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출간될 에티엔 발리바르의 {우리는 유럽의 시민들인가?}(후마니타스)에 수록될 용어 해설 몇 가지를
옮깁니다. 두어 개는 너무 분량이 많다 싶은데, 그래도 얼마간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냥 수록할 생각입니다.
처음에는 용어 해설 쓰고 해제 쓰는 데 한 2주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벌써 두달을 넘겨버렸네요. 책의 출간을
기다리는 분들께 죄송하고 후마니타스 출판사 여러분들께도 죄송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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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국민적transnational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이라는 관형어는 최근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이 용어는 보통 종래의 국민 국가적인 차원을 넘어선 정치ㆍ경제ㆍ문화적인 지평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가령 “transnational corporations”는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본국의 기반을 바탕으로 세계적 규모에서 자본 축적을 수행하며, 이러한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과 조직을 갖고 있는 기업”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초국적 기업”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장시복, 세계화 시대 초국적 기업의 실체, 책세상, 2004, 41쪽). 또한 “transnational civic activity”는 국경을 초월하여 전개되는 시민 운동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transnational terrorism” 같은 용어도 종종 사용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 용어는 “초국민적” 내지 “초국적”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해 보인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 책을 비롯한 최근 저작들에서 “national”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접두어들을 섬세하게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transnational”을 단순히 “초국민적”이나 “초국적”으로 번역하기는 좀 어렵다. 발리바르가 주로 사용하는 용어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용어들이다.
우선 “post-national”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이제 국민 국가 시대가 종언을 고했으며, 탈국민적인 시대, 곧 유럽 공동체라든가 기타 세계 시민적인 정치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주장하는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 책에서는 하버마스가 이러한 입장의 대표자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관점에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공화주의자들이 고수하는 국민 국가적 관점과 이것에 대립하는 “post-national”, 곧 “포스트 국민적” 관점의 양자택일을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 “transnational”이라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를 잘 보여준다. “여기 유럽에서(하지만 이는 분명히 훨씬 더 일반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몇몇 국민들이 심지어 국민 형태 그 자체가 재정초 및 재생의 국면을 통과하고 있지 않은지, 또는 돌이킬 수 없게 국민 형태가 폐절되는 과정에, “포스트 국민적”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 접어든 것은 아닌지 하는 질문이 점점 더 피할 수 없게 제기되는 만큼, 비판적 거리 두기는 점점 더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나 자신은 문제를 이렇게 제기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믿는다. 이런 식의 양자택일들은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명하는 데 기여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37쪽)
또한 발리바르는 “supra-national”이라는 용어와 “transnational”이라는 용어를 구별한다. 전자는 국민 국가의 차원을 넘어선 정치 제도, 특히 유럽 공동체를 가리키기 위해 자주 사용된다. 물론 국민 국가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보면 “supra-national”과 “transnational”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양자가 상호 대체 가능한 동의어처럼 쓰이는 곳도 존재한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두 용어를 상당히 섬세하게 구별해서 사용한다. 우선 전자는 현재 유럽 공동체 건설을 주도하는 세력의 공식적 관점을 표현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이러한 관점은 국민 국가의 존속을 옹호하는 “주권론적” 관점과 대립하여 (미국이나 일본 또는 중국과 맞설 수 있는) 유럽이라는 새로운 초강대국의 구성을 겨냥하는 “유럽 공동체적” 관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은 공산주의의 종언 이후에 유럽 공동체 건설이 본격화되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다분히 신자유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으며 “유사 제국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은 이런 상황을 심원하게 변형시켰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유럽 공동체”는 유럽 대륙에 존재하는 유일한 초국민적 구성물이라는 유사 제국적인 상황에 놓이지 않았을 것이다.”(305쪽)
더 나아가 유럽 공동체는 국민 국가의 한계를 지양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함에도, 이러한 관점은 국민 국가의 위기를 초래한 핵심 모순, 곧 시민권=국적이라는 모순(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나오는 “국민 사회 국가” 항목 참조)을 약화시키거나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게 된다. 왜냐하면 초국민적 관점은 유럽 공동체를 유럽 회원국들, 곧 유럽의 (부유한) 국민 국가들의 합으로 규정하고, 따라서 유럽 구성원은 기존 국민 국가들의 성원으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국적을 가진 성원에게만 시민권의 향유 자격을 부여하는 시민권=국적 등식을 본질로 하는 국민 국가의 모순을 해결하는 대신, 기존의 국민 국가 시민권의 특징들을 초국민적 차원으로 그대로 옮겨놓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는 불가피하게 유럽적인 아파르트헤이트를 낳을 수밖에 없다. 마치 이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백인과 흑인 사이에 체계적인 격리가 존재했던 것처럼 유럽 대륙 내에서 유럽적인 시민권을 향유하는 주민들과 그렇지 못한 주민들(하지만 유럽 대륙에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는) 사이에 체계적인 장벽과 경계가 설립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transnational”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포스트 국민적이거나 초국민적인 관점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발리바르 자신의 관점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이때의 “transnational”은 보통 이해되는 것처럼 국민 국가를 넘어선다든가, 다른 나라의 시민들과 연대한다든가 하는 뜻보다 좀더 강하고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발리바르가 다른 곳에서 간명하게 규정한 것에 따르면 “trans-national”은 “trans-frontière”, 곧 “국경/경계를 넘어섬”을 의미한다(É. Balibar, Europe, constitution frontière, Éditions du Passant, 2005, p. 17). 이 때 “국경/경계를 넘어섬”은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국경을 초월한다든가 횡단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런 의미도 포함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시민권=국적을 조건 짓는 국민적ㆍ인종적 경계, 따라서 상징적이고 동일성 중심적인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trans-national”은 무엇보다도 국민 국가 또는 국민 사회 국가의 모순의 핵심을 이루는 시민권=국적의 한계를 넘어서고 개조한다는 것을 뜻한다. 발리바르에게 “transnational”이 무엇보다 “citoyenneté transnationale”, 곧 국민적 시민권의 한계를 넘어서는 “관국민적 시민권”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transnational”은 국민 국가의 종언이라는 막연한 관념에 기반을 둔 추상적인 포스트 국민주의나 세계 시민주의와 달리 국가 형태의 역사, 헌정 형태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국민 국가의 내적 모순을 개조하거나 지양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새로운 형태의 국가 내지 헌정의 구성을 추구하려는 발리바르의 관점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transnational”을 보통 사용되는 “초국민적”이나 “초국적”이라는 번역어로 옮기는 대신 “관(貫)국민적”이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번역어는 시민권=국가라는 등식을 가능케 하는 국민적ㆍ인종적 경계를 가로지른다는 의미를 좀더 잘 표현해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을 담을 수 있다면 “횡국민적” 같은 번역어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