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인 기욤 시베르탕-블랑의 저서 [국가에 관한 질문들]이 오월의봄에서 출간됐습니다. 


이 책에 "추천사"를 썼는데, 그것을 여기에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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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적인 정치철학 교과서를 쓴다는 것



이 책의 저자인 시베르탕-블랑은 들뢰즈와 가타리 사상의 전문가로서, 현재 국제적인 마르크스주의 학술지 "악튀엘 마르크스"(Actuel Marx)의 편집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새로운 세대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가 쓴 탁월한 정치철학 교과서인 이 책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자연스럽게 던지게 된다.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정치철학에 관한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욱이 좌파적인 입장에서 정치철학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과서는 알다시피 학생들을 위한 책이다. 교과서는 해당 분야의 지식을 체계적이면서 교육적으로 제시하여 해당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관련 지식을 성공적으로 습득하여 활용하거나 더 전문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는 발판을 제시해주는 책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정치철학에 관한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모종의 당파성을 견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교과서에 대한 이러한 중립적인 정의를 위태롭게 만드는 요소를 포함하게 된다. 좌파적인 관점에서 정치철학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더 까다롭고 더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실패에 관한 성찰, 따라서 어쩌면 자기 자신의 불가능성에 관한 성찰을 교과서의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선 이 책이 다루는 시기와 관련이 있다. 이 책은 19세기와 20세기, 곧 프랑스혁명에서 시작해서 러시아혁명을 거쳐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에 이르는 200년 간의 정치철학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근대성의 시작을 알리는 한 혁명에서 근대성의 종결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혁명의 실패에 이르는 이 시기는 좌파 정치의 관점에서 보자면 쓰라린 실패의 여정일 수밖에 없는 시기이다. 하지만 새로운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반성해야 할 시기이다. 저자가 프랑스혁명에서 출발하되, 혁명가들의 담론보다는 혁명에 대한 대응들인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형성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으며, 러시아혁명 이후의 마르크스주의를 총체적 국가와의 대비 속에서 살펴보는 이유 역시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이 책을 서술하는 방법론적 전략과 관련이 있다. 저자는 국가라는 역사적 실재를 이 책의 준거로 삼으면서, 역사적, 이론적, 비판적 관점에서 국가라는 대상을 둘러싼 정치철학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역사적' 관점은 국가라는 대상을 실체화하지 않고 역사적 변화과정 속에서 이해하겠다는 뜻이며, 또한 국가를 둘러싼 철학적 담론들의 전개과정 역시 그러한 역사적 변화와 연동하여 살펴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이론적' 관점이 의미하는 것은 정치철학이라는 담론을 불변적인 초역사적 실체로 간주하지 않고, 신학이나 법학, 경제학이나 사회학 같은 다른 담론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정치철학 담론의 조건 자체가 변화하는 과정, 그리하여 정치철학이 매 시기마다 새로운 담론으로서 생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학과의 마주침에 의해 규정되는 정치철학과 경제학 및 사회학과의 마주침 이후에 생성된 정치철학은 하나의 동일한 담론이 아니다.


더 나아가 '비판적' 관점이 가리키는 것은, 국가라는 대상의 우연성과 정치철학이라는 담론 자체의 우연성을 성찰하려는 태도다. 이것은 이중의 함의를 지닌다. 우선 이것은 20세기를 특징지은 양 극단의 국가, 곧 한편으로는 전체주의적인 국가와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인 국가의 생성의 원인과 그 실패의 이유를 성찰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보통 세계화라고 부르는 조건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 및 그에 대한 담론으로서의 정치철학이 근본적인 우연성, 따라서 소멸 가능성에 직면해 있음을 사유하겠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성찰하는 정치철학만이 국가와의 상호정당화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 결과 흔히 접하게 되는 정치철학 교과서와는 꽤 차이가 있는 교과서, 역사적 전개에 충실하면서도 방법론적으로 개성적이고, 정보가 풍부하면서도 명료한 논리적 일관성을 지닌 교과서를 (물론 역자의 공들인 번역 덕분에)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실패 가능성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하는 이 교과서에서 학생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얻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진보적인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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