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의 민주주의> 발표에 대한 후기

 

 

지난 금요일 국제비교한국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던 증언의 민주주의발표문에 관해 후기 겸 해서 몇 마디 덧붙여둡니다.

 

이번 󰡔황해문화󰡕 봄호는 광장에서 현장으로!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을 주제로 51명의 시민들의 원고를 받아 전권 특집호로 꾸몄습니다. 발표문에서도 두 편의 글을 인용한 바 있듯이 51명 시민들의 원고 한 편 한 편이 모두 소중하고 뜻깊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는데, 지난 금요일 발표와 관련하여 또 한 편 더 눈에 띄는 원고가 있었습니다. 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활동가의 원고인데, 이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시민  정의가  다시  쓰이고  있다모든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라는    누구도배제하지  않는  민주주의가  되었고광장의  주체는  ‘국민이나  ‘민중  것이  아닌  ‘시민들이  되었다지금까지의  투쟁을  ‘국민’  혹은  ‘민중  것으로  바꾸었을    퇴색되는  맥락과 의제들을  생각해  보자광장의  나온  시민들을  일컬어  민중이라  부를  수는  있겠으나시민의  의미가  재정의되는  만큼  민중의  의미도  좁혀지고  있지  않은가누구도  광장에  나온  시민들만이  평등한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투쟁이  민중에  의한민중을  위한  투쟁이  된다면  배제되는  이들과  놓치는  의제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대목에는 의미심장한 철학적 쟁점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활동가의 문제의식은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청소년을 다른 시민들이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하지 않고,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집회에 참가한 것을 <기특하게> 여기는 태도에 대한 비판입니다. 청소년 시민을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해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미성년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식민주의>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겠죠. <보호>의 대상으로만 간주되고 자율성과 평등이 유예되어 있는 존재자니까요. 그런 점에서 보면 청소년만이 아니라 어린이 인권과 시민권을 어떻게 다시 사고하느냐는 민주주의의 핵심 의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두 번째 문제의식은 광장에서 연대하고 하나됨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도 중요하다는 것이죠. 다른 인권활동가들에게서는 잘 볼 수 없는, 청소년 활동가의 고유한 문제의식인데요, 저는 이 문제의식이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봅니다. 12.3 친위쿠데타 이후 2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이번 정국의 철학적 쟁점을 잠정적으로 세 가지의 철학적 관점 사이의 트릴레마 또는 이율배반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하는 주제로 문제화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세 가지 관점이란 1) 아나키즘 2) 공화주의 3) 사회주의입니다.

 

1) 아나키즘 모먼트

 

이번에 "남태령 대첩"을 계기로 특별히 주목하게 된 것이 바로 <아나키즘>인데요, 사실 아나키즘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인식의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적극적인 전유의 대상이 되지는 않죠. 하지만 제가 볼 때 남태령 대첩 등에서 볼 수 있는 소수자들의 연대, 저는 그것을 서로가 서로의 투쟁에 대한 증인이 되는 연대라는 의미에서 <상호 증인의 연대> 내지 <서로 증인의 연대>라고 보르고 싶은데요, 이러한 연대를 철학적으로 제일 잘 표현해줄 수 있는 게 바로 아나키즘이라고 봅니다. 이때의 아나키즘의 의미는 바로 <아르케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사실 anarchism의 어원 자체가 an + arche, <아르케 없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나키즘의 핵심을 이렇게 풀이하는 게 적절하다고 봅니다.

 

이 경우 <아르케 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과두제적인 지배와 복종, 위계적 질서 없는 삶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죠. 그렇게 본다면 아나키즘은, 넓은 의미의 인권운동에 가장 부합하는 사상적 이념이라고 봅니다. 여기에는 생태주의도 포함되겠죠. 공생, 돌봄, 자율, 연대 등이 바로 아나키즘을 지탱하는 기본 이념들이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소수자 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하는 것이 바로 아나키즘이야, 이렇게 말해주면 뚱한 반응을 보일 때가 적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나키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해서 그렇겠죠.

 

[여기에 대해 한홍구 선생이 이런 코멘트를 주셨어요. 사실 의병이나 독립군에는 십대가 아주 많았어요. 그러니 기록도 잘 안 남았죠. 오래 살다 간 사람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기는데, 십대들은 이름도 제대로 몰라요. 그건 기층 민중들도 마찬가지지요. 독립전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분이 10만을 훨씬 넘을 것이지만, 우리가 아는 이름은 천 명이나 될까 ...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란 말로 잘못 번역되면서 많은 오해가 생겼어요. 또 볼쉐비키들이 아나키즘의 잠재력을 두려워 해 많이 오염시키기도 하고요.

 

평화박물관의 초기 모토가 '고통의 연대'였습니다. ]

 

 

제가 작년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책 중 두 권이, 미국의 아나키스트 활동가였던 엠마 골드만의 자서전 [레드 엠마]와 미국의 장애인아자 성소수자이고 유색인종 작가이자 활동가인 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의 [가장 느린 정의]라는 책이었어요. 이 책들을 읽으면서 감동적이었던 게 뭐냐하면, 마르크스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피억압자들, 박해당하는 이들, 요컨대 성소수자라든가 장애인이라든가 하는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 게 아나키스트들이었다는 것이죠. 결국 사회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이들에게 힘을 준 것이 아나키즘이었던 것이죠.



 



























[한홍구 선생의 코멘트. 이런 코멘트에서 잘 드러나는 한홍구 선생의 날카로운 감각을 저는 좋아합니다.^^ 이런 감각은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흥미롭습니다.

 

김수영이 조금만 더 나갔더라면, 혹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이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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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커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그러다가 작년 11월 말에 대구 학술대회에서 <마르크스주의 또는 아나키즘: 카트린 말라부의 최근 저작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나 하면서 집중적으로 읽은 책이 데리다 제자이기도 했던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가 최근에 출간한 아나키즘 정치철학에 관한 책이었어요. [도둑이야! 아나키즘과 철학Au voleur! Anarchisme et philosophie](2022)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은 6명의 현대 철학자(라이너 슈어만, 에마뉘엘 레비나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조르조 아감벤, 자크 랑시에르)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이들의 사상에 얼마나 아나키즘이 깊이 침투해 있는지, 그러면서도 왜 이 사람들이 일관된 아나키즘 철학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는지 분석하는 책입니다. 제가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데, 거기에서 말라부가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증인들이다>라는 말을 해요.

 

이것은 아나키즘이,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이 오랫동안 트라우마를 겪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죠. 그것은 아나키즘이, 아나키스트적인 봉기와 저항, 그리고 아나키스트적인 공생과 돌봄의 공동체가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그것의 발생, 그리고 그것이 발생했음은, 자리를 갖지 못한 트라우마의 경험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누구도 아나키즘이 인정하지 않고 그것의 사상과 투쟁에 정당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증인으로 남아 있단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트라우마의 경험은 굳이 아나키즘만의 문제가 아니예요. 오늘날 스스로 아나키즘을 표방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장 빈곤하고 모욕당하고 배제되고 차별받는 이들이 스스로 전개하는 투쟁들, 예컨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투쟁이나 성소수자들의 투쟁, 재난 참사를 경험한 유가족들의 투쟁, 이주노노동자들의 투쟁, 또는 밀양 탈송전탑 탈핵 투쟁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의 경험도 역시 이런 성격의 경험이라고 봅니다. 농민들의 투쟁도 마찬가지고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증인으로 외롭게 투쟁을 이어가는 것이죠.

 

그런데 이번 "남태령 대첩"에서 서로 외롭게 투쟁을 이어가던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의 투쟁을 자신의 투쟁으로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죠. 이것을 저는 엄밀한 의미의 <아나키즘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따라서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의 관점도 이런 의미의 아나키즘적인 경험을 반영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2) 공화주의적 모먼트

 

그런데 이번 탄핵 정국의 쟁점은 아나키즘으로만 환원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또한 <공화주의적 모먼트>도 존재하거든요. 그런데 전에도 언제 말했던 적이 있지만, 공화주의는 단일한 이념도 아니고 단일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공화주의는 공동체주의에 가까운 우파적인 입장도 존재하고 반면 매우 급진적인 좌파적 관점도 가능하죠. 하지만 국내에서 공화주의나 시민공화주의에 준거하는 이들은 대개, 겉으로는 진보적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매우 전통적인 공화주의적 입장을 채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공화주의는 사실 엘리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관점이죠. 요컨대 이런 공화주의로는 <과두제적 지배>라는 문제를 제대로 해명할 수 없고 거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과두제적인 지배>의 문제를 핵심 쟁점으로 삼지 않으면, 헌정 수호는 그냥 현상유지에 그칠 수밖에 없죠. 2017년 탄핵을 되풀이하는 셈입니다.

 

따라서 공화주의를 재해석하는 과제가 상당히 중요한 또 다른 과제로 제기됩니다. 마침 5월쯤에 아나키즘 학회에서 초청을 받아서 발표를 하기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공화주의에 대한 재해석을 다뤄보려고 합니다. 제 생각은 <아카니즘적 공화주의>가 가능한지, 그러면 어떤 원리, 어떤 제도적 틀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한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사실 제가 10여 년 전에 두 편의 글에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려면 <무정부주의를 제도화>하는 게 필요하고 <무정부주의적 시민권>을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번 기회에 그것을 <아나키즘적 공화주의>라는 관점에서 다뤄보고 싶습니다.

 

[한홍구 선생 코멘트: 아카니즘적 공화주의, 그거 이회영의 문제의식과도 겹친다고 봐요. 이회영은 엄청 근왕주의적이었는데, 고종이 죽자 임시정부 엘리트들의 자리다툼 싫다고 민중으로 돌진해 갔죠. 아나키즘과 공화주의도 문제이지만, 다양한 아나키스트들이 모였을 때 민주적 의사결정이 쉽지 않을 겁니다. 급한 사안에서 연대 가능하지만, 상설적인 조직화에는 어려움, 갈등, 내분, 환멸이 따르겠지요.

 

중국에서도 아나키즘이 매우 강했어요. 아나키즘의 정신이 사라진 적흑논쟁 거쳐 러시아혁명 이후 힘을 잃은 것이 중국공산당의 여러 문제점의 중요이유라고 봤는데, 찾아보니 번역이 안 되었나봐요.

 

https://www.amazon.com/Origins-Chinese-Communism-Arif-Dirlik/dp/0195054547

 

나의 답변: 예 선생님. 아주 적절한 지적이십니다. 그러니까 <아나키즘적 공화주의><공화주의적 아나키즘>은 쉽게 조화를 이루긴 어려운 표현들이죠. 매우 이율배반적이고 딜레마적인 표현들이어서, 한 방에 해결하기는 어려운 다수의 쟁점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탄핵 정국의 쟁점 자체가 이런 딜레마 내지 이율배반을 명료하게 정식화하고 개념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보여요.]

 

이것과 관련해서 좀 미묘한 용어법의 문제도 있는데, 아시다시피 저는 <-을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을의 민주주의>라는 용어도 만들어봤는데요. 전에 장애인 활동가들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이라는 용어를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더라고요. 대신 <마이너><마이너리티> 또는 <소수자>라는 용어를 훨씬 더 애용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더군요.

 

그게 그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전에 언급했던 세 가지 쟁점과 관련해보면, 제가 보기에 <소수자><마이너리티> 같은 용어법을 중시하는 데에는 아나키즘적인 관점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아나키즘의 관점만으로는 <과두제적 지배>라는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어제 발표문에서도 얘기한 바 있지만, <국가 바깥의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과 비슷한 어려움이죠.

 

3) 사회주의의 쟁점

 

그리고 세번째 쟁점이 사회주의의 쟁점이라고 보는데요, 최근 사회운동이나 인권운동에서 <사회주의>의 문제는 거의 논의가 되지 않는 주제이긴 한데, 21세기의 역사적 조건에서 사회주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도, 지구 생태계의 파괴라는 문제도, 페미니즘적인 사회적 재생산의 문제도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고, 대응책을 마련할 수도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21세기의 자본 축적이 더 이상 노동 착취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재생산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죠. 삶 전체의 상품화라고 부를 수도 있겠죠. 우리가 흔히 알고리즘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도 이것의 한 측면이겠고요. 이번 탄핵정국에서 사회주의의 문제가 별로 부각되지도 않고 중요한 쟁점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기저에서는 이 문제와 어떻게든 연동이 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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