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펴내는 [민족문화연구]에 수록될 논문 한 편 올립니다. 


이 논문에 관해 논평하거나 이 논문을 인용하기 원하는 분들은 [민족문화연구]에 출판된 판본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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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동아시아 문헌 속 개인과 개인주의

 

코기토, 소유적 개인주의, 예속적 주체화*

서양 근대에서 개인과 개인주의

[이 글이 처음 발표된 2020925일 근역한문학회 하계 학술대회에서 유익하고 통찰력 있는 논평을 해준 김은주 선생과 청중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아울러 이 글에 좋은 평가를 해주시고 유익한 조언과 문제제기를 해주신 익명의 심사위원들에게도 감사드리고 싶다. 이 수정된 글이 충분한 답변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심사위원들이 제기한 논점들은 앞으로 다른 글에서 조금 더 확장되고 진전된 논의를 통해 발전시켜보고 싶다.] 


 

 

1. 머리말


이 특집에서 내게 할당된 것은 서양 근대에서 개인과 개인주의라는 주제다. 한문학을 전공한 동료 연구자들을 위해 가급적 평이하고 명료한 방식으로 서양 근대에서 개인과 개인주의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경우도 물론 마찬가지이겠지만, 주제 내의 다양한 세부적 쟁점들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전체의 흐름을 뚜렷하게 보여주어야 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이는 전략적 선택이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나는 세 가지의 주요 쟁점을 중심으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해보려고 한다. 우선 나는 서양 근대의 개인에 관한 지배적인 철학적 서사를 살펴보면서 그것이 지닌 맹점과 역설을 검토해볼 것이다. 이는 특히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칸트, 헤겔, 니체로 이어지는 근대 주체의 철학적 서사를 체계적이고 강력하게 구성한 하이데거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작업이 중심을 이룬다.


그 다음 이러한 서사에서 빠져 있는 정치적 개인에 관한 또 다른 쟁점들을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해석틀에 입각하여 검토해볼 것이다. 이는 부르주아적 개인 및 개인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의미와 한계를 보여주면서, 추상적 개인이라는 근대의 정치적 주체 개념의 양가성을 보여줄 것이다.


세 번째로 알튀세르와 푸코가 각각 나름대로 제시한 바 있는 예속적 주체화의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예속적 주체화라는 개념은 근대의 철학적 개인 및 정치적 개인에 관한 서사들을 전도하여, 자율적 주체로서의 개인들이 사실은 지배 관계의 재생산 메커니즘 속에서 예속적으로 생산되고 재생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양의 철학적 근대성과 정치적 근대성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강력하면 할수록 근대 주체 및 그것에 대한 탈구축 또는 탈근대적비판에 담겨 있는 규범적 아포리아가 더 선명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결론에서 나는 이러한 검토가 제기하는 쟁점들을 살펴보면서 관계적 자율성 개념의 실마리를 간략하게나마 모색해보겠다.

 

2. 철학적 주체로서의 개인


주지하다시피 서양 근대철학은 주체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표준적인 철학사 이해에 입각하면, 서양 근대철학은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코기토(cogito) 개념에서 출발한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1637)이나 󰡔성찰󰡕(1641) 같은 그의 주요 저작에서 회의주의에 맞서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을 자신의 철학의 중심 과제로 삼았다. 데카르트는 이른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라는 확실한 지식의 기초를 발견한다.[René Descartes, “Discours de la méthode”, in Charles Adam & Paul Tannery eds., Oeuvres de Descartes, Vol.VI, 1897~1913; 르네 데카르트, 이현복 옮김, 󰡔방법서설 외󰡕, 문예출판사, 1997a.] 데카르트는 일체의 회의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여러 가지 사실이나 견해, 심지어 진리에 대해 의도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가령 내가 지금 방 안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이 컴퓨터가 진짜 존재하는 컴퓨터인지, 창 밖에 걸어가고 있는 저 사람들이 실제의 인간인지 아닌지 의심을 품을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견해들, 가령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기운다는 것이 사실인지, 그리고 1+1=2라는 것이 정말 진리인지 의심을 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 과정에서 악한 정령’(malin génie)이라는 가설적 존재자를 가정한다. 이 존재자는 신과 같은 전능한 힘을 지닌 존재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까지 거짓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과연 확실하게 진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데카르트는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답변을 생각해낸다. 다시 말해, 악한 정령이 나를 아무리 속이려 한다고 해도, 속고 있는 내가 속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생각을 하고 있고, 또한 그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한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악한 정령까지도 기만할 수 없는 확실한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데카르트는 회의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라틴어 표현이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며, 이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를 뜻하는 코기토 개념은 근대 주관성 철학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널리 사용된다. 따라서 생각하는 나를 뜻하는 코기토 개념은, 우주의 창조주로서 신과 객관적인 실체에 중심을 둔 중세철학과 단절하는 근대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이 되었다.


데카르트 이후 주체 개념을 근대 철학의 확고한 기초로 확립한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였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더욱 급진적으로 밀고 나가 이른바 철학에서 코페니르쿠스적 전회를 이룩한다.[Immanuel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Felix Meiner, 1928;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 아카넷, 2006.다시 말해 이전까지는 주체의 관념이나 표상이 진리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가 주체 바깥에 존재하는 객관적 사물에 있었다면, 칸트는 그러한 기준을 인식 주체 자체 내에서 발견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잡다한 인상에 대해 통일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하나의 일관된 개념적 표상으로 구성하는 것은 인식 주체의 활동이라는 것, 초월론적 통각(transzendentale Apperzeption)의 작용이라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다.[칸트의 “transzendental”이라는 개념을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뚜렷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주로 선험적이라는 용어로 옮긴 반면, 최근에는 초월적이라는 용어도 널리 쓰이고 있으며, 또한 초월론적이라는 번역어도 많이 사용된다. 이 글에서는 초월론적이라는 역어를 사용하겠다. 아울러 통각나는 생각한다”(Ich denke)곧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je pense)의 독일어 표현를 가리키는 말인데, 때로는 수반의식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여기서는 더 널리 쓰이는 통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따라서 칸트 이후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관념론적인 성격을 띠게 되며,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는 인식 주체의 활동의 소산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주체 중심의 철학은 헤겔 철학을 통해 완성된 체계를 얻게 된다.


이처럼 관념론적인 성격을 띤 주체론 철학이 서양 근대 철학의 중심적인 흐름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이하의 논의는 부분적으로 진태원, 타자의 윤리학, 진태원한정헌 엮음,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도서출판 길, 2015에서 가져왔다.]


하나는 갈릴레이뉴턴 이래 근대 수리 자연과학의 발전이다. 이러한 수리 자연과학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 기관에 주어진 대로의 자연 세계는 실제 자연의 참된 모습이 아니라, 오류와 가상으로 얼룩진 왜곡된 자연이다. 가령 우리의 감각 기관에 나타나는 대로 보면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지반이며, 태양은 매일같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기운다. 또한 태양은 지구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원형 물체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리의 감각 기관은 자연의 참된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믿을 수 있는 수단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이성에 기반을 둘 경우에만 자연은 존재하는 그대로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이성적 사유 능력을 잘 구현하는 것이 바로 수학이다. 실제로 갈릴레이와 뉴턴 이래 수학에 기반을 둔 자연과학은 자연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리하여 근대 수리물리학 이후 우리의 감각기관에 나타나는 자연이 아니라 우리가 이성적 능력을 통해 재구성된 자연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데카르트와 칸트의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근대 자연과학의 발전을 철학적으로 정초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과학적 인식에 기반을 둔 기술 문명의 발전이다. 일찍이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지식은 힘이다라는 금언을 바탕으로 과학적 인식과 경제적사회적 발전의 연관성을 주장한 바 있듯이, 근대 자연과학의 발전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낳았으며, 이는 다시 자연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경제적 부의 증대와 인간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려는 기술의 발전을 촉발했다. 증기기관이야말로 이러한 근대 기술을 대표하는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서양 여러 나라들이 짧은 기간 내에 국력을 신장시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게 만든 발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두 가지 요인들은 모두 더 이상 미지의 자연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인간상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자 자연의 지배자로서 적극적으로 자연을 탐구하고 개발하는 능동적인 인간상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자연을 자신이 구성한 인공적 질서의 한 부분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자연의 주인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이것은 좀 더 형이상학적으로 표현되었지만, 하이데거의 견해이기도 하다. 마르틴 하이데거, 박찬국 옮김, 󰡔니체󰡕 2, 도서출판 길, 2012, 132-33. “지구 전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배를 위해 인류의 모든 능력을 최고도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전개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인으로 하여금 더 새롭고 가장 새롭게 발진하도록 촉발하고 그의 안전한 전진과 목표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지침을 정립하도록 촉구하는 은밀한 목표다. () 근대 역사에서, 더 정확히 말하면 근대적 인간 유형의 역사에서 인간은 도처에서 그리고 항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중심과 척도로서 내세우면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려 한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근대 철학의 기원으로 제시하는 이러한 철학사적 관점에 대해 강력한 논리와 서사를 확립해주었다. 1930년대 말 강의록의 모음인 󰡔니체󰡕에서 하이데거는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야말로 데카르트에게는 모든 명제 중의 명제이고 형이상학의 원리라고 주장하면서,[같은 책, 144.] 이 명제를 근대 형이상학을 정립한 근본 원리로 간주한다. 그는 이미 󰡔현상학의 근본 문제들󰡕(1927년 마르부르크 대학 강의록)에서부터 코기토 에르고 숨을 “cogito me cogitare”, 나는 사유한다는 것을 사유한다는 명제로 전환하여 해석한 바 있는데,[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 󰡔현상학의 근본 문제들󰡕, 문예출판사, 1994, 186.] 이는 하이데거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칸트의 주체 개념, 특히 초월론적 통각의 개념에 입각하여 재해석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하이데거는 󰡔니체󰡕에서는 데카르트에서 유래하는 근대 주체 개념이 서양철학사 속에서 지닌 위상을 해명하고 그것의 새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주체 개념을 두 가지로 구별하고 있다. 즉 하이데거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주체성”(Subjektivität)이라는 용어와 구별하여 신조어인 기체성”(Subiectität)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마르틴 하이데거, 앞의 책, 2012, 420면 이하.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서는 존재자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 불변적인 사물 내지 존재자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휘포케이메논(hypokeimenon) 및 중세 스콜라철학의 수브옉툼(subiectum) 같은 개념우리말로는 양자 모두 보통 기체’(基體)라고 번역된다을 통해 표현되었다. 더욱이 수브옉툼은 논리적문법적 의미에서의 주어를 나타내는 개념이었다. 반면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존재자의 본질 내지 근거를 이루는 이러한 철학사적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그것을 사유하는 자아라는 새로운 수브옉툼, 즉 주체(Subjekt)로서 설립했다.


전통적인 수브옉툼, 즉 기체 내지 주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자신의 생각들 또는 표상들을 소유하고 있는 실재(res) 내지 주어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코기토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근대적인 주체를 욕구와 의지의 주체로서 정립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즉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의 역사에서 근대성은 무엇보다 존재를 의지, 본질의 욕구(exigentia essentiae)”[같은 책, 422. 강조 표시는 원문.]파악한 시대다. 근대에서 존재는 모든 의지가 자신을의지하는 것인 한, ‘자신에게로향해서’(Auf-sich-zu)라는 것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며, “이러한 자신에게로 향해서라는 것의 본래적인 본질은 자기성으로서의 이성에서 실현된다. 존재는 의지에의 의지이다.”[같은 책, 423.]


따라서 하이데거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기체성과 구별되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주체성을 설립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코기토가 단순히 표상들의 주어 내지 주체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니체에게서 완성되는 의지의 의지로서의 주체성 개념의 개시를 나타낸다는 뜻이. 하이데거가 특이하게도 데카르트의 주관성 내지 주체성의 형이상학을 고대 소피스트 철학자였던 프로타고라스와 연결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즉 이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 인간주의의 철학적 표현으로 이해하고, 이것의 형이상학적 완성을 니체의 에의 의지”(Wille zur Macht), 즉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힘을 위해 힘을 추구하는 의지의 의지에서 발견하려는 하이데거의 철학사적 서사의 논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근대 주체성의 철학사적 위상 및 그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한 하이데거의 서사는 매우 강력한 것이기는 하지만, 데카르트 철학의 자체 논리와 잘 들어맞지 않을뿐더러 역사적 맥락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 연구자들이 보여준 바 있듯이, 데카르트적 주체성의 성립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배경과 연결시키는 것이 더 타당하다.[특히 Zbigniew Janowski, Cartesian Theodicy: Descartes’ Quest for Certitude, Dortrecht: Kluwer, 2000 참조.] 사실 16-17세기 유럽 신학과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대대적인 복권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Henri Gouhier, Cartésianisme et augustinisme au XVIIe siècle, Paris: Vrin, 1978.] 이것은 문화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여기서 한 가지 주의사항을 덧붙여두겠다. 나의 논점은 데카르트적인 주체성 개념이 오직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사상 배경하고만 관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며, 데카르트 연구의 최근 경향이 이것으로 한정된다는 뜻은 아니다. 더욱이 하이데거의 데카르트 해석에 반대하는 다른 식의 비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령 뒤에서 더 상론하겠지만 찰스 테일러의 해석이 그런 경우이고, 에티엔 발리바르가 데카르트 철학에는 칸트적인 의미의 주체 개념이 부재해 있다고 지적하는 것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수 있다. 또한 926일 학술대회 당시 논평에서 김은주 선생이 제안한 것처럼, 데카르트를 포함한 칸트 이전의 초기 근대 철학을 무한에 관한 새로운 사유라는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나는 사람들이 데카르트적인 코기토 개념에서 읽고자 하는 것, 곧 근대적인 주체 개념은 기독교적인 사상적문화적 전통과 분리해서는 사고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뿐이다. 근대적 주체 개념의 성립에서 기독교적 전통의 함의에 관해서는 최근 출간된 다음 저작이 유익하다. 래리 시덴톱, 정명진 옮김, 󰡔개인의 탄생󰡕, 부글북스, 2016.]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래 르네상스는 중세의 암흑시대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율성과 창조적 힘을 강조함으로써 계몽주의의 기원을 이룬다는 것이 문화사의 가장 상식적인 견해로 통용되었다.[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기숙 옮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 한길사, 2003 중 특히 2부 참조.] 하지만 문학이론가 이언 와트(Ian Watt)󰡔근대 개인주의 신화󰡕에서 설득력 있게 보여준 바와 같이, 근대 소설의 기원으로 간주되는 󰡔파우스트 박사의 생과 사의 비극적 역사󰡕(크리스토퍼 말로, 1616)󰡔돈키호테󰡕(세르반테스, 1605, 1615) 그리고 󰡔돈 후안󰡕(티르소 데 몰리나, 1630)은 모두 르네상스적 개인의 좌절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이언 와트, 이시연강유나 옮김, 󰡔근대 개인주의 신화󰡕, 문학동네, 2004.] 즉 이 세 명의 주인공들은 부르크하르트가 강조한 바와 같이 인종이나 민족, 정당, 가족 또는 결사 등과 무관하게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한 인물들이다. 더 나아가 이들은 또한 자아 대 세상이라는 대립 구도 위에서 행위하는 주체들이다. 하지만 이 세 작품은 모두 이러한 근대적인 개인 주체가 자신들의 욕망을 관철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의 결과 영원한 파멸이라는 형벌을 겪게 되고, 돈키호테는 백월기사에 패배한 후 집으로 돌아가 기사도 이야기에 심취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돈 후안은 석상에 의해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고해성사도 받지 못한 채 영혼의 파멸을 겪게 된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비극적 결말이 의미하는 것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가치를 계속 추구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환멸감에 빠지거나 혼란상태에 귀착한다[같은 책, 189.]는 점이다. 따라서 이 주인공들은 결국에는 실패하고 마는 개인주의의 상징을 나타내며, 그것은 곧 반종교개혁 세력이 르네상스 개인주의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주려 한 재미없는 교훈[같은 책, 201.]이었다고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역설적일 수 있지만 그만큼 더 흥미로운 것은, 근대적 주체는 하이데거나 그 이전의 헤겔이 생각했던 바와 같이 전근대적 전통, 특히 기독교적 중세 스콜라철학과의 단절을 통해 성립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오히려 근대적 주체는 중요한 측면에서 기독교적 전통 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러한 전통의 수용과 변형을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이 점에 관해서는 앞에서 언급했던 래리 시덴톱 이외에도 특히, Louis Dumont, Essai sur l’individualisme, Paris: Seuil, 1985, pp.33-81이 유익하다. 그리고 뒤몽의 인류학적 고찰의 사상적 기원인 마르셀 모스의 고전적인 논문도 여전히 참고할 만하다. Marcel Mauss, “Une catégorie de l’esprit humain: la notion de personne, celle de “moi””, in Sociologie et anthropologie, Paris: PUF, 1999.]


데카르트 철학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은 이제 더 이상 소수의 데카르트 전문가들만이 공유하는 주장은 아니다. 일례로 근대적 자아의 기원에 관한 대작에서 찰스 테일러는 데카르트적인 주체 개념이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것을 내재적으로 변형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 바 있다.[찰스 테일러, 권기돈하주영 옮김, 󰡔자아의 원천들󰡕, 새물결, 2015 26면 이하.] 우선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연상시키는 논변이 󰡔자유의지론󰡕이나 󰡔삼위일체론󰡕 같은 저작들 속에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논변의 유사성은 두 사람이 플라톤과 달리 사물들의 질서의 불변하는 원리(형상 또는 이데아)에 대한 통찰에서 철학의 근거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 내지 자아의 내면 속에서 그것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내 안에 내 자신보다 더 내면적인, 그리고 그것보다 훨씬 더 심층적인 사물의 원리이자 진리의 근거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진리와 확실성은 이러한 원리와 근거에 대한 다름 아닌 나 자신의 깨달음에 있다는 점이 두 사람에게서 공히 발견되는 근본적 반성성”(radical reflexivity)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증명과 구별되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안셀무스, 데카르트로 계승되는 존재론적 신증명(ontological argument)의 계보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가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 무엇보다 과학혁명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데카르트에게 사물의 질서는 표상의 질서이며, 표상의 질서는 이미 주어져 있는 자연의 질서가 아니라 정신 또는 영혼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수학적인 방식으로 자연의 질서를 구축한다. 이러한 질서의 진리성을 형이상학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데카르트가 회의의 과정을 거치고 코기토 논증을 제시함으로써 보이고자 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신이 사물의 원리이자 진리의 근거라는 점이 아니라, “신의 진실성덕분에 내가, 정신 또는 자아가 확실성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강조점은 신과의 합일에서 나의 생각의 참됨, 나의 현존의 확실성으로 이동하게 된다.


더 나아가 하이데거적인 해석틀은 데카르트 철학 및 근대 철학 일반에서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이라는 문제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중세 스콜라철학에 이르기까지 자연 사물들은 형상과 질료의 결합인 실체로 이해되었다. 질료가 실체의 소재를 이루는 것이라면, 형상은 그 질료를 실체로 구성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자연 사물의 형상을 이루는 것은 영혼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영혼은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영혼보다 폭넓은 뜻을 갖고 있다. 영혼은 식물적 영혼과 동물적 영혼, 그리고 지성을 갖춘 인간적 영혼으로 분류된다. 식물적 영혼이 생성과 성장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리를 가리킨다면, 동물적 영혼은 감각하고 운동하는 원리를 나타내며, 인간적 영혼은 지각과 인식의 기능을 표현한다. 따라서 자연 사물들은 영혼이 없는 것과 영혼을 가진 것으로 분류되었으며, 다시 영혼을 가진 것은 식물적인 것, 동물적인 것, 인간적인 것으로 분류되었다. 이렇게 이해하면 자연 사물들은 질료와 형상, 물체와 영혼이 분리할 수 없게 긴밀하게 결합된 것들이다.[아리스토텔레스, 오주은 옮김, 󰡔영혼에 대하여󰡕, 아카넷, 2019.]


반면 데카르트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엄격하게 분리했다. 이는 첫째,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철학의 관점으로는 물질적인 자연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한계의 근원에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뒤섞어버리는 실체적 형상이론, 곧 영혼을 모든 실체의 형상으로 이해하는 이론이 놓여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물질적인 것의 본성과 작용은 영혼과 분리되어 자율적인 탐구 대상이 될 경우에만 제대로 설명이 될 수 있다. 둘째, 더 나아가 양자가 분리될 경우에만 정신적인 것의 본질도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영혼은 자연 사물들의 생명의 원리가 아니라, “사고하는 것”(res cogitans)이며, 따라서 영혼의 본질은 사고다.


이렇게 하여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신체와 정신은 근원적으로 분할된다. 양자는 서로 전혀 다른 존재의 질서에 속한다. 신체를 포함한 물질적인 것의 본질은 연장(延長, extensio), 곧 길이와 넓이, 깊이를 지닌다는 점이며, 이로써 모든 물체들은 기하학적 좌표 공간상에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인간 정신의 본질은 사고하는 것, 사유를 본질로 지니는 것이다. 넓은 의미의 사유에는 지적 인식만이 아니라 상상과 의지, 욕망과 감정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체와 정신이 동등한 지위를 지닌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에게 인간의 본질은 무엇보다 정신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이 나는 곧 나의 정신이며, 이 정신에 의해 나는 바로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 정신은 나의 신체와 완전히, 진정으로 구별되는 것이며, 나의 신체 없이 존재하거나 실존할 수 있다.” [르네 데카르트, 이현복 옮김, 6번째 성찰, 󰡔성찰󰡕, 문예출판사, 1997b.]


데카르트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이원론을 주장한 이유 중 하나는 자연 세계를 기하학적으로 파악하면 자연 세계에는 자유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하학적으로 설명된 자연 사물들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며, 외부 원인에 의해 타동적으로 운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과학자로서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지만, 형이상학자로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의지야말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심각한 문제들이 제기되는데, 그중 하나가 정신과 신체의 결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데카르트 형이상학에 의하면 정신과 신체는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하는 독자적인 실체들인 반면, 일상적 경험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신과 신체로 결합된 존재로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을 단순한 착각이나 오해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마지막 저작인 󰡔정념론󰡕에서 정신과 신체가 결합되어 있으며, 상호작용한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특히 그는 뇌 안에 존재하는 솔방울샘이라는 아주 작은 신체 기관에서 외부 사물이 신체에게 미친 작용이 영혼에게 전달되고, 역으로 영혼의 의지가 이 샘을 통해 신체의 행위를 규정한다고 주장했다.[르네 데카르트, 김선영 옮김, 󰡔정념론󰡕, 문예출판사, 2013.] 하지만 이것은 그가 󰡔성찰󰡕에서 제시한 형이상학과 충돌하는 견해였다. 사실 어떻게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하는 정신과 신체가 상호작용할 수 있겠는가?


데카르트의 최후 저작인 󰡔정념론󰡕은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의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중요성 중 하나는 정념에 관해 예전과 달리 수사법이나 도덕적 교훈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연학자의 관점에서 다루려고 했다는 점에 있다. 아울러 데카르트는 정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념은 비난하거나 억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잘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찰스 테일러가 탁월하게 보여준 바와 같이 근대성의 윤리의 본질적인 측면 중 하나가 일상적 삶에 대한 긍정[찰스 테일러, 앞의 책, 422.]에 있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다. 우리의 삶에서 생산 및 재생산과 관련된 측면, 필요한 사물을 만드는 노동이나 결혼과 가족생활을 포함한 정념적이고 성적인 삶 등이 바로 테일러가 일상적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적 삶은 고대 철학에서도 그렇거니와 중세 스콜라철학에서도 중요성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역설적이고 흥미로운 측면은, 일상적 삶을 중시하는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적 전통, 특히 종교개혁의 유산이라는 점이다.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측면 중 하나는 구원은 오직 신에게 달려 있다는 원칙이었다. 이것은 구원을 위해 교회 및 사제들의 본질적인 중재 역할을 강조했던 가톨릭의 이해방식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가톨릭의 복잡한 의례와 절차, 관행을 배격했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 자체에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것들소유, 결혼을 포기하는 수도사적 오류를 거부해야하며, 또한 역으로 사물 자체에 빠져들어 우리 인간의 목적을 위해 사물을 취하는”[같은 책, 444-45.] 오류 역시 거부해야 한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현세적 금욕주의라고 부른 것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3. 소유적 개인주의: 정치적 주체로서의 개인


하지만 근대적 개인에 관한 철학적 논의가 이것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철학적 논의에서는 영국 경험론 전통에서 발전된 개인에 관한 논의가 빠져 있다. 영국 경험론 전통에서 개인에 관한 철학사적 해석의 주요한 틀을 제시해준 사람은 캐나다의 정치철학자였던 맥퍼슨(C.B. Macpherson)이었다. 그는 1962년 출간된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이라는 저작에서 경험론적인 전통의 개인을 소유적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로 규정함으로써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해석틀을 제시한 바 있다.[C. B. Macpherson, The Political Theory of Possessive Individualis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2; C. B. 맥퍼슨, 이유동 옮김,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인간사랑, 1991.]


맥퍼슨이 말하는 소유적 개인주의는 몇 가지 핵심 논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자신이 지닌 능력(생명과 자유, 인신(person)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절대적인 자연적 소유자이며, 이 때문에 본질적으로 자신의 존재에 관하여 사회에 아무것도 빚지고 있지 않다. 그는 사회 이전에 자신의 본질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자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 개인들의 본질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충족하기 위해 자신들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에 놓여 있다.


둘째, 소유적 개인주의의 관점에 따르면 사회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의 공동체, 곧 계급이나 신분에 따른 지배와 복종의 관계, 또는 공화주의적 공동체의 경우 시민들 사이의 권리와 의무의 상호적인 관계의 체계가 아니라, 서로 자유롭고 동등한 개인들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다. 즉 소유적 개인주의에서 일차적인 사회적 관계는 국가나 정치가 아니라 시장이나 교환이다.


셋째, 따라서 개인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소유자로서 관계를 하는 것이지, 공동체의 성원으로 관계를 하는 것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유적 개인주의의 해석틀에 따르면, 국가를 포함한 정치 공동체는 소유관계 및 시장관계에 기반하여 사고된다. 이 경우 국가의 본질은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원초적 권리(근본적으로 사적 소유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있다. 여기가 근대 사회계약론이 과거 스토아학파를 비롯한 고대적중세적 전통의 계약론과 갈라지는 지점이다. 이전의 계약론 전통과 달리 근대 사회계약론은 단순히 정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따라서 국왕과 영주(및 성직자) 사이에 권리와 의무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를 본질로 삼지 않는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지적하듯이, “인민이 왕을 선출하는 행위를 검토하기 전에, 인민이 인민이 되는 행위를 검토”[-자크 루소, 김영욱 옮김, 󰡔사회계약론󰡕, 후마니타스, 2018, 22(15).] 해야 한다. 즉 근대 사회계약론에서는 공동체 자체가 미리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 다른 물리적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분해와 합성”(갈릴레이, 홉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정치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인공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일종의 자유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적 자유주의자였던 맥퍼슨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영국에서 발원한 새로운 자유주의’(New Liberalism)의 전통[여기에는 토머스 힐 그린, L. T. 홉하우스, R. H. 토니 등이 속한다. 새로운 자유주의 전통에 관해서는 앤서니 아블라스터, 조기제 옮김, 󰡔서구 자유주의의 흥성과 쇠퇴󰡕, 나남, 2007, 16장 및 17장 참조.]에 기반하여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사회, 특히 영미 사회의 새로운 조류로 등장한 냉전 자유주의’(칼 포퍼,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이사야 벌린 등을 주축으로 하는)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에서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을 저술했다.[특히 C. B. 맥퍼슨, 앞의 책, 6장 참조.] 냉전 자유주의가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한 가지 사상적 기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은 단순히 영국 지성사의 전통을 넘어서는 폭넓은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 이론의 영향력의 요인 중 하나는 근대적 개인 및 개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상시킨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자유주의 이후󰡕에서 근대 이데올로기를 세 가지로 구별한 바 있다.[이매뉴얼 월러스틴, 강문구 옮김, 󰡔자유주의 이후󰡕, 당대, 1996 2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건설과 승리참조.] 첫 번째가 근대의 중심적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이며, 둘째가 보수주의, 셋째가 사회주의다. “변화의 정상성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중심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는 옛것에 대한 거부와 변화와 진보에 대한 예찬을 기반으로 하는 반면,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나 프랑스의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 또는 루이 드 보날(Louis de Bonald) 등이 대표하는 보수주의는 프랑스혁명이 대변하던 변화와 진보를 거부하고 전통의 고수와 국가제도의 보존을 추구했다. 반면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와 더불어 변화와 진보를 환영하면서 동시에 자유주의보다 더 급진적인 차원에서 진보를 가속화하고자 했다.


사회주의 및 그것을 계승발전시킨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개인을 봉건제의 신분적 예속에서 해방시켜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의 담지자로 만든 것을 근대성의 핵심적인 성취로 내세우지만, 그것은 양가적인 것이었다. 분명 자유주의적인 근대성은 개인들을 더 이상 왕족과 귀족, 평민과 노예 등으로 신분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정치 권력을 종교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이러한 자유와 평등은 오직 정치적 영역에서만, 그것도 제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정치와 달리 경제적 영역에서 개인들은 더 이상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아니라, 소유자와 비소유자, 즉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과 계급과 생산수단 없이 오직 자신의 노동력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노동자 계급에 속한 개인들로 분류되었다.[마르크스의 초기 저작 가운데서는 특히 칼 마르크스, 김현 옮김,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 책세상, 2015 참조.]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현실은 거대한 불평등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정치적 해방은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다. 즉 그것은 경제적 영역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은폐하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불만을 상쇄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개인들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다.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이루어지는 유통[또는 상품교환]의 영역은 사실 천부인권의 진정한 낙원이었다.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자유평등소유 그리고 벤담이다. 자유! 왜냐하면 상품 교환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오로지 그들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구매자와 판매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으로서 계약을 맺는다. 계약은 이들의 의지가 공통된 법률적 표현으로 드러나는 최종 결과물이다. 평등! 왜냐하면 이들은 오로지 상품소유자로서만 서로 관계하며 등가물을 서로 교환하기 때문이다. 소유! 왜냐하면 이들 각자는 모두 자신의 것만을 처분하기 때문이다. 벤담! 왜냐하면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하나의 관계로 묶어주는 유일한 힘은 그들 자신의 이익이 발휘하는 힘이다.”[칼 마르크스, 강신준 옮김, 󰡔자본󰡕 I-1, 도서출판 길, 2008, 261.]

 

이러한 소유적 개인주의 이론 및 그것이 함축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 설명력과 규범적 타당성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근대적 개인 개념이 지닌 정치적 함의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것도 사실이다. 존 로크에서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서양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공리는, “인간 존재자들 사이에 본성적 종속 관계는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개인은 지고하며 모든 권위에 맞서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을 내린다”[Catherine Audard, Qu'est-ce que le liberalisme ?, Paris: Gallimard, 2009, p.29.]는 점이었다.


이러한 공리는 여러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다. 우선 이것은 자유주의적인 개인 이해가 얼마나 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이하의 논의는 진태원, 개인-보편적이면서 독특한, 󰡔을의 민주주의󰡕, 그린비, 2017b에서 부분적으로 가져온 것이다.] 사회 내지 국가가 개인들에 앞서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 내지 국가가 독립된 개인들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했다는 생각은, 전근대 사회에 보편적이었던 인간학적 가정, 즉 인간들 사이에는 본성적인 불평등이 존재하며, 사회 질서는 이러한 불평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가정을 뒤집는다. 알다시피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신분적 질서의 유무에서 찾을 수 있다. 전근대사회의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이런저런 신분관계(, 귀족, 평민, 노예 등)에 따라 규정되고 정치사회적 위치와 행동 방식에서 제약을 당했던 것에 비해, 근대적 개인들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모두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들로 가정되어 있다. 민주주의가 번성했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지닌 이들은 자유 시민(곧 데모스)이었으며[이것은 귀족과 평민 사이의 신분적 구별의 해체를 함축하는 것이었으며, 그 자체가 대단히 혁명적인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자크 랑시에르는 다음 저작에서 이 점을 인상적으로 논증한 바 있다. 자크 랑시에르, 진태원 옮김, 󰡔불화: 정치와 철학󰡕, 도서출판 길, 2015 참조.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좀더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논의로는 Josiah Ober, Mass and Elite in Democratic Athens: Rhetoric, Ideology, and the Power of the Peopl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1 참조.], 노예들은 이러한 권리에서 배제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근대적인 개인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혁신적인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반박하면서 근대적 개인 개념이 함축하는 이러한 급진성을 잘 밝혀준 바 있다.[C. Lefort, L'invention démocratique, Paris: Fayard, 1994(초판: 1981); Essais sur le politique, Paris: Seuil, 1986; 클로드 르포르, 홍태영 옮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 그린비, 2016 참조.]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근대적 평등과 자유의 원칙이 착취 및 억압 관계를 은폐하는 측면만을 부각시켰을 뿐, 그것 자체가 지닌 혁명적 성격을 충분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마르크스가 간파했듯이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개념은 추상적이며, 또한 그 담지자로서 개인 역시 추상적이며, 이러한 추상성은 사회경제적 영역에서의 착취의 현실을 은폐하고 상쇄하려는 이데올기적 성격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이러한 추상성은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조건과 독립적인 정치 영역의 자율성을 (사고)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프랑스혁명 당시 발표된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자로 선언된 인간은 추상적 개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국적과 관계없이(프랑스인이든 영국인이든 인도인이든, 또는 국적 없는 난민이나 망명객이든 간에), 재산 유무에 관계없이(부자든 가난뱅이든, 재벌이든 노숙자든 간에), 피부색에 관계없이(백인이든 흑인이든 황인종이든 간에), 종교에 관계없이(기독교 신자든 불교 신자든 무슬림이든 간에), 성별에 관계없이(여성이든 남성이든 아니면 트랜스젠더이든 간에), 또 연령에 관계없이(어른이든 아이든, 노인이든 청년이든 간에), 사람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인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자로 간주되며 또 그렇게 간주되고 존중받을 권리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 없고 - 없고 - 없는 존재자라는 점, 다시 말해 아무런 특성도 없는 존재자라는 점에서 인권의 담지자인 또는 인권의 주체인 사람은 추상적 개인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인권 선언이 보편적 선언으로서 효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추상성 덕분이다. 만약 여기에 어떤 제한이 붙는다면, 가령 인간은 그가 가난한 한에서, 또는 생산수단이 없는 존재자인 한에서, 약소국 국민이거나 피식민지인인 한에서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진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보편적인, 따라서 혁명적인 성격을 지닐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추상성은 역설의 측면을 지니는데, 이는 특히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잘 드러난다. 조앤 스콧이 잘 보여준 바 있듯이, 페미니즘은 한편으로는 이러한 추상적 인간의 보편성을 남성에게만 한정하고 여성은 인간바깥으로 배제하려는 또는 이러한 추상적 인간의 타자로서 여성을 구성하려는 근대 공화주의 내지 민주주의의 남성 지배적 성격을 고발해온 운동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이러한 추상적 인간의 보편성이 어떻게 그 자체 안에 성적 차이(sexual difference)를 포함할 수 있는지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해온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조앤 W. 스콧, 공임순이화진최영석 옮김, 󰡔페미니즘 위대한 역사󰡕, 앨피, 2017. 이러한 역설은 단지 젠더와 관련해서만 제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4. 개인의 자율성의 이면: 예속적 주체화


하지만 이러한 설명 역시 자신의 고유한 맹목을 지니고 있다. 우선 위에서 설명한 근대적 개인이 말 그대로 사회에서 독립해 있는 일종의 인간학적 원자(原子)들로서 실존함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앞에서 우리가 서양 자유주의의 기본 공리라고 불렀던 것은 기술적(descriptive) 의미가 아니라 규범적(normative)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Catherine Audard, op. cit. 참조.] 때로 개인의 독립성을 기술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으나(고전적인 사회계약론의 근간 개념 중 하나인 자연상태개념에는 이러한 애매성이 함축돼 있다), 이는 인간이 사회적 관계 바깥에서는 생존하기 어렵고 인간으로 성립하기도 어렵다는 점을 간과할 뿐만 아니라(18세기 이래 서양의 문학에서 종종 거론되어온 늑대인간의 이야기는 이러한 난점의 문학적 표현이다) 개인들 사이의 실제적인 불평등(신체적 능력만이 아니라 재산이나 권력, 지능 등에서의 불평등)의 존재도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실제로 근대사회의 개인들은 전근대사회와 상이한 조직화 및 사회화 과정에 따라 형성되고 재생산된다. 이것을 포괄적으로 개인화(individualization)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이때 개인화 과정이란, 개인들이 원초적으로 주어진 존재자가 아니라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변형되고 또 재생산되는 존재자들이라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근대적 개인, 보편적인 추상적 개인의 이면에는, 이러한 개인은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개인이며 특정한 메커니즘의 생산물이라는 사실이 놓여 있다. 반면 대개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자아로서의 개인을 일체의 사회적 관계 이전에 미리 주어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내가 앞에서 말한 자유주의의 또 다른 맹목이다.


이러한 맹목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준 사람들이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자들이다. 우리가 흔히 후기 구조주의라고 부르는 철학자들 가운데서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자율적인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근대의 개인 주체가 사실은 예속적 주체화(assujettissement, subjectfication)의 산물이라는 점을 보여준 바 있다.


알튀세르(Louis Althusser)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을 통해 바로 이러한 맹목을 설명하고자 했다.[Louis Althusser, Sur la reproduction, Paris: PUF, 2011(2e édition); 루이 알튀세르, 김웅권 옮김, 󰡔재생산에 대하여󰡕, 동문선, 2007.]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지만,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개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스피노자 철학에 의지하여 이를 개조하려고 했다. 이러한 개조의 핵심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알튀세르는 가상 내지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와 현실 내지 진실을 단순히 대립시키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개념의 한계를 넘어 이데올로기의 실재성(및 더 나아가 물질성)을 개념화하려고 했다. 이데올로기를 단순한 가상 내지 허위의식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어떻게 그러한 가상(예컨대 종교라든가 마르크스가 말하는 물신숭배(fetishism) 같은 것)이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또 사회적 현실을 구조화하는 힘을 갖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둘째,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예속적 주체 형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흔히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개인들 내지 주체들이 바로 그 개인들 내지 주체들로서 존재하는 양식이 사실은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과 내재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개인적인 실존 양식, 개인성 그 자체가 지배 계급의 권력에 대한 예속을 전제로 한다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 이데올로기적 권력 또는 상징적 권력에 대한 분석을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할 수밖에 없다. 알튀세르는 특히 호명(interpellation) 개념을 중심으로 이러한 예속적인 주체 생산의 메커니즘을 해명하려고 했다.[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및 호명 이론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알뛰쎄르와 라깡: “또는알뛰쎄르의 유령들 I, 김상환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비, 2002; 스피노자와 알튀세르: 상상계와 이데올로기, 서동욱진태원 엮음, 󰡔스피노자의 귀환󰡕, 민음사, 2017a를 참조하기 바란다.]


따라서 이것은 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철학적 근대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개인을 뜻하는 자유로운 주체라는 범주는 칸트 이래 근대 철학의 핵심 원리로 존재해왔는데, 개인 내지 주체라는 것이 이데올로기적 호명 메커니즘의 산물이라면, 개인 내지 주체는 정의상 예속적인 주체인 셈이며 근대철학의 가정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예속적 주체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반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심각한 난점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이데올로기론은 현대 인문사회과학에서 가장 혁신적인 이론 중 하나로 널리 찬사를 받았지만, 동시에 격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는 이러한 이론을 전제할 경우 평등하고 자유로운 주체 내지 개인의 가능성을 좀처럼 사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개인 내지 주체가 정의상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산물이라면, 따라서 예속적인 개인 내지 주체라면, 그렇다면 해방의 주체,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가?[이는 특히 영미권 맑스주의자들이 알튀세르에게 제기한 주요한 비판 논점이었으며, 테리 이글턴이나 슬라보예 지젝 같은 현대 비평가들에 의해 되풀이되고 있다. 이 비판이 특히 잘 나타난 책으로는 Slavoy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LondonNew York: Verso, 1989; 슬라보예 지젝, 이수련 옮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새물결, 2013 참조. 이러한 비판에 맞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강점을 옹호하려는 시도로는, 진태원, 앞의 글, 2017a 참조.]


실제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밑바탕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법 이데올로기로 파악하는 관점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알튀세르가 말하는 법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바로 평등과 자유 같은 것이다. “법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개인은 법인으로서 법률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며 의무가 있는 법적 인격이다. () 법 이데올로기도 외관상 이와 유사한 담론을 펼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본래(본성상, par nature) 자유롭고 평등하다. 따라서 법 이데올로기에서는 (법인들이 아니라) ‘인간들의 자유와 평등에 토대가 되는것이 법이 아니라 자연이다.” [Louis Althusser, Op. cit., p.99; 루이 알튀세르, 앞의 책, 121-122. 강조는 알튀세르.]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평등자유는 법 이데올로기이며, 이러한 법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강제 없이도 자발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또 그것이 정상적으로재생산되도록 그 체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게끔 해준다.


한편 푸코는 다른 관점에서 근대적 개인 내지 주체의 예속적 생산 메커니즘을 탐구했다. 그는 특히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 1󰡕 같은 저작에서 규율권력”(pouvoir disciplinaire)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이러한 작업을 수행했다. 1976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서 푸코는 자신의 관점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권력을 관계의 원초적 항들로부터 출발해서 연구할 게 아니라, 관계야말로 자신이 향하고 있는 요소들을 규정하는 것인 한에서, 관계 자체로부터 출발해서 연구해야 한다. 이상적 주체들에게 그들이 스스로 예속될(assujettir) 수 있도록 그들 자신으로부터 또는 그들의 권력으로부터 양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어떻게 예속 관계들(relations d’assujettissement)이 주체들을 만들(fabriquer) 수 있는지 탐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권력 형태들이 그 결과로서 또는 그 전개로서 파생되어 나올 유일한 형태나 중심점을 찾기보다는 우선 이 형태들이 지닌 다양성, 차이, 종별성, 가역성을 부각시켜야 한다. 따라서 이것들을 서로 교차하고 서로에게 준거하고 서로 수렴하거나 반대로 서로 대립하고 서로를 소멸시키는 경향을 지닌 세력관계들로 연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법에 대해 권력의 발현으로서의 특권을 부여하기보다는 권력이 작동시키는 상이한 강제의 기술들을 표시해두는 것이 좋다.” [Michel Foucault,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Paris: Seuil/Gallimard, 1997; 미셸 푸코, 박정자 옮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동문선, 1998, 305-306. 번역은 수정.]

 

이 대목에서 푸코는 관계론적 권력론이라 부를 수 있는 관점에 입각하여 주체에 관한 서양 근대 철학 및 정치학의 관점을 뒤집고 있다.[푸코의 관계론적 권력론에 관해서는 진태원, 푸코와 민주주의,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그린비, 2019 참조.] 근대 철학의 기본 범주로서 이해된 주체는 무엇보다 인식과 실천의 원리, 곧 인간의 모든 인식 및 도덕적 실천의 토대로 기능하며, 따라서 그보다 상위의 원리에 예속되지 않는 자율적인 존재자로 간주된다. 또한 서양 근대 정치학의 지배적인 모델을 이루는 사회계약론은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사회계약을 통해 정치사회를 구성하려는 개인들의 자발적인 의지에서 근대 국가의 규범적 토대를 발견한다. 따라서 사회계약론의 자명한 전제는 자유롭게 토론하고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개인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푸코는 권력에 대한 분석에서,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들의 권력을 자유롭게 양도하는 이상적 주체들에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상적 주체들 또는 자유로운 개인들은 권력 관계 바깥에서 항상 이미 성립해 있는 존재자들이 아니라, 권력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하고 존재하고 재생산될 수 있는 존재자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권력 관계는 사람들을 근대의 지배 질서에 예속시키는 예속화의 권력 관계들이며, 이러한 예속화 작용을 통해 비로소 근대적 주체들은 주체들로서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근대적 주체들은 권력 관계의 기원에 놓인 정치적 질서의 창시자들이 아니라, 지배 질서에 예속되어 그러한 질서를 유지하고 재생산할 임무를 부과 받은 예속적 주체들이다.


여기서 영어로는 subject, 또는 불어로는 sujet라는 말이 지닌 이중적 의미를 유념해야 한다. 근대 철학이나 정치학에 의해 subject가 자유롭고 자율적인 주체로 부각되기 이전에, 또는 그 이면에서 subject는 예속적인 존재자, ‘신민’(臣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푸코가 자유의지에 따라 계약을 맺는 이상적 주체들로부터 출발하여 권력 관계를 이해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예속 관계들(relations d’assujettissement)이 주체들을 만들(fabriquer) 수 있는지 탐구해야 한다고 말할 때 염두에 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중적 의미다. 다시 말해, 근대 철학과 정치학, 그리고 그것이 정당화하는 근대 사회(곧 자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 주체들을 상정하고 있지만, 푸코에 따르면 이는 그 이면, 하부구조에서 작동하는 규율 권력, 곧 예속적인 주체들을 생산하는 예속화 권력의 메커니즘을 은폐하고, 이에 따라 자유롭고 자율적인 주체들이란 사실은 이미 예속적 권력 관계들에 의해 생산된 예속적 신민-주체들이라는 점을 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음의 두 인용문은 푸코의 생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 그리고 사람들이 해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그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이미 그 자체에서 그 인간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예속화의 성과인 것이다. 한 영혼이 인간 속에 들어가 살면서 인간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권력이 신체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력 안의 한 부품인 것이다. 영혼은 정치적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이며, 또한 신체의 감옥이다.” [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Paris: Gallimard, 1975, p.38;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 1994, 60. 번역은 수정.]

 

부르주아지가 18세기를 통해 정치적 지배 계급이 된 과정은 명시적이고 명문화되고 형식적으로 평등한 법적 틀의 설정과 의회제 및 대의제의 형식을 띤 체제의 조직화에 의지한 것이다. 하지만 규율 장치의 발전과 일반화는 이러한 과정의 어두운 이면을 만들어 놓았다. 원칙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권리 체계를 보증했던 일반적인 법률 형태는 이러한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물리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규율로 형성된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불균형적인 권력의 모든 체계에 의해 그 바탕이 만들어진 것이다. () 현실적이고 신체적인 규율은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자유의 기반을 마련했다. 인간의 자유를 발견한 계몽주의 시대는 또한 규율을 발명한 시대였다.[Michel Foucault, Ibid., 1975, p.258; 미셸 푸코, 앞의 책, 1994, 322-23. 번역은 수정했으며 강조 표시는 인용자가 추가한 것이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개념과 호명 개념에 기반하여, 자율적인 것으로 간주된 주체들이 사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유순한 주체로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예속적 주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면, 푸코의 경우에는 인간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하는 계몽주의적 근대성의 공언과는 달리 근대적 개인들은 감옥, 병원, 학교, 군대, 공장 등과 같이 사회의 주변적인 영역에서 작용하는 규율권력을 통해 마치 물건이 제조되듯 제조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규율은 개인을 제조한다’(fabrique). 즉 그것은 개인을 권력 행사의 객체와 도구로 간주하는 권력의 특정한 기술이다.” [미셸 푸코, 앞의 책, 1994, 255-56. 강조는 푸코.]


알튀세르와 푸코의 작업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간주된 근대 주체들, 더욱이 중세의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자들로, 자율적인 인식과 행위의 중심으로 간주된 주체들이 사실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따라서 불평등한 계급관계 내지 지배관계의 재생산을 위해 예속적으로 형성된 존재자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들의 작업은 근대의 개인적 주체들이, 개인주의 및 자유주의의 자기 이해와 달리, 미리 주어져 있는 존재자들도 아니고 그 자체로 자율적인 또는 자유롭거나 평등한 존재자들도 아니라는 점, 이들의 존재와 행위는 항상 이미 장치들(더 넓은 의미로 이해한다면 제도들), 그것도 계급관계나 지배관계의 재생산을 위한 장치들/제도들과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그 때문에 아주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5. 맺음말


이제 몇 가지 간단한 논평을 통해 이 글을 마무리해보겠다.


첫째, 알튀세르와 푸코의 예속적 주체화에 관한 분석은 개인과 개인주의에 관한 기존의 논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시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나 푸코의 신니체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들의 작업의 핵심 논점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알튀세르가 말하듯, 가족이나 학교와 같은 제도들과 독립하여 과연 개인들이 개인들로서 형성될 수 있는지, 개인들은 바로 이러한 제도들 속에서 인간으로서, 자율적 개인으로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푸코가 말하듯, 규율권력의 작용이 없이 과연 마르크스가 주어진 것으로 전제했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지 또한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규율권력은 결국 정상적 개인들과 비정상적 개인들의 분류 및 차별화 과정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푸코가 제시한 바 있는 예속적 주체화의 과정은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규범적 문제에 대한 답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문제를 더욱 미궁에 빠뜨렸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예속화 메커니즘으로의 편입을 의미한다면, 더욱이 그것은 동시에 정상화와 비정상화의 분류 작용을 함축한다면, 자율적 개인의 가능성은 더욱 더 어려워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근대적 개인을 프로테우스적 인간으로 규정한 것에 관해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근대적 개인은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공식은 결코 외부세계에서 오지 않기 때문에) 과소-사회화되고 동시에 (할당, 계승, 보상받은 정체성이라는 의미에서 핵심은 외적 압력의 상반되는 경향들에 맞서기에 충분할 만큼 강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 정체성은 궁극성의 전망 없이 계속 타협, 조정, 구축되어야 하기 때문에) 과잉-사회화된 사람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문성원 옮김, 󰡔자유󰡕, 도서출판 이후, 2002, 78-79. 강조는 원문.]


여기서 바우만이 근대적 개인의 특성으로 규정한 것은, 흔히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처럼, 이제는 지나간 과거의 인간에 대한 성격 규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시대, 즉 탈근대적인 사회 내지 신자유주의 사회의 인간에 대한 규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우리 시대의 근본 특징 중 하나는, 서양 근대에 철학적 개인 및 정치적 개인을 개인으로서 형성하는 데 본질적이었던 사회적 관계,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제도들의 쇠퇴 및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개인들은 더 이상 전성기의 복지국가 체제에서처럼 국가가 사람들의 삶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보장해줄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의 강력한 지지 아래 자신들의 권리 증대와 이익 증진이 이루어질 것으로 희망하기 어렵게 되었다. 반면 우리 시대에 개인들은 자신들의 개인성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해주었던 이러한 제도들의 부재 속에서 더욱 더 개인들로 실존하기를,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기를 요구받고 있다. 요컨대 탈근대 시대라고 하든 아니면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하든 간에, 우리 시대의 근본 특징 중 하나는 (자율적) 개인화의 조건이 부재하거나 약화된 상황에서 더욱 더 (자율적) 개인들로 존재하기를 요구받고 있는, 공포에 질린 개인들의 각자도생의 시대라는 점이다.


셋째, 이러한 동시대의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이론적 지주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 근대적 개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주권적 자율성개념을 대체할 수 있는 관계론적 자율성개념에서 이러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주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및 페미니즘 규범 이론의 새로운 모색에서 출발한 관계적 자율성 이론은 최근 서양 학계에서 광범위한 호응을 얻고 있다.[John Christman and Joel Anderson eds., Autonomy and the Challenges to Liberalism: New Essay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Catriona Mackenzie, & Nathalie Stoljar eds, Relational Autonomy: Feminist Perspectives on Autonomy, Agency, and the Social Self,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Aurelia Armstrong & Keith Green eds., Spinoza and Relational Autonomy: Being with Others,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9.]


관계적 자율성 이론은, 각각의 개인들의 자기결정(스스로 자신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과 자기통치(타인의 간섭이나 지배 없이 자기 스스로 행위하고 존재할 수 있는 능력), 자기권위화(사회적 규범이나 관습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을 독자적으로 평가하려는 태도)를 위해서도 각각의 개인들을 관계적 개인들로 이해하는 것이 본질적이라고 간주한다. 개인들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실존하며, 행위하고, 자신을 변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계론적 자율성 개념은, 한편으로 근대적 개인 개념에 함축된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규범적 이상을 포기하지 않은 가운데, 타인 및 사회와의 관계를 개인의 정체성에 구성적인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율성의 조건으로서 고립과 분리를 강제 받아온 근대적 개인 개념의 맹점, 그리고 그것이 우리 시대에 산출하는 사회적정치적 재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전망을 보여준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적 자율성의 원리는 특히 내가 몇 년 전에 제기한 바 있는 을의 민주주의에 잘 부합하는 규범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을들은 개별적으로 보면 가난하고 권력을 갖지 못하고 지적으로 유능하지 못할 수 있으며, 자신감도 결여하는 존재자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을들은 갑들보다 훨씬 더 타자 의존적이고 타자 지향적인 존재자들이다. 하지만 타자와의 이러한 관계들을 통해 을들은 집합적으로 또는 관계적으로 풍족하고 능동적이며 유능하고 관대한 행위자들로, 곧 한 마디로 하면 자율적인 존재자들로 재구성될 수 있다. 따라서 개별적으로는 취약하지만, 집합적인 관계 맺음을 통해 이를 자기 역량의 강화 및 타자에 대한 존중 역량의 고양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말하자면 더욱 의존적이면서 동시에 더욱 자율적일 수 있는) 을들의 관계적 자율성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을의 민주주의가 ()근대적 개인성의 규범적 아포리아와 관련하여 제기하는 한 가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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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2021-02-16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늘 감사드립니다!!

balmas 2021-02-17 17:57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잘 지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