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3일 부산 부경대에서 개최되는 새한영어영문학회에서 초청을 받아서 발표를 하나 하게 됐습니다.
제 발표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행성과 바이러스 사이에서 – 관계론적 생태론을 위하여
나는 이 발표에서 ‘철학적인 것’의 한 사례 내지 요소로서 인류세의 문제를 사고해보고 싶다. 여기서 철학적인 것은 제도적인 철학 내의 관례적 주제 및 관행적 실천을 넘어서는 철학적인 주제와 실천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철학적인 것은 철학의 바깥에 있다고 간주되는 어떤 대상에서 출발하여 그 대상은 사실 철학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철학의 한계를 가리키는 증상이라는 점을 보임으로써, 철학적 사고와 제도, 관행의 한계를 변화시키려는 수행적 실천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빨갱이, 5.18, 신자유주의, 세월호, 갑을 관계, 장애 등과 더불어 인류세는 탁월한 철학적인 것의 한 사례이자, 다른 사례들을 과잉결정하는 범례적 지위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범례성은 우리가 물려받은 철학적 범주들(또는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비평의 범주들)의 개조 없이 인류세를 철학적인 것으로서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실체와 사물,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명,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무생명, 이론과 실천 같은 범주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발표에서 나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몇 가지 요소들을 이끌어 와서 철학적인 것으로서의 인류세를 사고해보려고 한다. 이것은 스피노자 철학이 인류세를 사고하는 데 가장 적합한 철학이라거나 심지어 인류세에 관한 고찰은 스피노자 철학을 비롯한 철학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허세를 부리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볼 때 인류세에 관한 철학적 또는 비평적 탐구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유용성은 안토니오 네그리가 적절하게 명명한 바와 같이 스피노자 철학이 서양 근대 사상에서 ‘야생의 별종’(anomalia selvaggia)으로서의 지위를 지닌다는 데서 기인한다. 곧 스피노자 철학은 서양 근대철학의 주류적인 전통에서 볼 때 특이한 별종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며, 더욱이 근대철학의 합리성의 틀로 포섭하거나 억압하기 어려운 야생의 역량을 품고 있다. 인류세가 어느 지점까지는 근대 문명의 소산이면서 동시에 그 문명적 합리성의 틀로는 제대로 사유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스피노자 철학은 근대 문명 내에서 그 한계를 벗어나거나 적어도 넓히기 위한 대안을 제시해준다.
인류세가 우리가 정의하는 의미에서 철학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인류세가 인류에게, 그리고 철학 및 비평에게 역설적인 사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인류세는, 인류의 인공적 행위성이 불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온 지구 자체를 변동시킬 수 있는 위력의 소산인 한에서,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 및 자연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에 입각한 근대 철학과 문명의 극한을 나타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류세는 이러한 변동으로 인해 초래되는 지구의 폭력적인 힘과 인류의 가능한 종말을 가리키는 한에서, 인류의 왜소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역설에 직면하여 세 가지 가능한 대안이 제시될 수 있다. 첫째는, 인류세를 인류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자연의 지배자로서 인류의 역량을 입증해야 할 미증유의 도전 과제로 이해하는 일이다. 에코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이러한 대안은 지구공학(geoengineering)이나 기후공학(climate engineering)의 방식으로 인류세의 도전에 응전하고자 한다. 두 번째는, 근대문명을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려고 하는, 생태학적 대안의 길이다. 전자와 달리 이러한 길은 인류세를 인간 및 근대문명의 오만함에 대한 징벌로 이해하고자 하며, 인간의 배타적 주체성과 행위성에 입각한 근대문명과 다른 비근대적이고 비서양적인 존재론을 모색함으로써 인류세가 산출하는 재앙적인 결과를 완화하거나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추구한다. 첫 번째 대안이 인류세를 근대 문명의 표현이자 그 확장의 계기로 간주한다면, 두 번째 대안은 인류세를 근대 문명의 실패의 표현이자 단절의 계기로 이해한다.
내가 오늘 발표에서 사고해보려는 세 번째 대안은, 인류세를 단절의 계기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두 번째 대안과 공명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의 행위성을 약화하기보다는 그 행위성을 새로운 철학적 바탕 위에서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구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간의 행위성에 따른 윤리적 책임을 찾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두 번째 대안과 길을 달리 한다. 나는 특히 스피노자 철학의 세 가지 요소에 주목하고자 한다.
첫째, 전통적인 실체의 철학과 달리 모든 사물 내지 실재를 양태로 이해하는 스피노자의 양태의 존재론은, 실체와 사물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 곧 관계론적인 통찰을 제시해준다.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되는” 양태들은 관계 속에서 성립하고 관계 속에서 실존할 수밖에 없으며, 변용되고 변용하는 양태들 간의 상호작용으로서의 변용의 관계는 양태들의 근본적인 존재론적 조건을 이룬다.
둘째, 다른 양태들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인 인간은, 관계들을 통해 성립하고 관계들 속에서 실존한다. 곧 인간은, 데카르트와 홉스에서 현대철학에 이르는 서양철학이 궁극적으로 가정하는 바와 달리, 관계에 앞서 이미 자율성을 지닌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타자들과의 자율적인 개인으로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다. (변용의) 관계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본질적인 존재론적 조건이다. 이는 비단 사회적 관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바이러스에서 행성에 이르는 (비)생명의 그물망은 인간과 상이하고 인간에 선행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내부를 구성하는, 인간의 조건이다.
셋째, 따라서 인간은 오직 비인간적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으로서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다는 인간학적 역설은 인류에게 미증유의 윤리적 책임을 부과한다. 이러한 윤리적 책임을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에 입각하여 사고해볼 수 있다. 자신의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코나투스는, 인간이나 생명체만이 아니라 “모든 독특한 실재”의 본질을 이룬다. 흥미롭게도 스피노자는 코나투스에서 두 가지 윤리적 실천의 방향을 이끌어낸다. 하나는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보존하려는 노력의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존재자들과 우정의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 곧 다른 존재자들이 각자 그 자신의 존재를 잘 보존하는 것을 주체 자신의 이성적 보존의 조건으로 삼는 방향이다. 이 양자가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능동성, 곧 강인함(fortitudo)의 두 측면을 이룬다. 이러한 코나투스의 윤리학이 인류세 시대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사고하기 위한 한 가지 길을 제시해준다는 것이 오늘 나의 발표의 궁극적인 가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