고 “이 관계는 주권이 도전받고 전복될 수 있는 지점”이라는 것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주권이 양면적이고 관계적이라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주권의 존립은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참여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참여, 곧 복종을 거부하게 되면, 주권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의 세계화된 제국의 질서에서 좀더 극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제국의 질서 하에서 경제적 생산이 점차 생명정치적인 것이 되어 “재화의 생산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정보, 소통, 협력의 생산, 요컨대 사회적 관계들과 사회적 질서의 생산을 목표로”(같은 책, 398쪽) 하게 되면서 제국 안에서 자본과 주권은 완전하게 중첩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이 끊임없이 노동의 생산성에 의존하고, 따라서 비록 자신에게 적대적이지만 노동의 건강과 생존을 확보해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제국적 주권 역시 동의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피지배자들의 사회적 생산성에도 의존”하는 것이다. 또한 제국은 무제한적인 것이기 때문에, 제국이 지배하는 사람들은 착취될 수는 있어도 배제될 수는 없다. 이는 “제국이 전지구적 다중 전체와 맺는 지배 및 생산의 관계와 끊임없이 대면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가하는 위협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399쪽)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제국의 질서 하에서 주권과 다중의 생명정치적 역량 사이에는 힘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어 피지배자들이 사회적 조직의 배타적 생산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는 주권이 곧바로 붕괴한다는 것, 따라서 권력을 곧바로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배자들이 더욱더 기생적이게 되고 주권이 점차 불필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같은 곳―강조는 인용자) 네그리와 하트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이에 상응하여 피지배자들은 점차 자율적이게 되고 그들 자신의 사회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399-400쪽―강조는 인용자)고 주장한다. 제국적 질서의 생산 그 자체가 이미 자율적인 주체의 형성, 정치적 주체로서 다중의 잠재력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3) 정치적 주체로서 다중
 

이처럼 다중의 존재론적 우월성에 대한 긍정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다중이 자기 자신을 정치의 주체로서 구성할 수 있는 온전한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것, 곧 다중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적 주체라는 것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다중]은 [제국]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선 네그리와 하트는 단도직입적으로, 오늘날 변혁과 해방의 정치, 곧 혁명의 정치의 유일한 주체는 다중임을 천명한다. “오늘날 변혁(transformation)과 해방을 목표로 하는 정치행위는 다중을 기초로 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Hardt & Negri 2008, 135쪽) 그 근거는 방금 보았던 주권의 기생화와 피지배자들의 자율화에서 찾을 수 있다. 제국의 질서에 이르러 “갑자기, 일자가 지배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일자가 결코 지배할 수 없는 것으로 보”(같은 책, 400쪽)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듯이 주권이 점점 더 기생적이게 된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반드시 피지배자들이 점점 더 자율화된다는 것, 정치적 주체로서 다중이 일자 없이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함축할까? 그들이 명시적으로 이 질문을 던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들은 “다중이 어떻게 결정에 도달하는가”(같은 책, 402쪽)라는 문제를 핵심적인 질문으로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선 전제가 되는 것은 앞서 이야기되었던 현대 자본주의에서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적인 경향이다. 정보와 소통, 정서 노동을 핵심으로 하는 비물질적 노동이 헤게모니적인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현대의 모든 생산에는 항상 이미 협동의 성향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자기 가치화가 가능하게 되며, 더 나아가 다중의 창조의 조건인 “공통된 것의 생산”의 가능성이 생겨나게 된다.

분명히 공통된 것의 생산 가능성은 그 자체로는 아직 정치에 미달하는데, 왜냐하면 정치는 공통된 것의 생산을 넘어 결정이 어떻게 가능한지, 어떻게 다중이 결정에 도달하게 되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유비, 곧 신경생물학자들이 설명하는 두뇌 기능 모델(두뇌는 일자가 아니라 다중으로서 존재한다)이나 “다중은 마치 언어처럼 조직되어 있다”는 유비 또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협동적 발전과 소스 공개 운동이 수행한 혁신들과의 유비 등을 제시할 뿐(같은 책, 403쪽 이하), 정치 제도의 틀 안에서 어떻게 다중의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또 그 구체적인 제도적 틀의 형태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중이 정치적 주체, 그것도 유일하게 해방적인 정치적 주체라는 두 사람의 믿음은 굳건하다. “다중은 다양함을 유지하고 내적으로 차이를 유지한다 할지라도 공통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다. 다중은 하나가 명령하고 나머지들이 복종하는 정치적 신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살아 있는 육체flesh다. [...] 다중은 민주주의, 다시 말해 만인에 의한 만인의 지배라는 법칙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주체다.”(같은 책, 137쪽)

 

III. 다중의 정치는 스피노자주의적인 정치인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또 네그리와 하트 자신도 여러 차례에 걸쳐 지적하고 있듯이 이 두 저작의 저변에는 특정한 스피노자주의, 네그리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론화하고 가다듬은 스피노자주의가 관류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두 저작은 두 사람이 제국의 시대에 다시 쓰는 그들 나름의 스피노자 철학, 스피노자의 [윤리학]과 [정치론]의 새로운 종합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의 정치학을 좀더 심층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제시하는 스피노자주의가 어떤 것인지, 또 그것이 스피노자 철학과 얼마나 부합하는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1. 역량과 권력
 

[제국]과 [다중]을 관통하는 스피노자주의의 핵심에는 포텐샤(potentia)와 포테스타스(potestas), 또는 (두 개념을 번역해서 사용하자면) 역량과 권력이라는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 개념쌍이 존재한다. 이러한 개념쌍에 대한 네그리와 하트의 해석 내지 변형은 스피노자 철학의 전개과정에 대한 네그리의 매우 독특한 해석과 결부되어 있다.[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1을 참조.]
 

1) 스피노자 철학 내부의 단절
 

네그리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철학의 발전과정에는 상이한 두 단계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초기 저작에서부터 [윤리학] 1-2부에 이르는 단계(1661-1665)로, 이 단계에서 스피노자는 신플라톤주의적인 범신론적 철학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능산적 자연인 실체와 속성이 소산적 자연인 (유한)양태들의 세계의 기본적(이고 초월적인) 구성 원리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이에 비해 두 번째 단계(1670-1677), 즉 [윤리학] 3-4부와 [정치론]에서 표현되고 있는 성숙한 스피노자의 철학에서는 첫 번째 단계의 철학에 남아있던 신플라톤주의적 철학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지고(네그리는 이를 특히 실체 개념과 속성 개념이 3-4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찾는다), 그 대신 정치론에서 등장하는 다중의 역량(potentia multitudinis)이라는 개념이 기본적인 세계구성의 원리로 제시된다. 네그리는 말년에 이르러서 스피노자가 다중이라는 세계구성의 주체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는 철학사에서 유례없는 완전한 내재성의 철학의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네그리에 따르면 비록 스피노자가 이 개념에 따라 민주주의 이론을 완전하게 체계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미완의 민주정 이론에 대한 네그리 자신의 재구성에 관해서는 특히 Negri 1994중 3장 참조.], 이를 철학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 바로 스피노자의 현재성이 있으며, 좌파의 이론가들은 스피노자가 남겨놓은 철학적 유산에 따라 이를 보다 완전하게 체계화해야 할 이론적 의무가 있다.
 

2) 역량과 권력의 계보  

스피노자 철학의 전개과정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네그리는 [야생의 별종]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르네상스 시기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개시된 위기 속에서 생산력을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로 조직화하려는 노선―이는 곧 권력의 노선으로, 홉스ㆍ루소ㆍ헤겔로 이어지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노선이다―과 이러한 조직화에 반대하는 노선―이는 마키아벨리ㆍ스피노자ㆍ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다중의 역량의 노선이다―의 대립에서 후자의 계보에 속하는 것으로 위치시킨다. 네그리에 따르면 근대성이라는 것은 “서양 합리주의의 선형적 발전도, 서양적 이성의 운명도 아니”며, “자유로운 생산력의 발전과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의 지배 사이에 항상 양자택일이 존재해 온 모순적인 전개과정”이다. 따라서 다중의 자유로운 생산력 대 자본주의적인 지배관계, 또는 역량 대 권력 사이의 대립 노선이 서양 근대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공간을 구조화하는데, 스피노자는 부르주아 생산관계의 헤게모니가 성립하는 고전주의 시기(17세기)에 이러한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생산력과 존재의 충만한 역량을 강조하는 “야생의 별종(savage anomaly)”의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서양 근대성의 최초의 헤게모니가 성립하는 과정―이는 부르주아지의 자기구성과정과 다르지 않다―에서 이 헤게모니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대표하며, 또한 이러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세계에 대한 다중의 실천적 구성의 역량을 긍정하는 정치적 구성의 존재론을 제시한다는 점에 스피노자의 현재성이 있다.
 

3)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존재론ㆍ신학의 차원
 

이러한 계보학의 기초에 놓여 있는 역량과 (주권적) 권력이라는 대립쌍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직접 유래한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역량(potentia)과 권력(potestas) 사이의 관계는 사실 좀더 복잡하지만 네그리와 하트의 논리는 존재론ㆍ신학적인 차원에서 이 개념쌍이 지니는 의미를 전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존재론ㆍ신학의 영역에서 두 개념은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곧 포텐샤는 합리적으로 인식된 신의 본성을 나타내며, 포테스타스는 신의 본성에 대한 상상적이고 미신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윤리학]에서 포텐샤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분명한 규정을 얻고 있다.
 

포텐샤는 실존할 수 있는 있음이다(posse existere potentia est).([윤리학] 1부 정리11의 두 번째 증명)

신 자신과 모든 실재가 그에 따라 존재하고 행위하는 포텐샤는 신의 본질 그 자체다(Potentia Dei, qua ipse, et omnia sunt, et agunt, est ipsa ipsius essentia).([윤리학] 1부 정리 34의 증명)

 

이 두 가지 규정은 각각 분명한 이론적 목표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규정은 포텐샤를 잠재력으로, 곧 실행될 수도 있고 실행되지 않을 수도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여 항상 현행적인 힘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두 번째 규정은 신과 피조물 또는 오히려 자연 실재들 사이에 초월적인 거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모든 실재들의 실존 및 행위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반면 포테스타스는 초월자(이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초월적 인격신을 의미하지만, 바로크 시대의 절대군주를 함축하기도 한다)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며, 주로 논쟁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포텐샤 개념의 경우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인과관계와 그 작용을 가리키는 데 반해, 포테스타스는 이러한 인과적 필연성을 초월하는 어떤 목적을 전제하거나 (초월적) 주체의 의지의 무한성에 의존한다는 점에 양자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의 구분은 당대의 신학 및 존재론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개념쌍에 대한 이상의 설명은 필자가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번역본에 붙인 “역량potentia-권능/권력/권한potestas”의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이 논문에 대한 익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은 필자의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구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를 한 바 있다.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구분이 당대의 의인론적 신관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고 하더라도, 이로부터 전자가 존재론적 차원이고 후자가 신학적 차원이라고 단순화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는 [윤리학] 1부 정리 35를 참조하라고 지적했다. 첫 번째 지적의 경우 그가 필자의 논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필자는 포텐샤가 존재론적 차원이고 포테스타스가 신학적 차원이라고 구별한 것이 아니라, 포텐샤/포테스타스 쌍이 존재론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지니는 비판적 함의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둘째, 그는 1부 정리 35가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구별과 제대로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Quicquid concipimus in Dei potestate esse, id necessario est” 중에서 “in Dei potestate esse”의 경우 스피노자가 potestas를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는 지적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보여주려는 것은, potestas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가능태로서의 힘 또는 능력이 아니라 필연성을 함축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정리는 필자의 구별을 반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입증한다.]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의 역량과 주권적인 권력을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로 받아들이는 한, 그들의 용법은 스피노자 철학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용법이 정치적 의미에서도 스피노자 철학의 내용과 합치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 문제는 두 번째 개념인 다중의 문제와 직접 연결된다.
 

2. 다중 또는 대중들 

[multitudo라는 개념을 네그리나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multitude”라고 번역하지만, 발리바르는 주로 “masses”라는 용어로 번역해서 사용한다. 네그리 식의 번역에는 물티투도를 주체로 보는 관점이 함축되어 있는 반면, 발리바르는 물티투도의 기본 특징은 양가성 내지 양면성이며, 따라서 그것을 자율적인 정치적 주체로 간주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물티투도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의 문제에는 이미 그 개념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쟁점이 결부되어 있다. 나는 발리바르의 견해가 스피노자의 원래 용법에 좀더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네그리와 하트 자신의 이론적 맥락이 아닌 경우에는 스피노자의 multitudo 개념을 “대중들”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하겠다. ]

1)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스피노자의 정치학에서도 포텐샤와 포테스타스는 체계적으로 구분되어 사용되지만, 존재론ㆍ신학이나 인간학ㆍ윤리학의 차원과는 달리 두 개념 사이의 관계는 대립의 관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두 개념 사이의 관계는 비제도적인 또는 선(先)제도적인 행위 능력으로서 포텐샤와 법제도에 의해 부여받은 권력 또는 권한으로서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곧 정치학의 영역에서 포텐샤가 법적ㆍ제도적 질서의 존재론적 기초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 제도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정치적 행위의 자연적 기초를 표현한다면, 포테스타스는 법제도에 따라 규정된 행위 능력이나 권한을 의미한다.[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진태원 2005 및 발리바르 2005에 수록된 필자의 “역량potentia-권능/권력/권한potestas” 용어 해설 참조.] 

2)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다중 또는 물티투도는 지난 1980년대 이후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했다. “많은”, “다수의” 또는 “큰”이라는 뜻을 지닌 “multus”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17세기 정치철학자들, 특히 홉스와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홉스의 경우 물티투도는 법제도의 틀 안에서 구성된 인민(people)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고유한 정치적 실재성을 지니지 못한 “군중” 내지는 “무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홉스 정치학의 원칙에 따를 경우 물티투도는 적법한 정치적 지위를 갖지 못하고 심지어 전혀 정치적 행위를 수행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물티투도는 정치학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불법적인 소요와 폭력으로 정치적 질서를 위협한다는 점에서는 홉스 정치학이 꼭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반면 스피노자는 물티투도라는 개념에 대해 좀더 미묘한 태도를 보여준다. 정치학에 관한 스피노자의 첫 번째 주저인 [신학정치론](1670)에서 이 개념은 단 세 차례만 사용되고 있으며, 거의 이론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신학정치론]에서는 오히려 좀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불구스(vulgus), 곧 우중(愚衆)이나 플레브스plebs, 곧 천민 같은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6년 뒤에 씌어진 [정치론]에서 물티투도는 69번이나 등장할뿐더러 이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이상의 내용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진태원 2005를 참조하라.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대중을 표현하는 vulgus, populus, turba, multitudo 같은 어휘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Balibar 1997 외에도, Chaui 1997, Montag 1998을 참조. Chaui와 Montag의 논의는 발리바르의 관점을 약간 교정하고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개념이 바로 대중들의 역량(potentia multitudinis)이라는 개념이다.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는 법/권리를 보통 통치권(imperium)이라 부른다. 공동의 동의에 따라 국정의 책임을 맡은 이가 이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보유한다.([정치론] 2장 17절)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과 같은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정치론] 3장 2절).


우선 이 구절들은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통치권의 기초로 명시함으로써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전개한 “역량의 존재론”과 좀더 부합하는 정치학의 원리를 제공해 준다.[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5 참조.]

둘째,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가 대중들 자체를 일종의 “정치적 주체”로 간주했으며, 민주주의를 대중들이 직접 통치하는 체제로 간주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네그리와 하트 같이 대중들의 역량을 직접 민주정과 일치시키고, 이로써 대중들의 역량을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과 동일시하는 관점은 스피노자가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항상 유지하는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자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차이를 대립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의 존재론 및 인간학과 정치학의 관계를 정확히 해명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은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일차적으로는 지배 권력에 맞선 인민대중의 전복적인 힘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적 기초라는 좀더 근원적인, 그리고 좀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는 대중들(의 운동)이란 정서적ㆍ관념적 연관망들의 집합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대중들의 역량은 항상 능동성과 수동성의 갈등적인 경향 속에 들어 있으며, 항상 희망과 공포의 정서적 동요를 보여준다는 점, 따라서 대중들의 역량은 항상 제도적인 매개를 요구한다는 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이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정치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투쟁과 갈등의 논리다. Moreau 2003 참조.]

법적ㆍ제도적 매개는 스피노자 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이고 필수적인 성격을 띤다. 이 매개들이 수행하는 기능은 자생적으로는 정념적이고 갈등적인 존재들로 남아 있는 개인들 및 대중들이 마치 이성적인 존재자들이 행위하듯이 국가의 보존을 위해 행위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으며, 스피노자는 이를 3장 7절에서 “마치 ~처럼(veluti)”이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대중들은 본성적으로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정신에 의해 실제로 인도되지는 않지만, 대중들의 역량이 국가의 보존과 안전을 위해 적절하게 활용되기 위해서는 대중들은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는 것처럼, 법적ㆍ제도적 매개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정치학의 영역에서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를 존재론ㆍ신학이나 인간학ㆍ윤리학의 영역과 달리 대립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주권이 없이는 국가, 정치 질서가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치의 영역에서 포테스타스는 단순한 가상이나 착각 또는 기생적인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포텐샤의 철학, 곧 역량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매우 적절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량-권력의 관계를 일의적인 대립 관계로 파악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스피노자 철학에서 양자 사이의 관계는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로 나타나며, 이 점에서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의 정치학은 스피노자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3. 절대적 정체로서 민주주의  

1) 다중의 자기 지배로서 민주주의

다중의 역량과 주권적 권력 사이의 관계 또는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의 관계를 둘러싼 네그리ㆍ하트와 스피노자 철학 사이의 긴장은 민주주의의 문제를 둘러싸고 지속된다. 네그리와 하트에게 절대적 정체로서 민주주의는 내재적 민주주의를 뜻한다. 여기서 내재적 민주주의란 무엇보다도 외재적인 지배장치로서, 일자로서의 주권을 필요로 하지 않는 민주주의, 따라서 다중이 자율적인 역량을 통해 스스로를 통치하는 민주주의를 가리킨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네그리와 하트는 심지어 민주주의를 다중이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정치로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앞의 인용문보다 좀더 길게 인용해보자.  

정치철학의 반복되는 진리들 중의 하나는, 오직 일자만이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군주이건, 정당이건, 인민이건, 또는 개인이건 간에 말이다. 통일되지 않고 복수적인 채로 남아 있는 사회적 주체들은 지배할 수 없으며, 그 대신 지배를 받아야 한다. [...] 다중은 다양함을 유지하고 내적으로 차이를 유지한다 할지라도 공통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다. 다중은 하나가 명령하고 나머지들이 복종하는 정치적 신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살아 있는 육체다. [...] 다중은 민주주의, 다시 말해 만인에 의한 만인의 지배라는 법칙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주체다.(Negri & Hardt 2008, 137쪽)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네그리와 하트에게 민주주의의 적은 초월적인 심급으로서의 일자, 특히 주권이며, 어떤 민주주의든 여전히 이러한 초월적 일자를 유지하는 한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중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과학’, 즉 이 새로운 상황과 대면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패러다임을 필요로 한다. 이 새로운 과학의 제 1의 의제는 민주주의를 위해 주권을 파괴하는 것이다. 주권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건 불가피하게 권력을 일자의 지배로서 제시하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침식한다.”(같은 책, 419쪽)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일체의 국가 제도 또는 정치 제도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기꺼이 제도적인 구조들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심지어 미국 독립의 이론가들 중 한 사람이었던 매디슨 식 입헌주의의 진보성을 긍정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말하는 절대적 민주주의, 다중의 민주주의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식의 직접 민주주의와 동일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같은 책, 416쪽 이하).

하지만 그들은 과연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적합한 제도적 형식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시사점을 제공하지 않으며, 다만 세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첫째는 어떤 식으로든 주권을 파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둘째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들은 “사회적 삶을 부단히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소통적이고 협동적인 네트워크들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는 다중은 결코 하나의 동일성으로 종합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들로, 독특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떠한 민주주의 제도도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들을 환원하거나 획일화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요컨대 이들의 입장은 “혁명적 현실주의는 욕망의 생성과 증식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실정치처럼 혁명 운동에의 이러한 몰두도 [...] 자기 자신을 직접적인 상황에서 분리시키고 매개들을 꾸준히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을 언제나 포함한다”(423쪽)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들의 입장은 우리가 앞 절에서 살펴본 스피노자의 입장, 곧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 사이의 상호 구성적 관계, 따라서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에 관한 입장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여전히 두 입장 사이의 차이는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앞에서 인용한, 유일한 정치적 주체로서 다중이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민주주의와 입헌적 공화주의와 같은 제도적 매개를 필요로 하는 민주주의 사이의 차이이기도 하다. 네그리와 하트는 절대적 민주주의 또는 내재적 민주주의가 직접 민주주의와 동일시될 때 생겨날 수 있는 위험성을 잘 알고 있으며,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이를 보충해야 할 필요성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들이 간과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내재적 민주주의는 그 정의 자체에서 자신 안에 분할과 갈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본질적인 분할과 갈등 때문에 다중을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를 다중이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것으로 규정하자마자 다중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분할되고, 양자 사이에는 해소할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하게 된다. 다중이 정치적 주체, 그것도 유일한 주체라면, 그 때의 정치적 주체는 과연 지배자로서의 다중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피지배자로서의 다중을 가리키는가? 만약 전자나 후자만이 정치적 주체라면 다중은 이미 자신 안에 배제를 함축하게 되며, 만약 양자 모두 정치적 주체를 의미한다면, 유일한 주체로서 다중은 자기 분열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궁극적으로 다중이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게 될 때, 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된다”(같은 책, 405쪽)는 주장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2) 과정으로서 민주주의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과 달리 스피노자에게 주권은 국가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대중들의 역량은 국가의 토대의 위상을 지니지만, 대중들에 고유한 내적 갈등 및 양가성 때문에 대중들은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통일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항상 제도적인 매개로서, 통일의 형식으로서 주권을 요구한다. 이처럼 주권의 필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을까? 스피노자는 미완의 장으로 남은 [정치론] 11장에서 민주주의를 “완전하게 절대적인(omnino absoluta)” 정체(政體)로 규정한다. 여기서 절대적인 또는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로서의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는 대중들이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정체라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바로 이 민주주의를 다루게 될 11장 이하의 내용 중에서 첫머리 4절만을 다룬 채 미완으로 남겨두고 숨을 거두었다. 이러한 미완성은 스피노자의 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거기에는 좀더 깊은 이론적인 난점이 존재했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발리바르는 한 가지 근본적인 답변을 제시한다. 곧 미완의 11장은 스피노자가 정체로서 민주주의를 정의하고 그 제도적인 요소들을 규정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를 느꼈다는 점을 입증한다는 것이다(Balibar 2005 중 1부 3장 참조). 사실 스피노자처럼 대중들을 근본적으로 양가적인 존재로 규정한다면, 이러한 대중들이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정체로서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구체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치 대중들이 현명하고 유덕한 존재자들인 것처럼 가정하고서 이상적인 정체로서 민주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정치론] 1장 첫머리에서부터 플라톤과 토마스 모어 류의 정치적 이상주의 내지 유토피아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신 마키아벨리를 비롯한 “정치가들”의 입장을 지지한 스피노자로서는 택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민주주의를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로 찬양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공백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공백은 단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또 스피노자의 지적 정직성에 대한 징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관한 매우 새로운 관점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법적으로 규정되는 정체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법적인 정치제도의 근저에 놓여 있는 하나의 본질적인 경향으로 파악하는 관점이다. 곧 민주주의는 더 이상 군주정이나 귀족정과 구별되는 하나의 정체의 문제가 아니라, 군주정과 귀족정을 포함하여 모든 정체의 근저를 이루는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면) 정치의 부재하는 원인, 부재하는 토대의 문제로 제시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모든 정체 내부에 그 정체의 토대로 존재하며, 그 정체의 완전성 내지 탁월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이렇게 되면 군주정이나 귀족정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 정체인지, 아니면 혼합정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정체인지와 같은, 고대 이래로 많은 정치학자들이 씨름해왔던 문제는 더 이상 핵심 문제가 아니게 된다. 오히려 각각의 정체 내부에서 그 정체의 기초를 이루는 민주주의적 토대를 강화하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구현하려는 과정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실제로 스피노자가 [정치론] 7장 이하에서 군주정과 귀족정을 분석하면서 골몰하는 문제는 어떻게 이 정체들 속에 존재하는 대중적인 요소를 강화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민주주의론의 독창성은 민주주의를 하나의 정체가 아니라 모든 정체 안에 존재하는 민주화의 경향으로 파악한 데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네그리ㆍ하트와 스피노자의 정치학, 그들의 민주주의론의 핵심적인 차이는 결국 물티투도를 자율적인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는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양가적인 정치의 토대로 간주하는지의 차이, 곧 다중의 정치와 대중들의 정치 사이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를 좀더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네그리ㆍ하트와 스피노자 철학 사이의 차이점은 대표 및 국가 제도를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느냐 아니면 그것이 지닌 본질적인 긍정성을 인정하느냐의 차이로 집약된다. 네그리와 하트에게 대표 및 국가 제도 일반은 다중의 자율적인 역량을 동일화하고(따라서 독특성들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획일화하고) 초월적인 심급의 대표들로 매개하는(따라서 그것을 외적인 타자로 대체하고 소외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대표 및 국가 제도 일반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이고 될 수 있는 한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하트와 네그리의 이론이 한편으로 법과 사회, 다른 한편으로 구성 권력과 구성된 권력 사이의 엄격한 분리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다. 이 점에 관해서는 Passavant 2004 참조.] 반면 스피노자에게 대표 및 국가 제도는 대중들의 근본적인 양가성을 조절하고 대중들의 부정적인 파괴적 역량(가령 민족주의적인 열광이나 소수자들 및 타자에 대한 배타성 등)을 합리적으로 중화하기 위한 핵심 장치다. 따라서 국가 제도 및 대표는 폐지되거나 적어도 축소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개조되고 합리화되어야 할 대상이다.[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할 수 있다. “민주주의적 대표représentation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의견과 당파의 다원성을 보증하고 활성화하는 것(이것은 물론 본질적입니다만)만이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대표하는 것이며, 모종의 세력관계가 강제하는 “억압”으로부터 이러한 갈등을 빼어내서 공동선 내지 공동의 정의를 위해 활용할 수 있게끔 그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Balibar 2002, p. 185.(강조는 발리바르)]  

IV. 맺음말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대중들의 모습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놀랍고 감동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으로는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읽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들은 “주체”라는 범주로 묶이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다양한 개인들과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는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대중과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다중을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로 가정하는 것, 또 지금까지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존재였던 대중이 이제 전적으로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다중으로 변모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대중이 지닌 양면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희망을 객관적인 대체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중은 네그리와 하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며, 단지 폭력적인 파괴나 약탈만을 자행하는 그런 존재도 아니다. 이른바 군중심리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귀스타브 르봉 자신이 대중이 지닌 양면성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었으며(르봉 2005), 그 이후의 여러 군중이론가들도 이 점을 긍정하고 있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모스코비치 1996 참조.] 촛불시위를 평가할 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들 중 상당수(어쩌면 대부분)는 또한 지난 황우석 사태 때 그야말로 민족주의와 무지한 정념의 광기에 휩싸였던 바로 그 대중들이며, 또한 그들이 맞서 항의하는 그 정권을 탄생시킨 바로 그 주역들이었다는 점이다.

네그리와 하트가 제시하는 다중 개념의 한계 중 하나는 그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다중과 대중의 차이에 관해 역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이러한 차이를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은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구분법에 따를 경우, 파시즘에 동조하지 않고, 획일적인 동일성에 포섭되지 않고, 민족주의적인 정념에도 휘둘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독특성을 존중하고 스스로 자신의 독특성을 개발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공통적인 것을 추구하고 실제로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바로 다중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늘 사후에만 그것을 식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대중들의 양면성, 대중들의 극단적인 동요를 인식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양면성 내지 극단적인 동요가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상수를 이룬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보편적 대의, 해방의 가치를 위해 봉기할 때 대중은 탁월한 정치적 주체, 또는 오히려 탁월한 정치적 행위자들이지만, 또한 그 대중은 민족주의나 다른 이데올로기적 정념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대중의 정치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대중 또는 대중들을 항상 이미 정치적 주체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운동을 규정하는 예속화와 주체화의 갈등적인 변증법(예측 불가능한)을 국가를 포함한 정치적 제도화의 핵심 쟁점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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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기명 2009-11-1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구. 감사합니다.^^

안중철 2009-11-1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선생님. 연락 부탁드립니다.

2009-11-24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09-11-25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잘 봤습니다.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야 없겠지만 많은 걸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군요.

포퓰리스트 2009-12-01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데리다에 관심이 있어서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다. 여기 주인장은 데리다를 유럽이나 프랑스에서 쓰는 용법처럼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르고 싶은 것 같다. 여기 주인장이 포스트를 무슨 의미로 쓰는지는 잘 모르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대로 쓰면서 후기구조주의라는 용법을 쓰니 좀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처음에는 이 공간에 흥미가 있었다. 하지만 다시는 여기에 들어오지 말아야겠다. 지식인이나 지식생산자는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학문이라는 것이 전문적이고 특수한 지식을 다루는 소수가 다루어야 한다는 얘기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포퓰리스트라고 규정한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포퓰리즘인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는 자칭 마르크스주의자인 (내가 보기에는 자유주의자인) 에릭 홉스봄을 연상시킨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엘리트주의에 가득 찬 사람이다. 역사서술은 어디까지나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하는 것이지 무지한 대중이나 민중들이 써서는 안 된다고 보는 사람이다.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칭 마르크스주의자인 주제에 말이다.

어쩐지 제도를 강조하는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제도는 어디까지나 엘리트가 지배하는 영역이 아닌가? 주인장은 자칭 마르크스주의자인 홉스봄과 다를 바 없는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다시는 여기에 오지 않겠다. 주인장이 생각하는 스피노자도 그런 스피노자인 것으로 보인다.

익명의1인 2009-12-03 10:3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포퓰리즘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그 누구도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제가 알기로 진태원 씨는 포퓰리즘을 부정적인 사태로 보기는커녕 오히려 민주주의 정치의 환원불가능한 계기로 보시지요. 엘리트주의에의 혐의 역시 때로는 전공자들끼리 이야기해서 잘 풀릴 수 있는 문제도 있다는 것이지 또 전공자들끼리만 글을 쓰고 읽어야 한다는 말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구두를 고칠 때 구둣방을 가고, 기계를 고칠 때 수리공을 찾듯이 학문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개인적으로 님의 리플을 읽고 며칠을 고민해 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 공간은 정확히 리플 남기신 분들께 도움을 주는 공간이지, 엘리트주의자 또는 먹물들의 은밀한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공간이 아닙니다. 이런 점들을 재고해 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 2009-12-07 16:4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poststructuralism을 후기구조주의라고 번역하는 건 충분히 근거가 있어보입니다. 왜냐하면 저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와의 단절보다는 연속이라는 느낌이 훨씬 강하고, 특히나 포스트모더니즘하고 불필요하게 동일시하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까요.
지적 포퓰리즘, 이것도 확실히 존재합니다. 다들 경악스러운 결론을 내놓기 위해 고민하죠. 이게 물론 인터넷에 한정되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만, 확실히 대화가 가지는 한계도 있어요. 많은 학자들이 논쟁이나 말하기를 불편해하는 것도 사실이에요. 말은 너무 위태로우니까요. 제가 알기론 데리다는 물론이고 들뢰즈, 푸코도 이와 같은 논지의 말을 한 적이 있었죠.
저 역시 제도에 대한 옹호로 가득한 위 글이 탐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래 글의 포퓰리즘 사용 역시 불만족스러웠구요. 그리고 스피노자에 대한 훈고학적 탐구로 네그리를 비판하는 것은 뭔가 약간의 문제가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것을 근거로 소통 자체에 대해 거부하는 건, 정통 마르크스주의 최악의 일면이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