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문화 103호, 곧 이번 여름호 권두언을 올립니다. 


이번 여름호 특집은 "청년 문제"입니다. 


자랑같아서 쑥스럽지만, 아주 시의적이고 유익한 글들이 실렸습니다. 


한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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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호 권두언 : 우리 사회의 증상으로서의 청년

 

 

작년 어느 무렵 편집회의에서 청년 문제를 한번 다뤘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을 때 내가 품고 있던 생각은 과연 우리 사회의 청년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였다. 이른바 ‘386’ 또는 ‘586’ 세대에 속하는 나는 몇 년 전부터 젊은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들이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내가 대학의 학과에 속해 있지 않고 꽤 오랫동안 대학 연구소에 근무해서 생긴 궁금증이었다. 학과 소속의 교수였다면 자연스럽게 대학생들과 자주 접하고 그들의 생각과 고민, 욕망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을 텐데, 대학의 연구소에 있다 보니 평소에 접하는 이들이 대개 내 나이 또래의 연구자들이나 아니면 선배 연구자들, 또는 젊다고 해도 이미 30대를 훌쩍 넘긴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소장 연구자들이었다. 간혹 대학의 강의를 맡게 되어도 주로 대학원 강의를 하다 보니 역시 젊은 학생들을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비교적 동질적인 생각을 가진 비슷한 세대의 연구자들과의 생활과 교류는 학문적 연구를 진작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의 범위를 한정하고 시야를 고정시키는 효과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청년 세대에 대한 이런 관심은 단순히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었다. 몇 년 사이에 우리 사회에서는 금수저 흙수저, 헬조선, 3포 세대, 5포 세대, N포 세대 같은 자조적인 담론이 유행했으며, 그와 더불어 한남, 메갈리아, 워마드 같이 젠더 전쟁을 상징하는 어휘들이 서로 날카롭게 맞서 왔다. 주로 20대 청년들이 발신한 이 담론과 어휘들은 내게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내가 (또는 우리) 막연하게 청년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이랄까 기대랄까, 아니 오히려 환상 같은 것들을 무자비하게 깨뜨렸기 때문이다. 386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나에게 (또는 우리에게) 청년은 늘 진보와 저항의 상징이었다.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군사 독재에 맞서 가장 열심히 싸웠던 이들, 그리고 전두환 군사 독재의 무자비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싸워서 끝내 역사적인 민주화의 성과를 이룩한 이들이 바로 청년 아닌가? 자신들의 빛나는 젊음을 반독재투쟁으로 보낸 청년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청년은 내게는 (또는 우리에게는) 늘 진보와 저항의 등가어였다.


그러나 이제 청년들 스스로 이러한 표상을 거부하고 그것에 조소와 경멸을 보내고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 곤궁할뿐더러, 미래를 기약할 수도 없기 때문일 터이다. 2000년대 이후 청년 실업의 문제는 늘 정치권과 사회의 주요 관심사였지만 뚜렷한 해결책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거와 복지, 사회적 관계와 문화에서 청년들의 삶은 열악한 형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사회가 점차 초고령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미래에 청년들이 짊어져야 할 부담은 눈덩이처럼 증가하고 있다. 현재의 청년들은 부모 세대보다 못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른 전 세계적인 불평등의 심화는 우리나라에서도 여지없이 관철되고 있어서, 청년들 사이의 양극화는 깊어져만 가고 있다. ‘금수저청년들이 탄탄한 경제적사회적 배경 덕분에 이른 나이에 확고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면, ‘흙수저또는 동수저청년들은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알바를 전전하면서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거나 아니면 반강제로 창업 전선으로 밀려나고 있다. 혹 일자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가중되는 육체적정신적 피로에서 기인하는 무기력 증상을 뜻하는 번아웃’(burn-out)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실천할 만한 가능성을 박탈당하고 있다.


젊은 여성들 및 특히 성적인종적문화적 소수자들은 아마도 더욱 가혹한 상황에 처해 있을 것이다. 과거보다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강고한 가부장제 문화와 관행이 여성들을 차별하고 있고, 요즘은 다양한 방식의 혐오의 대상이 되어 물질적 차별에 상징적 모욕까지 당하고 있는 형편이니 그들의 고통과 분노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정상적인) 성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거나 한국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예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소수자들의 고통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청년들의 보수화나 무기력함을 걱정하고 타일러야 하는 것일까? 실제로 올해 2월 한 정부 자문기구에서 나온 20대 남성 지지율 하락에 관한 정책 보고서에서 20대 여성을 집단 이기주의감성의 진보 집단으로, 20대 남성은 반페미니즘적인 보수화 집단으로 지목해서 문제가 된 바 있다. 청년을 다분히 편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보수진보개념에 입각하여 재단한 것도 문제이지만, 청년을 대상화하거나 심지어 도구화하는 발상을 품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흔히 청년 문제를 세대의 문제로 바라보곤 한다. 어떤 점에서는 당연하고 또 필요한 관점일 수도 있지만, 청년 문제를 세대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그것은 청년 문제를 특정한 생물학적 연령기에 고유한 문제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청년들이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 곧 고용문제, 주거 문제를 비롯한 복지 결여의 문제, 그리고 노동에서 겪는 비인간적 착취의 문제, 문화적 관계의 빈곤함의 문제, 젠더 차별의 문제, 지방 청년들의 소외 문제 가운데 청년들에게만 고유한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사회 체계의 구조적 문제점으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들이며, 따라서 구조적 차원의 해법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풀리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더 나아가 청년 문제를 세대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청년들을 대상화하기 쉬운 접근법이다. 청년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성숙했으되, 아직 사회의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받기에는 무언가 결여되어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우선 일정한 일자리를 얻음으로써 사회의 정식 구성원이 되었음을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여기에는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 이는 청년들을 주체적인 이니셔티브에 따라 발언하고 판단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주체들이 아니라, 일단은 보호받고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피후견자의 지위로 격하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청년을 진보와 저항의 주체로 간주하는 기성 세대의 환상은 이를 상상적으로 은폐하고 봉합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


또한 청년들을 간단히 세대로 묶을 경우, 청년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대립과 갈등을 놓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는 문제적이다. 하지만 특집의 여러 글이 지적하듯이 단수로서의 청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복수의 청년들이 존재할 뿐이며, 그 청년들은, ‘금수저 흙수저담론이 말해주듯 계급적으로 분할된 청년들이고, 또한 젠더 상으로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청년들이다. 아마도 서울(수도권)과 지방의 대립, 국민과 비국민의 대립 역시 청년들을 가로지르는 또 다른 갈등(충분히 인지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절박할 수 있는)의 축일 터이다.


따라서 우리가 청년 문제를 제대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청년의 문제를 단지 세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시스템의 실패에 대한 증상으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청년 문제를 증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청년들을 주체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스스로 발언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이니셔티브를 부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청년 문제는 청년들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며, 대상으로서의 청년들을 위한 정책을 제시한다고 해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청년들을 우리 사회의 실패한 시스템을 함께 고민하고 그 개혁의 방향을 함께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주체로 인정할 때, 청년 문제는 우리 사회의 전환을 이끄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가 청년들에 대한 자기중심적 환상에서 벗어나 청년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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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다루는 이번 호 특집은 다섯 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편집위원회가 특별히 주문하지 않았음에도 이 다섯 편의 글은 청년 문제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장기적인 전망에 입각하여 해법을 모색할 것을 주문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요컨대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청년 문제는 우리 사회의 증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먼저 이승윤 선생은 노동시장에서 청년들이 처해 있는 불안정한 상황을 촘촘한 자료를 통해 상세히 보여주면서 20세기 이후 100여 년 동안의 복지국가의 형성과 전개, 재편의 흐름 속에서 청년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선생은 디지털 자본주의와 플랫폼 경제의 발전은 저임금 일자리의 확산을 가져오기 때문에 기존의 고용 중심 정책으로는 청년들의 불안정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복지국가의 역사적 전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복지제도의 구조개혁을 요구하고 추구할 만한 주체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 실질적인 복지국가 경험을 하지 못한 청년 세대들이 앞으로 복지제도의 개혁과 발전을 이끌어갈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이는 청년 문제의 해법은 청년들의 주체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이승윤 선생의 글이 거시적인 흐름에 주목한다면, 이충한 선생은 좀 더 미시적인 차원에서 청년노동의 문제를 살피고 있다. 선생은 전방위적 엉망감이라는 흥미로운 용어로 청()년들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엉망감은 경쟁의 상위나 하위가 아니라 중간에 놓여 있는 대다수의 존재자들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경쟁 시스템 내부에서 나름대로 노력하려고 하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열정노동의 착취를 당하고 그 결과 의욕 상실과 비노동 지향의 니트 상태에 놓이게 하는 것이 바로 엉망감인 셈이다. 그렇다면 니트 청년은 취업취약계층도 은둔형 외톨이도 아니며, 열악한 노동환경과 이상한 조직문화 속에서 소진되어버린 다수의 청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제기해야 할 올바른 질문은 청년 니트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회적 조건이 청년을 니트(비노동) 상태로 만드는가라는 질문이다.


선생은 서구 선진국들이 탈고용사회에 접어드는 시대에 우리 사회는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낡은 고용 시스템에 매달려 있는 것이 상황을 더욱 가중시킨다고 본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발상이 필요한데, 특히 인간학적으로 본다면 노동과 비노동 사이에 중간 단계를 만드는 것, 그리고 욕망을 공공화하는 것이 긴요한 과제다. 소외된 노동을 강요하고 그것을 소비주의적 욕망으로 벌충하도록 만드는 것은 청년들을 더욱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다양한 탐색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정책과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임윤서 선생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포토보이스 기법을 활용하여 우리 시대 청년들의 삶과 고민, 욕망과 희망의 내면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청년들이 직접 참여하여 자신들의 생각이 담긴 사진들을 촬영하고 그 사진들에 담긴 의미를 공유하는 포토보이스 기법은 통계 자료나 설문조사 등으로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 청년들 자신의 속생각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선생은 불안이라는 키워드로 청년들의 마음을 탐색하고 있다. 청년들은 불확실한 미래와 끝없는 경쟁 속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의 부재를 겪으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성공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인지, 또 이룰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바람직한 성공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경우 남는 것은 막막한 피로감과 탈출의 욕구일 것이다. 그것은 소확행이나 덕질로 나타나기도 하고 한국을 탈출하고 싶은 욕구로 나타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불안과 피로, 혼란이 스스로 초래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세습화된 불평등 사회와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부과하는 것이며, 서열화된 신자유주의 대학이 이끄는 것이다. 이처럼 불안의 일상화 속에서 생존주의 윤리를 습득하도록 내몰리는 청년들의 모습에서 청년 문제는 단지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필자들 가운데 청년이라는 범주에 생물학적 연령상 가장 가까운 최성용 선생은 올해 들어 정치권과 언론에서 회자되고 있는 이른바 ‘20대 남성을 둘러싼 담론의 허와 실을 날카롭게 따지고 있다. 이 글은 청년이라는 기표, 특히 ‘20대 청년이라는 기표가 허구적이고 맹목적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허구적인 이유는 중성적인 청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청년은 다른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젠더적인 차이가 기입된 세대라는 점, 따라서 20대 여성과 20대 남성은 엄연히 다른 존재자라는 점을 삭제하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이유는 청년은 진보적이며, 따라서 민주적이고, 따라서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는 기대 내지 소망이 착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선생은 이러한 허구성과 맹목성이 세 가지를 뜻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여성을 정치적 주체에서 배제한다는 점,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20대 남성을 20대 청년으로 과대 대표화한다는 점이다. 둘째, 이는 청년에 대한 외부적 시각을 나타내는 것으로, 청년 세대 자신의 시각에서 청년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소망하는 관점에서 청년 세대를 재현하는 것이다. 셋째, 그렇다면 외부적 시각에서 청년들을 재현하는 이 자신들은 누구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장기 386세대. 이런 의미에서 장기 386세대와 20대 남성은 남성 연대를 통해 가부장제를 수호하기 위해 공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20대 남성에 관해 장기 386세대를 필두로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세대론 프레임은 문제를 인식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남성 청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생은 20대 남성들에게 동료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의 고통에 대해 정직하게 인식하고 분노하면서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문한다. 그들의 길을 함께 따르는 길만이 20대 남성들이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전효관 선생은 청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사회 전환의 전망에서 청년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청년 문제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 실패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이 시스템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이른바 ‘4차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기술적 변화에 대해서도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 사회의 강고한 카르텔 구조는 청년들을 의사결정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해 왔다. 20대 국회에 40대가 19%에 불과하고 30대는 1%에도 미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를 단적으로 대변해준다. 이러한 시스템 실패는 청년들 내부에서 을들 사이의 갈등을 키우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선생은 정부와 달리 지자체들이 시행하고 있는 청년 거버넌스 정책을 확대하고, 근본적으로는 청년들의 이니셔티브를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청년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이라고 강조한다. 시스템을 전환하는 것은 사회적 상상력의 전환과 일상적인 관행과 규범의 변화를 요구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청년들이 사회적문화적 재설계에 참여할 수 있는 공론장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다. 단지 청년을 위해서가 아니라 청년과 함께문제를 인식하고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첩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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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여러 가지 논의들이 지면을 풍성하게 채우고 있다. 우선 특집과 관련된 박정훈 선생의 비평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지난 222일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와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는 포용국가와 청년정책: 젠더갈등을 넘어 공존의 모색이라는 토론회를 개최했는데, 이 글은 이 토론회의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그것의 한계를 짚고 있다. 선생은 토론회가 젠더와 청년이라는 두 가지 주제의 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도 양자가 서로 유기적으로 엮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청년 정책의 틀에 입각하여 젠더 문제를 이해하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 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청년 문제 해법의 핵심으로 제시된 당사자성의 한계를 짚고 있는 부분이다. 그 한계는 청년 문제들을 청년 당사자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하라는 해법이 오히려 청년들의 도구화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생겨난다. 더 나아가 청년 당사자에서 말하는 청년은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선생이 보여주듯 이때의 청년은 주로 남성 청년으로 재현되며, 따라서 남성 청년은 과잉대표되는 반면 여성 청년은 과소대표됨으로써 재현과 대표 수준에서의 또 다른 차별을 낳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젠더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계급과 지역 등의 차원에서도 과잉대표와 과소대표의 문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20대 남성을 중심으로 한 정부의 청년 담론과 그 해법이 우리 사회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여성 혐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20대 남성문제의 진정한 해법은 한국 사회의 남성성의 변화, 공정성 및 능력주의 담론에 대한 분석, 그리고 징병제의 전환 같은 근본적인 차원에서부터 찾아야 하리라는 것이 글의 결론이다.


또한 아시아의 작가들이 평화에 관해 나눈 좌담도 눈길을 끈다. 2018년 한 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널리 회자된 용어는 미투라고 할 수 있다. 사법부와 정치권에서 시작되어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사회 전역으로 확산된 미투 운동은 한편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행되어온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드러냈으며 다른 한편으로 여성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저항의 연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사건이었다. 서구의 식민 지배를 공통의 유산으로 지니고 있는 아시아 작가들의 대담은 미투 운동을 확장된 시야 속에서 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


방글라데시 작가인 샤힌 아크타르가 방글라데시의 독립전쟁과 로힝야족의 대량 학살에 관해 생생히 증언하듯이 여성들과 아이들은 늘 폭력의 집중적인 대상이 되며, 이는 깊은 육체적정신적도덕적 상처를 남긴다. 다른 한편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는 여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이 서구적 페미니즘의 이데올로기일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에게는 이스라엘에 억압받는 팔레스타인의 식민지적인 현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저항과 투쟁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도 출신으로 유럽에서 활동하는 프리야 바실은 여성들이 연대하기 위한 조건이 인종적국민적 차별과 위계에 대한 명철한 자각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배경과 조건 속에서 활동하는 이들 작가들의 목소리는 미투 운동의 진전을 위해서는 인종, 계급, 젠더, 종교, 교육, 능력 같은 분할과 차별화의 요소들을 가로지르는 교차적인 투쟁의 방식을 발명하는 것이 필요함을 잘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것이 김남일 작가의 스토리텔링 아시아연재다. 선생은 이번 회에서 하노이와 관련된 스토리를 감동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하노이라는 이름은 얼마 전 우리에게 깊은 실망을 안겨준 기억이 있다. 2018년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역사적인 최초의 북미정상회담 이후 두 번째 정상회담이 개최된 하노이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모은 곳이었다. 이번에야말로 한반도의 평화와 비핵화의 결정적인 문턱을 넘어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지만, 허무하게도 그것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선생의 글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다. 우리는 하노이를 우리의 평화를 위한 장소로 기대했지만, 사실 그 이전에 하노이, 곧 베트남은 우리가 두 차례, 아니 그 이상의 폭력을 가했던 장소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 군대는 미국의 용병으로 참전하여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한 바 있으며, 이러한 학살은 베트남인들의 가슴에 폭력과 고통의 기억을 새겨놓았다. 더욱이 1990년대 이후 베트남 처녀들은 우리나라 농촌 총각들의 결혼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수입되었다. 선생이 상기시키는 베트남,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국제결혼 전문”, “천생연분 결혼정보.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초혼, 재혼, 장애인 상담 환영. 후불제같은 국제결혼 안내 현수막들은 우리가 베트남, 그들의 청년에게 어떻게 (상징적인) 폭력을 가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에 들어온 수많은 베트남 여성들은 청년 문제의 대상인가 아닌가? 우리는 그들을 청년 문제의 당사자로 인식하는가 아닌가? 그리고 만약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길윤형 한겨레신문 기자의 한일관계에 관한 조망도 눈여겨 볼만한 글이다. 현재 한일 관계는 역대 최악이라고 할 만한 상황에 있는데, 이는 지구상의 최후의 냉전 지역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미래에 관한 한국과 일본의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갈등이다. 일본이 냉전의 해체 이후 부상한 중국에 맞서 자국의 안보를 위해 기존의 미일 동맹을 고수하는 가운데 한국을 그 하위 파트너로 견인하려고 시도한다면, 한국은 남-북과 미-중이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동아시아의 현존 질서를 타파하여 새로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양국의 해법의 차이와 연결되는데, 일본이 존 볼턴과 같은 강경파와 더불어 이른바 리비아식 모델을 지지한다면, 한국은 톱다운 방식으로 북핵 문제 해결과 종전 선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으로 나아가는 길을 개척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선생은 현재 한국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여 동아시아 냉전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지만, 그 이전에라도 대일 외교에 대한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상 문제라는 현안을 풀어내는 것이 가장 긴급한 문제이겠지만, 더 근본적인 과제는 김대중 정부 시절 이루어졌던 한일 간의 우호협력 관계에 버금가는 새로운 양국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언론 문제를 다루는 세 꼭지의 문화비평은 진정한 언론적폐의 청산을 위해서는 시민 중심의 미디어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990년대 이래 한국의 언론은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와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에 편승하여 퇴행을 거듭했으며, 최근에는 유료방송 및 글로벌 미디어 산업의 국내 시장 잠식으로 인해 한층 더 언론의 공공성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언론개혁의 과제도 한층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위해 채영길 선생은 기술관료적 정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개입적 전략의 필요성을 환기하고 있다. 다섯 가지 조직화 원리에 기반을 둔 이러한 전략은 언론개혁의 철학적 기반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또한 정수영 선생은 소극적 자유가 아닌 적극적 자유에 기반을 둔 언론자유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저항에 직면한 일본의 언론사 사주 및 경영관리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편집권이라는 개념은 1960년대 도입된 이후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언론의 독립과 자유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선생에 따르면 이 개념은 오늘날에는 언론사 사주와 경영진의 배타적인 권능으로 변질되었으며, 오히려 언론 민주화를 탄압하기 위한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외부권력-미디어-시민시민사회라는 3자 구도에 기반을 둔 자유롭고 어카운터블한(accountable)” 언론자유 개념을 확립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글의 결론이다.


이밖에도 이수경 작가의 소설 크라운공장노동자가족과 윤성희 작가의 김용균의 세계는 우리 사회의 참담한 노동의 현실을 묵직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이하나 선생의 르포 이 땅의 방 한 칸은 거주의 대상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한 신도시 아파트의 삶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지만 시와 문화비평, 서평 역시 [황해문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값진 소품들이다. 독자 여러분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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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가 들어선지 2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금방이라도 이루어질 것처럼 보였던 한반도의 평화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고, 노동개혁 및 경제개혁은 오히려 주춤거리다가 뒤로 물러서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법개혁과 정치개혁의 과제도 답답하게 막혀 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수구세력은 다시 한 번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면서 호시탐탐 탄핵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려는 야수의 집요함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청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혹시 한가한 조개 줍기의 태도로 비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특집의 필자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듯이 청년 문제를 기존의 과제들에 병렬적으로 덧붙여지는 또 하나의 (부차적인) 과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앞서 말한 과제들을 인식하고 해결하는 정부 및 기성세대의 방식이 지닌 맹목과 모순을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청년 문제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과 규범, 인식틀을 살펴보는 문제이며, 우리의 새로운 미래를 기획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번 호 특집이 이를 납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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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작 2019-06-19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년이 연구 대상인듯하네요. 청년의 대상화, 나 청년의 재현, 은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해서, 도서관에 가 읽어봐야할것 같아요.

balmas 2019-06-20 01:39   좋아요 0 | URL
ㅎㅎ 예 맞습니다. [황해문화] 이번 호 특집이 바로 청년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