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lesas 2005-08-06  

기쁨.
아, 기뻐라. 원서를 사는 기분이 이런 거였군요! 둘 중 한 권은 알튀세르의 Pour Marx(비스듬히 흘려줘야되나ㅋ)랍니다. 어우, 정말 이국의 언어들은 제겐 죄다 바닥인데;; 언젠가는 다 읽게 되겠지요. 어쨌든 너무 기쁩니다. 참, 앞으로도 몇 번 더 알튀세르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데요. problematique(악상 여기다 어떻게 쓰죠??) 라는 개념. 제가 그 의미를 몰라서, 왜 <문제틀>과 <문제설정>이라고 혼란스럽게 사용되는지 여쭤보고 싶네요. 그 개념을 처음 사용한 저자가 너무 낯설어서 번역된 게 있나 찾아봤는데, 없었어요. 차이와 반복에도 그것의 역주는 없던데...
 
 
balmas 2005-08-08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정말 기쁘겠군요. 원서를 처음 얻게 되면 기분이 남다르죠.
언젠가 꼭 읽게 되기를 바랍니다.

problematique(악상 표시는 "e" 위에 하는 거죠)는 알튀세르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의 친구였던 자크 마르탱(Jacques Martin)에게 빌려온 용어라고 하지만, 사실은 하이데거에게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크 마르탱이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려왔을 수도 있고, 또 알튀세르가 사실은 하이데거에게 빌려온 것이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60년대 당시에 하이데거에게 어떤 철학 개념을 빌려온다고 공공연히 얘기하기는 매우 어려웠죠) 다른 사람에게 출처를 돌렸을 수도 있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는 아니죠.
제 기억에만 의존해서 말하자면(아마 맞긴 맞을 텐데, 책을 찾아볼 시간이 없어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는 Problematik이라는 용어도 나오고 Problemstellung이라는 용어도 등장합니다. 국역본에는 각각 "문제성"과 "문제제기"라고 번역되어 있던 것 같던데, 이것도 확실치는 않군요. 그가 이 단어들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말 그대로 "문제들의 집합" 또는 "문제틀"이나 "문제제기" 정도의 의미로 쓴

balmas 2005-08-08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막연한 추측이긴 한데, 이 용어의 용법은 아마도 당대의 신칸트주의에서 유래한 게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의 의미는 철학은 객관적 실재 자체가 아니라 인식 주관이 주어지는 감각자료를 구성하는 방식, 또는 주어지는 현상을 인식할 수 있는 인식 주관의 능력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는 칸트 철학의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세계, 실재에 대한 인식은 문제들의 집합이나 문제를 구성하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이런 (넓은 의미의) 신칸트주의적인, 또는 포스트칸트주의적인 관점은 알튀세르가 이 개념을 사용할 때에도 전제되어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알튀세르가 이 개념을 사용해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문제들의 집합 위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 실재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죠. 가령 청년 마르크스가 "의식"이나 "소외", "실천", "노동" 같은 개념들을 사용해서 책을 쓰고 논쟁을 할 때, 마르크스는 여전히 포이어바흐의 문제설정에, 또는 문제틀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가 "이데올로기" "생산양식" 같은 개념들, 포이어바흐에게서는 볼

balmas 2005-08-08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 없는 개념들을 사용해서 저술하고 논의를 할 때, 마르크스는 새로운 문제설정이나 문제틀을 얻었다, 또는 그 바탕에서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거죠. 이렇게 되면 동일한 사태나 현상을 전혀 다른 식으로 인식하게 되겠죠. 이런 의미에서는 "관점"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을텐데, 다만 차이는 관점이라는 말은 한 사람의 주관적인 입장이나 견해를 의미하는 데 반해, 문제설정이나 문제틀이라는 용어는 이론적인 장 자체를 구성하는 작용이나 틀을 가리킨다는 점이죠. 그래서 단순히 주관적인 입장과는 좀 차이가 있죠.

마지막으로 이 용어와 관련해서 {차이와 반복}을 언급했는데, 사실 거기에도 이 용어가 등장하죠. 그런데, 좀더 조사해봐야 하지만, {차이와 반복}에서의 용법은 프랑스에서 이 용어, 또는 "probleme"이라는 개념이 수용된 역사와 더 많이 결부되어 있는 것 같아요. 다시 말해 1930년대 프랑스에서 후설과 하이데거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일부의 과학철학자들이 수리철학 영역에서 이 용어들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들뢰즈는 그 중 일부(로트만)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오히려 알튀세리엥들은 로트만보다는 카바이예스라는 철학자의

balmas 2005-08-08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죠. 지금으로서는 이것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기 어렵겠네요.

그리고 몇 가지 질문이 더 있다고 했는데, 가능하다면 나중에 질문해주면 고맙겠습니다. 9월 초까지는 다른 일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에, 알라딘에도 거의 못들어올 것 같거든요.
그럼 독서 많이 하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

cplesas 2005-08-08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재밌네요, 칸트(이성의 물음)와 하이데거(현존재의 물음)의 그것이라니.
<차이와 반복>을 읽다가 그런 생각은 못해봤어요.
문제틀이라는 개념이 원래 다른 이의 것인데
아마 들뢰즈는 철학사의 몇몇 맥락을 거기에 귀속시킨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후아, 그래도 여전히 <문제틀>은 낯설기만 하네요.

그럼 또 차분히 <맑스를 위하여>를 읽고서,
9월 초에 또 질문드릴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