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슬레이 2004-11-25  

또 들렀습니다.
여전히 왕성하게 서재 활동을 하고 계시는군요.^^ balmas님의 서재에서는 항상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번에 이야기해주셨던 라캉에 대한 책들은, 다 읽지는 않았지만 그 중에 몇권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라캉과 정신의학>은 제게 아주 유익했습니다. 요새 책을 읽다가 '프로이트-맑스주의'라는 말을 접하게 됐는데, 이건 맑스와 프로이트를 어떻게 접목한 것인가요? 혹시 프로이트-맑스주의에 대해 접할만한 책을 알고 계시다면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s. 이거 항상 질문만 하고 가네요. 죄송합니다^^;;;
 
 
balmas 2004-11-26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는 이른바 '서구 마르크스주의'만이 아니라 20세기 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론적 시도인데요, 1930년대 빌헬름 라이히나 허버트 마르쿠제 등에서부터 초기 알튀세르나 들뢰즈/가타리(특히 [앙티 오이디푸스]) 등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어 왔습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접목하는 양상은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를 시도하는 사람마다 좀 상이하기 때문에 한 마다로 말하기는 어렵죠. 다만 계급적 통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또는 심지어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반대하여 행위하는 대중운동의 현상을 설명하려는 데서 이런 시도가 나왔다고 할 수 있겠죠. 최근의 지젝 같은 사람의 작업은 일종의 포스트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적 작업이라 할 만한 작업들 중 하나죠.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은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책인데, 이전에 현상과 인식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지만, 지금은 절판된 것 같습니다.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 같은 책이나 여러 논문들도 역시 이런 부류의 작업으로 볼 수 있죠.
구조주의에서는 알튀세르의 [프로이트와 라캉]([아미엥에서의 주장]에 수록)이나 [알튀세르와 라캉](공감)에 수록된 글들이 볼 만합니다.

balmas 2004-11-26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가타리의 [앙티 오이디푸스]도 대표적인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저작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책인데, 아시다시피 민음사에서 나온 번역본은 번역이 좋지 않아서 권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이 책이 재번역 중이니까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푸코의 [성의 역사] 1권은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하나의 강력한 비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모 2004-11-28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 / 제가 들뢰즈도 가타리도 프로이트도 맑스도 잘 몰라서(아는 게 뭐여 대체;;) 그러는데요, 음, 들뢰즈+가타리의 그 책은 프로이트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아니면 그 '비판적'이라는 게 프로이트가 만들어놓은 담론 체계 안에서의 '비판적'인, 일종의 더욱 급진적인 프로이트주의 같은 건가요? 그리고 그렇다면, <성의 역사 1>에서 푸코가 행하는 비판의 대상에는 들뢰즈+가타리 또한 포함되어 있다고 이해해야 하나요? (들뢰즈와 푸코가, 물론 입장의 차이는 있겠지만 서로의 이론에 대해 퍽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한 걸로 알고 있어서요.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였나 <안티 오이디푸스>를 호의적으로 인용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고.)

balmas 2004-11-29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모님,
[앙티오이디푸스]는 물론 프로이트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그럼에도 [앙티오이디푸스]가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의 흐름에 포함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 책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추구하는 일이 (1) 계급적 이익보다 더 심층적으로 대중운동의 양상을 규정하는 욕망이라는 힘을 해명하려고 시도했고 (2) 이에 기반하여 역사유물론과 정신분석을 비판적으로(특히 후자를) 개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푸코에게 1975년([감시와 처벌] 출간)-76년([성의 역사 1권] 출간)은 매우 의미심장한 시기였는데, 들뢰즈(-가타리)와의 관계라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푸코와 들뢰즈는 1976년에 지적으로 결별해서 푸코가 1984년 죽을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서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결별에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지만 심층적으로는 양자 사이의 철학적 입장의 차이가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거기에서 문제되는 게 바로 <욕망>이라는 개념이죠. 푸코가 보기에 이 개념은 너무 실체론적이고 본질주의적인 개념인 데 비해(이는 [성의 역사 1권]에서 <억압 가설>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되죠), 들뢰즈에게는 근본적인 정치적 실천을 위해서는 포기할 수 없는 개념이었던 셈입니다.

balmas 2004-11-29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72년에 푸코가 [앙티오이디푸스]에 [서문]을 달아주면서 "비파시스트적 삶의 윤리를 위한 입문서"(정확한 문구인지는 의문 ...)라는 극찬을 한 적이 있는데, 두 사람은 비파시트적인 철학과 정치, 윤리의 길을 둘러싸고 4년만에 결별한 셈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곧 반파시즘의 정치와 윤리를 핵심적인 이론적 목표로 제기하고, 이를 위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결합하려고 시도했다는 의미에서 [앙티오이디푸스]를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반면 [성의 역사 1권]은 이 시도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있는 책이죠.

모모 2004-11-30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디에 에리봉의 평전에서는 베르나르 앙리-레비나 글뤽스만 등을 둘러싼 의견 대립 때문에 사이가 멀어졌다..는 정도의 이야기만 나와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런 다른 배경이 있었군요. 음. 좋은 설명 고맙습니다 =)

p.s. 오늘 <푸코와 맑스>를 사서 앞부분만 조금 읽었는데, 재밌더군요. 크. 근데 번역한 분이 1980년생이라서 잠시 흠칫; 번역의 퀄리티는, 오역의 여부는 모르겠지만 문장이 약간 거친 듯해요. 뭐 오역만 아니라면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수준인듯. 기본적으로 영역본에서 중역을 하고 거기에 불어판과 다른 영역본 등을 참고했더군요.

카슬레이 2004-12-20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절한 답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