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기억과 전망]이라는 학술지에 발표될 주제서평을 하나 올립니다. 


아직 교열교정이 다 완료되지 않은 글인 만큼, 토론과 인용은 [기억과 전망]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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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머니즘 또는 디지털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한국에서 포스트휴머니즘 수용

 

 

또 하나의 포스트 담론

 

최근 10여 년 사이에 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한 논의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4차 산업혁명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관해서는 송성수 2017, 정연보 2018, Giesen 2018 참조)이나 인류세(또는 자본세)에 관한 논의와 더불어 우리나라 인문사회과학의 최신 유행담론으로 자리 잡았다.[여기에 2020년 이후 전 세계에 충격을 준 코로나19 팬데믹 담론 또는 포스트 코로나담론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진태원 2021 참조.] 포스트휴머니즘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회 및 연구 집단들이 생겨나고,[2015년에 창립된 한국포스트휴먼학회, HK사업단에서 시작한 이화여대 탈경계인문학 연구단, 서울대-한신대 포스트휴먼연구단, 서울시립대 철학과의 인공지능 연구단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포스트휴머니즘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서들이 과학철학 및 과학기술학 분야만이 아니라, 철학, 문화이론, 문학, 사회과학, 교육학 및 신학 분야 등에서 출간되고 있으며, 각종 학술지에서도 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한 특집과 논문들이 발표되고, 출판사에서는 포스트휴머니즘과 관련된 총서들이 기획되고 있다.[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한 주요 저작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번역서로는 모라벡 2011(영어 원서는 1988), 워릭 2004, 커즈와일 2007, 보스트롬 2017, 헤어브레히터 2012(이 책은 번역에 문제가 많다), 헤일즈 2013(원서는 1999), 브라이도티 2015, 클락 2015, 페페렐 2017(원서는 2003), 오코널 2018, 해러웨이 2019, 해러웨이 2021, 페란도 2021 등이 있고, 국내 저자의 연구서로는 신상규 2014, 한국포스트휴먼학회 2016, 김재희 2017, 이종관 2017, 이중원 엮음 2018, 이중원 엮음 2019, 이중원 엮음 2021, 홍성욱 2019, 김진석 2019; 심광현유진화 2020, 이광석 2020, 이광석 2021.] 가히 포스트휴머니즘 신드롬이라고 할 만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1980년대 말 ~ 19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물밀 듯이 수용되었던 포스트담론, 곧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에 뒤이어 포스트휴머니즘이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붙은 또 하나의 유력한 담론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포스트 담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은 진태원 2019, 1장 참조).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은 이전의 포스트 담론과 한편으로 연속성을 지니면서도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우선 이전의 포스트 담론이 근대성 및 그것을 대표하는 보편적인 해방의 이론과 운동(특히 마르크스주의를 중심으로 한)에 대한 비판 내지 탈구축을 시도하는 것이었다면,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은 주로 20세기 후반 이후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의 전개과정 및 특성에 관한 개론서로는 헤어브레히터 2012, Herbrechter 2013, 홍성욱 2019, 2021을 각각 참조). 즉 이전의 포스트 담론이 기본적으로 정치철학적인 성격을 띤 담론이었다면, 포스트휴머니즘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계기로 촉발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인간과 기술의 관계, (자연)과학과 인문학(humanity)의 관계 등을 묻는, 과학철학적이고 과학기술학적인 지향을 보이고 있다. 뒤에서 더 논의하겠지만, 물론 포스트휴머니즘 담론 전체가 이것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이전의 포스트 담론에서 포스트라는 접두어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이고 과거지향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면,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의 포스트는 긍정적이면서 미래지향적인 특성을 보이는 것 같다. 이전의 포스트 담론에서 포스트라는 접두어는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표현을 빌린다면) 거대 서사에 기반을 둔 계몽과 해방의 운동으로서 모더니티의 종언을 지시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으며, 이 때문에 비판과 고발, 탄핵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반면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과 기각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적극적으로 예고하면서, 이 시대가 이전보다 더 나은 시대, 따라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시대라고 주장한다(이때의 우리가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리고 포스트휴머니즘은 명칭이 말해주듯이, 인간에 대한 재정의를 핵심적인 개념적 내포로 지니고 있다. 그것은 기술적(descriptive)이면서 규범적(prescriptive)이고, 서술문적(constative)이면서 동시에 수행문적인(performative) 것이다. 기술적인 이유는 이른바 NBIC(Nanotechnology, Biotechnology, Information technology and Cognitive science)“GNR혁명”(유전공학, 나노테크놀로지, 로봇공학)을 중심으로 하는 동시대의 과학기술적 발전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변형 내지 진화를 촉발하기 때문이며, 규범적인 이유는 이러한 진화를 적극적으로 촉진하고 이에 발맞추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인간 이후의 인간, 곧 포스트휴먼을 재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에서 포스트휴먼에 관한 서술문적인 주장들은 동시에 수행문적인 성격을 띤다. 즉 포스트휴먼에 관한 담론 자체가 포스트휴먼을 실현하기 위한 집행 수단이자 방식인 것이다.


셋째, 사회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이전의 포스트 담론과 포스트휴머니즘은 차이를 보인다. 이전의 포스트 담론이, 비록 마르크스주의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좌파 이론과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제기하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좌파적인 지향을 지니고 있었다면, 포스트휴머니즘은 다수의 정치적 지향들이 혼합되어 있다. 특히 넓은 의미의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의 일부를 이루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및 그것과 다소 구별되는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technical posthumanism)은 때로는 자신을 비정치적인 과학 내지 공학 담론으로 제시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내지 자유지상주의적인(libertarian)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엘리트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반면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critical posthumanism)은 이전의 포스트 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또한 페미니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좌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의 수용은 주로 처음 두 가지 부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최근 들어서 도나 해러웨이(해러웨이 2019, 2021)와 로지 브라이도티(브라이도티 2015)의 저작을 기반으로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한 논의가 점차 활력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해러웨이에 관해서는 최유미 2021, 브라이도티에 관해서는 이경란 2019 참조). 아울러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과학기술학(STS) 내지 비판 문화론의 관점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의 과학기술적 혁신 과정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려는 주목할 만한 시도들이 제기되고 있다(전자의 경우는 하대청 2019, 2020, 후자의 경우는 이광석 2020, 2021, 김상민 2019, 2021 참조).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의 분류

 

방금 지적한 것처럼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별될 수 있다. 첫째, 트랜스휴머니즘이라고 불리는 유형의 담론이 존재한다.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작가였던 줄리언 헉슬리(Julian Huxley)1957년 에세이 트랜스휴머니즘에서 발원한 트랜스휴머니즘은 맥스 모어(Max More), 사이먼 영(Simon Young), 닉 보스트롬(Nick Bostrom) 같은 저자들의 작업을 통해 1980년대부터 영향력을 얻기 시작했으며, 인공지능, 신경과학, 컴퓨터공학, 나노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인간을 기술적 수단을 통해 포스트 휴먼 존재자로 변형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운동이다(More & Vita-More 2013).


트랜스휴머니즘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인간의 조건, 특히 질병과 노쇠, 죽음과 같은 생물학적 조건을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최신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질병으로 간주한다(신상규 2014, 이종관 2017). 화장, 이식, 인공지체 같은 신체 기능 개선 기술, 컴퓨터, 스마트폰 같은 정신확장기술”, 유전자 진단 같은 재생산기술 등을 통해 인간 능력을 증강하고 완전화하여 궁극적으로 불멸을 달성하는 것이 트랜스휴머니즘이 추구하는 목표다. 이 담론은 이원론적인 인간관을 견지하고 있다. “어머니 자연이 선사한 육체는 질병과 노쇠, 죽음에 굴레에 얽혀 있는 데 반해, 지능을 본질로 하는 정신은 인간이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 극복 및 자기 완전화를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둘째, 트랜스휴머니즘과 구별되는 분석적 포스트휴머니즘(로지 브라이도티) 내지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야니나 로)이라 불리는 부류가 존재하며, 부류는 로봇공학자인 한스 모라벡이나 로드니 브룩스,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 등의 저작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두 부류는 공통의 담론적 계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때로 서로 한 부류로 묶이기도 하고(신상규 2014, 우정규 2018, 이경란 2016, 이종관 2017 등은 양자를 구별하지 않고, 트랜스휴머니즘으로 분류한다), 트랜스휴머니즘에 속하는 이론가가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개념적으로 뚜렷한 차이점을 보인다. 트랜스휴머니즘이 이원론적인 관점 위에서 기술적인 수단을 활용하여 인간의 불멸을 추구하는 데 반해,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은 대개 일원론적 관점을 견지한다. 이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지능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체라는 생물학적 조건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진화가 필요한 존재자다. 진화의 경로는 인간이 자신을 구속하는 생물학적 자연에서 해방된, “포스트 생물학적”(모라벡) 초지능(super intelligence)을 본질로 삼는 기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개념이 마음 업로딩특이점이다. 노버트 위너가 일찍이 󰡔사이버네틱스󰡕(1948)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정보의 동일 패턴으로 규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에서도 인간의 인격적 동일성은 신체의 동일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패턴 동일성”(모라벡, 203)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나 자신의 본질은 내 머리와 몸에서 일어나는 패턴과 과정으로 정의되는 것이지, 그것을 지탱하는 물질적 지주가 생물학적 신체인지 기계적 신체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커즈와일 역시 우리의 마음은 소프트웨어에 해당하고 뇌는 그것의 하드웨어라고 규정하면서, 뇌 전체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실리콘 기반의 전자 신체로 업로딩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인공지능이 전체적으로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초지능으로 도약하게 되는 특이점이 도래하면(커즈와일은 2045년에 도래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육신의 죽음마저 초월하게 되며, 우주 전체의 변화를 초래하는 우주론적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셋째, 이 두 가지 부류와 구별되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이라 불리는 담론의 갈래가 존재한다. 캐서린 헤일즈의 1999년 저작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나󰡕를 통해 차별적인 담론으로 확립된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로지 브라이도티와, 독일의 이론가 슈테판 헤어브레히터, 미국 이론가 캐리 볼프(Wolfe 2010), 캐런 바라드(바라드 2009), 이탈리아의 이론가 프란체스카 페란도 등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 이 담론의 특징은 이전의 포스트 담론이 제기한 반()인간주의 테제(이들은 특히 푸코의 󰡔말과 사물󰡕을 원용한다)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동시에 앞의 두 가지 담론들과 달리 인공지능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초를 두고 인간의 기계로의 진화를 추구하기보다 페미니즘이나 반유럽중심주의, 또는 반인간종주의 등에 입각하여 인간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데 주력하며,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광범위한 존재자들 사이의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이종관은 포스트휴머니즘을 언어에 의한 차이의 놀이”(이종관 2017, 34)를 기반으로 한다고 보는데, 이것은 이전의 포스트 담론과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의 차이를 다소 간과하는 주장이다. 다른 한편 데이비드 로덴(David Roden) 같은 이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과 사변적 포스트휴머니즘(speculative posthumanism)이라는 구별법을 제안한다(Roden 2014, 2021).]


따라서 이 담론에서 말하는 포스트휴먼은 인공지능 내지 인공적 초지능을 본질로 삼고 있는 존재자가 아니라, 훨씬 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비인간(동물, 식물, 기계를 비롯한 무생물)과의 연대와 접속을 통해 생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만이 기존에 정상적인 인간 모델로 간주되어 왔던, 남성-유럽-백인-부르주아-비장애 인간의 지배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소수자들, ()들을 더 효과적으로 해방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인류세 개념으로 상징되는 생태계 위기를 맞아 전 지구적인 생물의 멸종이라는 사태를 피하기 위한 길을 제시해줄 수 있다. 그리하여 해러웨이는 인간”(Anthropos)자본”(Capital)의 지구 파괴에 맞서, 땅 속 무기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 사이의 촉수적인 연결을 지칭하기 위해 쑬루세”(Chthulucene)라는 기발한 신조어를 제안한다(해러웨이 2021). 또한 브라이도티는 물질의 자기 조직적 능력(아감벤에게서 빌려온 조에(zoe) 개념으로 표현되는)에 기반을 둔 자연-문화 연속체를 바탕으로 동물-되기”, “지구-되기”, “기계-되기로서의 포스트휴먼을 추구한다. 다수의 여성 이론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페미니즘 운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페미니스트 포스트휴머니즘 또는 포스트휴머니스트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쟁점들

 

상이한 특성과 목표를 지닌 이 다양한 부류의 담론들에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공통의 이름을 부여하는 이유는, 첫째, 이 논자들이 공통적으로 전통적인 휴머니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랜스휴머니즘이 휴머니즘 또는 계몽사상의 계승인지 아니면 그것의 왜곡 내지 일탈인지에 대해서는 관점이 엇갈린다. 인간 향상 및 자기 완전화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볼 때 트랜스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의 현대적 판본이며(닉 보스트롬은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 사상가인 피코 델라 미란돌라를 원용한다) 기술적 수단들을 통해 그 목표를 더욱 급진화하려 한다(“울트라-휴머니즘”(Onishi 2011))는 점에서 휴머니즘의 계승이라고 이해된다(페란도 2021, 29).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이 인간의 향상보다는 새로운 종으로서의 인간을 넘어선 인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우정길 2018), 또는 인간의 향상 내지 완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인간을 자기형태화의 수동적 객체로 전락시키고, 그리하여 휴머니즘 및 계몽주의의 근본 이념으로서 목적으로서의 인간의 이념을 위배한다는 점에서(2021, 97), 휴머니즘의 왜곡 내지 일탈이라고 비판받는다. 저널리스트인 마크 오코널은 트랜스휴머니즘에서 기독교에 고유한 퇴락과 구원의 서사를 발견한다(오코널 2018).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은 이에 비하면 훨씬 더 반()휴머니즘적인데, 이는 그것이 인간을 마음으로 환원하고, 더 나아가 정보일원론에 입각하여 인간만이 아니라 존재자 일반을 정보적인 존재자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인간과 기계를 구별하면서 이 후자를 전자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인데,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이 마음에 있고 마음은 정보의 패턴과 다르지 않다면, 탄소에 기반을 둔 생물학적 신체에 구속되어 있는 인간의 지능보다 기계적인 지능, 더 나아가 초지능이 훨씬 더 마음의 본질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초지능으로 진화하는 기술적 특이점은 오히려 해방적인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인간이 기계로 진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과연 인공지능이 약한 인공지능(이런저런 특수한 분야에서 인간의 지능과 동등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경우)에서 강한 인공지능(종합적인 지능 자체에서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경우)으로 진화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회의론에 입각한 반론이 있을 수 있다(이중원 2018 및 김진석 2019 참조). 또는 체화된(embodied) 인지론에 근거를 둔 반론도 가능하다(신상규 2020). 즉 인간의 인지는 두뇌 구조로 한정될 수 없으며 신체적 구조나 과정 자체가 인지의 본질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마음은 신체와 분리될 수 없다는 반론인 셈이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지능과 인공 지능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는, 존 설과 허버트 드레퓌스 식의 주장과 연결된다(박찬국 2018). 다른 한편,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바 있는 인간의 무엇임누구임의 구별에 기반을 둔 반론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2021). 곧 인간의 정체성은 단순히 인간이 지닌 이런저런 속성들의 집합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실존의 우연성의 차원을 포함하는 것이다.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의 경우 반휴머니즘은, 앞의 두 가지 부류와 달리 과학기술적 진화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인간 종 내부의 관계, 인간과 동물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서 제기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에 배타적으로 관심을 집중하는 전자의 두 담론은 오히려 인간 종 중심주의를 더 강화하는 것이며, 또한 인간 내부에서 정상적인간과 비정상적인간 사이의 차이를 심화하는 것으로, 또한 근대 서양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인 자유(지상)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헤일즈).


하지만 역으로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최근의 과학기술적 발전이 제기하는 중심 문제, 즉 인간과 기술의 관계라는 문제에 대해 소홀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해러웨이는 유명한 사이보그 선언(1985)에서 과학기술과 유전공학의 발전은 동물과 인간, 신체와 정신, 유기체와 기계의 본질적인 구별을 쓸모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여성의 자연적 통일성이 아니라 사이보그라는 형상에 입각하여 다시 사고되고 실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럼에도 해러웨이 자신만이 아니라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일반에서 인간과 기술의 관계라는 문제는 체계적인 이론적 성찰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페란도는 인공 생명의 문제가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의 중심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생태-기술의 관점에서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페란도 2021, 237), 문제제기에 머물러 있다.


오히려 인간과 기술의 관계라는 문제는 브뤼노 라투르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기술학(라투르 2009, 2010, 2018 및 홍성욱 2021)이나 질베르 시몽동과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기술철학의 전통에서 더 치밀하고 세심하게 전개되어 왔다(시몽동 2011, 2017, 스티글레르 2017, 2018, Stiegler 1994, 1995, 1996, 르쿠르 2005 및 김재희 2017, 2018). 두 가지 전통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논점은, 도구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을 넘어서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을 채택해야 한다는 점이다. 곧 기술을 인간이 지닌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거나 과학적인 지식을 응용하기 위한 도구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성립하기 위한 조건 자체를 구성한다고 보는 관점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주변 환경과 무관하게 미리 형성된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다른 생물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환경과의 끊임없는 교섭 작용에 의해 분화되고 개체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섭에서 기술은 인간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데 본질적인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그러한 환경의 요소를 이루고 있으며, 기술적인 대상 역시 인간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독자적인 개체화 양식을 지니게 된다. 이로부터 인간은 항상 이미 기술적 환경 속에서 실존해왔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기술과 더불어 공진화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구성적이고 공진화적인 관계로 보는 이 관점은, 동시에 자율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청한다. 인공지능에 관한 기술적 발전이 사람들에게 열광과 동시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이유 중 하나는,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지금까지 인간의 배타적 속성으로 간주되어 왔던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인간보다 더 탁월하게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자동성과 자율성을 혼동하는 것이며, 인공지능이 구현한다고 간주되는 자율성은 사실 인간의 숨은 노동 내지 고스트워크를 전제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인간과 물질, 조직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요구한다는 점을 은폐하는 것이다(그레이수리 2019 및 하대청 2018, 2019, 조동원 2020). 예컨대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사이의 바둑 대결은 인간과 기계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고, 실제로 그 대결 이후 인공지능 및 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한 신드롬이 일어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바둑 대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알파고가 태평양 건너 미국의 데이터센터로 연결되었어야 하며, 다시 이를 위해서는 인공신경망 알고리즘, 딥마인드사의 알파고 개발 엔지니어들, 알파고의 훈련을 위해 고용한 프로 바둑기사, 구글 클라우드 플랫폼, 태평양에 걸쳐 있는 인터넷 케이블, 데이터 센터, 전력시스템, 그리고 이 기술 네트워크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던 다양한 종류의 인력들”(하대청 2019, 183) 같은 행위자 네트워크가 제대로 작동되어야 했다. 따라서 인공지능을 인간으로부터 분리된 자율적 존재자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이 복잡하게 매개되고 서로 의존하는 혼종적 존재자로 이해하는 것이 기술적 네트워크의 실상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규범적으로도 더 건강한 통찰을 가져다줄 수 있다.

 

디지털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서 포스트휴머니즘 담론

 

이는 세 번째 쟁점과 연결되는데, 그것은 포스트휴머니즘의 사회정치적 함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는 특히 포스트휴머니즘이 20세기 말 이후 자본주의의 전개과정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집약되는 쟁점이다. 이러한 쟁점에 비춰보면, 포스트휴머니즘의 두 갈래가,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간에, 디지털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실로 트랜스휴머니즘 및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 자체가 실리콘 밸리의 문화에서 깊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또한 빅 테크 기업들의 구체적인 사업 전망과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커즈와일 자신이 구글의 기술이사로 있을 뿐 아니라, 구글의 사업 방향이 웹 검색기술에서 크롬 OS 및 안드로이드 OS의 개발,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 지도정보와 GPS, 자율주행차, 지구적 수준의 네트워크 구축, 구글 글래스를 통한 증강현실의 실현, 딥러닝 기술을 활용한 인공지능 딥 마인드 개발, 그리고 로봇 벤처 및 바이오벤처 기업들에 대한 투자, 바이오기업 칼리코(Calico) 설립을 통한 유전자 공학 분야 진출 등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한국에서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이 각광을 받게 된 것은 2016년에 벌어진 두 개의 사건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알파고와 이세돌 사이의 세기의 바둑 대결이며, 다른 하나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의 이해”(Mastering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라는 의제가 채택된 일이다. 이는 곧바로 국내에 4차 산업혁명 열풍을 불러와 경제계와 경제 정책의 최고 의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인문사회과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 몇 년 간 연구재단의 집단적, 개인적 학술 프로젝트 제목을 검색해보면, 두 사건이 미친 영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문제는 포스트휴머니즘 및 4차 산업혁명에 관해 대량 실업의 문제라든가 인간 자율성의 침해를 두려워하는 목소리들이 제기되긴 하지만, 디지털 자본주의의 구체적인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에 기반을 둔 비판이나 대안의 모색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광석(2020, 2021)이나 하대청의 연구(2018, 2019)는 이런 아쉬움을 달래줄 수 있는 훌륭한 성과들이다. 이광석은 플랫폼 기업들이 한편으로 창의, 상상력, 도전, 혁신이라는 수사법 아래(“유튜브 크리에이터”) 대중 지성의 확산을 돕는 매개와 촉매의 역할을 자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심층적인 예속화 작업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이 기업들은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일상적인 감정과 정서, 의식 및 담론과 행태 등을 데이터로 등가 환산해 패턴화하거나 예측하는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을 플랫폼으로 포섭하고, 다시 이를 기반으로 더 많은 데이터를 축적해 알고리즘을 정교화하여 그만큼 사람들을 더욱 더 플랫폼에 종속되게 만드는 과정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이를 통해 플랫폼은 자신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장할 뿐만 아니라(아마존이나 네이버, 카카오를 생각해보라), 사회 전 영역에 걸쳐 플랫폼 문화와 논리를 확산시킨다. 그 결과 랏짜라토가 기계적 예속이라고 부른, 디지털 자본주의에 고유한 예속화 메커니즘이 확립된다(랏짜라토 2017). 이러한 예속화 메커니즘은 자율적이거나 독립적인 존재자들로 간주되어왔던 개인들(individuals), 디지털 네트워크 안에서 부유하는 데이터 가분체들’(dividuals)(질 들뢰즈의 통제사회에 대한 후기”)로 변모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광석은 비물질의 디지털세계와 물질의 물리적’(physical) 세계가 끊임없이 상호 연결되고 서로의 필요에 따라 상호 교직이 일어나 혼합되는 현상을 의미하는 피지털개념을 기반으로 플랫폼에 대항하는 다중적 플랫폼 내지 커먼즈를 구축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그는 디지털 미디어기술에 의해 매개된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소통 능력을 가리키는 기술 감각개념을 바탕으로 사회 공통감각을 형성하는 것을 디지털 자본주의의 예속화에 맞서기 위한 대안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다른 한편 하대청은 서구의-남성-백인-부르주아-비장애인을 모델로 한 자율성 개념 대신 인간과 기계의 상호매개와 의존 개념에 근거하여 주류적인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자율적인 인공지능이라는 가상에 의해 은폐되어 드러나지 않는 루프 속의 프레카리아트의 노동,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부불노동으로 치부되었던 여성들의 돌봄노동과 등가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이는 한편으로 비가시화되고 폄하되어온 돌봄노동을 타자들의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책임감(responsibility)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격상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상호 매개와 의존을, 인간-기술 관계를 포함한 사회적 관계의 일반적 존재론으로 확장하는 결과를 낳는다.


인공지능으로 상징되는 우리 시대의 과학기술의 발전은 디지털 자본주의의 예속화 메커니즘을 강화하기 위한 토대로만 기능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반()자본주의 또는 적어도 포스트자본주의적인 전망을 위한 발판으로도 기능할 수 있는가? 김상민(2019, 2020)“AI 최소주의“AI 최대주의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영미권 좌파 이론가들의 논의를 소개하고 있다. 전자가 인공지능의 자동화 능력을 과장이나 허상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에 가려진 인간 노동의 착취 현실을 부각시킨다면, “가속주의”(accelerationism)로 대표되는 후자는 인공지능의 자동화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단조롭고 고된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더 나아가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으로 삼자고 주장한다. 바스타니는 인공지능에 바탕을 둔 완전한 자동화를 통해 인간이 정보, 노동, 에너지의 희소성에서 벗어나 화려하고 풍요로운 공산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바스타니 2020). 국내 학계나 사회운동에서 이 문제는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 디지털 자본주의가 심화될수록 주요한 이론적 문제로 부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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