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사실들이 폭로되고 다시 여기에 대한 윤석열과 국민의 힘의 대응들이
변화하면서 숨 가쁜 탄핵 정국이 전개되고 있네요.
오늘 윤석열의 <대국민 담화>가 있고 나서 많은 시민들이 분노를 표현했지만, 또 그것을 지지하는
이들도 꽤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두렵고 슬프다는 반응을 보이시더군요.
어떻게 친위 쿠데타를 통해 내란을 시도한 일당에 대해 탄핵을 요구하는 것에 반대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죠.
그런 분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합니다. 내란 세력과 그 동조자들, 그리고 지지자들의 사고와 행위 방식을 보면
같은 나라에 같은 국민으로 살고 있지만, 정말 우리가 <같은> 나라와 살고 <같은> 국민을 이루는 것인지
의심스럽고, 그런 모습에 분노하고 슬프기도 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정도로 놀라거나 무서워하거나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탄핵에 반대하는 세력은
한국 현대사의 유구한 수구 냉전 세력(그 이전에는 친일 세력)이고, 한국 현대사를 보면 이들이 저지른 만행은
훨씬 더 집요하고 잔혹했거든요. 1987년 민주화라든가 1997년 이후 민주당 정권의 등장, 그리고 2016~17년 촛불시위는,
그 이전에 비춰보면 진일보한 측면이 있지만, 한국 현대사 또는 한국의 물질적 헌정의 지배적 세력인 이 수구 냉전 세력을
격퇴하거나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죠. 지금도 이 수구 냉전 세력이 우리 사회, 우리나라의 물질적 헌정의
실질적인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죠.
약간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이제 탄핵에 관해서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게 됐다고 봅니다. 탄핵 정국은
실질적으로 종결됐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탄핵이 가결되든 다음 주에 가결되든, 국회 탄핵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 됐고,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도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여러 차례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개헌입니다. 개헌 정국에서의 싸움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탄핵에서는 일치했던 세력이
본격적으로 분화하고 대립하는 국면이 바로 개헌 정국이거든요. 요컨대 탄핵 운동에서는 <우리 편>인 줄 알았던 세력이
사실은 반대 세력이었구나 하는 것을, 개헌 정국에서는 절감하게 될 겁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탄핵 정국에서는 <우리가 주체구나> 생각했지만, 개헌 정국에 가면 <우리가 졸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우리가 주체구나>, <내가 주체구나> 하는 자부심을 느끼는 데 안주하게 되면, <국민 주권>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국민 주권 패러다임에 만족하는 한, 냉전 수구 세력을 한국의
물질적 헌정에서 제압할 길이 없습니다. <국민>이라는 개념은, 냉전 수구 세력과 민주 평화 세력을 구별하지 않고,
재벌과 노동자를 구별하지 않고, 가부장제 세력과 페미니즘 세력을 구별하지 않아요. 실질적인 세력 관계가 불평등한데,
헌법 자체가 추상적 중립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그 세력 관계가 헌법에서도 관철되게 마련이죠.
사실 그것은 중립 상태도 아닙니다. 헌법 내에 이미 통치와 피통치 사이의 구조적 위계화 원리가 헌정의 작동 요건으로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추상적 중립은 그러한 위계화 원리의 바탕 위에서 유지되는 것이죠. 예컨대
국민 주권은 모든 국민의 평등을 함축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평등이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구조적 분할과 위계 속에서
표현되도록 규범적으로 강제하거든요.
따라서 다각도에서 <국민 주권> 패러다임을 탈구축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번 개헌정국의 핵심 쟁점 중 하나입니다.
사실 <최소주의 개헌>이라는 프레임이 관철되느냐, 아니면 <최대주의 개헌> 프레임이 관철되느냐 하는 것 자체가
근본 쟁점이죠. 십중팔구 앞으로의 정치 일정은 최소주의 개헌의 방향으로 나아갈 겁니다. 최대주의 개헌을 추구해야
하는 세력의 제도적 힘이 극히 미약한 상태에서 그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측면이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최대주의 개헌"운동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고 공론화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그러한 운동 자체가
진보적이고 평화적인, 생태적인 세력을 주체화하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공론장 내에 <최대주의 개헌>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기입해놓으면,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고 그 필요성과 정당성을 느끼게 되면, 언젠가는
그 방향의 개헌이 이뤄질 겁니다. 그게 우리 생애에서는 안 된다고 해도, 언젠가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겁니다.
그게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메시아적 힘>입니다.
어제 현대정치철학연구회에서 오카 마리 선생의 <가자란 무엇인가>에 관한 토론회가 있었는데, 제가 토론회에서 말한
핵심 논지 중 하나는 이런 거예요. 우리가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는 제노사이드에 분노하고 그것을 비판하지만,
그것은 국가와 무관한 개인들로서, 그리고 이런저런 단체들로서 수행하는 일이죠. 국가 자체는 그 제노사이드에 대해
무심합니다. 우리 정부만이 아니라 미국, 유럽 정부가 제노사이드를 비판하거나 저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정부의 힘이 막강한데도 말이에요. 그것은 현재의 국가 또는 정부는 기본적으로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정부이고 국가이기
때문이에요. <국가경쟁력>이야말로 오늘날의 모든 국가의 지상명령이죠. 이 국가경쟁력이 국가 및 정부의 본질을
이루기 때문에, 이 국가경쟁력과 관련성이 떨어지는 문제, 그것을 약화시키는 문제에 대해 국가나 정부는 무심한 것이죠
.그런데 국가나 정부가 <국가경쟁력>에 의거해서 통치하고 대외관계를 맺을수록, 그 국가는 정의상 반인권적이고
반소수자적이고 반민주적이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국가의 이름으로> 또는 <정부의 이름으로>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를
비판할 수 있게 할 수 있는 길은 없는지 그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개인이나 이런저런 단체의 회원으로서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를 비판하고 그것에 분노하는 것은 필요하고 정당한 일인데,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국가 자체, 정부 자체가 인권, 동물권, 생태권, 타자의 권리의 이름으로 행위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100퍼센트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 비중을 높일 수 있게 해야죠. 그것이 개헌운동의 핵심적인 쟁점 중 하나예요.
그러니까 상상력이 중요합니다. 헌법, 개헌에 관한 우리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지배자들의 헌법관, 개헌관에 따라 사고하고 느끼고 행위하니까, 그게 현실적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사실, 미안한 얘기지만, 50대 이상, 특히 남성 지식인들의 상상력은 너무 경직돼서 개헌에 관해 말해봐야
내셔널리즘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서 민주공화국, 능력주의 운운 하는 것 이상 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만큼 젊은 세대, 을들의 목소리가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