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황해문화] 봄호 (제126호) "권두언" 올립니다. 


이번 [황해문화]는 <광장에서 현장으로!: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주제 아래 


전권 특집호로 꾸몄으며, 모두 51명의 시민들의 글이 실렸습니다. 


많이 관심 갖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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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놀람, 세 개의 질문, 세 가지 과제

 

 

작년 123일 느닷없이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탄핵 정국이 시작된 지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정국이 안정되기는 고사하고 하루하루 예측할 수 없는 격류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 전체가 요동치고 있다. 계엄령 선포와 국회의 해제 의결, 대통령 탄핵 소추와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개시, 대통령의 체포와 구속과 같은 일들이 숨 가쁘게 전개되면서 이제 탄핵 심판 절차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지만, 과연 그것으로 이번 사건이 종결될지 아니면 또 다른 사건의 서막 내지 발단이 될지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먼 과거의 유산이 되었다고 믿었던 것,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그리고 이미 우리가 극복했다고 믿었던 것이 마치 프로이트가 말했던 억압된 것의 귀환인 양,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서 불쑥 솟아올라, 단단하다고 믿었던 우리의 민주주의 헌정 질서, 우리 사회의 상징적 질서의 토대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세 번의 놀람

 

스피노자 철학 개념을 빌려서 말한다면, 이번 정국에서 많은 사람들은 세 번의 놀람”(admiratio, wonder)을 경험했을 것이다. 첫 번째 놀람은 12.3 비상계엄 선포 자체에서 일어났다. 이번 비상계엄령은 197910.26 사건 이래로 45년만에 군사 쿠데타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었던 대다수 시민들의 생각을 비웃듯이, 잠자리를 준비할 늦은 밤 시간에 너무나 태연하게 선포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가짜 뉴스인 줄 알았다고 토로하듯이, 텔레비전에 나와 담담한 어조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대통령 모습이 차라리 딥페이크 영상으로 된 가짜 뉴스 화면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것은 생생한 현실이었고, 시민들이 그 짧은 순간에 선포된 계엄령의 역사적 무게가 어떤 것인지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SNS를 통해 계엄령 선포에 관한 소식이 급속히 전파되었고, 어떤 이들은 지난 날 경험했던 역사적 기억을 떠올리며 공포에 젖었고 어떤 이들은 채 실감은 하지 못하면서도 계엄령 선포가 앞으로 어떤 파장을 미칠지 걱정하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밤늦은 시간 용감하게 계엄군을 막기 위해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도 적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영웅적인 저항 덕분에, 그리고 국회의원들이 신속하게 국회로 집결한 덕분에 계엄령은 짧은 시간 내에 유혈 사태로 이어지지 않은 채 해제될 수 있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비상계엄령 선포 소식을 듣자마자 국회로 간 용감한 시민들이 없었다면, 만약 국회의원들이 신속한 판단력으로 국회로 집결하여 계엄 해제를 의결하지 못했다면, 또한 군인들이 상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고 태업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계엄령이 의도대로 진행되었다면,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만약 그랬다면, 불행하게도 많은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죽거나 다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번 계엄령 선포로 인해 일어난 역사적 퇴행은 우리 사회에 훨씬 더 깊은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따라서 첫 번째 놀람은 공고하다고 믿었던 한국의 민주주의 헌정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놀람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민주주의의 취약함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일임이 널리 입증되고 있다.


두 번째 놀람은 남태령 대첩에서 경험한 놀람이다. 작년 1221일과 22일 사이에 서울의 관문인 남태령에 진입하려는 농민 시위대가 경찰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 다수의 시민 시위대가 농민들에 합류하여 밤샘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결국 농민 시위대가 서울에 진입하는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가히 남태령 대첩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고 뜻깊은 싸움이었다. 그것은 비상계엄과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 이후 이번 탄핵 정국을 규정했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2016년 박근혜 탄핵 당시 농민 시위대가 넘지 못했던 남태령 고개를 넘어서 처음으로 서울 시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남태령 대첩이 중요했던 것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과 차별, 배제에 시달리는 소수자들 사이의 저항의 연대가 이번 탄핵 정국을 이끌어가는 민주주의의 핵심 동력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서로 외롭게 싸워왔던 소수자들, 사실 우리 사회 시민들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을()들은, 타인들이 직면한 문제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발견했고, 마치 자신들의 문제인 것처럼 타인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싸움에 동참함으로써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남태령 대첩은 을들의 연대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의 진전에 기여하는지 보여준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놀람은 올해 119일 새벽 우리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흥분한 극우파 시위대가 서부지방법원에 침입하여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 촉발한 놀람이다. 만약 이번 탄핵 정국이 앞의 두 가지 사건 및 그것들이 촉발한 놀람에 한정되었다면, 이번 탄핵 정국의 정치적 파장의 범위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서부지방법원 폭동이 발생함으로써 현재의 정국은 훨씬 더 복잡하고 근원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서부지방법원 폭동이 충격적인 것은 이번 탄핵 정국이 단지 내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내전과 관련된 것임을 뚜렷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내란과 내전의 차이는 어떤 것인가? 글자 하나 차이에 불과한 두 단어는 상당히 중요한 차이를 품고 있다. 무엇보다 내란이 법적인 용어라면, 내전은 법 바깥의, 그리고 법 이전 내지 법 이상의 용어라는 점이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심판 절차를 밟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하여 내란죄 피고인으로 형사재판을 받게 된 것은 형법상 내란 수괴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윤석열 대통령 변호인단을 비롯한 지지자들은 내란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강변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법적인 틀 내에서 이루어지는 공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전은 법을 벗어나는 문제다. 실제로 윤석열 변호인단과 극우 시위대는 내란죄 혐의를 부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사법부 전체를 공격하면서 탄핵소추가 인용될 경우 내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경고를 수차례 제기하고 있다. 내전에 대한 이러한 경고는 법적인 틀 자체, 우리 헌정 자체를 부인하고 그것을 파괴하겠다는 경고인 셈이다. 서부지방법원 폭동이 충격적인 것은, 그것이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이러한 의미의 내전의 전초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내전의 전초를 가리킨다면, 설령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인용 판결이 난다고 해도, 심지어 그 이후 2달 이내에 치러질 조기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승리한다고 해도 현재의 탄핵 정국을 특징짓는 적대적 대립은 종결되지 않고, 부정선거론을 매개로 해서 차기 정권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번 탄핵 정국이 지난 2016~17년 박근혜 탄핵 정국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하고 복잡한 쟁점을 포함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따라서 이 세 번의 놀람은 2016~17년의 탄핵과 이번 탄핵 사이의 차이점을 잘 드러내준다. 두 개의 탄핵의 첫 번째 차이점은 박근혜 탄핵이 이른바 국정농단사건으로 촉발이 됐고 직권남용과 뇌물수수 등이 탄핵의 주요 이유가 되었다면, 이번 탄핵은 불법적이고 위헌적인 비상계엄령 선포 및 계엄포고령 발표, 국회, 국회의원 및 선거관리위원회 같은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탄핵의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박근혜 탄핵이 헌법 위반과는 무관한 것이었다면, 윤석열 탄핵은 12.3 비상계엄령 선포에서 비롯된 헌법 위반 및 헌정 자체를 문란하게 한 행위가 탄핵의 핵심 사유로 제시되는 것이다. 두 개의 탄핵 가운데 윤석열 탄핵이 훨씬 더 중대하고 복잡한 위상을 갖는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둘째, 이러한 차이점으로 인해 국민의힘을 비롯한 여권 및 우파의 대응이 지난 번 탄핵과 여실히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다. 지난 박근혜 탄핵에서 여당의 상당수는 탄핵 찬성에 합류했으며,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판결을 대부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조기 대선 과정 및 그 결과에 대해서도 대부분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이번 탄핵 정국에서는 윤석열 측 변호인들만이 아니라 여당인 국민의힘 지도부 및 주요 중진 의원들까지도 탄핵소추의 핵심 사유인 비상계엄령 선포의 위헌적위법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의 정당성을 강변하면서 오히려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사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2017년 탄핵에 이어 두 번째 대통령 탄핵을 당할 경우, 우파 세력이 입게 될 치명적인 정치적 정당성의 손상을 우려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번 탄핵은 헌법 위반 및 헌정의 문란 행위가 탄핵 소추의 주요 사유인 만큼, 국민의힘을 비롯한 우파 세력이 탄핵으로 인해 갖게 될 피해는 훨씬 더 막대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여권은 처음부터 태극기 부대로 지칭되는 극우파 대중운동을 오히려 조장하고 그 세력에 편승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윤석열의 비상계엄령이 촉발한 이번 탄핵정국을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엉뚱하고 기괴한 방식으로 돌파하려는 부조리하고 몽상적인 시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윤석열 및 국민의힘의 행태가 실로 기괴하고 부조리한 면모를 보인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괴하고 몽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행태가 대중의 정치적 무의식을 자극하고 있으며, 위협적인 정치적 힘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국민의힘을 비롯한 여권의 정치적 지지 없이, 또한 대중의 동원이 없이 소수의 몽상가들의 부조리하고 착란적인 행위에 그쳤다면, 12.3 친위쿠데타 시도는 큰 문젯거리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여권의 주류 자체가 그러한 몽상에 편승하여 극우화되고 있는 만큼 그것은 새로운 차원의 정치적 위험으로 자라나고 있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바버러 월터의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가 보여준 바는, 내전은 그런 식으로 시작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셋째, 두 개의 탄핵의 또 다른 핵심 차이점은, 남태령만이 아니라 한강진, 여의도, 광화문 등에서 열리는 집회에서 볼 수 있듯이, 박근혜 탄핵 때와 달리 이번 탄핵 집회에서는 탄핵이나 대선 같은 대의를 위해 장애인운동이나 성소수자운동, 농민운동이나 이주노동자운동, 또는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이나 사회적 참사 피해자 운동 같은 소수자운동이 양보를 해야 한다거나, 소수자운동의 다양한 쟁점은 나중에다뤄도 된다는 식의 배제와 위계화의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남태령 대첩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서로의 투쟁에 연대하고, 서로가 서로의 투쟁을 증언해주는 상호증언 연대가 이번 탄핵 집회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이번 탄핵이 박근혜 탄핵 과정을 되풀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이고 명시적인 입장이 사람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공감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 탄핵 정국은 12.3 비상계엄령 선포로 나타난 헌정의 위기에 대하여, 한편에서는 극우파 대중운동에 편승하여 그 위기를 오히려 더 심화시키고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헌정 질서 및 상징적 질서의 토대 자체를 뒤흔들려는 세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을들의 상호증언의 연대에 입각하여 위기에 빠진 헌정 질서를 구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질서를 수습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한결 더 수준 높은 민주주의적 헌정으로 개조하려는 세력 사이의 투쟁을 근본 쟁점으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의 정국의 전개 과정이 입증하겠지만,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로도, 그리고 그 이후 전개될 조기 대선으로도 봉합될 수 있는 쟁점이 아니다. 그것은 해방 80년의 역사에 대한 평가 및 향후 전개될 한국의 헌정의 향방이 걸려 있는, 훨씬 더 심층적이고 복잡한, 그리고 장기적인 투쟁을 요구하는 쟁점이다.

 

세 개의 질문

 

󰡔황해문화󰡕 이번 호는 광장에서 현장으로!: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주제 아래 전권 특집호를 마련했다. 이런 예외적인 결정을 내린 이유는, 우리가 이번 12.3 친위쿠데타 이후에 전개되고 있는 탄핵 정국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 헌정사의 분수령이 될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 사건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이번 탄핵 정국에서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을들의 상호증언의 연대에 참여했던 51명의 시민들이 지난 두 달여의 시간 동안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문제의식을 느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과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각 분야의 유능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기에 앞서 현장에서 탄핵 정국을 경험하고 스스로 그 탄핵 정국에서 익명의 행위자들로 활동한 시민들의 놀람과 감정, 의견과 고민, 다짐을 듣고 싶었다. 이에 우리는 51명의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공통의 질문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모았다.

 

123 내란 사태를 어떻게 겪었는지. 내란 사태를 겪으면서 어떤 활동을 했고 어떤 것을 느꼈는지 개인적 경험을 말씀해주십시오.


우리 사회의 어떤 것이 바뀌고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평소 각자의 분야에서, 그리고 이번 내란 사태를 겪으면서 경험한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관해 말씀해주십시오.


각자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에 관하여,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게 되겠어? 이렇게 말해도 되나?’ 하는 자기검열을 넘어, 각자 활동하는 분야를 중심으로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지, 그러기 위해 필요한 제도적 대안, 실천 등은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우리는 최대한 다양한 분야 및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민들을 모으고자 했고, 가급적 여러 세대의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으며, 탄핵 정국의 여러 현장들의 서로 다른 모습들을 보이고자 했다. 51명의 시민들이 보내준 답변을 편의상 5개의 범주로 분류했지만, 서로의 투쟁에 함께 하고 서로의 투쟁을 증언하려고 했던 시민들 각자의 답변은 사실 서로 교차하고 중첩되는, 그러면서도 각각의 고유한 문제의식과 고민을 담고 있었다.


이 세 개의 질문들에 대해 51명의 시민들이 보내준 답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여러 번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것은 그들이 각자의 글에서 보여준 놀람과 두려움, 분노와 결의, 기쁨과 사랑, 그리고 고민과 통찰, 다짐이 󰡔황해문화󰡕 구성원인 우리들이 함께 경험했던 그것이었으며, 우리가 묻고 찾으려고 했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독자들 역시 51명의 시민들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와 비슷한 감동과 통찰, 고민과 다짐을 얻게 될 것이다.

 

세 가지 과제

 

이번 특집호에 수록된 시민들의 글을 하나씩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이번 사건, 한국 현대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될 이번 정국에서 세 가지 과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공화주의의 문제다. 우리의 생각이 얼마간 일리가 있다면, 해방 80년을 맞이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헌정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그것은 불과 7년 사이에 두 차례의 탄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드러날 뿐만 아니라, 헌정의 주요 세력 중 하나가 헌정 자체를 부인하고 파괴하려는 시도를 공공연히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그것은 지난 2017년 탄핵에 힘입어 집권한 정권이 스스로를 촛불 정부로 자처하면서 국민 주권에 기초를 둔 새로운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어가겠다고 다짐을 했으면서도 5년만에 허무하게도 탄핵의 심판을 받았던 그 세력에게 도로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번 탄핵 정국을 새로운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크나큰 착각과 단견이 될 수 있음을 잘 말해준다.


그렇다면 현재의 헌정 위기를 딛고 우리가 새롭게 구축해야 할 민주주의 공화국의 토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여러 사람이 공화주의에서 찾지만, 대개의 경우 그러한 공화주의는 내용이 막연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공화주의를 되풀이하는 것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어떤 공화주의가 새로운 헌정의 토대를 제시해줄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을까? 이것이 우리가 제기해야 할 첫 번째 질문이다.


두 번째는 서로가 서로의 외로운 투쟁에 대한 증인이 되었던 시민들의 집회와 시위, 특히 남태령 대첩에서 볼 수 있었던 상호증언의 연대를 어떻게 지속적인 한국 민주주주의의 동력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나는 소수자들 간의, 을들 간의 이러한 연대가 엄밀한 의미에서 아나키즘의 특성을 지닌 운동이라고 이해한다. 아나키즘이라고 하면 국내에서는 부정적인 인식의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적극적인 전유의 대상이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남태령 대첩 등에서 볼 수 있는 을들의 연대, 서로가 서로의 투쟁에 대한 증인이 되는 연대라는 의미에서 상호증언의 연대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연대를 철학적으로 제일 잘 표현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나키즘이다. 그리고 이때의 아나키즘의 의미는 바로 아르케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 아나키즘anarchism의 어원 자체가 an + arche, 아르케 없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나키즘의 핵심을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


이 경우 아르케 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과두제적인 지배와 복종, 위계적 질서 없는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렇게 본다면 아나키즘은, 생태주의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인권운동에 가장 부합하는 사상적 이념이다. 공생, 돌봄, 자율, 연대 등이 바로 아나키즘을 지탱하는 기본 이념들이며, 이는 곧 남태령 대첩을 비롯한 을들의 연대의 기본 정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아나키즘 운동은 깊은 트라우마를 경험했으며, 오늘날 스스로 아나키즘을 표방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장 빈곤하고 모욕당하고 배제되고 차별받는 이들이 전개하는 투쟁들, 예컨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투쟁이나 성소수자들의 투쟁, 재난 참사를 경험한 유가족들의 투쟁, 이주노노동자들의 투쟁, 농민들의 투쟁이나 밀양 탈송전탑 탈핵 투쟁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역시 이러한 트라우마를 경험해왔다. 그 트라우마의 핵심은 그들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그들의 투쟁을 인정하지 않고, 그 투쟁의 가치와 중요성을 공감하지 않았다는 점, 따라서 그들만이 외롭게 자신들만의 투쟁을 전개해왔다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남태령 대첩을 비롯한 이번 탄핵 정국의 여러 집회와 시위에서 그동안 서로 외롭게 투쟁을 이어가던 사람들이 이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의 투쟁을 자신의 투쟁으로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아르케 없는 삶, 과두제적인 지배와 복종, 위계적 질서에 휘둘리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을들이 스스로 입증한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였으며, 51명의 시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를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광장에서의 한때의 좋았던 경험으로 한정하지 말고, 어떻게 우리의 헌정 질서 내로 기입할 수 있을까? 그것이 우리가 사고해봐야 할 두 번째 질문이다.


세 번째는 민주주의의 사회적 토대에 관한 문제다. 이번 특집호에 수록된 51개의 글에서 각각의 필자들은 저마다 자신이 활동하는 영역에서 제기되는 긴급한 문제를 전하고 있다. 그것은 이주노동자가 처해 있는 차별과 착취의 이중적인 고통의 현실이기도 하고,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부자유와 차별, 위계화의 문제이기도 하며, 수도권 이외의 지역 시민들이 처해 있는 지방 소멸 및 식민화의 공포스러운 경험이기도 하다. 또한 참사 피해자들이 겪어야 하는 다중적인 고통, 성 소수자들의 핍박받는 삶, “건폭으로 몰리는 건설 노동자들의 억울한 처지이기도 하고, 점점 더 극우화되는 개신교 목회자의 고민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들 중 많은 것은 우리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사회적 인프라 및 법적규범적 토대와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토대를 잠식하는 과두제 지배가 관철되는 영역이 바로 이것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새로운 공화주의가 빈 말에 불과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고민하고 개혁해야 하는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권두언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 결과 여부에 따라 2달 이내에 조기 대선이 실시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문제의 종결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을 유념하는 일이다. 우리가 비상한 헌정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을들이 전하는 연대의 증언들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번 특집호가 그 작업에 얼마간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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