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문화]가 120호를 출간하면서 창간 30주년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지난 번에 공지한 바와 같이 3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7월 8일에 개최된 바 있고,
(https://blog.aladin.co.kr/balmas/category/1980?CommunityType=MyPaper&page=2&cnt=544)
이번 호는 심포지엄 발표문과 토론을 중심으로 특집호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번 120호 권두언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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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재난의 시대에 정의로운 전환을 모색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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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문화] 120호를 세상에 내놓는다. 한편으로는 담담하게, 다른 한편으로는 비상한 마음가짐으로.
담담한 마음인 것은, 50호, 100호, 120호가 되었든, 49호, 101호, 119호가 되었든 [황해문화]를 내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가 특별히 다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전 지구적 시각, 지역적 실천”이라는 창간 이래의 초심에 입각하여 우리 사회와 아시아, 더 나아가 지구 전체에 걸친 핵심적인 이론적ㆍ정치적ㆍ문화적 쟁점들을 제기하고, 그에 관한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매호마다 [황해문화]가 일관되게 견지해온 태도라고 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120호를 내면서 [황해문화]는, 비상한 각오를 다지지 않고서는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내재적으로 본다면 [황해문화]는 지난 20여 년 동안 편집위원회를 이끌어 왔던 김명인 편집주간을 비롯하여 김진방, 백원담 편집위원이 물러나고 새로운 편집위원회를 꾸려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1993년 인천을 중심으로 한 지역 계간지로 출발했던 [황해문화]는 세 사람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던 기간 동안 명실상부 한국의 비판적 공론장을 대표하는 잡지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평범한 시민들과 약소자들, 곧 우리 사회 을(乙)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돌이켜본다면 [황해문화]가 첫 발을 내디뎠던 1993년은 전 지구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당시는 100년 넘게 세계를 분할해온 주요 세력 중 하나였던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였다. 또한 당시는 민주화 이행의 기쁨이 민주화 운동 내부의 분열과 패퇴, 수구 보수 세력의 연이은 집권에 따른 좌절감으로 퇴색하던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탈냉전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세계 문명의 창도는 인천을 비롯한 각 지역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통찰은 지난 30여 년 동안 [황해문화]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꿋꿋하게 전진해올 수 있었던 길잡이였다.
그런가 하면 2006년 50호를 발간하면서 [황해문화]는 “이제 성장도 정리도 끝난 포스트 모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세간의 시대인식에 거슬러, 우리에게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근원적 난제들을 인식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음을 명시한 바 있다. 그것은 시대적인 혼돈의 와중에 섣부른 판단과 명령을 내리기보다 그 혼돈의 상황을 직시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불행과 고통과 갈등과 비명”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무라는 [황해문화]의 자세였다.
몇 년 전 100호 출간을 기념하여 열린 심포지엄에서 [황해문화]는 “통일과 평화 사이”에서 ‘황해’의 위상에 대해 질문한 바 있다. 이 질문은 지난 70여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질곡에 빠뜨려온 분단과 전쟁의 엄중함을 기억하면서도 섣부른 통일과 평화에 대한 기대를 경계하기 위함이었으며, 진정한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위해서는 그 주체와 장소, 방법에 관해 좀 더 깊이 숙고해야 함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황해라고 하는 ‘주체’, 곧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지난 근현대를 살아온 주변부의 작은 지역의 시민들이, 황해라고 하는 ‘장소’, 곧 분단과 냉전의 경계이면서 동시에 섬과 섬, 항구와 항구, 지역과 지역을 잇는, 그리하여 하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교류하고 어울리는 곳에서, 황해라고 하는 ‘방법’, 곧 중앙집권적이지 않은 자율적인 변방성, 폐쇄적이지 않은 개방성, 선형적이지 않은 횡단성을 바탕으로 대안적인 통일-평화의 기획을 모색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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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황해문화]는 이전의 편집위원회가 일궈놓은 성과의 무게를 실감하면서, 비상한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편집위원회와 함께 새로운 길을 나서게 되었다. 새로 합류한 장정아, 하남석 두 편집위원 및 앞으로 참여하게 될 다른 편집위원들과 함께 [황해문화]는 지도가 없는 미지의 정글을 탐사하는 심정으로 길을 나선다. 실로 전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자는 창간사의 다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도 우리는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함을 새삼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위기라는 말로는 제대로 형용하기 어려운, 절박하고 다중적인 재난의 먹구름이 현재와 미래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이것이 우리가 120호를 내면서 비상한 각오를 다지게 된 두 번째 이유다). 지난 7월 8일 개최된 [황해문화]120호 기념 심포지엄은 이런 측면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한 발판을 놓는 작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번 120호 특집의 근간을 이루는 심포지엄은 ‘다중재난’과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두 개의 핵심어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작년부터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복합위기’라는 말이 자주 거론된 바 있다. 2022년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에너지와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를 잡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급격하게 금리 인상을 함에 따라 각국 중앙은행도 연쇄적인 금리인상 대열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의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여기에 더해 환율 인상, 금융 불안정, 부동산 가격 하락, 가계부채 문제 등과 같은 다면적인 위험 요인들이 누적되고 있다는 것이 이른바 ‘복합위기’론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복합위기’로 표현되는 이 문제들이 한국 경제와 사회에 적지 않은 부담과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치안’(police)의 관점에서 이해된 위기일 뿐이다. 치안에게는 기존 지배 질서의 안정적인 재생산과 지배 계급의 이익 보장이 최고의 목표이기 때문에, 이를 위협하는 요인들은 모두 무차별적으로 위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치안에게는 인플레이션이나 금융 불안정도 위기이지만 민주화 시위도 위기이고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도 위기다. 지배 계급과 정권은 기존의 질서를 ‘정상적인’ 것으로 규범화하고, 이 질서를 훼손하거나 동요시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탄압하거나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치안이 위기라고 부르는 것들이 많은 경우 진정한 위기들을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언론과 정치권에서 ‘복합위기’라고 부르는 것에는 인류세(anthropocene) 내지 자본세(capitalocene)라는 명칭으로 표현되는 생태적 재난이나 3년여의 시간 동안 진행되어 온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보건 재난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서로 맞물려 있는 이러한 생태적ㆍ보건적 재난은 인류 문명의 토대 자체를 잠식하는 문명적 위기이며 민중의 삶에 심각한 피해를 낳을 수밖에 없지만, 복합위기론에서 이 문제는 방치되거나 배제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이미 지나간 사건으로 치부되고 있으며, 기후위기는 기만적인 ‘탄소중립 녹색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자본 축적의 구실로 전락하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래 전 지구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세월호 참사 및 이태원 참사로 대표되는 사회적 재난들과 더불어, 비정규직 노동자들, 여성과 성적 소수자들, 장애인들, 이주자, 탈북민, 난민 등과 같은 사회적 약소자들이 직장에서, 일상에서 직면해 있는 불안전 재난도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여성가족부 해체’나 ‘노동조합 회계 감사’ 또는 ‘관제 애도’ 같은 에피소드에서 보듯 현 정권은 약소자들을 탄압하거나 배제하는 데 골몰하고 있을 뿐이다. 그 사이에 하루가 멀다 하고 일터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는 전 세계적인 지정학적 변동과 그것이 특히 동아시아의 정세에 미칠 파장 역시 제대로 고려되지 못하고 있다. 대개 ‘신냉전’으로 명명되고 있는 이러한 재편은 군사적ㆍ정치적ㆍ경제적 질서의 전환 흐름 속에서 동아시아에서는 한미일 대 북중러 사이의 대결구도로 가시화되고 있는데, 현 정권이 시대착오적인 냉전 반공주의에 불과한 ‘가치 동맹’의 기치 아래 전개하고 있는 외교ㆍ안보 정책은 이러한 대결을 조장ㆍ강화하고 있어서 군사적 긴장만이 아니라 정치적ㆍ경제적 불안정을 심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전망은 점차 멀어지고 적대적인 대결 구도가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고 이는 다시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악순환의 경로가 고착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러한 재난들의 중심에는, 낸시 프레이저가 말하듯 ‘식인 자본주의’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지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오늘날의 식인 자본주의는 착취에 기반을 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할 뿐만 아니라 ‘제국적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는, 글로벌 남반구와 북반구 사이의 인종적 수탈 및 구조적 불평등의 간극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를 산출함으로써 문명의 기초를 잠식하고, 인공지능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에 입각하여 대중들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을 이용함으로써 오히려 대중들의 사고와 감정, 행동에 대한 정밀한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에서 주목해야 하는 진정한 위기는 치안이 명명하는 ‘복합위기’가 아니라 그것이 은폐하고 배제하는 다중적 재난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재난들이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사실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들을 서로 연결된 다중적 재난들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겪어야 하는 민중들, 곧 을(乙)들의 관점에서 문제를 이해하고 사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지배 세력이 ‘복합위기’나 ‘탄소중립 녹색성장’과 같은 기만적인 프레임을 통해 다중재난의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그것을 오히려 새로운 이윤 획득의 기회로 삼고자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대안적 프레임의 개발을 비롯한 인식론적 투쟁이 수반되어야 하는 과제다.
우리가 ‘다중재난’과 더불어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또 다른 핵심어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의로운 전환은, 다중재난을 몸으로 겪으면서 그것에 맞서고 있는 민중의 관점에서 이러한 재난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진보적으로 전환하기 위한 다중적이고 다면적인 노력의 방향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명칭이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우리는 먼저 돌봄에 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돌봄은 흔히 생각하듯이 어린아이나 노인 또는 환자나 장애인에게만 필요한 서비스 활동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활동이며 더 나아가 자연 생태계의 약탈적인 파괴를 저지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활동이다. 우리들이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며, 또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속적으로 돌봐야 한다. 그것이 생태적ㆍ사회적 연관망 속에 존재하는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돌보고 돌봄을 받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자 각자가 누려야 할 권리이며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다.
자연과 인간, 주체와 객체, 생명과 비생명, 공공성과 사유성, 국민 대 비국민, 남성과 여성, 정상인 대 비정상인 등과 같이 대립적이고 경쟁적인 범주들에 의거하여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을 전환하기 위해 돌봄 개념은 우리에게 어떤 길을 제시해줄 수 있을까? 생태적ㆍ보건적 재난과 불안전 재난, ‘신냉전’의 전개, 디지털 자본주의의 심화는 사회의 공동 이익 및 인류의 공동 생존을 추구해야 할 집합적인 정치적 주체를 해체하여 그들을 서로 상이한 이익 추구를 위해 끝없이 경쟁하는 신자유주의적인 행위자들로 변모시키고 있다. 더욱이 트럼프 시기의 미국에서, 러시아와 동유럽, 중남미에서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부상하고 있는 신권위주의 통치는 강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을들 간의 적대적 갈등을 조장하는 포퓰리즘 정치를 활용하여 약소자 시민들의 권리를 짓밟고 외면함으로써 민주주의 공동체의 기초를 파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을들 간의, 민중 간의 새로운 연대가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우리가 모든 문제는 결국 자본주의로 귀착된다는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러한 질문들을 자본주의에 관한 질문과 연결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해체된 이후 자본주의는 유일하게 가능한 현실적 사회경제 체제로 존립해 왔고 정당화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재난이 직ㆍ간접적으로 자본주의의 비이성적인 광기와 연결되어 있다면, 정의로운 전환의 시도는 자본주의 이후라는 문제, 자본주의를 넘어서라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이전의 사회주의의 시도가 실패로 귀결된 이후,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들을 어떻게 사고하고 실천해볼 수 있을까? 어떻게 지금까지 제시되었던 자본주의의 대안들에 대한 새로운 대안들을 모색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계 문명을 구성할 수 있는 길을 우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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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호 심포지엄에서는 퇴임하는 편집위원들을 대신하여 백원담 선생이 기조강연을 한 뒤, 6명의 발표자와 4명의 토론자가 참여하여 이 질문들에 관한 흥미롭고 유익한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1부에서는 홍덕화 선생이 기후위기에 관해, 백승욱 선생이 전쟁과 폭력에 관해, 김관욱 선생은 디지털 자본주의와 노동에 관해 발표했고, 김현우 선생과 한상원 선생이 세 발표에 대한 토론을 맡았다. 2부에서는 김정희원 선생이 돌봄정치에 대해, 장석준 선생이 자본주의 너머에 대해, 김선철 선생이 기후정의운동에 대해 발표했고, 이승윤 선생과 이승원 선생이 이 발표들에 대해 토론해주었다. 아울러 심포지엄 마지막 순서로 발표자와 토론자가 한 자리에서 모여 1부와 2부에서 발표되고 논의되었던 주제들에 관해 다시 한 번 난상토론의 시간을 가진 바 있다. 백원담 선생의 기조강연과 6개의 발표가 이 특집호의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으며, 1ㆍ2부의 토론 및 종합토론 내용을 정리하여 별도의 꼭지로 구성했기 때문에, 독자들은 심포지엄 당시의 생생한 토론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백원담 선생의 기조강연 및 6개 발표의 구체적 내용과 그에 관한 토론은 박자영 선생이 「심포지엄 지상중계」에서 면밀하고 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그 내용을 굳이 다시 한 번 요약하지 않겠다. 다만 각각의 발표 및 토론을 들으면서 내가 느꼈던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황해문화]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화두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 오늘날 [황해문화]를 비롯한 한국의 비판적 인문사회과학 매체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모순들에 관한 논의는 물론이거니와 그것보다 좀 더 토대적인 수준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등장과 같은 사건은 분명 계급적ㆍ인종적ㆍ젠더적인 쟁점들과 결부되어 있되,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기초와 특성을 지닌 사건들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행성으로서 지구 시스템의 물리화학적 특성 및 그 효과에 대한 고찰을 요청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물학적이면서 기술적인 본성에 대한 좀 더 면밀하고 심층적인 토론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자연과학의 고유한 탐구대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인류세라는 개념이 보여주듯, 지구의 물리화학적 시스템에 미친 인류의 행위성(agency)의 충격이 다시 인류 문명의 토대 자체에 파국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오늘날의 시점에서 이 사건들에 대한 고찰을 자연과학자들에게만 미뤄두는 것은, 인문사회과학자들로서만이 아니라 시민으로서도 직무유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빅테크 기업들과 거대 제약(big Pharma) 기업들을 비롯한 초국적 자본과 지배 세력이 미증유의 다중재난을 새로운 자본 축적과 세력 강화의 계기로 삼고 있으며, 이는 역으로 재난을 한층 더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유발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문제에 대한 비판적 숙고의 필요성은 더욱 증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한 토론은 소수의 전문 분야 연구자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의 비판적 공론장의 중심 의제로 제기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보면 [황해문화]를 비롯한 한국의 비판적 매체들은 지난 30여 년 동안 ‘근대 완성’과 ‘근대 극복’이라는, 이른바 ‘이중 과제론’에 긴박되어온 감이 없지 않다. 탈냉전과 민주화의 동시적인 전개라는 비상한 역사적 정세에서 이중 과제론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오늘날 그것이 지닌 인식론적ㆍ역사적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이중 과제론은 한편으로는 근대라고 하는 보편적이고 단일한 본질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각각 민족 통일과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또 다른 이원적 본질로 환원하고 있다. 여기에는 근대를 이해하는 본질주의적 관점에 더하여 민족주의적인 가정이 뿌리 깊게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이미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세를 사고하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한 인식론적 틀로서도 역부족이었을 뿐더러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더 이상 준거하기 어려운 낡은 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다중재난의 엄혹한 현실에 관해 우리가 무언가 확고한 개념적 기반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오늘날의 상황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모종의 확고한 토대나 기반에 집착하는 태도를 버리고, 좀 더 급진적으로 탈구축적인 자세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사회경제적이거나 문화적인 인프라만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이미 거기에 불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우리의 삶과 사고의 근본적 조건이면서도 우리에게는 비사고(非思考)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지구 시스템이라는 물리화학적ㆍ지질학적 인프라의 변동 내지 와해가 목전에 다가온 상황에서, 아울러 오랫동안 인간의 배타적 특성을 나타낸다고 믿었던 인지 능력을 넘어서는 범용 인공지능의 (자본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 실현과 활용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실체와 사물,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명,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무생명 같은 전통적인 사유 범주들에 무비판적으로 의탁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며, 더욱 더 무책임한 일이 될 것이다.
사실 [황해문화]는 몇 년 전부터 ‘21세기 인간의 조건’이라는 연속 기획을 통해 “불안전한 세계, 안전에 대한 욕망”(110호),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112호), “기후위기 시대, 정의로운 전환은 가능한가”(114호), “전쟁, 폭력, 평화”(117호) 같은 주제들을 다룬 적이 있지만, 우리가 당면한 다중재난이라는 문제에 충실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인 분석과 고찰이 수행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둘째, 더 나아가 앞으로 [황해문화]에서는 다중재난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거기에 창발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을들의 생동적인 현실을 분석하는 작업이 좀 더 구체적이고 다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컨대 97호와 101호 등에서 페미니즘과 젠더에 관한 특집을 구성한 바 있지만, 미투운동 이후 활발히 전개된 대중적 페미니즘을 억압하고 되돌리려는 거대한 반(反)페미니즘의 흐름 속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과 성소수자들의 상황을 고려하면, 앞으로 [황해문화]의 페미니즘적인 지향을 더 뚜렷하게 드러내야 하리라고 본다.
아울러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황해문화]에서는 장애인 차별의 현실에 맞서 분투하는 장애인운동의 중요성에 관해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선도적인 투쟁 아래 장애인운동과 비판 장애학 연구는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운동 및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의 주요 부문으로 성장하면서 장애인들의 인권과 복지 향상에 기여하고 장애 개념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인식론적ㆍ사회적 구별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데 크게 공헌해왔다. 이러한 작업은 단지 장애인들에 대해서만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계론적 본성과 사회의 토대를 형성하는 돌봄 연관망의 존재를 일깨움으로써 민주주의 공동체의 존재론적ㆍ인간학적 기초가 무엇인지 성찰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업이다. 앞으로 장애인운동에 관한 인식과 토론은 다중재난을 정의롭게 전환하기 위한 기획에서도 중심적인 위상을 부여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지방ㆍ지역이라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본래 [황해문화]는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 문화 계간지로 출발했으며, 오늘의 시점에서도 인천은 [황해문화]의 뿌리이자 원천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지역과 지방의 문제는 [황해문화]에게는 늘 중심적인 의제로 존재해왔다. 그런데 인천도 사정이 다르지 않겠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서울 내지 수도권과 지방의 관계는 더 이상 ‘격차’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오히려 서울에 의한 전 지방의 식민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다중적인 모순이 착종된 관계로 변모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치ㆍ경제ㆍ문화적 인프라와 권력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으로 집중된 상황에서 지방은 자율적인 생존의 능력을 상실한 채, 수도권의 끊임없는 확장과 축적 운동의 착취와 수탈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실로 오늘날 지방은 고령화와 소멸의 위협 속에서 각종 군사 시설과 핵 폐기물을 비롯한 수도권의 폐기물 투기 지역이 되고 있으며, 이주노동자 및 여성과 성적 소수자들과 같은 사회적 약소자들의 인권과 생존권이 서울 및 수도권에 비해 훨씬 더 취약한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생존을 위한 지역 주민들의 요청은 지역 토호 세력과 권력, 자본의 결탁 아래 무분별한 난개발의 범람으로 왜곡ㆍ변질되고 있는 상황이다. 얼마 전 국제적인 망신의 대상이 된 새만금 잼버리 대회의 기원에 이런 모순이 자리 잡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지방이야말로 오늘날 다중재난이 더욱 가혹하고 집약적으로 누적되는 장소이며, 앞으로도 더욱 더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다중재난의 이 구체적인 장소들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외면한 채 우리가 정의로운 전환을 실제로 모색할 수 있을까?
또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라는 문제, 더 분명히 말하자면 동물 타자의 문제에 앞으로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도 [황해문화]가 역점을 두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페미니즘과 젠더의 문제가 됐든 장애인 문제가 됐든 아니면 지방의 문제가 됐든 간에, 이 문제들은 모두 인간을 중심으로 한 문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지배와 착취의 문제는 예리하게 발휘되는 비판적인 지식인ㆍ전문가들의 지성이 비인간 타자에 관한 문제에는 둔감한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재난의 현실 및 그 원인에는 비인간 타자들에 대한 착취와 수탈, 지배라는 문제가 놓여 있으며, 엄청난 생물종들이 파괴되고 육식 산업은 번창하는 와중에 반려동물 산업 역시 성장하는 모순적인 현실이야말로 비인간 타자와의 관계라는 문제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셋째,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토론이 소수의 전문가 지식인들만의 논의로 국한되지 않고 대중적인 힘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황해문화]가 더욱 더 대중의 시선에서, 그것도 을들의 시선에서 문제를 전달하고 논의하는 장이 되어야 하리라는 또 다른 요구를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두 가지 과제가 얼마간 길항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것은 [황해문화]와 같은 잡지라면 마땅히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막강한 권력과 조직력, 매체력과 자금력을 갖춘 지배 세력에 비해 여러 모로 자원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이러한 과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 앞으로 다양한 방식과 접근법을 통해 대중들과 더 자주 대면하면서 대중들의 창의적인 비평과 발상의 목소리를 더 많이 실으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과제는 동시에 [황해문화]가 앞으로 견지하고 발전시켜야 할 매체성의 방향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지금까지 [황해문화]가 매체로서 이룩한 성과는 분명 주목할 만하고 보람을 느낄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직면한 시대적인 과제는 매체의 내용과 더불어 매체의 물질적 성격 자체에 대해서도 재점검해볼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종이 잡지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디지털 매체로서의 성격을 확장하고 강화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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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문화] 30주년을 축하하고 격려하기 위해, 또한 자만과 나태를 경계하기 위해 여러 분이 귀중한 메시지를 전달해주었다. 중국 칭화대의 왕후이 교수와 타이완 쟈오룽대학의 천광싱 교수는 [황해문화]가 지속적으로 한국과 동아시아의 비판적 공론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희망을 보내주었다. [창작과 비평]의 이남주 주간과 [문화과학]의 이동연 전 주간은 한국의 비판적 공론장을 형성하는 동지적인 관점에서 뜻깊은 격려와 따끔한 조언을 전해주고 있다. 이남주 선생은 30년이라는 시간적 단위의 결절적인 성격을 확인하면서 [황해문화]가 지난 30년의 성취에 대해 자부심을 갖되, 앞으로의 30년을 기약하면서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동아시아의 협력과 상생, 공영을 위협하는 최근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 새로운 사유를 촉발할 수 있는 담론을 개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체적 사유 단위이자 실천 단위가 될 수 있도록” 매진해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또한 이동연 선생은 계간지로서 [황해문화]를 [창작과 비평]과 [문화과학]의 중간에 위치시키면서 “장소, 사람, 사건”이라는 세 가지 지표에 따라 그 특성을 해명하고 있다. 선생은 그러면서 [황해문화]가 이러한 독특성을 계속 견지하면서도 지금까지의 거시적 분석 중심에서 벗어나 “소수자적 정체성과 라이프스타일 분석, 사회적 사건에 대한 미시적인 분석”을 보완하고 아울러 “인천 또는 서해안, 한반도가 앞으로 정치․기술․생태․문화의 교합으로 발생할 수 있는 생태-기술-문화의 미래 토픽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황해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에서 우러나는 두 분의 진심 어린 조언들을 유념하고 구체화할 것을 약속드린다.
[황해문화]의 독자인 이희영 선생의 메시지도 특별히 언급해두고 싶다. 선생은 [황해문화]가 그동안 이룬 성과를 상찬하면서 특히 독자들에게 세상을 읽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는 점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황해문화]가 앞으로 “이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젊은 세대를 비롯한 평범한 시민들이 좀 더 접근하기 쉬운 매체가 되어 달라는 요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심은 있으나 당사자성이 부재한 민중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충고이기도 하다. 그것은 [황해문화]가 어떻게 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매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민중의 당사자성을 체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드는 아주 서늘한 요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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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는 특집호인 관계로 “비평”과 “문화비평” 꼭지는 쉬어간다. 애독자들의 양해를 부탁드린다. 다만 문학과 서평에서는 여전히 좋은 글들이 독자들의 높은 안목을 만족시켜 줄 것이다. 구로와 청계천을 배경으로 80년대 노동운동의 기억을 오늘의 시점과 교차하여 풀어나가는 김남일 작가의 소설과 문명과 역사, 정치, 철학, 문학을 넘나드는 김정환 시인의 시와 더불어 이세기 시인과 연여름 시인의 시는 문학을 사랑하는 [황해문화] 독자들에게 청량한 읽을거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아울러 이번 호 황해문화 창작공모제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작품이 응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작품 수준이 뛰어났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주제서평과 서평에서는 여느 호와 마찬가지로 주목할 만한 저작들에 대한 유익한 논의다. 우동현 선생은 얼마 전 국내외에서 큰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 문제를 배경으로 핵 폐기물 투기의 역사를 조망한 세 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선생은 1944년 처음 시작된 핵 폐기물 투기는 일관되게 핵 재난 속에서 이익만을 추출하고 그 비용은 사회와 자연에 전가해온 권력과 자본, 과학의 결탁의 역사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중재난을 주제로 한 이번 특집호의 기획의도와 잘 부합하는 서평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박영균 선생은 신유물론에 관한 박준영 선생의 저작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사회적 관계의 유물론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을 조언하고 있으며, 구정은 선생은 구기은 선생을 비롯한 11명의 신진 중동학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지은 노작의 중요성을 꼼꼼하게 설명하면서 이슬람과 민주주의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만한 저작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하고 있다. 주윤정 선생은 나날이 확정되어가는 한국 인권운동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정리한 정정훈 선생의 저서 [인권의 전선들] 서평에서 한국 인권운동에 대한 풍부한 시각을 보여주는 동시에 보다 다양한 인권의 전선들을 형성하기 위해 우리 역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권리운동의 역사도 함께 살펴봐줄 것을 당부한다. 그런가 하면 김도민 선생은 백지운 선생의 항미원조에 관한 저작을 공공역사의 관점에서 세심하고 균형 있게 평가하고 있다. 좋은 서평은 그 자체가 독자적인 텍스트라는 점을 실감하게 해주는 서평들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작고한 한국 민족사학의 거장인 강만길 선생에 관한 추모글을 제자인 정병욱 선생이 보내왔다. 선생은 강만길 사학의 업적을 분단시대라는 개념을 창안한 것과 민중의 생활사 연구를 개척한 것으로 꼽으면서, 스승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것에 강만길 사학의 핵심이 놓여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 호에서 독자들이 놓쳐서는 안 될 김명인 선생의 글에 관해 몇 마디 언급해두고자 한다. 「전향한 남조선노동당원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얼마간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글은 최근에 발굴된 김수영 시인의 1949년 일간신문 게재 ‘탈당성명서’에서 출발하여 김수영의 생애와 문학 전반을 재고찰하려는 주목할 만한 비평의 시도다. 김수영의 탈당성명서는 제대로 발견하기도, 판독하기도 어려운 신문 광고란의 불과 몇 줄짜리 조각글에 불과하지만, 선생은 이것을 기반으로 김수영 문학 저변에 깔려 있는 사회주의의 이상에 대한 열망을 재구성하면서 더 나아가 김수영의 문학을 비롯한 한국 근현대문학은 검열과 강제전향의 굴레 아래에서 문학의 본령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의 장이었음을 밝혀내고 있다. 앞으로 선생의 이 글에 대해서는 김수영 문학의 재평가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문학의 성격에 관한 재고찰이라는 측면에서도 많은 토론이 뒤따라야 마땅하리라 생각한다. 투병의 와중에 이런 문제작을 발표한 선생의 지성과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부디 빠른 시일 내에 완치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