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파란] 21호, 2021년 여름호에 실린 원고 한 편 올립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관련하여 '안전'의 문제에 관해 생각해본 단상입니다. 


이후에 '포스트 코로나'에 관한 단상도 올릴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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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의 인간의 조건에 관한 단상 I 안전에 관하여

 

 

1. 코로나19 팬데믹의 시간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에 대해 팬데믹을 선언한지 1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처음 중국에서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했고 우리나라에 첫 번째 확진자가 생겨났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전의 사스 바이러스(2003)나 메르스 바이러스(2014) 때처럼, 이번 바이러스도 다소간 피해를 주겠지만 늦어도 몇 달 안에 잠잠해질 것으로 생각했고, 그만큼 무심하게 대했다. 이것은 이웃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 등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방역 당국은 당연히 심각한 문제로 간주했겠지만, 전문가가 아닌 나와 같이 평범한 시민들은 또 하나의 바이러스가 출현했군, 아 당분간 귀찮게 됐네 ...’ 이 정도의 반응이 일반적이었을 것 같다. 이미 여러 종류의 바이러스를 경험했던 동아시아 사람들의 경우에도 이랬으니, 수십 년 동안 본격적인 바이러스 감염증을 경험하지 못했던, 유럽이나 북미 대륙 사람들은 아마 훨씬 더 태평하고 무심했으리라. ‘동아시아에 또 바이러스가 출몰했다는군. 불쌍한 사람들.’ 이 정도의 반응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초기 예상과 달리 코로나19, 그 이전의 다른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들과 달리 팬데믹으로 확산되었고, 2021423일 기준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는 15천만명을 넘어섰으며, 사망자는 300만명을 넘었다. 특히 코로나19 재앙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인도의 경우는 51일 기준 1일 코로나 확진자 수가 40만명을 넘어섰고, 1일 사망자 수도 3천명을 넘어서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전문가들은 실제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는 공식 기록의 몇 배 이상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202011월 예상과 달리 빠른 시간 내에 미국 제약사인 화이자(독일의 바이오엔테크와 공동 개발)와 모더나에서 m-RNA 백신을 최초로 개발함으로써 2021년 여름 무렵이면 집단 면역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 전망이 나오기도 했으나, 이는 섣부른 전망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영국 변이, 남아공 변이, 브라질 변이, 인도 변이 등과 같이 처음의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감염력이 강한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가 지속적으로 출현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m-RNA 백신이 이전의 백신들보다 변이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출현하는 변이 바이러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백신에 대한 상당한 거부감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백신 개발 국가의 백신 독점으로 인해, 코로나19 백신이 방역 능력이 취약한 신흥국들이나 저개발 국가들에게 효과적으로 배분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역시 코로나19 확산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네이처󰡕코로나19에 대한 집단 면역이 불가능해 보이는 5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최근 기사에서 코로나19 집단 면역이 사실상 어려워 보이며, 코로나19는 계속 풍토병으로 남게 될 것 같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Five reasons why COVID herd immunity is probably impossible”, Nature no. 591, 18 March, 2021.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1-00728-2 (2021.5.7. 접속)] 또한 우리나라의 신종감염병 중앙임상위원회 역시 코로나19 집단면역이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며, 코로나19는 토착화되고, 인플루엔자(독감) 백신처럼 주기적으로 백신 접종이 필요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코로나19 집단면역 가능불가능, 입장 선회 이유는?, 󰡔메디포뉴스󰡕 2021.5.4. http://www.medifonews.com/news/article.html?no=160172 (2021.5.7. 접속)] 성인만을 접종 대상으로 하는 현재의 백신으로 인구의 70% 이상에서 집단 면역 효과를 낳기 위해서는 면역효과가 95%인 백신이 필요하지만, 현재 개발된 백신 가운데 이 정도의 면역효과를 보이는 백신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백신의 효과는 백신을 접종한 개인의 발병 가능성을 예방하는 효과이지,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을 예방하는 효과가 아니기 때문에, 면역효과가 95%인 백신의 가능성은 더 줄어든다는 것이다. 또한 집단 면역의 전제가 되는 코로나 재생산지수 3”이라는 기준 역시 임상적으로 가정된 기준일 뿐이며 실제 재생산지수는 훨씬 편차가 크기 때문에, 역시 집단 면역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앙임상위원회의 결론이다. 따라서 백신 접종 전략은 코로나19 근절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국내외 전문가들의 결론인 셈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의 시간은, 많은 사람들의 희망 섞인 전망과 달리 올해는 물론이거니와 아마도 향후 몇 년간은 더 지속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볼 수 있다. 1918~19년 전 세계를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의 경우보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의학적 역량은 몰라보게 성장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세계는 그 당시보다 훨씬 더 세계화되었으며, 또한 훨씬 더 생태적으로 파괴되고 사회경제적으로 불평등해진 것이다.

 

2. 우리 시대 인간의 조건은 어떤 것인가?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유행은 우리 시대가 거대한 이행의 시기라는 점을 다시 일깨워준다. 해방의 정치의 역사적 실험으로서 사회주의 체제의 종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 국민국가 체계의 쇠퇴와 난민의 일반화, 생태적 재앙의 예고와 탄소경제의 종말, 포스트 휴머니즘의 도래 등과 같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몇 가지 문구들을 열거해보는 것만으로도 이를 납득할 수 있다. 이러한 거대한 이행의 시대에 더해진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의 시대가 다중적인 변화와 위기의 시대라는 것, 또는 몇 년 전 작고한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안토니오 그람시에게서 가져와서 사용한 개념을 빌려서 말하자면, 인터레그넘(interregnum)의 시대,[인터레그넘에 관해서는, 진태원, 몫 없는 이들의 몫: 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을의 민주주의: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그린비, 2017 참조.] 낡은 것은 사라져 가는데, 아직 새로운 것은 탄생하지 않은시대라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게 해주는 것이다.[얼마 전 출간된 낸시 프레이저의 팜플렛 제목 역시 인터레그넘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김성준 옮김, 책세상, 2021 참조.]


이러한 인터레그넘의 시대에 우리가 질문해봐야 할 것 중 하나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주제가 아닌가 한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실재로서의 인간은 불변적인 본질을 지닌 존재자가 아니라, 역사적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를 재규정해온 생성과 변화 속의 존재자라는 점을 전제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거대한 이행의 시대에 인간의 정체성, 인간의 본질이 이전과 동일하게 남으리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 시대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과 동물 사이에서 인간의 자리를 규정하기 위해 노력했을 때처럼, 또한 고대 중국에서 공자를 비롯한 당대의 사상가들이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의 위치를 놓으려고 고심했을 때처럼, 또한 기독교 탄생 이후의 사상가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새로운 본질을 탐색했을 때처럼, 그리고 17세기 과학혁명의 충격 속에서 근대 철학자들이 기하학적인 자연의 질서 위에서 인간에 대한 혁명적인 재규정을 모색했을 때처럼, 또는 19세기 말 제국주의적인 서양 문명의 충격 속에서 아시아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지식인들이 전통적인 세계관 대신 새롭게 부과된 세계관 속에서 자신들의 전통과 인간의 모습을 다시 파악하도록 강제되었을 때처럼, 인간을 그의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재규정하고 재구성해야 하는 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인간의 조건을 이해하기 위한 이중적 가설: 타율적인 기업가 주체

 

나는 우리가 인간의 조건이라는 문제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설 위에서 제기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오늘날의 인간의 조건은 타율화의 조건 속에서 고도의 자율성을 강제 받고 있는 상황이라는 가설을 제기해볼 수 있다. 여기서 타율화의 조건이라는 말은, 근대적인 인간을 근대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던 조건이 이제 쇠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지하다시피 근대는 주체의 시대이고, 주체는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특성으로 지닌다. 근대적인 주체의 자율성을 철학적으로 가장 정교하게 제시했던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였다. 그는 인식론적으로는 초월론적 주체(transcendental subject)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외부 세계가 아니라 주체에 근거한 인식의 가능성을 정초했으며, 스스로 이것을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불렀다. 또한 칸트는 도덕적 행위의 기초는 신적인 초월성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적 본성에 있는 것도 아니며, 사회적 권위나 관습에 놓인 것도 아니고, 오직 주체 자신의 선의지에 달려 있다는 원리에 의거하여 자율성 개념을 근대 실천철학의 근본 개념으로 정립했다.


하지만 칸트의 철학은 (아주 위대한 철학이기는 하지만) 근대적인 사회정치적 변화의 원인이 아니라 그 산물이었다. 특히 칸트와 거의 동시대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정치적 변혁은 칸트 철학을 가능하게 했던, 주체 발명의 혁명이었다.[Etienne Balibar, “Citoyen sujet”, in Citoyen sujet et autres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PUF, 2011.]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하 인권선언으로 약칭)에서 천명된 근대성의 정치적이념적 약속은 신분적 예속, 정치적 예속, 인간학적 예속(인종적성적지적 예속)에서 벗어나 각각의 개인, 민족, 인종, 젠더가 자율성의 이념에 입각하여 평등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약속 위에서 수립된 것이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근대의 사회정치적 질서였으며, 그것의 가장 진보적인 표현이 20세기 후반의 복지국가 체제였다. ‘복지국가체제는 근대적 인간이 그 정치적이념적 약속에 걸맞은 인간적 자율성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제도적 조건을 구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근대적인 사회정치적 체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영국의 사회학자였던 마셜에 따르면 시민권의 역사는 18세의 공민권 내지 개인적 시민권(사유재산의 자유, 신체의 자유, 계약 체결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에서 19세기의 정치권(선거권, 피선거권 등)으로, 그리고 20세기에는 사회권으로 진화해온 과정이다.[토마스 험프리 마셜톰 보토모어, 󰡔시민권󰡕, 조성은 옮김, 나눔의 집, 2014. 원서는 T. H. Marshall, “Citizenship and Social Class”, in Citizenship and Social Class and Other Essays,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0.] 20세기 후반 복지국가에서는 여러 가지 사회권들(무상교육, 의료보험, 실업수당, 양육비, 주거 보조비 ...)이 시민권 자체 속으로 통합되었으며, 각각의 시민 또는 국민은 개인적 권리와 정치권 이외에 사회권을 기본권으로 향유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시민권은 사회적 시민권이 되었다. 곧 사회권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시혜나 구제(이는 또 하나의 차별이 된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나라의 모든 시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를 뜻한다. 따라서 사회적 시민권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진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는 모순적인 이중의 효과를 산출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적 자율성의 물질적제도적 조건으로서 복지체계의 기본 구조를 와해시키면서 사람들, 특히 하층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소수자들이자 약소자들이라는 의미에서 마이너리티(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로 만들었다. 신자유주의적 사회는 노동운동가 김혜진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비정규사회.[김혜진, 󰡔비정규사회󰡕, 후마니타스, 2015.] 신자유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을 포함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불안정한 노동,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된다.


정규직 일자리를 얻으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사실 착각일 뿐이다.[이정아, 김수현, 정규직의 허구적 안정성과 청년의 불안정성, 󰡔경제와 사회󰡕 114, 2017.] 평균 수명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데 정규직 일자리가 언제까지 보장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뿐더러, 정상적인 근로소득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치솟는 집값은 기본적인 생활 여건에 큰 부담을 주고, 강도 높은 노동으로 인해 이른바 워라벨’(Work-life balance)을 적절하게 유지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우리가 예전 복지국가 시대에 정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 곧 직장을 갖고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키워서 훌륭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만든 뒤, 적절한 시점에 은퇴하여 편안한 여생을 누리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이, 특권적인 소수를 제외하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추구하게 되며, 특히 을들은 권리를 빼앗긴 이등국민[김혜진, 󰡔비정규사회󰡕, 77.]의 삶을 살도록 강제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는 모순적이게도 사람들이 고도의 자율적 주체로서 행위하도록 강제한다. 이점을 특히 잘 보여준 사람은 바로 미셸 푸코였다. 푸코는 1978-1979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했던 강의를 묶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신자유주의의 두 가지 뿌리를 이루는 독일의 질서 자유주의”(Ordo-Liberalismus) 학파 및 미국의 시카고학파의 주요 이론과 개념들을 분석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를 제시한 바 있다.[Michel Foucault,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 Gallimard/Seuil, 2004;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2.] 푸코는 이 강의록에서 애덤 스미스에서 유래한 고전적인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핵심적인 차이점을 교환경쟁이라는 두 가지 개념의 차이에서 찾는다. 고전 자유주의는 시장을 특수한 국가 제도나 사회 부문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연적인 체계로 간주했으며, 이 때문에 고전 자유주의에서 시장은 국가 권력을 재해석하고 비판적으로 한정하기 위한 토대로 작용한다. 반면 신자유주의는 교환이 아니라 경쟁에 초점을 맞추며, 교환 대신 경쟁을 경제적 인간학의 근본 원리로 간주한다.


이에 따라 고전적인 자유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야경국가”) 국가와 구별되는 시장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반면 신자유주의에서 이러한 구별은 더는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장의 원리를 국가를 비롯한 사회 전체, 그리고 인간의 삶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에서는 국가 역시 최소의 비용을 통해 최대한의 효율성을 달성하려는 경영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하며, 인간들의 삶의 모든 측면에도 이러한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적인 관점(특히 미국의 시카고학파)에 따를 경우 경제학의 범위가 무한정하게 확장된다.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자인 게리 베커의 정의를 원용하면서(“경제학은 인간 행동을, 목적들과, 양자택일적 용도를 갖는 희소한 수단들 사이의 관계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242.]) 푸코가 말하듯이 이제 결혼과 범죄, 아이 양육 등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행하는 행동이라면 모두 경제적인 비용 계산의 대상이 되며, 따라서 경제적인 활동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제 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 원리는 더 이상 사회의 한 부문이 아니라 사회 전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주체는 기업가”(l'homme de l'entreprise)가 되며, 인간의 활동은 인적 자본의 관점에서 재정의된다.


급변하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모든 개인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기업가 주체로서 모험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학업과 취업 내지 창업, 연애, 결혼, 양육, 이주는 물론이고 취미생활, 건강관리 같은 일상적인 생활도 모두 투자의 관점에서 이해되며, 그 성패 여부는 기업가로서 각 개인의 책임으로 귀속된다. 아울러 부동산투자, 금융투자는 신자유주의적 기업가 주체로서 각 개인의 필수적인 투자 활동이자 덕목이 된다. 고도로 자율적인 주체들만이 기업가 주체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말한 바, 오늘날의 인간들은 타율성의 조건 속에서 고도의 자율성을 강제 받고 있다는 가설의 뜻이다.

 

4. 탈인간주의적인 정치적윤리적 규범은 무엇인가?

 

둘째, 탈인간주의의 조건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윤리적 규범을 발명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라는 가설이다.

근대성의 시대는, 하이데거와 알튀세르가 각자 개념화한 바와 같이 인간주의(humanism)의 시대였다.[마르틴 하이데거, 휴머니즘에 관한 서간, 󰡔이정표 2󰡕, 이선일 옮김, 한길사, 2005; 󰡔니체󰡕 2, 박찬국 옮김, 도서출판 길, 2012;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옮김, 후마니타스, 2017;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을 각각 참조.] 표준적인 철학사 이해에 입각하면, 서양 근대철학은 르네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개념에서 출발한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1637)이나 󰡔성찰󰡕(1641) 같은 그의 주요 저작에서 회의주의에 맞서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을 자신의 철학의 중심 과제로 삼았다. 데카르트는 이른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확실한 지식의 기초를 발견한다. 따라서 생각하는 나를 뜻하는 코기토 개념은, 우주의 창조주로서 신과 자연적인 실체에 중심을 둔 중세철학과 단절하는 근대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이 되었다.


데카르트 이후 주체 개념을 근대 철학의 확고한 기초로 확립한 철학자는 칸트였다. 칸트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더욱 급진적으로 밀고 나가, 앞에서 말했듯이 철학에서 코페니르쿠스적 전회를 이룩한다. 다시 말해 이전까지는 주체의 관념이나 표상이 진리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가 주체 바깥에 존재하는 객관적 사물에 있었다면, 칸트는 그러한 기준을 인식 주체 자체 내에서 발견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잡다한 인상에 대해 통일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하나의 일관된 개념적 표상으로 구성하는 것은 인식 주체의 활동이라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칸트 이후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관념론적인 성격을 띠게 되며,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는 인식 주체의 활동의 소산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주체 중심의 철학은 헤겔 철학을 통해 완성된 체계를 얻게 된다.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욕구와 의지의 주체로서 근대적인 주체 개념을 정립한 것으로 파악한다. 곧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의 역사에서 근대성은 무엇보다 존재를 의지, 본질의 욕구(exigentia essentiae)”[마르틴 하이데거, 󰡔니체󰡕 2, 422. 강조 표시는 원문.]로 파악한 시대다. 근대에서 존재는 모든 의지가 자신을 의지하는 것인 한, ‘자신에게로향해서’(Auf-sich-zu)라는 것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며, “이러한 자신에게로 향해서라는 것의 본래적인 본질은 자기성으로서의 이성에서 실현된다. 존재는 의지에의 의지이다.”[같은 책, 423.] 따라서 하이데거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기체성(基體性, Subiectität)과 구별되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주체성(Subjektivität)을 설립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코기토가 단순히 표상들의 주어 내지 주체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니체에게서 완성되는 의지의 의지로서의 주체성 개념의 개시를 나타낸다는 뜻이다.


하이데거가 특이하게도 데카르트의 주관성 내지 주체성의 형이상학을 고대 소피스트 철학자였던 프로타고라스와 연결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곧 이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 인간주의의 철학적 표현으로 이해하고, 이것의 형이상학적 완성을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힘을 위해 힘을 추구하는 의지의 의지에서 발견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코기토, 소유적 개인주의, 예속적 주체화: 서양 근대에서 개인과 개인주의, 󰡔민족문화연구󰡕 89, 2020 참조.]

 

지구 전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배를 위해 인류의 모든 능력을 최고도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전개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인으로 하여금 더 새롭고 가장 새롭게 발진하도록 촉발하고 그의 안전한 전진과 목표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지침을 정립하도록 촉구하는 은밀한 목표다. () 근대 역사에서, 더 정확히 말하면 근대적 인간 유형의 역사에서 인간은 도처에서 그리고 항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중심과 척도로서 내세우면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려 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니체󰡕 2, 132~33.]

 

다른 한편 알튀세르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을 통해 자율적인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근대적 개인 또는 주체가 사실은 그가 예속화”(assujettissement)라고 부른 예속적 주체 생산의 메커니즘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준 바 있다.[루이 알튀세르, ; 󰡔재생산에 대하여󰡕, 앞의 책 참조.] 알튀세르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인간주의’(humanism)에서 발견했으며, 주체 개념을 그것의 철학적 표현으로 이해했다. 알튀세르의 이러한 관점은 사실 마르크스의 통찰을 더욱 확장하고 급진화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초기 저술인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1844)에서나 후기 저술인 󰡔자본󰡕에서 지속적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모순적인 성격을 고발한 바 있다.[칼 마르크스,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 김현 옮김, 책세상, 2015; 󰡔자본󰡕 1-1,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인권선언에서 천명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법적정치적 영역에서는 모든 사람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언하지만, 정치적 이념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법적 문구 속에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것으로 가정되는 사람들은, 현실의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는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같은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들로 분할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권선언이 내세우는 평등과 자유는 사실은 현실의 계급적 지배 및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1번은 법적 이데올로기이며, 법적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자유와 평등이라고 주장할 때, 사실 그는 마르크스의 통찰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루이 알튀세르, 󰡔재생산에 대하여󰡕 5참조.하지만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본질적인 기능은 예속적 주체의 구성이라고 주장할 때, 그는 마르크스를 넘어서 새로운 이론적 발명의 경지에 도달한다. 유명한 호명 테제가 뜻하는 바가 바로 이점이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한다. ...

주체 범주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구성적이라고 말하자. 하지만 여기에 곧바로 다음과 같은 점을 추가해두자. 주체 범주가 모든 이데올로기에 구성적인 것은 모든 이데올로기가 구체적 개인들을 주체들로 구성하는것을 자신의 기능(이는 이데올로기를 정의하는 기능이다)으로 갖고 있는 한에서다. 바로 이러한 이중적 구성 작용 안에서 모든 이데올로기의 기능 작용이 실존하며, 이데올로기는 이 기능 작용의 실존의 물질적 형태들 안에서 자신의 기능 작용 이외의 것이 아니다.[루이 알튀세르, 같은 책, 287~88. 번역은 약간 수정했으며, 강조는 원문.]

 

알튀세르 호명 개념의 핵심 논점은, 우리가 이데올로기나 권력의 작용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가정하는 개인 또는 주체가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강한 의미에서, 개인 또는 주체는 이데올로기 바깥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만 실존하고 존속할 수 있다. 역으로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따위의 피상적인 작용의 중심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의 본질적인 기능은 주체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 호명은 개인들 내지 주체들이 바로 그 개인들 내지 주체들로서 존재하는 양식이 사실은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과 내재적으로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처럼 인간의 개인적인 실존 양식, 개인성 그 자체가 계급 지배 및 권력에 대한 예속을 전제로 한다면, 해방의 사상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 이데올로기적 분석을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할 수밖에 없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이론이 그처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역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서 인간주의는, 이처럼 인간 개인 내지 주체의 구성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체계의 성립, 따라서 계급적 착취 및 지배의 구성과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오히려 인간주의는 인간은 본성상 자유롭고 법 앞에서 평등한 존재자라고 주장하며, 이것이 중세의 신분적 예속의 질서에서 벗어난 인간의 해방을 표현하는 근대성의 핵심 이념이라고 자부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했던 것을 데카르트는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라는 말로 새롭게 변형했고, 그것은 다시 헤겔 또는 루카치에 이르러 인간은 역사의 주체라는 테제로 지양되었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율적 주체이며 각자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이라는 테제의 이면에는 인간은 우주와 자연, 역사의 주인이라는 또 다른 테제가 놓여 있다. 인간주의는 바로 이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했던 근대성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였다.


21세기가 거대한 이행의 시기라는 것은 이러한 인간주의가 더 이상 자명한 해방의 이념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퇴행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뜻을 함축한다. “인간이 먼저다는 구호는 사회경제적 영역에서조차 진부하고 쓸모없는 문구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국가 경제의 발전’, ‘국제적 경쟁력 강화’, ‘성장 동력의 발견’, ‘디지털그린 뉴딜같은 노골적인 이데올로기적 표어를 얼마간 완화하거나 감춰보려는 자위적인 소심한 수사법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먼저다라는 말은 갑질에 대해서도, 여성이나 성 소수자, 장애인 또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효과를 산출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 말은 생태적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퇴행적인 측면을 지닌다. 자연 환경의 파괴나 동물에 대한 과도한 착취의 기저에는 인간이 자연과 우주의 주인이라는 인간주의 이념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 기술에 대한 대중들의 양가적 반응, 곧 과도한 두려움과 전능함에 대한 환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것 역시 인간주의의 이념이다.


따라서 근대성을 지배해왔던 인간주의의 이념에서 벗어나 한편으로 우리 시대의 을들이 어떻게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발명할 것인가 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주권적이지만 배타적인 주체의 이념에서 벗어나 어떻게 타자들과의 공존 및 공생의 규범을 창안할 것인가 하는 것이, 21세기의 인간의 조건을 사고하기 위해 우리가 출발해볼 수 있는 가설이다.

 

5. 안전의 이중성

 

이러한 두 가지 가설에 입각하여 안전의 문제를 사고해볼 수 있다. 안전이라는 주제는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에 가장 널리 논의되고 또한 가장 널리 요청되는 주제 중 하나일 터이다. 20세기 초 스페인 독감 이래 근 100여년 만에 닥친 전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는 모든 사람이 안전이라는 가치에 주목하고 집중하게 만들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개인별 철저한 위생수칙 준수는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시민의 의무이자 안전 규칙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자명하고 보편성을 띤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규칙으로 보인다. 전 세계적으로 15천만명이 넘는 확진자와 3백만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21세기 최초의 팬데믹 상황에서 안전이라는 가치야말로 가장 시급하면서도 보편적인 규범이라는 점에 대해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 안전은 매우 모순적인 규범이자 구호. 예를 들어보자. 코로나19 팬데믹 선언이 이루어지기 이전인 작년 1월 말부터 이미 국내에서는 중국 동포와 중국인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염운옥, 배제의 정치학: 인종주의, 국민주의와 불안전의 ()생산, 󰡔황해문화󰡕 110, 2021년 봄호 참조.중국 동포가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서울 대림동에서는 작년 1월 말 한국 전체에서 확진자가 7천명을 넘어서는 시점까지 단 한 명의 확진자도 발생하지 않았는데, 중국 동포들이 마치 코로나19 확산의 주범인 것처럼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이다. 또한 잘 알려져 있다시피 2020년 겨울~2021년 봄 사이에 미국에서는 여러 차례 아시아계 주민들을 상대로 한 증오범죄가 발생한 바 있다. 이는 무엇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한편으로는 코로나19 방역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과의 정치적경제적 경쟁에서 우월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중국 바이러스”(china virus)라고 부르면서 중국에 대한 대중적 혐오를 조장한 데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자신의 실존적이고 사회경제적인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많은 개인들 및 대중의 공포감이 작용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중국이 이러한 안전을 깨뜨린 원인으로 표상/재현되면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감이 일어나고, 이것이 아시아인 전체에 대한 인종적 증오심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경우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이미 2020년 상반기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강력한 타격을 받은 유럽 지역에서 광범위한 동양인에 대한 대중적 혐오감이 발생한 적이 있다.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Made in China”라는 제목으로 표현한 독일 시사 잡지 󰡔슈피겔󰡕의 기사나, 코로나 바이러스 발생의 원인을 중국의 비문명적인 야만성에서 찾는 유럽의 대중 담론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이은정, 코로나와 아시아의 타자화, 󰡔황해문화󰡕 108, 2020년 가을호 참조.]


한국에서 일어났던 중국인과 중국 동포에 대한 혐오, 미국에서 발생한 아시아인들에 대한 증오 폭력, 그리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제기된 중국 및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중국인 및 아시아인들을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지칭하는 언어적 폭력의 현상이다. 대림동에서 중국인 및 중국 동포에 대한 호칭이 짱깨에서 다문화, 그리고 다시 코로나로 변모된 것처럼, 미국에서도, 독일 및 유럽에서도 중국인 및 아시아인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바이러스라는 모욕적인 호칭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의 상상과 욕망 속에서 아시아인 =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존재론적 등식이 작용하고 있다. 아시아인의 존재론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전과 사회경제적정치적 안전에 대한 대중들의 요구와, 타자들, 특히 중국 및 아시아인들을 혐오하거나 증오하는 대중들의 분노가 사실 동일한 욕망의 두 가지 표현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동일한 하나의 운동의 앞면과 뒷면인 셈이다. 코로나 19 팬데믹과 같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처음 경험하는 대규모의 집단 감염병의 유행에 직면하여 자신과 가족, 이웃의 안전을 도모하고 또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기본 권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명하고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 요구는 또한 불가피하게 타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 폭력과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일어난 한국 동포들에 대한 증오 폭력에 분노하면서, 한국인은 중국인이 아니라고, 제대로 구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문제의 쟁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 및 증오와 동일한 작용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많은 미국인들이나 유럽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논점이다. 곧 그 미국인들(상당수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온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상당수는 유럽에서 오랫동안 차별의 대상이 되어온 하층 계급이나 이민자 유럽인들)은 중국인과 아시아인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가 사실은 자신들을 대상으로 한 증오의 상상적 배출구이면서 동시에 복제물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은,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인과 한국인을 구별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미국인 내지 유럽인으로서의 자신들과 혐오스러운 타자로서의 아시아인을 제대로 구별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안전이라는 규범 내지 명령이 이렇게 모순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잘 보여준 바 있듯이, 안전은 역사적으로 이중적인 면모를 띠어왔다.[에티엔 발리바르, ...... ‘안전과 압제에 대한 저항,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1 참조. 또한 정정훈, 안전의 변증법, 혹은 민주적 권리에 내재된 모순, 󰡔황해문화󰡕 110, 2021년 봄호 참조.] 한편으로 안전은 프랑스혁명 이래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인권선언2조에 나오듯이 자유, 소유권, 압제에 대한 저항과 더불어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 규정되었다. 또한 미국 독립선언서에서도 안전은 행복과 더불어 가장 기본적인 인민의 권리로 제시된 바 있다. “어떠한 정부든 이러한 목표에 반할 경우, 그 정부를 교체하거나 폐지하고 인민에게 안전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원칙에 기반하여 권력을 조직한 새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정정훈, 앞의 글, 24~25쪽에서 재인용.]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안전은 치안의 기본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안전에 대한 요구는 많은 경우 사회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고 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는 모종의 세력에 대한 통제와 억압의 요구로 표현된다. 이에 따라 안전에 대한 요구는 가령 작업장 안전, 쾌적한 환경, 편안한 주거, (여성의) 안심 귀갓길, (장애인의) 이동의 권리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또한 혐오시설 철거, 불법이주자 추방, 여성, 성적 소수자, 장애인 등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요구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민원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많은 권리 요구는 사실 차별과 배제에 대한 요구들이다.


안전에 대한 요구를 특징짓는 이러한 모순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래 더욱 첨예한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안전에 대한 권리는 일차적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극소수의 부자들이 점점 더 많은 부를 차지함에 따라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줄어드는 몫을 둘러싸고 더욱 치열하고 가혹한 경쟁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늘 피해자 내지 패배자의 위치를 강요당하는 성적경제적사회적 약소자들의 절박한 생존에 대한 요구를 표현한다. 하지만 이러한 안전에 대한 요구는 동시에 정체성의 인정에 대한 요구이자 정상성에 대한 욕망으로, 차별과 배제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신자유주의적인 각자도생의 논리가 삶을 극도로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는 만큼, 홉스가 개념화한 바 있는 전쟁상태로서의 자연상태에서의 삶과 같은 것으로 만들고 있는 만큼, 안전에 대한 권리는 더욱 더 배타성과 차별화의 권리의 모습을 띠게 된다. 국민이자 정규직 남성 이성애자이고 비장애인이자 수도권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안전에 대한 요구는 동시에 자신들의 정체성의 배타적 권리에 대한 요구이기도 한 것이다. 생존이 경쟁의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 주어지는 전리품과 같은 것으로 인식될수록, 그것은 (잠재적 경쟁자들인) 타자에 대한 난폭한 혐오와 배제를 수반하는 것이다.

 

6. 전능한 자의 무기력과 배제의 논리

 

이는 안전의 담지자인 국가에 대하여 대중들이 경험하는 (무의식적인) 이중적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발리바르는 이것을 전능한 자의 무기력증후군이라고 부른 바 있다.[에티엔 발리바르, 국민 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 󰡔정치체에 대한 권리󰡕, 141쪽 이하.] 세계화의 시대는 국민국가의 주권적 역량이 소멸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위축되고 감퇴하는 시대다. 국민국가가 과연 그것이 자처하는 주권적 자율성을 실제로 가져본 적이 있느냐 하는 문제와 상대적으로 독립하여, 적어도 대중들의 상상계에서 국가, 국민국가라는 것은 자율적이며 전능한 것으로 상상되어왔다. 그런데 세계화는 대중들의 이러한 상상계를 붕괴시켰다. 한국에서 많은 시민들이 이를 외상적으로 체험했던 사건이 바로 IMF 외환위기였다. 이 사건은 한국의 대다수 국민에게 국가가 전쟁 없이도 망할 수 있다는 것, 국가는 그것을 무너지게 만드는 타자의 공격(세계 금융 시장)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각인시켰다. 이는 대중들에게 엄청난 불안감을 산출한다.

 

아마도 가장 역설적인 것은, 보호자로서의 국가가 그다지 강력하지 못하다는 것, 또는 우리를 보호하는 국가의 힘이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순간부터 이러한 감정이 더 강력해진다는 점일 것이다. 외관상 우리에 대해서는 전능한 왜냐하면 우리는 국가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 자신이 실제로는 무기력한 것이다. 이러한 모순이 낳는 불안감은 때로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에티엔 발리바르, 󰡔정치체에 대한 권리󰡕, 144~45. 강조는 발리바르.]

 

그리고 전능한 주권자에 대한 상상계가 균열을 일으키게 되면, 대중들은 더욱 더 집요하게 자신들의 안전을 추구하면서 자신들이 배제된 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 받으려고 하는데, 이러한 입증은 배제된 이들, 배제된 타자들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들은 국가가 다른 이들을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안전을 선택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무기력하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무기력을 두려워하는 시민들은 국가에 대해 그들이 항상 좋은 쪽에 있고, 희생자, 전형적인 불쌍한 사람들 나는 열등 인간이라는 말까지 쓰려 했었다 은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라는 점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도록 ... 요구한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은 종류의 질문을 제기한다. 국가는 누구를 우선시하는가? 국가는 누구 편인가? 그리고 국가의 결정들은 누가 내리고, 누가 국가로부터 정확히 우선이라는 답변을 얻을 수 있는가? 누가 선택된 이들이고 누가 버려진 이들인가?[같은 책, 145~46. 강조는 발리바르.]

 

7. 마스크 쓰기가 의미하는 것

 

그러므로 코로나19 팬데믹이 안전에 대한 대중들의 욕구를 자극할수록 차별과 증오가 분출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치안의 논리에 따라 표상/재현되고 제도적으로 구현되는 형태로서의 안전은 늘 차별과 배제의 상관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치안의 논리에 입각한 안전 개념과 다른, 민주주의적 안전의 개념을 사고해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안전은 어떻게 실행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이 질문을 진지하게 다루기는 어렵다. 그것은 또 다른 지면 전체가 필요한 복잡하면서도 중요한 주제다. 이 글에서는 이제 결론을 대신하여 마스크라는 한 가지 사례를 통해 이 문제를 제기해보는 데 그치겠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마스크다. 평소에는 독감이 유행하거나 봄철 황사가 밀려올 때 한시적으로 착용했던(또는 연예인들이나 착용하는 것이었던) 마스크가 코로나 19 팬데믹 이후에는 안전의 대명사가 되어 상시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필수품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트럼프 집권 시절 미국에서 마스크는 정치적 갈등의 상징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트럼프는 공적인 장소에서조차 마스크 착용을 거부했으며, 마스크 착용을 겁쟁이에게나 어울리는 소심한 짓이라고 비웃곤 했다. 그 결과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는 것은 트럼프를 지지하고 공화당을 지지하는 것의 상징처럼 되었다. 반면 새로 대통령이 된 조 바이든과 민주당은 마스크 착용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으며, 또 스스로 그것을 계속 실천하고 있다.


미국의 정신분석 연구자인 토드 맥고완은 마스크를 둘러싼 이러한 정치적 갈등을 단순한 당파적 싸움으로 이해하지 않고, 좀 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 쟁점으로 제시한 바 있다.[Todd McGowan, “The Mask of Universality: Politics in the Pandemic Response”, Crisis & Critique, vol. 7, no. 3, 2020 참조.] 그에 따르면 마스크 착용은 보편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단 이 때 그가 말하는 보편성은 모든 이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보편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이가 소유하지 않음을 나누어 갖고 있음”(what everyone shares not having)이라는 의미의 보편이라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편적인 것은 순응을 요구하며 상이한 주체들에게 자신을 부과하는 이로써 보편성의 비판가들이 두려워하듯이, 그들의 특수한 차이들을 제거하는 주인 기표가 아니라, 그것의 부재가 주체성이 생성될 수 있게 해주는, 결여된 기표다.” [Todd McGowan, Ibid., p. 231.]

 

맥고완의 분석은 마스크 쓰기에 함축된 한 가지 중요한 철학적 함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사실 마스크 쓰기는 여러 가지 함의를 갖는다.


첫째, 그것은 기초적인 방역의 수단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미 사스 바이러스와 메르스 바이러스 또는 신종 플루를 경험한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마스크 쓰기는 감염의 위험으로부터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효과적이고 확실한 수단으로서 인식되어 왔다. 반면 유럽 사람들이나 북미 사람들에게 마스크 쓰기는 큰 질병을 앓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시처럼 간주되어 거부감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더욱이 공적 공간에서 마스크 쓰기는 정치적 주체의 자율적인 자기 표현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져 더욱 금기의 대상처럼 취급되었다. 하지만 마스크 쓰기가 코로나19에 대한 효과적인 방역 수단이라는 점이 임상적으로 입증된 이후에는 마스크 착용이 훨씬 더 일반화된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둘째, 마스크 쓰기는 개인의 자율성 및 독특성에 대한 제약이자 규율의 부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코로나19의 확산세가 증가할수록 마스크 쓰기는 자율적인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행정 당국에 의해 요청되고 더욱이 치안을 통해 통제되는(곧 그것을 어겼을 경우 법적인 제재의 대상이 되는) 강요된 실천이 되었다. 한여름에, 그것도 냉방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얼마나 성가시고 괴로운 일인지는 작년 여름 많은 이들이 경험한 바 있다.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 착용을 준수하는 것은 감염을 피하려는 욕구에 더하여 치안의 강제가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에 유럽의 언론 매체에서 동아시아인들의 마스크 쓰기는, 디지털 장치를 통한 감염자 추적 방식과 더불어, 동아시아에 고유한 권위주의적 규율 문화를 상징하는 실천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셋째, 마스크 쓰기는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의미를 지닌다. 마스크를 쓰는 것은 단지 감염의 위험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욕구만이 아니라, 혹시 나도 모르게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나 자신으로부터 타인을 보호하려는 배려의 의도와 몸짓 역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맥고완이 말하는 마스크 쓰기의 보편성도 이점과 연결되어 있다. “보편성의 가면”(Mask of Universality)이라는 그의 글의 제목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한편으로 마스크 쓰기가 (정치에서의) 보편성을 표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보편성이란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마스크, 은폐 내지 가림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보편적인 것은 항상 은폐된 것으로만 자신을 드러내는데, 맥고완에 따르면 그 이유는 보편적인 것(라캉 정신분석의 용어로 하면 대타자(the Other))이란 실정적인 사실로서, 모종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스크가 은폐하는 것/마스크가 가리키는 것은 실체로서의 보편이 아니라, 사실 그러한 의미의 보편이 부재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맥고완 자신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그의 분석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는 우리에게 확고하게, 일의적으로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보편적 심급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마스크이든, 백신이든, 아니면 국가이든 간에 우리로 하여금 코로나19 팬데믹이 상징하는 감염의 위협, 건강과 생명에 대한 위협에서 절대적으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결정적인 장벽, 방어막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알베르 카뮈의 또 다른 교훈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 사실은 페스트이고 우리 자신이 바이러스(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나야말로 나의 온 힘과 정신을 기울여 바로 그 페스트와 싸운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끊임없이 페스트를 앓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 그렇습니다. 나는 여전히 부끄러웠고, 우리들 모두가 페스트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1, 326~329.]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안전의 부재는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우연적인 사건으로 인해 생겨난 우발적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조건 자체(그것을 신자유주의로 이해하든, 파괴되어 가는 생태적 조건으로 이해하든, 아니면 좀 더 거시적이고 실존적으로 말해 이중 기생의 구조라고 이해하든 [윌리엄 맥닐, 󰡔전염병의 세계사󰡕, 김우영 옮김, 이산, 2005 참조. 맥닐은 인류 문명은 이중기생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인류와 공생해온 각종 세균들이 인간을 숙주삼아 기생해온 것이 미시기생이라면, 각종 노역이나 세금 등을 통해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기생해온 것은 거시기생이라고 부를 수 있다.])에서 비롯한 필연적 사실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공동의 안전을 민주적으로 모색하고 실천하기 위한 일차적 조건일 터이다.


코로나19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준 계기였을 뿐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포스트 코로나라는 문구야말로 치안을 상징하는 문구, 따라서 코로나19의 교훈을 통찰하는 것을 방해하는 거짓 문제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살펴보는 일은 다른 글의 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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