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필로소픽 출판사에서 자크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 새 번역본이 출간됩니다. 


이보경 선생님이 번역을 맡아서 공들여 새로 번역을 해주셨는데, 


제게 해제를 하나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와서 간단히 글을 한 편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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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라는 이름의 철학적인 것: [환대에 대하여] 한국어판 해제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를 읽는 일은, 몇 번의 놀람 또는 반전을 경험하는 일이다.

 

첫 번째 놀람 또는 반전.

[환대에 대하여]를 손에 든 독자들은 아마도 무조건적 환대또는 절대적 환대를 머릿속에 떠올릴 것이다. 그것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간에, 데리다는 무조건적인 환대를 주장한 철학자 내지 윤리학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실제로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데리다의 환대론을 그처럼 단순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된다. 예컨대 데리다는 이렇게 질문한다. “무엇이 더 정당하고 더 애정 어린 것일까? 묻는 것일까, 아니면 묻지 않는 것일까?”(47) 묻는 것이 더 정의롭고 사랑이 담긴 대응일까, 아니면 묻지 않는 것이 더 정의롭고 사랑을 베푸는 일일까? 요컨대 묻는 게 환대하는 것일까, 아니면 묻지 않는 게 환대하는 것일까?


여기서 묻는다는 것은 이름을 묻고 신원을 파악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행이나 사업차 또는 공부 등을 위해 찾아간 외국의 공항에서 우리는 이름과 국적, 방문 목적 등을 묻는 해당 국가 관리의 질문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질문들을 통해 우리가 그들에게 위험하지 않은 존재자임이 확인되고 난 이후 우리는 비로소 해당 국가에 입국할 수 있다. 이것이 대개 우리가 경험하는 환대의 절차다. 그렇다면 묻지 않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것, 이름이 무엇이고 국적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우리나라에 왔는지 물어보지 않고 입국시켜주는 것, 요컨대 무조건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만약 무조건적인 환대를 주장하는 철학자라면, 데리다는 당연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정의롭고 애정 어린 환대의 태도라고 주장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묻는 것과 묻지 않는 것 사이에서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과연 어떤 게 더 정의로운 것인지 묻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무엇보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곧 무조건적인 환대를 실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국경을 모두 개방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도래하는 이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가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입국하려는 것인지 묻지 않고 그냥 모두 받아들인다면, 그 경우 국경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국경이야말로 검열과 분류, 선별의 장소, 곧 묻고 따지는 장소가 아닌가? 그런데 이처럼 국경을 모두 개방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모든 나라가 국경을 없애고 모든 사람들이 모든 나라들을 자유롭게 왕래하게 된다면,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평화로운 곳이 될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마 세계가 대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 더 개연성이 있는 일일 터이다. 왜냐하면 (개연성이 전혀 없는 것이기는 해도) 국경이 모두 개방되면, 현재와 같이 부유한 나라들과 가난한 나라들로 분할된 세계에서, 더욱이 소수의 부유한 나라들과 대다수의 가난한 나라들로 분할된 세계에서, 가난한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이 소수의 부유한 나라들로 몰려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국경이 절대적으로 개방된다면,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타자들에 대한 커다란 불안과 공포(panic), 아마 실제 일어난 혼란보다 훨씬 더 큰 공포를 가져올 것이다. 이러한 공포는 집단적인 불안과 안전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자극할 것이며, 이는 다시 공적일 뿐만 아니라 사적인 형태의 무장과 폭력들을 대규모로, 그리고 다양한 수준에서 유발하게 될 것이다.


무조건적인 국경의 개방과는 전혀 거리가 멀지만, 시리아 내전 이후 시리아 주변국들만이 아니라 유럽으로 수많은 난민이 몰려들면서 유럽 대륙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자의반타의반으로 많은 수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 대륙으로 몰려드는 많은 난민들이 존재하며, 유럽의 각 나라들은 난민 문제로 애를 먹고 있다. 이처럼 많은 수의 난민을 받아들이면서 인종주의와 국민주의적 반동이 격렬해지고 반()이민, ()이슬람 감정이 고조되고, 그에 편승하여 극우파 정당들이 득세하게 되었으며 치안과 검열 활동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만약 무조건적 환대의 방식으로서 국경의 완전한 개방이 이루어진다면, 그 경우 오히려 환대는 더욱 더 제한될 수 있다. 절대적인 환대를 실행하려는 것이 환대를 제한하게 되며, 환대를 실행할 수 있는 주체의 조건을 잠식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출간된 환대에 관한 세미나에서 데리다 역시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정확히 정치적인 것이 파괴될 때, 곧 갑자기 명확한 국경이, 지정된 시민권이, 조국에 대한, 종교에 대한, 따라서 가능한 정체화(identification)에 대한 준거가 존재하지 않게 될 때, 바로 이 순간 증오가 적대를 대체하게 되고, 증오가 한없이 절대적으로 분출하게 됩니다.”(Jacques Derrida, Hospitalité, vol. 1, Seuil, 2021, p. 190.)


따라서 데리다가 무조건적인 환대를 주장했다는 소문은, 사실 책을 읽어보지 않은 이들의 순진한 상상의 결과일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놀람 또는 반전이다.

 

두 번째 놀람 또는 발전.

여기에서 두 번째 놀람 또는 반전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조건적 환대가 무조건적 환대보다 더 낫다는 뜻인가? 우리는 더 많은 공포와 불안, 혐오와 폭력을 초래할 수도 있는 무조건적 환대보다는 현실적인조건적 환대를 수행할 수밖에 없고, 또 수행해야 한다는 뜻인가? 만약 데리다가 󰡔환대에 대하여󰡕에서 내리는 결론이 이런 것이라면,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굳이 철학 없이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일상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그 사람이 나 또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 손해가 될지, 그 사람이 나 또는 우리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고려하면서 누군가를 사귀거나 가까이 하지 않는가? 우리가 외국인을 들일 때도 우리는 그 사람이 우리나라에 도움이 될지 아닐지를 일차적으로 고려하면서 (관광을 와서 돈을 잘 쓰고 가는지, 이주노동자로 와서 성실히 우리나라 경제를 위해 기여할지, 100만원 가사도우미로 와서 저출산 문제 해결에 기여할지 등) 들이거나 거부하거나 하지 않는가? 그런 상황에서 굳이 조건적 환대를 정당화하는 철학이 필요할까?


아니 데리다는 확실히 조건적 환대보다는 무조건적 환대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데리다가 이 책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이가 외국인또는 이방인이며, 그 중에서도 절대적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오이디푸스, 단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의 오이디푸스에게서 바로 이러한 절대적 이방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오이디푸스는 -바깥의-사람(anomon)”이며, “절대적 도착자”(57)이다. 그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그가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앎이 없는 채, 그 장소와 그 장소의 이름에 관한 앎이 없는 채.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사이에”(57) 놓여 있는 존재자다. 오이디푸스는 우리가 알다시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자식이자 동생인 이들을 낳은 사람, 따라서 가장 원초적인 인륜 질서를 어기고 신들에게 버림받았으며, 조국에서 쫓겨나서 눈 먼 채로 이국땅을 떠돌아다는 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데리다에 따르면 절대적 도착자 오이디푸스는 단지 비극 속의 허구적 주인공이 아니다. 그는 오늘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자이며 근대 세계를 상징하는 존재자이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하듯,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쟁을 피해, 나치의 박해를 피해 피난을 간 수많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자마자 노숙자(homeless)가 되었고 국가를 떠나자마자 무국적자(stateless)가 되었다. 인권을 박탈당하자마자 그들은 무권리자들(rightless)이 되었으며 지구의 쓰레기”(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Harcourt, 1973, p. 267;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489~90.)가 되었다. 바로 이들이야말로 아노모스 오이디푸스, 근대적인 법-바깥에-존재하는 이”(J. Derrida, Hospitalité, vol. 1, p. 187.)가 아닌가? -바깥의-사람들, 그들은 오늘날에도 우리 도처에 존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일회용 인간이라고 불리는 이들, 남아메리카의 광산에서 저임금 중노동에 시달리는 현대판 노예들만이 아니라,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속에서 위험한 일을 혼자서 감당하다가 건강을 해치거나 목숨을 잃는 수많은 비정규노동자들, 이주자들, 난민들, 성적 소수자들 같은 이들이 다름 아닌 법-바깥의-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데리다가 이러한 이방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철학적, 윤리적, 정치적으로 정당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데리다는 확실히 무조건적 환대의 편에 있는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세 번째 놀람 또는 반전.

하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그럼에도 우리는 무조건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에서 한 쪽 편을 확실하게, 결정 가능하게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양자의 관계가 정확히 이율배반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 (또는 [법의 힘]의 표현을 빌린다면) 정의와 법 사이에는 이율배반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핵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양자의 관계가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은, 단지 양자가 서로 충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것은 칸트가 말하는 규제적 이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아니면 추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117) 것에 머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한다면 무조건적 환대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이념이지만, 그것은 어쨌든 현실적으로 실천되는 조건적 환대를 규제하고 그것을 개선하는 준거로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런 해석을 미리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조건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 또는 "자체와 법이라는 이 두 개의 법 체제는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이면서도 분리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서로를 함축하는 동시에 하나와 다른 하나 간에 서로를 배제한다. 그것들은 서로를 배제하는 순간 서로 합체되며, 하나와 다른 하나 간에 서로를 에워싸는 순간 서로 분리된다."”(117~18) 왜냐하면 무조건적 환대 편에서 보면 조건적 환대는 진정한 환대가 아니라 사실은 치안에 불과한 것이며, 역으로 조건적 환대의 편에서 보면, 공공의 불안을 야기하면서 무조건적으로 이방인을 맞아들이자고 주장하는 무조건적 환대야말로 공익을 훼손하고 정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조건적 환대들 없이 무조건적 환대는 존재할 수 없으며, 무조건적 환대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면 조건적 환대는 그저 행정적이고 치안적인 규제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방인들에 대하여, 외국인에 대하여, 더 나아가 일회용 인간들에 대하여 무조건적 환대를 해야겠지만, 그 무조건적인 환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는 무조건적인 환대일 수 있는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불안하고 위험한 행위처럼 보일 수 있으며, 심지어 우리가 어떤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환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또 다른 타자들은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한한 우리가 모든 타자들에 대해 절대적으로 무조건적 환대를 베풀고, 모두에게 정의를 시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에게 무조건적 환대를 해야 하고 누구는 (적어도 당분간) 환대에서 배제해야 하는가? 어떤 기준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 기준은 무조건적 환대의 원리에 부합하는 기준인가 아니면 조건적 환대의 원리에 일치하는 기준인가?


그렇다면 얼핏 보기에 매우 추상적이고 난해한 철학 논의처럼 보이는 데리다의 논변이 지극히 현실적인 함의를 지닌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데리다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철학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깊이 생각하는 독자라면 현실주의철학이라는 두 단어 사이의 관계가 또한 지극히 이율배반적이라는 점을 눈치 챘을 것이다.

 

네 번째 놀람 또는 반전.

하지만 아마 반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서 법-바깥에-존재하는 이라고 말했던 오이디푸스에게도 또한 그 바깥이, 또 다른 절대적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타자의 이름은 바로 안티고네다. 그는 눈 먼 아버지를 모시고 이국땅을 이리저리 배회하는 존재이지만, 결국 이국땅에서 자신의 묘지를 선택한 아버지를 애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아버지에게서. 그리고 나중에는 고국에서 크레온에게서. 애도야말로 환대의 또 다른 본질적인 방식이라면, 애도의 기회를 박탈당한 안티고네, 따라서 환대의 가능성 자체에서 배제당한 안티고네는, 우리에게 환대의 문제에 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더욱이 이 책의 말미에 나오는 성경 창세기의 롯 이야기, 곧 이방인을 환대하기 위해 자신의 딸들을 내어주는 그 이야기는 환대에 관하여, 환대와 젠더의 문제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주는가?

 

아마도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방금 언급했던 것들보다 더 많은 놀람과 반전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환대에 대하여]라는 이 책을 올바르게 환대하는 한 방식일 것이고, 환대에 관한 데리다의 사유를 단지 하나의 철학이 아니라 철학적인 것의 이름으로 만드는 한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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