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과학] 가을호에 실릴 글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은 지난 4월 4월 15일 이 글은 2023415일 장애인 권리예산 투쟁에 연대하는 마포-신촌 학술단체 모임 학술 토론회에서 발표한 강연문을 다소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이 글은 강연의 생생한 현장성을 살리기 위해 경어체 표현을 그대로 살렸는데요, 사실 이런 글쓰기는 [문화과학]의 편집 원칙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꺼이 원고를 받아준 [문화과학] 편집위원회의 후의에 깊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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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으로서의 장애, 관계로서의 돌봄

 

 

머리말

 

우선 발표에 앞서서 오늘 이 자리를 가능하게 해준 두 분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장애인 차별 철폐를 위해 앞장서 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으로 약칭)의 헌신적 투쟁 덕분에 저는 조금이나마 우리나라 장애인 차별의 문제에 대해, 그들의 고통에 대해, 그들의 열망과 투쟁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 차별과 억압에서 드러나는 국가권력의 폭압성에 대해, 사회적 차별과 배제의 뿌리 깊음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따라서 그것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이 우리 시대 민주주의적 실천의 본질을 이룬다는 데 대해 얼마간이나마 깨닫게 된 것 역시 전장연의 투쟁 덕분입니다. 따라서 전장연의 투쟁을 이끌어온 박경석 공동대표님께 이러한 각성의 기회를 주신 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김도현 선생님께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도현 선생님은 저와 같이 장애인 운동 바깥에 있고 또한 장애학 운동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는 장애인 운동과 장애학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비판적 장애학이 단지 당사자들로서의 장애인들만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의 광범위한 관심사가 되고,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 사이의 연대와 횡단의 정치를 모색하는 데 준거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많은 부분 김도현 선생의 부단한 노력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이 제도권 학계 바깥에서, 장애인 운동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이런 성과를 일궈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제도권 내의 장애학만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제도권 인문사회과학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증상으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몇 마디 해보려는 것이 두 분을 비롯한 전장연 활동가들 및 비판적 장애학 연구자들의 가르침에 얼마나 부응하는 것일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제가 과연 오늘 학술대회의 기조강연자로서 적절한지, 그럴 만한 자격과 역량을 지니고 있는지에 관해 아마 많은 분들이 의아해하실 듯합니다. 저 역시도 과연 제가 저에게 부과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저 자신이 별로 미덥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오늘 여러분에게 몇 마디 전해보고자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제가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마포-신촌 학술단체 모임의 동료들에게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투쟁에 관해 무언가 지지와 연대를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던 첫 번째 발언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 제안을 여러 동료들이 흔쾌히 받아주었고, 뜻을 함께 하는 연구자들이 속속 참여하게 되어 '장애인 권리예산투쟁에 함께 하는 마포-신촌 지역 학술단체 모임'이 결성되었습니다. 저희는 먼저 일간지에 전장연의 지하철탑승투쟁 및 권리예산투쟁에 대한 저희의 지지와 연대의 뜻이 담긴 공동 선언문을 게재하기로 하고 모금 및 지지 서명 활동을 전개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 학술대회를 기획하고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제가 첫 번째로 발표를 하게 된 것은, 그것이 이 모임의 최초 제안자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책무를 제가 어느 정도나 수행한 것이 될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보편을 정의하는 역량으로서의 해방

 

보시는 바와 같이 오늘 학술대회의 전체 주제는 역량(capability)으로서의 장애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 발표의 핵심 주제 중 하나 역시 역량입니다. 제가 발표문의 제목을 생각하면서, 아니 그 전에 마포-신촌 지역 학술단체 모임의 공동 성명서 초안을 만들면서 역량이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존 맥나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 김도현 선생의 {장애학의 도전}을 읽은 이들이라면, 본문 맨 앞에 제사(題詞)로 인용되어 있는 이 문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2009.] 2017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캐치프레이즈였던 이 문구는 어떤 의미에서 장애가 역량인지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역량이란,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뜻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불화: 정치와 철학}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몫 없는 이들의 몫으로 정의하면서, “몫 없는 이들의 몫의 설립에 의해 지배의 자연적 질서가 중단될 때 정치가 존재한다”[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5, 39.]고 말하면서 염두에 둔 것도 이러한 통찰과 다르지 않습니다.


맥나이트의 정의는 우리에게 몇 가지 점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제시해줍니다. 우선 철학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보편성이라는 것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더욱이 보편성의 사회적 구성은 조화롭게, 아무런 갈등이나 다툼도 없이 누구나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중립적인 기준이나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갈등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보편성은 그것의 성립 조건으로서 적대와 폭력을 함축합니다. 새롭고 진정한 보편성이란, 아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 문제가 드러날 때, 지금까지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 문제로 출현할 때 시작됩니다. 곧 지금까지 누군가에 의해 문젯거리로 여겨졌던 이들, 다른 이들과 평등한 이들로 간주되지 않고 무언가 부족하거나 비정상적인 이들로 여겨지고, 차별과 종속의 대상이거나 배제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이들이, 이런 취급은 부당하다고, 나 또는 우리는 비정상적인 것도 열등한 것도 아니며 차별과 종속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고 나설 때 진정한 보편성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편성은 본질상 적대를 함축합니다. 기성의 보편성의 허구성과 지배적 본성을 드러내면서 상징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적대적 행위가 보편성의 한 가지 척도를 이룹니다.


랑시에르는 {불화}에서 이점에 관해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진정한 인간, 진정한 시민이란 오직 귀족들뿐이었습니다. 그들만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재산(여기에는 노예들이 포함됩니다)을 지니고 있었고, 일을 하는 대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원과 기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평민들은 형식적인 자유를 지니고 있긴 했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동을 수행해야 했고, 정치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원과 여유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시민으로도, 진정한 인간으로도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자유는 불평등했으며, 귀족들만이 실질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자유는 불평등의 조건 속에서 향유되었습니다. 그리스나 로마의 평민들이 여기에 맞서 자유는 불평등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평등의 징표를 나타낸다고 주장하고 나섰을 때, 자유로운 이들은 평등을 누릴 자격이 있으며, 역으로 평등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될 경우에만 자유는 현실적으로 향유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비로소 자유는 평등의 다른 표현이 될 수 있었으며, 만인의 평등한 자유를 위한 정치로서 민주주의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시민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새롭게 수립한 해방의 사건이었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곧 자기 자신과 자식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무산자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자신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인간이고 평등한 시민이라고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다시 한 번 민주주의가 새롭게 구현되고 확장되었습니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평등의 3단논법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삼단논법의 대전제는 간단하다. 1830년에 막 공포된 헌장 전문에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적혀 있다. 이 평등이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된다.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즉각적인 경험에서 이끌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1833년에 파리의 재단사들은 양복점 주인들이 급료, 노동 시간, 일부 노동 조건들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업을 시작했다. 따라서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전개될 것이다. 그렇지만 양복점 주인 슈바르츠 씨는 우리의 근거들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그에게 급료를 재검토해야 할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근거들을 그는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검증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평등한 자들로 대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그는 헌장에 기입된 평등에 위배된다.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4, 89.]

 

해방의 삼단논법이 구성되려면 먼저 대전제가 성립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삼단논법에서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전제, 곧 보편적인 평등 전제가 헌법에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본질적인 중요성을 얻게 됩니다(그리고 이러한 기입 자체가 투쟁의 성과입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 헌법에서 내세우는 평등의 원리란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계급적 불평등을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고발한 바 있지만, 랑시에르가 볼 때 이는 19세기의 노동자들이 실제로 생각하고 실천했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당시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국가가 스스로 내세운 보편적 평등의 원리를 대전제로 삼아 그것을 위반하는 부르주아 주인의 행태(소전제)를 비판하면서, 결론적으로 자신들을 보편적 평등의 원리에 따라 실제로 평등하게 대우하라고, 사장과 동일한 인간이자 동일한 시민으로서 존엄하게 대우하라고 요구하면서 투쟁한 것입니다. 이것도 다시 한 번 인간과 시민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새롭게 제시하는 해방의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1849년에는 잔 드루앙(Jeanne Deroin) 같은 여성이 남성들에 대해,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과 시민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쇄신한 바 있습니다.[잔 드루앙에 대해서는 또한 조앤 스콧, {페미니즘 위대한 역사}, 공임순이화진, 최영석 옮김, 앨피, 2017 3장 참조.] 이것은 식민지 해방투쟁을 전개했던 이들에게도, 흑인 및 유색인종의 인권과 시민권을 위해 투쟁했던 이들에게도, 그리고 오늘날 미등록 이주자 및 난민의 권리,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종속적이고 열등한, 심지어 비정상적인 존재자라는 낙인이 찍힌 가운데 차별과 억압, 배제를 감내하기보다는 그러한 낙인찍기와 차별에 맞서 투쟁하고, 이러한 투쟁을 통해 자신들에게 부과된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인간과 시민의 지위를 철폐할 수 있을 때, 해방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해방의 사건만이 보편성을 새로 정의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닙니다.

 

인간과 시민을 새롭게 정의하는 역량으로서의 장애

 

전장연을 중심으로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의 장애인들이 전개해온 투쟁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해방의 사건이었고, 그들 덕분에 한국 사회와 많은 비장애인들은 인간과 시민에 대한 진정으로 보편적이고 진보적인 정의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전장연의 투쟁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줍니다. 그들은 우선 비장애인들에게 장애라는 범주를 다시 사고해보도록 촉구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장애인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 존재자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들은 우선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손상을 지닌 존재자이며, 이로 인해 다른 정상인들과 구별되는 비정상적인상태에 있는 존재자, ‘정상인들이 보통 할 수 있는 이런저런 일들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존재자, 따라서 역량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자이고(disability), 결국 다른 정상인들에 비하면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 핸디캡을 지니게 되는 존재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우리 사회에서만 오랫동안 통용된 것이 아닙니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세계보건기구가 1980년에 제시한 바 있는 장애에 관한 국제적인 정의(ICIDH)의 핵심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의료적 장애모델에 입각해 있는 이러한 장애인 범주에 맞서, 전장연은 문제를 다르게 사고하자고,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요컨대 장애인들의 능력 부족의 원인으로 제시되고, 따라서 차별적인 대우와 배제의 논거로 기능하는 정신적신체적 손상이라는 것이 차별과 배제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손상은 오직 일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차별과 배제를 산출하고, 이로써 장애인을 무언가 열등하고 비정상적인 존재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장애를 장애로 만드는 것은 바로 사회적 관계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동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이런저런 이들이 겪고 있는 신체적 장애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신체적 장애를 지닌 이들이 그 장애의 조건과 관계없이 충분히 편리하고 만족스럽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 인프라(엘리베이터, 저상버스 및 도보 편의 시설 등)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정신적, 신체적 손상으로 인해 의사소통에서 장애를 겪는 이들이 제대로 소통을 할 수 없다면, 그것 역시 그들의 손상 자체가 원인이라기보다는, 그런 손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충분히 만족스럽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통 인프라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이 만인의 평등한 자유라는 보편적 원리에 입각해 있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부합하는 사고방식이고 실천일 것입니다. 이런저런 정신적, 신체적 손상을 지닌 이들은, 그런 손상을 지니지 않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곧 그들과 동등하게 인간과 시민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이 실질적으로 향유될 수 있도록 관련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 및 지자체, 공무원들의 행정적인 돌봄의 의무일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시민들이 공유해야 할 정치적 의무일 것입니다. 다른 동료 인간과 시민(더욱이 매우 많은 수의)이 심각한 부자유와 불평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나 또는 우리가 자유와 평등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기만일 뿐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민주주의적인 시민으로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특권적인 존재자로서, 지배자 내지 권력자로서 사고하는 것이며, 그것 자체가 갑질의 한 방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과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구별 자체가 타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만약 이런저런 정신적신체적 손상을 지닌 이들을 장애인이라고 부른다면, 과연 우리들 가운데 장애인이라는 범주에서 자유로운 이들이 누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컨대 저는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안경이 없다면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상적인 도보가 어려울 만큼 시력이 심각하게 좋지 않습니다. 지난 두 달 동안은 목 디스크에 걸리는 바람에 제대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있는 일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론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약한 정도의 신체적 손상일뿐더러 영구적이거나 장기적인 손상이 아니라 일시적인 손상일 뿐이기 때문에, 장애와는 구별되는 것이라고.


좋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시각을 넓혀서 사람의 일생을 생각해봅시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 상당한 기간 동안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장애를 지닌 채 살아가게 됩니다. 엄마나 아빠, 또는 주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제대로 눕지도 앉아 있지도 못하고, 영양분을 공급받거나 대소변을 해결하기도 어렵습니다. 그 시기를 지난다고 해도 우리가 마냥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먹고 입고 자는 것을 도와주어야 하고, 공부하는 것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가 스스로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무인도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나 아니면 인기 티브이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혼자서 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서는(하지만 그들의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삶이며, 많은 이들의 돌봄 속에서만 인간은 인간답게, 그리고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 끼 밥을 차려주는 이들, 청소와 빨래 같은 가사일을 해주는 이들, 교통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 환경 미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한 사람의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에는 식생활이 개선되고 의료 서비스의 질이 향상됨에 따라 평균 수명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장수를 누린다는 것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재앙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적어도 새로운 문젯거리의 출현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신체와 정신이 쇠약해지면서 여러 가지 질병을 겪게 되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더욱 많은 의료 서비스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오면서 특별한 정신적, 신체적 손상을 겪지 않았던 이들도 노년이 되면 불가피하게 다양한 형태의 손상을 겪게 됩니다. 말하자면 노년기에 접어들게 되면 누구나 이른바 장애인들이 되는 셈입니다. 평균수명이 80세를 훌쩍 넘기고 주변에서 90세가 넘은 어르신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우리 시대는 어쩌면 (대표적으로 치매나 암, 각종 뇌질환 및 신경 질환 같은) 장애 문제의 보편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일생의 더 많은 부분을 정신적, 신체적 손상 및 장애와 더불어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른바 노년학”(gerontology)이라고 하는, 새로운 학제 연구는 장애학과 많은 부분에서 중첩되는 쟁점들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범주는 사실은 우리 일생의 특정한 시기, 곧 청년기와 장년기 같은 시기를 추상해서 만들어낸 추상적 범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더욱이 우리가 청년기와 장년기에도 이런저런 정신적, 신체적 손상과 장애를 자주 경험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과연 나는 온전한 비장애인이다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특정한 정신적, 신체적 손상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만을 장애인들로 분류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이들을 차별하거나 억압하는, 심지어 배제하는 것은 더욱 더 정당성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들을 비정상적인 존재자로 분류하고 차별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정상성을 특권화하는 비장애인이라는 범주 역시 정당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장애의 문제는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통적인 문제가 되었으며, 인간을 규정하는 보편적인 특성이 되었습니다.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에게 이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양태로서의 인간: 스피노자의 교훈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에 관해 다시 한 번 성찰해보게 됩니다. 이처럼 장애라는 것이 특정한 부류의 개인들 및 집단에게만 고유한 특성이나 현상이 아니라, 우리 인간(및 동물, 더 나아가 생명체 일반)이 보편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특성임에도, 우리는 왜 장애라는 것을 특수한 개인들 및 집단들에게 고유한 문제로 여기게 되었고, 왜 장애학이라는 학문을 장애인들이라고 불리는 특수한 이들에 관한 특수한 학문이라고 간주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철학도로서 생각해본다면, 서양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전승되어온 인간의 본질에 대한 특정한 개념화가 주요한 이유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체’(subject)라고 하는 것을 토대로 삼고 있는 서양 근현대철학, 그리고 이 철학들에서 제시되는 표준적인 인간에 대한 관점이 장애를 특수한 문제로 간주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꽤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 학자들은 서양 근현대철학에서 제시되어온 표준적인 인간, 곧 자율적인 존재자로서의 주체의 모델이 사실은 여성을 근원적으로 배제하는 남성 중심적인 모델이라고 고발해왔습니다. ‘인간을 가리키는 영어의 맨(man)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남자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서양 근현대철학, 더 나아가 서양 근현대문명에서는 인간 = 남자로 간주되어 왔고,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열등한 존재자로 치부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여성은 공적인 활동에서 배제된 채 가사일을 전담하면서 아버지, 남편, 자식을 위해 봉사하는 종속적인 존재자의 지위를 할당받아오게 되었고요.


그런데 서양 근현대철학은 여성만을 차별하거나 배제해온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이 철학들에서 제시되는 표준적인 인간으로서의 주체는 당연히 비장애인주체이고, 비장애인으로서의 주체는 자기 스스로 다른 사람의 도움 내지 돌봄 없이 사고하고 활동할 수 있는 존재자입니다. 주체라는 개념의 핵심적인 속성이 자율성으로 정의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주체는 스스로 사고하고 활동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자입니다.


이러한 근대적 주체 개념에 대하여 미국의 철학자이나 퀴어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는 정당하게도 그것이 판타지’(phantasy)라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0] 이것이 판타지 또는 망상인 이유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노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돌봄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고 존속될 수 있는 삶인데 반해, 근대적 주체 개념은 돌봄 연관망이 자립적 개인 내지 자율적주체의 가능 조건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돌봄 활동이라는 것은 특정한 존재자에게만 필요한 특수한 활동이 아닙니다. 자율적인 존재자로서의 주체는, 오직 타자들의 돌봄 속에서만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존재자로서 살아가고 사고하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돌봄은 자율성 및 자립성의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그것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경험한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제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어느 계간지의 편집회의에서 특집 주제로 돌봄의 문제를 다뤄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안에 대해 어떤 편집위원은 아니, 노인이나 장애인 같은 사람들을 돌보는 활동이 어떻게 특집 주제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지엽적인 문제라는 것이죠. 버틀러의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전형적인 서양 근대 철학의 판타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더욱이 매우 남성 중심적인 시각일뿐더러, 신자유주의로 표현되는 주류경제학적인 시각입니다(반드시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이런 시각에서 보면 돌봄은 특수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지엽적인 활동일뿐더러, 돌봄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적절한 서비스 비용을 치러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정상적인 주체로서의 대다수 비장애인들 시민에게 돌봄은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 아닐뿐더러, 만약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각자 필요한 만큼, 그리고 능력만큼(요컨대 돈이 있는 대로)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앞에서 말했던 것이 얼마간 타당성이 있다면, 이런 시각은 의료적 장애 모델에 입각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주체에 관한 전통주의적 시각, 곧 남성 중심적이고 주체 중심적인 판타지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시각일 뿐입니다.


서양근현대철학이 이처럼 자율적인 존재자로서 주체 내지 개인에 관한 판타지를 포함하고 있다면, 스피노자는 이러한 철학사의 흐름에서 상당히 예외적인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한 유한한 존재자를 실체로 간주하지 않고 양태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피노자 철학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바와 달리 실체(substance)의 철학이 아니라 양태(mode)의 철학, 양태의 존재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까지, 그리고 데카르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 전통에서 존재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실체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때 실체라는 범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따르면, 주어의 지위를 갖는 존재자들, 곧 자립적인 존재자들을 가리킵니다.[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존재자들을 바탕이 되는 것또는 기체”(基體, hypokeimenon; substratum)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는 것들”, 곧 속성을 구별한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보면 주어와 술어의 구별로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들], {범주들명제에 관하여}, 김진성 옮김, 그린비, 2023, 2.] 또는 {형이상학} 7권의 설명에 따르면 실체는 첫 번째로 있는 것”(proton on)을 의미합니다. 실체는 있음의 측면에서도 첫 번째이고 논리적 측면에서도 일차적이며 앎의 측면에서도 우선한다는 것이죠.[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조대호 옮김, 도서출판 길, 2007, 1028a 14 이하.] 또한 데카르트에 따르면, 실체는 실존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르네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원석영 옮김, 아카넷, 2002, 151.]을 의미합니다. 신이 당연히 실체의 범주에 속하겠지만, 정신과 물체 역시 신을 제외하면 실존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실체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하죠. 무한 실체인 신만이 엄밀한 의미의 실체라고 할 수 있으나, 유한한 존재자인 정신과 물체 역시 일종의 실체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칸트 이후의 서양 근현대 철학에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식과 실천의 중심을 주체라는 명칭으로 불러왔습니다. 이때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자로서의 개인 주체(따라서 실체로서의 사물들과도 구별되는 것)이며, 집합적인 의미의 주체는 이것을 모델로 하는 것입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한 존재하는 이런저런 사물들을 실체가 아니라 양태라고 정의합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양태의 라틴어 원어는 모두스(modus)인데, 이것은 원래 척도라는 뜻 이외에도 방식이나 태도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래 모두스라는 용어는 어떤 실재나 사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그 사물의 모양이나 존재방식, 행위방식 등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양태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있는 책상이나 의자, 건물, 나무, 그리고 지구 전체도 양태이며, 더 나아가 관념과 정신 역시 하나의 양태입니다. 그러면서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의 3에서 실체를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하에서 󰡔윤리학󰡕의 인용은 모두 필자 자신의 번역이다.]이라고 정의하고, 정의 5에서는 양태를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실체와 양태에 대한 두 개의 정의의 내용이 서로 대조를 이루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실체가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존재자를 가리킨다면, 양태는 기본적으로 타율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자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스피노자에게는 오직 신 또는 우주 전체만이 실체이고,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양태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타율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헤겔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용납하기 어려웠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스피노자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양태라고 규정하면, 인간은 주체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인간에게는 윤리적 실천의 여지도 자유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아직 주체가 되지 못한 실체의 철학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철학은 진정한 의미의 근대 철학에 미달하는 철학이라는 셈입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스피노자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양태라고 규정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근본적으로 상호의존적인 존재자라는 것,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 없이는 성립할 수도 없고 존속할 수도 없는 존재자라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양태의 존재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을 오직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고 실존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관계론적인 시각을 나타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 singular thing)에 관한 스피노자의 정의입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2부 정의 7에서 독특한 실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나는 독특한 실재를,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그런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 간주한다.

 

이 정의는 우선 단수와 복수의 역설적인 결합을 표현해줍니다. 라틴어 싱귤라리스(singularis)는 일상적인 어법에서는 단수의, 단 하나의, 개개의 같은 뜻을 지니며, 명사로는 과부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독특한 실재 내지 단수의 실재 또는 더 일반적으로 개체는, 일상적인 어법과 모순되게도 복수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독특한 실재, 레스 싱귤라리스가 단일하고 개별적인 것인 것, 단 하나의 것으로 성립하기 위한 조건은 다수의 개체들이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하나의 결과를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Jean-Luc Nancy)가 싱귤리에 플뤼리엘(singulier pluriel)이라는 프랑스어 표현을 통해 복수적 단수독특한 복수라는 뜻을 동시에 전하려고 했던 것과 유사합니다(Jean-Luc Nancy, Être singulier pluriel, Galilée, 1996; [공산주의, 단어], 슬라보예 지젝코스타스 두지나스 엮음, {공산주의라는 이념}, 김상운 외 옮김, 그린비, 2021.). 따라서 개체의 개체성, 독특한 실재의 독특성은 그것을 구성하는 복수의 개체들 사이의 인과관계의 결과입니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이 개체들이 공동의 결과를 산출하는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할 때입니다. 그것들은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독특한 실재가 바로 스피노자가 양태, 특히 유한 양태라고 부른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양태 또는 독특한 실재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실존하고 존속할 수 있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변용”(affection)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연속입니다. 생명체로서의 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공기에 의해 변용되어야 하고 마실 수 있는 물에 의해 변용되어야 하며, 일정한 영양분에 의해 변용되어야 합니다. 역으로 나는 다른 사물들이나 사람들을 변용함으로써 존속하고 실존합니다. 나 또는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의 변용되기와 변용하기 속에서, 나 또는 우리의 적들과의 변용되기와 변용하기 속에서 우리는 실존하고 존속하고 때로는 손상을 입거나 소멸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용의 관계가 우리의 실존과 삶의 보편적인 조건을 이룹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변용의 관계만을 경험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좋은 변용들만이 아니라 나쁜 변용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고 때로는 신체나 정신의 일부가 파괴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도 있고 죽음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용의 관계는 양가적인 관계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우리의 역량을 획득하고 증대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이룹니다. 우리는 타자들과의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의 역량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변용 관계 덕분입니다. 반면 변용 관계는 우리가 손상을 입고 때로는 파괴될 수 있는 원천을 이루기도 합니다. 변용 관계는 기본적으로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vulnerability)을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동시에 우리가 역량을 획득할 수 있는 조건인 한에서, 장애의 문제는 인간의 보편적 조건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것은 지금까지 장애인이라고 불린 이들만이 아니라, 아마도 비장애인이라고 잘못 선험적으로 분류된 이들까지도 모두 배워야 하는 공통의 과제, 인간의 또는 생명체 일반의 공통의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제를 우리 공통의 과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장애의 문제를 장애인비장애인모두의 보편적 문제로 사고한다는 뜻입니다. 누구도 장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으며, 실제로 우리 모두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항상 이미 장애를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장연 투쟁의 규범적 의미: 보편적 삶의 조건으로서 돌봄

 

여기에서 보편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돌봄이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돌봄에 관해 간단히 한 마디만 더 언급하고 제 논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했던 것이 일리가 있다면, 장애인들에게만 돌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부모의 끊임없는 손길이 필요한 어린 시절이나 보호자의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한 노년의 시기에만 돌봄이 요구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며, 또한 스스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속적으로 돌봐야 합니다. 관계론적인 존재론은 돌봄의 윤리를 요구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돌보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자 각자가 누려야 할 권리이며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는 최근에 출간한 자서전에서 활동보조인이 생긴 뒤로는 내 삶이 180도 바뀌었다”[이규식,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나의 이동권 이야기}, 후마니타스, 2023]고 말한 바 있습니다. 활동 보조인의 돌봄을 받기 전까지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지금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인지가 우선이었던 데 반해, 활동보조인의 지속적인 돌봄을 받게 된 이후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양하게 시도해 보거나, 한 사람의 시민으로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애인만의 이야기일까요? 스스로 비장애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 각자 역시 어떤 활동 보조인의 돌봄 없이는 시민으로서, 자립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릴 수 없는 것 아닐까요? 다만 스스로 비장애인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자신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러한 돌봄을 당연한 것으로, 자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기고, 그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에게 돌봄 활동이라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조건이라는 것, 우리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의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 사회가, 특히 정부와 서울시가 이러한 보편적 돌봄의 중요성을 외면하고 그것에 대한 공적인 책무를 망각하고 있다는 점 역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히려 정부와 서울시는, 그리고 보수 언론은 전장연의 시위를 선량한 시민들을 볼모로 삼는 이기적인 소수 집단의 불법적인 시위로 몰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처럼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사회적 소수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거나 외면하면서 억압하고 배제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의 전형적인 특성입니다.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에서는 타인과의 관계를 경쟁과 자기 향상의 틀 안에서만 추구하는 기업가적 개인을 인간의 전형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식에 기반을 둔 사회 조직과 공적 행위는 협력보다는 경쟁을 우선시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효율성과 수익성이라는 이름 아래 그렇게 하죠). 또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요구, 곧 을들의 요구는 패배자들이나 무임승차자들의 부당한 불평불만으로 치부되고, 때로는 보편적인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법적인 치안 교란 행위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 사람들, 특히 우리가 을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약소자들, 소수자들은 이중구속적인 규범적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것은 과소 주체화된 이들이 과잉 주체로 실존하고 행위하기를 요구받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시대의 근본 특징 중 하나는, 서양 근대에 철학적 개인 및 정치적 개인을 개인으로서 형성하는 데 본질적이었던 사회적 관계,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제도들의 쇠퇴 및 변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개인들은 더 이상 전성기의 복지국가 체제에서처럼 국가가 사람들의 삶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보장해줄 것으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의 강력한 지지 아래 자신들의 권리 증대와 이익 증진이 이루어질 것으로 희망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반면 우리 시대에 개인들은 자신들의 개인성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해주었던 이러한 제도들의 부재 속에서 더욱 더 자립적인 개인들로 실존하기를,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기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시대의 근본 특징 중 하나는 (자율적) 주체화의 조건이 부재하거나 약화된 상황에서 더욱 더 (자율적) 주체들로 존재하기를 요구받고 있는, 공포에 질린 개인들의 각자도생의 시대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전장연의 투쟁은, 더더욱 우리 사회 일부 개인들이나 특정 집단의 권익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맞선 보편적인 투쟁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잠재적 장애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과 시민의 보편적인 돌봄의 권리에 입각하여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적으로 개조할 것이냐 아니면 신자유주의적인 권위주의 통치에 밀려 세습적인 불평등의 질서를 강화하는,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가운데, 각자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는 질서를 용인할 것이냐를 쟁점으로 갖는 투쟁입니다. 광범위한 생태계 파괴와 보건 재난, 사회적 안전 재난 같은 다중적 재난으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에 이 투쟁은 우리 평범한 시민들에게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싸움에 연대함으로써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고 확장하는 길 이외에 다른 권력, 다른 역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 투쟁이 다중 재난에 직면하여 또 다른 해방의 사건으로 기억될 수 있는가 여부는 우리가 이러한 공통의 역량을 구성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점을 가르쳐준 데 대해서도 전장연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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