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체의 권리droit de cité
발리바르는 이 책에서 “droit de cité”라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하고 있으며, 1998년에 출간되고 2002년 증보판으로 재출간된 저서에서는 아예 책의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Droit de cité: Culture et politique en démocratie, PUF, 2002). 프랑스어에서 “avoir droit de cité”라는 표현은 관용적으로는 “~에 대한 권리를 갖다”, “~에 속할 권리를 갖다”를 의미한다. 가령 “Google Voice n'a pas droit de cité sur l'iPhone”라는 문장은 “구글 보이스는 아이폰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발리바르는 이 책 및 다른 곳에서 이 용어에 대해 몇 가지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첫째, 이 용어의 가장 좁은 의미는 이주노동자 및 외국인들이 누려야 할 “거주의 시민권”이다. 발리바르는 34쪽에서 이 점을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출신에 대한 차별 없이 외국인들에 의한 정치체의 권리(또는 거주의 시민권)의 획득.”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발리바르가 말하는 droit de cité란, 지난 80년대 이후 프랑스 및 유럽 정치의 핵심 쟁점이 되어온 이민자들 및 이주자들이 유럽 안에서 누려야 할 출입 및 거주의 권리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 책 및 다른 책에서 이 용어에 대해 훨씬 더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반대로 국민적 동일성 또는 내가 조금 전에 그 발생에 관해 환기한 바 있는 허구적 종족성에 특징적인 폐쇄성은 세계화의 사회적‧경제적‧기술적‧통신적 현실만이 아니라 “유럽에서의 정치체의 권리droit de cité en Europe”라는 의미로 이해된 “유럽적인 정치체의 권리”라는 관념, 곧 유럽의 건설을 통한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관념과 양립 불가능하다.”(30쪽) 또한 다음 구절도 참조할 수 있다.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다양한 집합적 상황과 개인적 삶의 궤적 속에서 외국인들과 특히 “이민자들”이 지닌 정치체의 권리라고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대안이다. 정치체의 권리는 시민권을 떠받치고 또 그것을 예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권리는 현대 세계의 요구들에 적용되기 위해 이 권리가 어떤 법적인 양상들에 따라 설립되고 전환되어야 하는가에 관해 예단하지 않는다. 정치체의 권리는 국적 부여 기준의 변경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지역적, 국민적, 유럽 공동체적 차원에서 국적과 독립하여 모든 거주자들에게 전진적으로 정치적 권리들을 확대함으로써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 권리는 “자유주의”의 승리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체류권 및 노동권의 결연한 해방에 상응한다. ...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체의 권리droit de cité 및 그것을 넘어 시민권 역시 단지 위로부터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아래로부터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108쪽) 더 나아가 발리바르는 이 책 356쪽의 주 20)에서 우리말로는 보통 “국가” 또는 “정체”(政體)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폴리테이아politeia의 가능한 번역어 중 하나로 바로 droit de cité라는 용어를 제시하고 있다. 이 경우 이 용어는 헌정constitution이라는 의미 또는 (발리바르가 좀더 정확히 제안하듯이) “시민권 헌정”이라는 의미와 등가적인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이 용어는 또한 “시테”라는 특수한 프랑스식 지명과 관련된 함의도 갖고 있다. 지난 2005년 프랑스 방리유 봉기에 관해 성찰하는 글에서 발리바르 자신이 지적하듯이 프랑스에서 시테는 대도시 주변 지역(방리유)에서 주로 이민자나 이주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지역은 전 세계 대도시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적ㆍ사회적ㆍ문화적 권리들에서 차별받는 주변적인 집단들이 거주하는 일종의 “게토”다. 따라서 “시테의 권리”라는 것은 이들이 시민으로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지니고 있고 또 마땅히 그러한 권리가 부여되어야 함을 함의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droit de cité라는 표현을 하나의 우리말로 모두 담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모든 시민, 따라서 모든 인간이 어떤 정치체에 거주하고 체류하고 시민으로서의 권리들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정치체의 권리라고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