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현상학 연구]에 실릴 논문 한 편 올립니다. 


아직 교정이 다 끝나지 않은 글이니, 논문을 인용하거나 논문에 관해 토론하려는 분들은 


[철학과 현상학 연구]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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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와 자크 데리다: 주권의 탈구축

[이 논문은 칼 슈미트와 21세기 정치현상학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2018428일 한국 현상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이후 수정보완을 거쳐 완성된 논문이다. 좋은 논평을 해준 학술대회 참석자들 및 익명의 심사위원들에게 감사드린다.]


 

 

I. 데리다와 주권의 문제

 

지난 1990년대 이후 데리다는 {법의 힘}[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aris: Galilée, 1994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마르크스의 유령들}[Jacques Derrida, Spectres de Marx, Paris: Galilée, 1993(󰡔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4(수정 2)).], {우애의 정치}[Jacques Derrida, Politiques de l’amitié, Paris: Galilée, 1994.], {환대에 대하여}[Jacques Derrida & Anne Dufourmantelle, De l’hospitalité, Paris: Calmann-Lévy, 1997(󰡔환대에 대하여󰡕, 남수인 옮김, 동문선, 2004).], {불량배들} 등과 같은 저작들을 통해 또는 데리다가 사망한 뒤에 유고로 출판되고 있는 여러 강의록을 통해 법, 정치, 환대, 주권, 마르크스주의 등과 같은 정치철학 내지 실천철학의 주요 쟁점들을 다루는 탈구축적인 방식을 충실히 보여주었다.


이 글에서 내가 다뤄보려고 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주권에 관한 데리다의 작업이다. 주권의 문제는 초기 데리다 저술에서는 거의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기록과 차이}에 수록된 조르주 바타이유에 관한 논문에서 바타이유의 낭비, 일반경제 개념 등과 관련하여 주권 개념이 부분적으로 논의되기는 했지만,[Jacques Derrida, “De l’économie restreinte à l'économie générale. Un hégélianisme sans réserve”, in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Paris: Seuil, 1967. 이 책은 󰡔글쓰기와 차이󰡕라는 제목으로 국역본이 나와 있으나(남수인 옮김, 동문선, 2001), 번역에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특히 2001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을 계기로 출간된 {테러 시대의 철학}에 수록된 자기면역-실재적이고 상징적인 자살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으며[Jacques Derrida, “Autoimmunity: Real and Symbolic SuicidesA Dialogue with Jacques Derrida”, in Giovanna Borradori, Philosophy in a Time of Terror: Dialogues with Jürgen Habermas and Jacques Derrida,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3; 데리다와의 대화: 자가-면역, 상징적이고 실재적인 자살, 지오반나 보라도리, 󰡔테러 시대의 철학: 하버마스, 데리다와의 대담󰡕, 손철성 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다른 한편으로 파울 첼란(Paul Celan)의 시학과 관련하여(따라서 홀로코스트, , 주권적인 것, 상징적 폭력, 독특성, 표상/대표 등과 연결하여) 발전되었다[이점에 관해서는 파울 첼란과 주권의 문제에 관한 데리다의 저술을 편역한 다음 저술을 참조. Jacques Derrida, Sovereignties in Question: The Poetics of Paul Celan, ed. Thomas Dutoit,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5.]. 하지만 이 주제가 가장 집약적이고 밀도 높게 다루어진 것은 데리다가 생전에 출판한 마지막 저작인 {불량배들}이었으며[Jacques Derrida, Voyous, Paris: Galilée, 2003. 이 책은 2003년 우리말로 번역된 적이 있는데, 오역이 심해서 도저히 참조하기 어렵다. 󰡔불량배들󰡕, 이경신 옮김, 휴머니스트, 2003.], 유고로 출간된 강의록 {짐승과 주권자} 및 {사형}에서도 주권의 문제가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Jacques Derrida, Séminaire. La bête et le souverain, tome I ~ II (2001 ~ 2003), Paris: Galilée, 2008~2009; Séminaire la peine de mort, tome I ~ II (1999 ~ 2001), Paris: Galilée, 2012~2015.


주권에 관한 데리다의 논의는 보통 정치학이나 정치철학에서 주권 개념을 다루는 것과 매우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정치철학 내지 실천철학에 관한 데리다의 다른 논의와 마찬가지로 주권에 관한 논의 역시 한편으로 매우 사변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데리다가 수십 년 동안 전개해온 자신의 철학적 논리(이것을 차이(差移, différance)의 논리라고 하든[데리다의 이 신조어는 우리말로 보통 차연이라고 번역되지만, 필자는 본문에서 사용한 번역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점에서 필자는 김남두-이성원의 제안을 따른다. 이 개념의 번역 문제에 관해서는 이성원, 해체의 철학과 문학비평,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 문학과지성사, 1997 참조. 최근 주재형은 챠이라는 번역어를 제안한 바 있는데, 흥미로운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주재형, 데리다: 혁명의 탈-구축, 󰡔마르크스주의 연구󰡕 153, 2018 참조.] 아포리아의 논리라고 하든 또는 유사초월론(quasi-transcendentalism)의 논리라고 하든 간에[데리다가 1968년 프랑스철학회에서 강연했던 “Différance”라는 글(나중에 󰡔철학의 여백들󰡕(1972)에 수록되었다)은 데리다 초기 철학의 논리를 집약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초기 데리다 철학에 관한 논의에서 중심적인 개념이 되었다. 반면 데리다는 후기 철학에서는 아포리아개념을 더욱 빈번하게 사용했으며, 이에 따라 후기 데리다 사상과 관련해서는 아포리아의 문제가 많은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한편 유사초월론적’(quasi-transcendantal)이라는 개념에 관해서는 진태원, 유사초월론: 데리다와 이성의 탈구축,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철학논집󰡕 53, 2018 참조.])에 입각하여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논리를 변용하고 확장하면서 전개된다. 이 글에서는 데리다의 풍부하고 다면적인 논의를 충실히 따라 가기는 어렵고 그 논의의 몇 가지 논점만 이끌어내 볼 것이다.


주권에 대한 탈구축 작업과 관련하여 칼 슈미트에 대한 데리다의 독해를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룬다. 데리다 저작에서 슈미트는 중심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없다.[따라서 가령 아감벤, 데리다 및 일군의 현대 주권 이론가들은 슈미트의 두 개의 경구적 텍스트[󰡔정치적인 것의 개념󰡕, 󰡔정치신학󰡕]과 관련하여 자신의 방향을 설정해왔다”(Anne Norton, “Pentecost: Democratic Sovereignty in Carl Schmitt”, Constellations, vol. 18, no. 3, 2011, p. 389)는 식의 주장은 사태를 너무 단순화하는 것이다. 이는 아감벤이나 다른 주권 이론가들에게는 사실일 수 있겠지만, 데리다에게는 들어맞지 않는 주장이다. 이런 식의 단순화와 일반화는 데리다의 정치철학이나 주권이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아감벤과 데리다 사이의 갈등적인 관계를 해명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 데리다와 슈미트(아감벤)의 차이에 관한 좀 더 세심하고 균형 있는 평가들로는, Benjamin Arditi, “On the Political: Schmitt contra Schmitt”, Telos, no. 142, 2008; Matthias Fritsch, “Antagonism and Democratic Citizenship(Schmitt, Mouffe, Derrida)”, Research in Phenomenology, vol. 38, 2008; Bonnie Honig, Emergency Politics: Paradox, Law, Democrac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9 4~5장을 참조.] 후설이나 하이데거, 또는 칸트나 헤겔, 아니면 프로이트나 라캉 또는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 블랑쇼, 레비나스 같은 사상가들이 초기 데리다에서부터 후기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그리고 자주 거론되고 면밀한 독서의 대상이 되었던 것에 비해, 슈미트는 데리다가 정치철학 및 법철학의 문제들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후기 저술, 특히 {우애의 정치}에서 처음 거론되며, 강의록 {짐승과 주권자}에서도 부분적인 논의의 대상이 된다.[이 때문에 칼 슈미트와 자크 데리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슈미트에 대한 데리다의 탈구축적 독해는 주권 개념을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에 관한 논의, 따라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뒤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정치적인 것에 관한 슈미트의 논의에는 주권에 대한 그의 고유한 관점이 깔려 있으며, 따라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탈구축하는 데리다의 독서는 슈미트의 주권 개념에 대한 데리다의 관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2절에서 우선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의 주요 논점을 살펴본 뒤, 그와 관련하여 {정치신학}에 나타난 주권의 논리를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3절에서는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과 주권 개념에 대한 데리다의 탈구축의 요점을 결정 불가능성’, ‘약한 메시아적 힘’, ‘자기면역을 중심으로 제시해볼 것이다. 마지막 4절에서는 데리다 주권론의 구체적인 함의를 살펴보기 위해 국경의 민주화라는 주제를 고찰해보겠다.

 


II. 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본질과 주권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1장은 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한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Carl Schmitt, Der Begriff des Politischen, Berlin: Duncker & Humbolt, 1979, p. 7; 󰡔정치적인 것의 개념󰡕, 김효전정태호 옮김, 살림, 2012, 31. 󰡔정치적인 것의 개념󰡕 독일어판 텍스트에 대해 한 마디 언급해두기로 하자. 이 텍스트는 1927󰡔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논총󰡕(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 Politik) 581호에 논문 형태로 처음 출판되었으며, 1932년 단행본 저작으로 출간되었다. 그 뒤 1963년 같은 출판에서 슈미트의 새로운 서문과 함께 1932년 판이 재출간되었으며, 국역본과 영역본을 비롯한 대개의 번역본들은 이 판본을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하인리히 마이어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더 탁월한 최종판”, 1933년의 제3판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한 슈미트의 선택이었다. 그것은 1933년 판에는 나치스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반유대주의적 언급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Heinrich Meier, Carl Schmitt, Leo Strauss und “Der Begriff des Politischen”, Stuttgart: J.B. Metzler, 2013(초판은 1988), p. 14 5). 마이어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 슈미트의 텍스트들 가운데 예외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이 텍스트가 3종류의 상이한 판본을 지닌 유일한 저작이며, 이 텍스트가 촉발한 적수들과의 논쟁을 반영하기 위해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을 든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변형을 초래한 것이 레오 스트라우스의 비판이었으며,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대한 주해라는 제목의 이 글은 슈미트의 주선으로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논총󰡕에 실렸다. Leo Strauss, “Anmerkungen zu Carl Schmitt, Der Begriff des Politischen”, 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 Politik, vol. 67, no. 6, August-September, 1932, pp. 732~49; 국역본은, 카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대한 주해, 󰡔정치적인 것의 개념󰡕, 187~223. 1932년 판과 1933년 판 사이의 차이는 바로 스트라우스와의 대화를 반영한 것이라는 게 마이어의 논지다. 반면 윌리엄 슈어먼은 마이어가 정치신학의 영향을 과장한다고 비판하면서 오히려 중요한 것은 1927년 판 논문과 1932년 판 저서의 차이점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한스 모겐소(Hans Morgenthau)의 영향 때문에 생겨난 결과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Willaim E. Scheuerman, “chapter 9. Another Hidden Dialogue: Carl Schmitt and Hans Morgenthau”, in Carl Schmitt: The End of Law, Lanham, Maryland: Rowman & Littlefield, 1999 참조.그리고 2장에서는 다시 정치적인 것의 규준”(Kriterium des Politischen)동지의 구별”(Unterscheidung von Freund und Feind)에서 찾는다(Schmitt 1979, 14 (국역) 39. 강조는 원문).

 

이 구별은 새로운 고유 영역(eigenen neuen Sachgebietes)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앞서 말한 하나 또는 몇몇 대립들에 근거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것들에게 귀착시킬 수도 없다는 의미에서 독립적이다. ... 적과 동지의 구별은 결합 내지 분리, 연합 내지 분열의 최고의 강도를 나타낸다는 의미를 가지며, 이것은 상술한 모든 도덕적미적경제적 구별 등에 동시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도 존립할 수 있다. 정치상의 적이 도덕적으로 악할 필요는 없으며, 미적으로 추할 필요도 없다. 경제적인 경쟁자로서 등장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 적이란 바로 타자, 이방인(der Andrere, der Fremde)이며, 그 본성상 그가 특별히 강렬한 의미에서 실존적으로 어떤 타자이며 이방인이라는 것만으로 족할 것이다. ... 동지와 적이라는 특수한 대립을 다른 구별들로부터 분리시켜 독립적인 것으로서 파악할 수 있다는 가능성 속에 이미 정치적인 것의 존재로서의 사실성과 독립성이 나타나는 것이다.”(Schmitt 1979, 1415 (국역) 39. 강조는 인용자)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슈미트의 구별은 도덕적인 것, 미적인 것, 경제적인 것 또는 종교적인 것 등과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의 고유성을 식별하려는 이론적 노력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 겉으로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이 다른 영역, 곧 미적인 영역, 종교적 영역, 도덕적 영역, 경제적 영역과 같은 사회적 삶의 영역들과 구별되는 별개의 한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것은 고유 영역이 아니며 결합 내지 분리, 연합 내지 분열의 최고의 강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이를 단순히 정치라고 규정하지 않고 정치적인 것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하는 것은, 정치에 관한 당대의 학문이나 정치가들의 규정에 대한 슈미트의 근원적인 반발과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정치적인 것20세기 정치철학자들 다수가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이론화를 시도했던 개념이며, 따라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적 계보학은 20세기 정치철학의 흐름을 해석학적으로 재구성하려는 표본적인 기획이 될 수 있다.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20세기 유럽정치사상사의 맥락에서 재구성하려는 한 가지 시도로는, Samuel Moyn, “Concepts of the Political in Twentieth Century European Thought”, in Jens Meierhenrich & Oliver Simons eds., The Oxford Handbook of Carl Schmit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6 참조. Moyn은 슈미트적인 계보와 (레몽 아롱에게서 유래하는) 프랑스적인 계보(특히 클로드 르포르)의 차이를 강조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다소 자유주의적인 관점이다. 슈미트가 적대성을 강조하는 반면, 프랑스적인 계보는 공동체의 적극적 토대를 정초하려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좌파 하이데거주의라는 맥락에서 특히 프랑스 정치철학을 정치적인 것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려는 다른 관점의 시도는 Oliver Marchart, Post-Foundational Political Thought,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Ltd, 2007 2“Politics and the Political: Genealogy of a Conceptual Difference”을 참조. Marchart의 시도는 하이데거적/데리다적인형이상학 탈구축의 시도따라서 존재론이라기보다는 유령론(hauntology)그람시/라클라우적인정치학 탈구축따라서 정치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접합하려는 시도이며, 말하자면 제일철학으로서 정치사상”(162)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인데, 내가 보기에 이는 데리다 자신의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 곧 정치 내지 정치적인 것의 근원적 핵심을 파악하는 대신 정치적인 것을 국가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일이 일어나거나, 더 나쁜 경우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Schmitt 1979, 56 (국역) 93)의 경우처럼 정치 자체를 탈정치화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하인리히 마이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새로 정의하려는 슈미트의 작업의 바탕에는 정치를 기술적인 것으로 환원하려는 자유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존재하며, 더욱이 슈미트는 이점에서 자유주의는 공산주의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간주했다. Heinrich Meier (2013) 11~12. 또한 나종석, 정치적인 것의 본질과 칼 슈미트의 자유주의 비판, 󰡔헤겔연구󰡕 25, 2009도 참조. 다른 한편 레오 스트라우스는 슈미트 자신의 반자유주의가 사실은 자유주의적 전제에 의거해 있음을 홉스와의 비교를 통해 보여준 바 있다. 레오 스트라우스 (1932) 참조.] 더 나아가 슈미트에 따르면 이것은 전체 국가”(der totale Staat)로의 경향을 더욱 강화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승리한 자유주의적 제국주의가 정당한 적이라는 범주를 배제한 가운데 오히려 적을 범죄자”(Schmitt 1979, 2 (국역) 18)로 만들게 되고, 중립적이거나 비정치적인 수사법 아래 새로운 십자군 운동이나 인류의 최후의 전쟁”(Schmitt 1979, 65 (국역) 105) 같은 훨씬 더 파괴적이고 전면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낳게 된다. 따라서 적과 동지의 구별, 그리고 그것을 전제하는 고전적인정치의 모델, 곧 슈미트에 따르면 유럽공법질서로의 복귀 내지 재구성이야말로 오히려 전쟁을 제한하고 국제법에 따라 그것을 규제하는 것, 󰡔대지의 노모스󰡕의 표현을 따르면 전쟁을 길들이는 것”(Hegung des Krieges)을 가능하게 해준다.[슈미트의 국제관계론에서 전쟁 길들이기에 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주권 개념에 대한 서론, 진태원 옮김, 󰡔우리, 유럽의 시민들?󰡕, 후마니타스, 2010 및 베노 테슈케, 결정과 비결정: 칼 슈미트의 지적정치적 수용, 󰡔뉴레프트리뷰 4󰡕, 도서출판 길, 2012를 각각 참조.]


슈미트는 이러한 적과 동지의 구별을 공적인차원과 사적인차원에서 다시 구별한다.

 

적이란 단지 적어도 때에 따라서는 현실적 가능성으로서 투쟁하는 인간 전체이며, 바로 그러한 전체와 대립하는 전체이다. 따라서 적이란 공적인 적만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인간의 전체, 특히 전체 국민과 관련되는 것은 모두 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적이란 공적(公敵, hostis)이며, 넓은 의미에서의 사적(私敵, inimicus)은 아니다.”(Schmitt 1979, 16 (국역) 42. 강조는 원문)

 

슈미트는 공적인 적사적인 적의 구별을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폴레미오스”(polemios)에크로스”(Echthros)의 용례에서 가져오는데, 이는 다시 헬라스인과 헬라스인이 아닌 사람들 간의 전쟁으로서 폴레모스(polemos)와 헬라스인 내부에서의 갈등, 곧 일종의 내전으로서의 스타시스(stasis) 사이의 구별에 근거를 두고 있다.[데리다의 슈미트 독서와 관련하여 칼 슈미트에게서 의 두 가지 개념 구별의 의미에 대해서는 David Lloyd Dusenbury, “Carl Schmitt on Hostis and Inimicus: A Veneer for Bloody-Mindedness”, Ratio Juris, vol. 28, no. 3, 2015; Jacques de Ville, “The Foreign Body Within the Body Politic: Derrida, Schmitt and the Concept of the Political”, Law and Critique, vol. 26, no. 1, 2015를 각각 참조. 전자는 슈미트의 개념 구별의 문헌학적 부정확성(따라서 이 구별의 문헌학적 출처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데리다의 부주의함)을 드러내고 있고, 후자는 이 구별에 대한 탈구축(이는 저자에 따르면 곧 정치적인 것의 개념 속에 내재해 있는 자기 파괴의 가능성으로서 자기면역을 보여주는 것이다)을 데리다의 슈미트 독서의 핵심으로 간주한다.]

적과 동지의 이러한 구별은 일차적으로는 엄밀한 의미의 정치와 내치(內治, Polizei)를 구별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며, 더 나아가 이라는 범주를 유럽공법질서의 규범에 따라 규정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슈미트는 1963년 판 서문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이른바 냉전에서 전쟁과 평화와 중립, 정치와 경제, 군인과 민간인, 전투원과 비전투원 같은 구별들 및 그 기초를 이루는 적과 동지 같은 모든 개념의 축들이 무너지고 있다”(Carl Schmitt 1979, 10 (국역) 28)는 아쉬움을 표현하면서, 그 본질적인 증상으로서 고전적인 의미의 ’(enemy) 개념과 다른 범죄자로서의 ’(foe)이라는 개념이 수백 년 간의 침묵 끝에 다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슈미트는 1963년 판 서문에서 이제 국가중심의 시대(Epoche der Staatlichkeit)는 끝나 간다고 지적하면서, “<국가적>이라는 개념과 <정치적>이라는 개념이 일치했던 시대고적인 유럽의 국가의 시대, 유럽공법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Schmitt 1979, 4 (국역) 1617) 그러면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재규정하려는 자신의 시도에 대한 두 가지 도전을 바로 파르티잔 개념과 냉전의 문제에서 찾고 있다. 더 나아가 1972년 출간된 󰡔정치적인 것의 개념󰡕 「이탈리아판 서문에서는 국가와 더불어 또는 국가 없이, 국가적인 내용과 더불어 또는 그 내용 없이 정치적 투쟁에 참여하는 새로운 주체들의 다양성이라는 문제를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 사고해야 할 새로운 정치적 현실의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 이는 주지하다시피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관한 중간 논평이라는 부제를 지닌 󰡔파르티잔 이론󰡕의 중심 주제를 이룬다. Carl Schmitt, Theorie des Partisanen, Berlin: Duncker & Humbolt, 1963; 󰡔파르티잔: 그 존재와 의미󰡕, 김효전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8. 이에 관해서는 Benjamin Arditi, “Tracing the Political”, Angelaki: Journal of the Theoretical Humanities, vol. 1, no. 3, 1996 참조.] 따라서 슈미트에 따르면 적과 동지의 구별이 존재할 때 어떤 갈등 내지 대립은 정치적인 것이 된다. 가령 종교 단체들 간의 투쟁이 적과 동지의 구별에 의거하면 이 종교 단체들은 종교 단체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통일체이다.”(Schmitt 1979, 25 (국역) 51) 또한 산업 콘체른이나 노동조합의 경우도 그러하며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의 계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계급 투쟁을 진지하게 행하고, 상대방 계급을 실제의 적으로 다루고 국가 대 국가든 한 국가 내부의 내전이든 그것과 투쟁하는 경우에는 순수하게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며 정치적 세력이 된다. ...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와의 대립 ...”(같은 곳)


적과 동지의 구별을 공적인 차원에서 규정하려는 노력을 넘어서 슈미트는 이를 전쟁의 문제와 연결시킨다. 이는 정치적 대립은 가장 강도 높고 극단적인 대립”(Schmitt 1979, 17 (국역) 43)이며, 그 본질은 전쟁이라는 투쟁 형식에서 가장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자신이 말하는 전쟁을 다른 유형의 전쟁, 곧 논쟁이나 경합 같은 정신적인 의미의 전쟁이나 국가 내부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서의 내전과도 구별한다. 엄밀한 의미의 전쟁에는 조직된 정치적 통일체 간의 무장투쟁만이 속한다.

 

여기서 투쟁이라는 말은, 적이란 말과 마찬가지로 그 본래의 존재양식이 의미하는 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투쟁이란 경쟁이 아니며 순수하게 정신적인논쟁도 아니다. ... , 동지, 그리고 투쟁이라는 개념들이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들이 특히 물리적 살해의 현실적 가능성(reale Möglichkeit der physischen Tötung)과 관계를 맺으며, 또한 계속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 있다. 전쟁은 적대 관계에서 생긴다. 적대 관계란 타자의 존재 그 자체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란 적대 관계의 가장 극단적인 실현에 불과하다.”(Schmitt 1979, 20 (국역) 4546)

 

그리고 슈미트는 여기에서 정치적인 것을 결정하는 기준인 적과 동지의 구별을 주권의 문제와 연결시킨다. 정치적인 것이 적과 동지의 구별, 곧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 결정하는 데 의거하고 있다면, 이러한 결정 위에서 정치적 통일성의 가능성이 성립하며, 이러한 결정의 수행 주체가 바로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권자의 결정의 중요성은 위급사태 내지 예외상태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기준이 되는 것은 언제나 이와 같이 결정적인 사태, 즉 현실적인 투쟁의 가능성과 이러한 사태가 현재 발생했는가 여부에 관한 결정뿐이다. 이러한 사태가 예외적으로만 발생한다는 것은 그 규정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이란 사태는 위급사태’(Ernstfall). 이 경우에도 또한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외상태(Ausnahmefall)는 결정적인, 사물의 핵심을 명백히 하는 의미를 지닌다.”(Schmitt 1979, 2223 (국역) 49)

 

여기서 슈미트가 사용하는 주권이라는 말은 정치적 통일성을 함축하며, 이러한 통일성은 예외상태에서 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통해 표현된다. 주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코 정치적 통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Schmitt 1979, 27 (국역) 53)


주지하다시피 슈미트는 󰡔정치신학󰡕 첫머리에서 주권자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의한 바 있다.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Souverän ist, wer über den Ausnahmezustand entscheidet)[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Berlin: Duncker & Humbolt, 2004(초판은 1923) p. 13; 󰡔정치신학󰡕, 김항 옮김, 서울: 그린비, 2010, 16.이것은 법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주권자가 역설적인 위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주권자는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타당한 법질서의 외부에 있으며, 그럼에도 그러한 질서에 속해 있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헌정을 전면 중단시켜야 할 것인지 결정할 권한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Schmitt 2004, 14 (국역) 18. 번역은 약간 수정) 우리가 슈미트의 주권 및 주권자 개념의 논점을 이해하려면, 그리고 이를 데리다의 주권에 대한 탈구축과 관련하여 해명하려면 󰡔정치신학󰡕에 나오는 다음 대목을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인용문 본문에 괄호로 표시한 숫자는 필자가 붙인 것이다.]

 

“(1) 예외란 포섭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일반적인 정식화의 범위를 넘어선다. (2-1) 하지만 동시에 예외는 결정이라는 특수한 법학적인 형식 요소를 그 절대적인 순수성 속에서 드러낸다. (2-2) 예외적 사태는, 우선 법적 규칙들이 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 상황을 창조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 절대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 (2-3) 혼돈 상태에 적용할 수 있는 규칙은 없다. 법질서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질서가 확립되어야 한다. 즉 정상적 상황을 창조해내야 한다. 이러한 정상적 상태가 실제로 군림하는지 여부를 확정적으로 결정하는 자가 바로 주권자이다. 모든 법은 상황법’(Situationsrecht)이다. (3-1) 주권자는 전체로서의 상황을 그 총체성 속에서 창조하고 보증한다. 주권자만이 이러한 궁극적인 결정권을 독점한다. (3-2) 국가 주권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법학적으로 보아 국가 주권에 적절한 정의는 결코 제재나 처벌의 독점이 아니라 바로 결정의 독점으로 ... 예외적 사태는 국가 권위의 본질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다. ...

(4-1) 예외는 정상적인 경우보다 더 흥미롭다. 정상적인 경우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지만 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4-2) 또한 예외는 단순히 규칙을 입증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규칙 자체가 예외를 통해서만 생존한다. (...) 19세기의 신학적 성찰이 얼마나 놀라운 강렬함을 가질 수 있었는지를 어느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는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예외는 일반적인 것과 그 자체를 동시에 설명해준다.””(Schmitt 2004, 1921 (국역) 25. 번역은 다소 수정)

 

매우 밀도가 높은 이 대목에서 슈미트는 다음과 같은 논점을 전개하고 있다. 우선 그는 예외의 기본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예외란 포섭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일반적인 정식화의 범위를 넘어선다.” 기본적인 뜻에 따라 이해할 경우 예외는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a) 일탈, 비정상 (b) 일시적인 것, 잠정적인 것 (c) 규칙이나 정상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 그런데 슈미트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기본적인 또는 일상적인 의미의 예외가 아니라 법학적인 의미에서 결정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개념으로서의 예외다. 예외와 결정의 관계를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예외적 사태는 법적 규칙들이 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 상황을 창조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 절대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이에 따르면 예외는 (a)(b)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c)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c)규칙과 예외, 또는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사이에 일종의 존재론적 순서를 전제한다. 곧 규칙이나 정상적인 것은 예외나 비정상적인 것에 논리적존재론적으로 우선하는 것이며, 전자로부터의 일시적인 일탈로서의 후자는 가급적 빨리, 그리고 온전하게 전자로 복귀해야 한다.


반면 (2-2)는 이러한 순서의 역전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슈미트가 관심을 갖는 예외는 절대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예외적 사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대적 예외 상태는 정상적인 것으로 가급적 빨리 복귀해야 하는 일시적인 일탈이 아니라, “법적 규칙들이 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 상황을 창조해야 하는 상태이다. 곧 이러한 예외 상태는 일반적인 법적 규범이 존재하지 않거나 이미 자신의 타당성을 상실한 상태(역사적으로 보면 국가 또는 법질서의 존망이 달려 있는 혁명이나 전쟁 상황), 따라서 (c)에서처럼 복귀하거나 회복해야 할 정상적인 질서가 부재하는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예외 상태는 (2-3)에서 보듯이, 정상적인 상황을 창조해내야 하는 상태, 절대적 혼돈의 상태이다.


이러한 예외적 상태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앞에 나온 주권자에 대한 정의를 다시 살펴보자.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이 명제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주권자는 예외상태에서 결정하는 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상사태나 긴급사태에 처해 있을 때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바로 주권자라는 의미이다. 둘째,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본다면 이 명제는 주권자는 예외상태에 대하여 결정하는 자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 의미에서는, 어떤 것이 예외상태인지 이미 확립되어 있고 또한 합의가 존재하고 있다면, 두 번째 의미에서는 무엇이 정상이고 예외인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예외와 정상을 결정하는 자가 바로 주권자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타당한 헌정 질서가 무엇이고 반역 세력이 무엇인지, 아니면 이미 낡은 질서가 어떤 것이고 새로운 정당성을 지닌 세력이 어떤 것인지는 주권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 또는 그러한 구별을 결정하는 자가 바로 주권자이다. 그렇다면 헌정 질서를 헌정 질서로 만드는 것이 바로 주권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슈미트는 (3-1)에서 주권자는 전체로서의 상황을 그 총체성 속에서 창조하고 보증한다. 주권자만이 이러한 궁극적인 결정권을 독점한다. 국가 주권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권의 본질은 (3-2)에서 말하듯 결정의 독점에 있다. 어떤 것이 정상적인 질서이고 어떤 것이 예외인지 결정하는 것, 그리고 예외 상태에서 어떤 헌정 질서를 창조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이 바로 주권의 본질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처음에 출발했던 예외에 대한 기본적인 또는 상식적인 의미의 완전한 전도가 이루어진다. (4-1)에서 말하듯 정상적인 경우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지만 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하는데, 왜냐하면 정상적인 경우는 이미 주어져 있는 법질서가 타당하다는 것을 전제한 가운데 그러한 법질서의 한 가지 경우로 포섭되어 있는 반면, 예외는 이러한 법질서의 타당성 내지 효력이 중단되어 버린 상황이며, 따라서 그러한 법질서의 한계가 드러나고 그와 다른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이 모색되거나 이미 드러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예외는 단순히 규칙을 입증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규칙 자체가 예외를 통해서만 생존한다”(4-2)고 할 수 있다. 곧 예외는 규칙 내지 법질서의 본질 및 그 한계를 드러내주는 것일뿐더러, 법질서의 존재 자체가 예외상태에서 내려지는 정상과 예외의 경계에 대한 결정에 따라 성립하고 유지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예외상태는 어떤 일시적인 상황, 가령 전쟁이나 계엄령, 긴급사태가 포고되는 경우만이 아니라 정의상 모든 법질서 내부에 그것의 가능 조건으로서 항상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모든 법질서는 주권의 심급을 전제하는데, 주권은 예외상태에서 예외상태(와 정상상태의 차이)를 결정하는 작용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권자는 법질서의 궁극적인 가능 조건이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법질서에 속하지 않는 것, 법질서 바깥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슈미트가 주권자는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타당한 법질서의 외부에 있으며, 그럼에도 그러한 질서에 속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슈미트는 정상적인 타당한 법질서라는 한정을 부여하지만, (2-3)에서 보듯 정상적 상태가 실제로 군림하는지 여부를 확정적으로 결정하는 자가 바로 주권자라고 한다면, 사실 주권자는 이러한 한정을 넘어선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법 일반과 그 바깥을 결정하는 자가 곧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슈미트가 말하는 외부 또는 바깥은 정확히 말하면 법의 바깥이다. 그것은 법과 관련하여 규정된 바깥이며, 법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지니는 바깥인 것이다. 따라서 주권자는, 슈미트 자신은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법과 그 바깥의 경계를 결정하는 초월론적인 근거이되, 주권자를 이러한 근거로 만드는 것, 주권자를 주권자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슈미트는 법학자들에게는 반()법학적인 법학자 또는 적어도 비정상적이거나 예외적인 법학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는 철저히 법의 관점에서 사고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슈미트(또는 아감벤)에게 법 바깥의 사회적인 것 또는 법 바깥의 정치적인 것과 같은 것은 부재한다는 비판이 일리가 있다. 이점에 관해서는 베노 테슈케, 결정과 비결정: 칼 슈미트의 지적정치적 수용및 같은 저자의 지정학의 물신: 고팔 발라크리시난에 대한 답변, 󰡔뉴레프트리뷰 4󰡕, 도서출판 길, 2012; Jef Huysmans, “The Jargon of Exception: On Schmitt, Agamben and the Absence of Political Society”, International Political Sociology, no. 2, 2008을 각각 참조.]

 


III. 결정, 폭력, 자기면역: 슈미트에 대한 탈구축

 

그렇다면 데리다는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및 그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적대, 갈등, 폭력의 문제에 대하여, 또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 근저에 놓여 있는 주권에 관하여 어떻게 사고했을까? 이 장에서는 이러한 쟁점들에 관해 결정의 아포리아폭력과 메시아적인 힘’, ‘주권과 자기면역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겠다.

 

1. 결정의 아포리아

 

데리다는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독서에서 슈미트를 일방적으로 비판하지도 않으며, 또한 슈미트의 관점에 대하여 자유민주주의적인 규범적 토대를 옹호하지도 않는다. 그는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내재한 아포리아를 부각시키는 데 집중한다. 그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결정(decision)의 아포리아인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본 것처럼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나 󰡔정치신학󰡕 그리고 다른 여러 저작들에서도 결정의 문제는 슈미트에게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저술, 특히 정치철학 내지 실천철학에 관한 저술의 주요 논점 중 하나는 결정 불가능성의 아포리아였다.


이러한 아포리아가 가장 명료한 언어로 표현되는 󰡔법의 힘󰡕에서 데리다는 아포리아의 경험비록 그것이 불가능한 것일지라도이 없이는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정의는 불가능한 것의 한 경험”(Derrida 1994a, 37)이라는 점을 환기시킨 뒤, 법과 정의 사이의 세 가지 아포리아 가운데 두 번째 아포리아를 결정 불가능한 것의 유령”(Derrida 1994a, 같은 곳)이라고 부른다. 결정이 적법한 결정을 넘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결정, 곧 정의로운 결정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계산 가능한 것과 규칙의 질서를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일단 결정이 내려지고 나면 그것은 다시 한 번 어떤 규칙, 주어져 있었거나 발명된 또는 재발명된, 그리고 재긍정된 어떤 규칙을 따랐던 것이 된다.”(Derrida 1994a, 5253) 곧 어떤 규칙이나 계산 가능성의 질서의 한 사례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규칙이나 계산 가능성의 질서를 무시하거나 그것을 무조건 침해하려고 하는 것은 최악의 도착적인 결정을 낳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결정이 정의로운 결정이기 위해서는 결정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기존의 지식이나 계산 가능성에 의지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시 정의로운 결정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식이나 규칙 또는 계산 가능성을 무시하는, 그것에 위배되는 결정이어서도 안 된다. 이것이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결정 불가능한 것의 유령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우애의 정치󰡕에서 데리다가 슈미트를 독서할 때에도 이와 유사한 논리적 분석이 제시된다. 아주 집약적이고 밀도 있는 한 대목을 보자.

 

우리는 모든 결정 이론, 특히 외관상 근대적인 모양을 띠는 이론, 가령 슈미트의 결정주의 및 그 우파적이거나 좌파적인’, 심지어 네오마르크스주의적인 유산우리는 뒤에서 이점에 대해 다룰 것이다이 관여해야 하는 아포리아를 예고하기 위해 결정에 관해 강조한다. 이러한 결정주의는 알다시피 적에 대한 이론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것의 조건 자체를 이루는 적의 모습은 20세기에 고유한 의미의 적의 상실로 인해 지워지고 있다. 우리는 적을 상실하고, 따라서 정치적인 것을 잃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사건의 아포리아는 아마도(peut-être)와 관련하여 결정의 아포리아와 교차하며, 또한 그것을 축적하거나 과잉규정한다.[알튀세르의 개념인 surdétermination은 대개 과잉결정으로 번역되지만, 여기에서는 decision과 구별하기 위해 과잉규정으로 번역했다.]...... 결정은 확실히 사건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결정은 또한 모든 주체의 자유와 의지를 기습해야/놀라게 해야(surprendre) 하는, 한 마디로 말하면 주체의 주체성 자체를 기습해야/놀라게 해야 하는, 주체가 모든 결정 이전에 그리고 결정을 넘어서모든 주체화 이전에, 심지어 모든 객체화 이전에노출되어 있고 민감하고 수용적이고 취약하며, 근본적으로 수동적인 곳에서 주체를 변용하는, 이러한 돌발(survenue)을 중립화한다. ...... 주체 이론은 최소한의 결정을 해명하는 데 무능력하다. 하지만 이는 특히 사건에 대하여, 그리고 결정과 관련된 사건에 대하여 언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결코 어떤 것도, 사건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어떤 것도 주체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결정의 도식은 규칙적으로적어도 그 공통적이고 헤게모니적인 수용(여전히 슈미트의 결정주의, 그의 예외 및 주권 이론을 지배하는 것으로 보이는)에서 본다면주체의 심급(instance), 고전적인 주체, 자유롭고 의지적인 주체, 따라서 그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일어나지 않는, 심지어 주체 자신이 가령 예외적인 상황에서 어떤 독특한 사건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보존한다고 믿고 있는 순간 그 독특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주체의 심급을 함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Derrida 1994b, 8697. 강조는 원문)

 

데리다가 사건의 아포리아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방금 전에 봤던 결정 불가능한 것의 아포리아에서 모든 지식과 계산 가능성, 규칙성을 넘어서는, 기존의 인식적경험적실천적 지평에서는 예상할 수 없었고 심지어 측정될 수도 없는 어떤 것, 그야말로 미증유의 것(데리다에 따르면 모든 사건은 이점을 함축할 때에만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다)의 발생과 관련된 것이다. 어떤 것을 사건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그것은 사건으로 규정될 수 있어야 하지만, 사건이 사건이기 위해서 그것은 규정 가능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아포리아는, 데리다에 따르면 결정의 아포리아와 교차하고, “그것을 축적하거나 과잉규정하는것이다. 왜냐하면 결정이 계산 가능성 및 지식의 지평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면, 결정은 항상 어떤 사건을 만드는 것, 그 자체가 사건이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이 지닌 이러한 사건성이 강조된다면, 위에서 언급했던 결정의 아포리아는 더 첨예하게 제기된다. 그것은 늘 확정 불가능한 아마도”(peut-être, perhaps)의 양상을 띠게 된다.


주체와 관련해 보면, 사건은 늘 주체를 기습하는, 따라서 주체를 놀라게 만드는(surprendre) 어떤 것이다. 사건이 진정한 의미의 사건이라면 그것은 예상 가능하거나 계산할 수 있는 어떤 것이어서는 안 되며, 주체를 기습하고 놀라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사건에 대해 속수무책이고 수동적이고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에 늘 노출되고 또한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자유로운 주체라 하더라도 사건에 대해서는 자유롭지도 능동적이지도 자율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사건은, 주체를 변용하는(affecter) 것이다. 사건은 주체를 기습하여 주체를 놀라게 하고 주체를 다른 것으로 변용시킨다. 사건 이전과 이후 주체는 동일한 주체로, 동일한 어떤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슈미트가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정치적인 것의 규준으로 삼고, 특히 예외상태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을 가장 탁월한 정치적 주체인 주권자의 본질로 정의할 때, 그는 주권자가 사건에 대해 수동적이거나 취약한 것이 아니라 또한 그것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고 보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사건이 아닐 것이며, 주체가 여전히 주도권을 장악하고 보존할 수 있다면, 주체는 늘 바로 그것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가 첫 머리에 언급하듯이 192030년대에 쓰인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나 󰡔정치신학󰡕, 그리고 다른 저작들 역시, 또한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저술들까지도 슈미트의 중요한 의도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20세기에 고유한 의미의 적의 상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의 상실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를 막거나 여기에 맞서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주권자가 사건에 대해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것을 보존하고 있는데, 또한 예외상태에서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데, 어떻게 적을 상실하는 일이, 따라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 소멸되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가? 슈미트의 시도 자체가, 그리고 그의 시도의 실패 자체가 정치적인 것에 관한, 예외상태, 주권에 관한 그의 논의가 본질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논의에 깔려 있는 주체 개념의 한계로 인해, 따라서 결정 불가능성의 아포리아 및 사건의 아포리아에 대한 맹목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는 슈미트가 그 자신이 유럽공법이라고 부르는 법질서 체계를 불변의 국제적인 규범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질서에서 주요한 행위자로 존재하는 국민국가들을 보편적인 정치적 공동체로 전제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의 기원에 관한 물음도 또한 종말에 관한 물음도 슈미트의 법학이나 정치신학에서는 제기되지 않는다.[이런 점에서 보면 이러한 기원에 관한 물음이 󰡔대지의 노모스󰡕에서 체계적으로 제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Carl Schmitt, Der Nomos der Erde im Völkerrecht des Jus Publicum Europaeum (1950), Berlin: Duncker & Humbolt, 1974(󰡔대지의 노모스: 유럽 공법의 국제법󰡕, 최재훈 옮김, 민음사, 1995.] 하지만 그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원이나 종말 또는 역사적 변화, 곧 주체를 놀라게 하고 주체에게 기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슈미트 자신의 개인적역사적 우여곡절이 그것의 탁월한 표본이 아닌가? 데리다가 계산을 넘어서야 할 필연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계산이나 규칙, 적법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 정의로운 결정은 이 두 가지 필연성을 모두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도착의 위험이 모든 결정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2. 폭력의 불가피성, 하지만 권력을 넘어 약한 메시아적 힘을 향해

 

다른 한편 데리다가 슈미트와 더불어 투쟁, 갈등, , 폭력이 정치의 고유한 요소를 이루고 있는 점에 찬동하리라는 것은 그의 다른 여러 텍스트들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가령 󰡔법의 힘󰡕을 생각해보면, 데리다가 법으로서의 정의 개념 자체에, 이 되는 것으로서의 정의, <>으로서의 법 개념 자체에 본질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힘”(Derrida 1994a, 15. 강조는 원문)에 관해 말할 때, 힘은 법, 법적인 정의, 따라서 정치의 고유한 요소라는 것을 긍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법이라는 것이 법 외부에 있는 어떤 힘이나 세력(가령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의 계급) 또는 폭력의 도구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법 자체가 힘이자 세력 또는 폭력이라는 것을 뜻한다.[이점에서 데리다는 알튀세르나 푸코와 구별된다. 알튀세르가 법 자체가 지닌 힘 내지 강제성을 환기시키면서도 그 힘의 수행성에 주목하는 대신 그것을 계급 지배의 도구로 환원한다면(Louis Althusser, Sur la reproduction, Paris: PUF, 1995(󰡔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4장 참조), 푸코는 법을 전근대적인 주권 권력의 핵심으로 파악할 뿐, 그것에 대해 근대 권력의 장 속에 고유한 위상 내지 기능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그린비, 2017 7장 참조.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의 제목의 더 정확한 번역은 법이라는 힘(force de loi)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데리다가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폭력적법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는 힘”(Derrida 1994a, 1617)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때, 이는 단순히 수사학적인 질문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법에 고유한 적법한 힘과 부당한 폭력 사이의 구별이 개념적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것을 함축하는 질문이다. 실로 해당 대목에서 데리다는 매우 미묘한 논변을 전개하고 있다.[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폭력의 쉬볼렛: 벤야민, 데리다, 발리바르, 󰡔세계의 문학󰡕 135, 2010년 가을호 참조.]


또 다른 텍스트에서도 데리다의 관점을 엿볼 수 있다. 데리다는 {우편엽서}에 수록된 유명한 논문 프로이트에 대해 사변하기/프로이트에 편승하기[Jacques Derrida, “Spéculer sur Freud”, in La Carte postale, Paris: Flammarion, 1980. 이 논문의 제목은, 데리다의 다른 많은 글이나 제목과 마찬가지로 너무 다의적이어서 한두 가지 표현으로 충분히 의미를 살리기 어렵다.]에서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제기한 죽음충동’(Todestrieb, pulsion de mort)에 관해 엄밀하게 살펴본 바 있으며, 20년 뒤에는 다시 한 번 이 문제로 돌아가 죽음충동과 결부되어 있는 Bemächtigungstrieb, 권력충동 내지 주권적 장악의 충동”(pulsion de pouvoir ou maîtrise souveraine)의 문제를 제기한다. [Jacques Derrida, États d’âme de la psychanalyse, Paris: Galilée, 2000, p. 14. 이 책의 제목 역시 거의 번역이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가 이처럼 갈등과 투쟁, 힘과 폭력, 권력 등의 불가피성을 긍정한다고 해서 그가 칼 슈미트처럼 실존적 현실주의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슈미트는 적과 동지의 구별을 규준으로 삼는 정치적 대립은 가장 강도 높고 극단적인 대립이라고 주장하며, “, 동지, 그리고 투쟁이라는 개념들은 ... 물리적 살해의 현실적 가능성과 ... 관련된다는 점에서 현실적 의미를 가진다”(Schmitt 1979, 20 (국역) 4546)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것은 결국 전쟁으로 귀착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슈미트는 전쟁이란 적대관계의 가장 극단적인 실현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의도는 정치적인 실존이 유혈투쟁에 불과하다거나 정치적인 것의 정의가 호전적이거나 군국주의적인 것”(Schmitt 1979, 20 (국역) 46)을 본질적으로 포함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전쟁으로 환원한다는 비판에 대한 반비판으로는 특히 에른스트 볼프강 뵈켄회르데, 카를 슈미트 국법학 저작의 열쇠로서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헬무트 크바리치 엮음, 김효전 옮김, 󰡔반대물의 복합체: 20세기 법학과 정신과학에서 카를 슈미트의 위상󰡕, 산지니, 2014 참조.] 곧 그의 논점은 사람을 살해하는 것, 특히 집단적으로 살해하는 것은 어떠한 합리적 목적, 얼마나 정당한 규범, 또 얼마나 이상적인 강령,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적 이상, 어떠한 정당성이나 합법성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정치적인 것이란 존재적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적이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이때에는 타인을 살해하고 자신도 죽을 각오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전쟁 ... 그것은 규범적 의미가 아니라 실존적(existenziellen) 의미에 불과한 것”(Schmitt 1979, 36 (국역) 66)이다.


하지만 데리다는 슈미트의 이러한 주장의 근저에는 목적론이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현상은 오직 적과 동지의 편 가르기의 현실적 가능성(reale Möglichkeit)과 관련을 가짐으로써만 파악되거나 포착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물리적 살해의 현실적 가능성과 같이 여러 군데에서 되풀이해서 현실적 가능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데리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이러한 '현실적 가능성'이 현존화되거나 현실화되는가, 가능태로서 아니면 현실태로서? 어떻게 이러한 현실이 때로는 현존을, 때로는 가능태 자체를 표시하는가? 전쟁에서. 아무튼 극단으로서의 전쟁, 예외상태의 극단적 한계로서, “극단적 사건성으로서의 전쟁에서. ... 이러한 현실적이거나 가능적인 현존은 사실이나 사례의 현존이 아니라, 목적의 현존이다. 정치적 목적, 이런저런 정치적 목표 또는 이런저런 정치의 목표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목적(...)의 현존이다.”(Derrida 1994b, 155. 강조는 원문)

 

요컨대 슈미트 자신은 전쟁은 정치적인 것의 목적이 아니라 전제또는 그것의 극단적인 실현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전쟁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 거리를 두려는 슈미트의 시도는, 그것에 본래적인 목적론으로 인해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데리다는 20세기 자유민주주의의 규범적 질서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이러한 갈등과 투쟁, 폭력과 권력의 범람에 직면하여 그 너머가 어떻게 가능한지 사유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제기하고 있다.

 

나의 질문은 오히려, 그리고 뒤에서 더 논의하겠지만, 사유에 대하여, 도래할 정신분석적 사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또 다른 너머(un autre au-delà)가 존재하는가, 잔혹성이 고지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실행되는 것으로 보이는 쾌락원리와 현실원리, 그리고 죽음충동 내지 주권적 장악의 충동, 그리고 다른 것들과 같은 이러한 가능태들 너머에 있는 어떤 너머가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전혀 다르게 말하면, 이 외관상 불가능한 것, 하지만 다르게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는 것이 가능한가? 곧 죽음충동 내지 주권적 장악의 충동의 너머, 따라서 잔혹성 너머, 충동들과도 원리들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을 어떤 너머를 사유하는 것이 가능한가?”(Derrida 2000b, 14. 강조는 원문)

 

정신분석과 죽음충동, 따라서 잔혹과 주권을 가능성과 불가능성 또는 불-가능한 가능성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일은 또 다른 심층적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간단히 논점만 언급해둔다면, 데리다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너머를 불가능한 무조건적인 것(l’inconditionnel impossible)의 다수의 형상들(Derrida 2000b, 83)에 입각하여 사유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한 형상들에는 환대, 선물, 용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견 불가능성, ‘아마도’, 사건의 그리고 만약’, 도래, 타자 일반의 도래, 타자의 도착함”(Derrida 2000b, 같은 곳)이 있다. 또한 {법의 힘}에서 데리다가 말한 정의’, 그리고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제시한 바 있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도 데리다가 언급한 불가능한 무조건적인 것의 형상들에 포함될 것이다.

 

3. 주권과 자기면역

 

데리다는 {불량배들}에서 민주주의가 자기의 권력, 자기의 힘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이때의 자기는 그리스어로는 autos, 라틴어로는 ipse에 해당하는 것으로, 데리다는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원리 내지 가치를 이루는 자유, 평등, 인민 등과 같은 개념들이 모두 이러한 의미의 자기”, 또는 자기성”(ipséité)의 성립 가능성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나는 자기성이라는 말을, 모종의 나는 할 수 있다”(je peux), 또는 적어도, 모임 내지 회합/의회(assemblée), 함께-있음, (또는 흔히 말하듯) “함께 살아가기의 동시성 속에서 자신을 재전유하면서 자신에게 자신의 법, 자신의 법의 힘, 자신의 자기 표상/자기 대표(représentation de soi), 주권적 모임(rassemblement)선사하는 /권력으로 이해하겠다.”(Derrida 2003b, 30. 강조는 원문)

 

그것은 민주주의에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정치적 행위, 곧 선언하고 발언하고 투표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또 때로는 저항하고 봉기하고 변혁하는 모든 행위는 다른 사람의 권위나 도움, 또는 강제나 제약 없이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이를 수행하는, 따라서 자기 자신으로서 성립하고 실존하고, 유지될 수 있는 어떤 자기의 가능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기가 전제되지 않은, 그것이 성립할 수 있으며 작동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정의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자기의 권력이 주권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고 본다. “모든 국가 주권 이전에, 국민국가, 군주정의 주권 이전에, 또는 민주주의에서는 인민 주권 이전에, 자기성은 적법한 주권 원칙, 어떤 권력이나 힘, 크라토스(kratos), 크라티(cratie)가 지닌 인정되거나 신임이 부여된 지배권(suprématie)을 명명한다.”(Derrida 2003b, 31) 그것은 주권이야말로 분할 불가능한 일자, 자기의 상징이자, 지고한(“sovereign”이라는 단어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다) , 자율적 결정의 심급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가 없이 민주주의가 성립 불가능하다면, 또한 주권 없이도 민주주의는 성립 불가능하다.


하지만 데리다가 주권을 마냥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 사상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데리다의 주권 개념은 그의 후기 사상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자기면역(autoimmunité) 개념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이 개념은 생물학이나 의학에서는 보통 자가면역이라고 번역되는데, 이 개념의 접두어 ‘auto-’는 어원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철학에서도 대개 자기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언어적 일관성을 위해 이 글에서는 자기면역이라고 번역한다.1993년 저작인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처음 등장했을 때 이 개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살아 있는 자아는 자기면역적이지만, 그들[마르크스와 슈티르너-인용자]은 이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살아 있는 유일한 자아로 구성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동일한 것으로서 자기 자신과 관련시키기 위해, 살아 있는 자아는 필연적으로 자기 내부로 타자를 영접하게 되며(기술 장치들의 차이(差移), 되풀이 ()가능성, 비유일성, 보철, 합성 이미지, 허상과 같은 죽음의 여러 가지 모습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언어와 함께, 언어 이전에 시작된다), 따라서 외관상으로는 비자아, , 대립자, 적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면역적인 방어기제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 맞서서 작동시켜야 한다.”(Derrida 1993, 275)

 

그리고 이 개념은 그 이후 {신앙과 지식}(Derrida 2000a, 67 (국역) 205206, 23)), {테러 시대의 철학}(Derrida 2003a, 107 (국역) 206 이하) 등에서 활용되었다가 {불량배들}에서는 특히 다음과 같이 재규정된다.

 

내가 자기면역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해 해를 끼치거나 약화시키는 것, 심지어 자기 자신의 보호장치를 파괴하는 것 ... 그리하여 자살에 이르거나 자살의 위협을 가하는 것만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또한 좀더 심각하게는 ... 나 또는 자기, 에고 또는 자기(autos), 자기성 자체를 손상시키는(entamer) , 자기의 면역성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단지 자기 자신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따라서 또한 자기성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단지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시성/자기 준거성(sui-référentialité), 자살의 자기(soi)를 위태롭게(compromettre) 만드는 것이다.”(Derrida 2003b, 71. 강조는 인용자)

 

원래 생물학 및 의학에서 유래한 이 개념은 원래의 맥락에서 본다면 질병을 가리키며, 따라서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에게 아포리아, 결정 불가능한 것 또는 차(差移) 등이 일방적으로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성격을 띨 수 없는 것처럼 자기면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데리다에게 자기면역은 민주주의의 원리 자체에 내재한 민주주의의 난점 또는 아포리아를 뜻한다. 자기면역이 가리키는 것은 첫째,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평등과 자유, 권리를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항상 시민들 가운데 일부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공간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자기면역적 위상학은 항상 민주주의를 다른 곳으로 보내도록/면직하도록/연기하도록(renvoyer) 명령한다. 민주주의로부터 민주주의의 적들을 밖으로 보내고 밀어내고 배제함으로써 내부에서 민주주의를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민주주의를 밀어내거나 축출하고 배제한다. ... 자기면역적 논리와 연계된 결정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은 근대의 자유주의적인 의회 민주주의 ... 내에서 우리는 결코 이민자들, 특히 국민적 영토 안으로 들어와서 노동을 하고 있는 이민자들에게 투표권을 허가하거나 거부하는 것, 따라서 그들을 배제하는 것이 더 민주주의적인지 아닌지 입증할 수 없을 것이다. ... 이른바 다수자 투표가 비례 투표에 비해 더 민주주의적인지 덜 민주주의적인지도 입증할 수 없을 것이다. 두 가지 투표 형태는 민주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배제를 통해, 보냄/면직/연기(renvoi)을 통해 자신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보호한다.”(Derrida, 2003b, p. 60) 󰡔불량배들󰡕에서 랑부아(renvoi) 또는 동사인 랑부아예(renvoyer)는 다의적으로 산종되어 있다. 그것은 보내기’, ‘반송하기를 의미하지만, 또한 지연을 뜻하기도 하고, ‘해고내지 면직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둘째, 또한 민주주의는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민주주의를 지연시킨다. “하지만 보냄은 또한 시간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자기면역은 또한 민주주의의 선거와 도래(avenement)를 나중으로 지연할(renvoyer) 것을 명령한다. 이러한 이중의 랑부아(renvoi)(타자에게, 타자를 보내기, 지연하기)는 민주주의 자체 속에 기입된 자기면역적 숙명성이다.”(Derrida 2003b, 6061. 강조는 원문) 이러한 배제와 지연의 필연성을 고려한다면, 민주주의적인 자기면역은 부정적인 것이라고, 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 민주주의의 이상을 구현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장애가 되는, 따라서 원칙적으로 제거하고 뿌리 뽑아야 할 질병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데리다는 자기면역에 바로 민주주의의 기회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데리다가 민주주의는 자기의 권력에, 곧 주권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할 때, 이는 민주주의는 본원적으로, 그 개념, 그 원리 자체 내에서 면역적인 성향을 띠고 있음을 함축한다. 곧 민주주의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비자아, , 대립자, 적수를 몰아내고, 민주주의의 자기의 논리, 자기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자기-면역은 바로 이러한 면역의 경향, 곧 자기의 논리, 자기의 권력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 민주주의가 자기를 고수하고 이를 위해 타자를 절대적으로 배제하고 몰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민주주의는 자기 파괴, 자살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가리킨다. 따라서 자기면역은 민주주의의 구조 자체 속에 함축되어 있는 자기의 논리, 주권의 논리를 약화시키고, 그 속에 이질성, 타자성의 여지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타자성은 민주주의의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타자성은 민주주의의 또 다른 진리로서, 항상 이미 민주주의 자체 내에 기입되어 있으며, 자기의 권력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양립 불가능하면서도 또한 분리될 수 없게 결부되어 있다.

 

나를 괴롭혀온 것, 나를 의문에 빠뜨린 질문은 어떤 민주주의의 공리계를 구조화하는 것, 곧 전체, 원과 구의 자기 복귀, 따라서 일자의 자기성, 자율성의 자기, 대칭성, 동질성, 유사성, 닮은 것 또는 비슷한 것, 심지어 결국에는 신, 다시 말해 민주주의적인 것의 또 다른 진리, 타자, 이질적인 것, 타율적인 것, 비대칭적인 것, 산종적 다수성, 익명적인 아무나”, “누구나”, 비규정적인 각자의 진리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심지어 충돌하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으리라는 점을, 아마도 고백해 두어야 할 것 같다.”(Derrida 2003b, 35)

 

데리다에게 타자 또는 타자성, 이질성은 민주주의의 외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진리, “민주주의의 또 다른 진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진리는 익명적인 아무나”, “누구나”, 비규정적인 각자””의 진리다. 이는 내가 다른 글에서 말한 것처럼 데모스의 이중적 측면, 곧 보편적이면서 독특한 데모스라는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진태원 2017 5부록참조) 데모스의 보편적 측면이 평등과 자유, 권리 등의 보편성을 뜻한다면, 데모스의 독특한 측면은 정체성을 갖지 않을 권리를 뜻한다. 곧 데모스로서의 시민은 다른 시민들과 평등한 권리와 자유, 행복을 누릴 권리를 갖지만, 다른 한편으로 독특한 존재로서의 시민은 아무런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을 권리, 익명적인 누군가로 존재할 권리, 비밀을 지닌 존재자로 살아갈 권리”(진태원 2017, 216. 강조는 원문)를 갖는다. 이것은 아마도 달리 말하면 주권자가 아닐 권리를 뜻할 것이다. 따라서 데모스는 주권자이면서 동시에 주권자가 아닌 존재자, 주권자로 존재하고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누릴 자격과 능력을 갖추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데모스는 주권자에 속하지 않을 권리, 주권자가 아닐 권리도 갖는 것이다.


이러한 데리다의 관점은 슈미트처럼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는 가장 강도 높은 극단적인 대립에서 찾으려고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자유주의의 또 다른 변종처럼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의 입장에서 보면 슈미트의 현실주의적또는 실존적관점은 국민국가라는 단위(또는 그 국민국가들의 체계)를 정치의 본래적 단위로 전제하게 되며, 더욱이 국민적인 것을 주권으로 환원한다. 그리고 이때 주권적인 것은 다시 루소적인 인민주권과 달리 (또는 그것에 거슬러) 인격화된 주권자의 형상으로 환원된다. 따라서 이는, 슈미트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인민또는 국민에 본질적인 갈등성과 이질성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거나 환원하는 것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순환성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길이 민주주의의 자기면역 및 데모스의 이중성이라는 데리다의 관점이다. 내가 보기에는 데리다 주권 이론의 의미 중 하나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IV. 국민적인 것을 넘어서: 국경의 민주화

 

따라서 데리다가 (옳든 그르든 간에) 주권이라는 개념을 폐기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아감벤에게 이는 데리다가 실패한 메시아주의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표 중 하나일 것이고(Giorgio Agamben, Homo Sacer: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Torino: Einaudi, 1995(󰡔호모 사케르󰡕,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반대로 자유주의적 이론가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데리다 주권 개념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으로는 Paul Patton, “Deconstruction and the Problem of Sovereignty”, Derrida Today, vol. 10, no. 1, 2017 참조. 또한 약간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데리다 정치철학을 자유주의적(또는 네오 칸트주의적) 세계시민주의의 논리 속에서 (제한적으로) 수용하려는 시도로는 Seyla Benhabib, The Rights of Others: Aliens, Citizens and Residents. The John Seeley Memorial Lectures, Cambr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타자의 권리: 외국인, 거류민 그리고 시민󰡕, 이상훈 옮김, 철학과 현실사, 2008 5; Another Cosmopolitanis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pp. 45~75를 각각 참조. 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여전히 형이상학, 특히 서양 형이상학의 논리에 빠져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감벤일 것이며(Derrida 2008, 여러 곳 참조), 그가 명시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지만, 자기면역의 역설 내지 이율배반(이는 곧 정치 그 자체의 역설 내지 이율배반)을 중화하려는 자유주의적 시도는 이러한 역설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그 역설 속으로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점에 관해서는 Honig 2009 1장 참조.] 더 나아가 주권이라는 것이 단지 잔재라든가 불가피한 악 내지 차악이라는 의미에서만 명맥을 유지한다고 볼 수도 없다. 주권이 자기성을 함축하고 자기성이 모든 주체성의 조건이라면, 자기성으로서의 주권은 정치 일반, 더 나아가 민주주의 정치의 본질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자기성으로만 존재할 때, 자기성의 요소만을 보존하고 강화하려고 할 때, 그것은 면역 및 더 나아가 자기면역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데리다의 논리를 조금 더 현실적으로 구체화하는 의미에서 국민 또는 국민적인 것의 문제를 살펴보자. 국민, 국민국가 또는 국민주의의 문제는 그동안 아주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이상하게도 국민적인 것의 가장 중요한 제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국경(frontière, border)의 문제는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국경에 관해 일찍부터 주목하고 흥미로운 주장을 제시한 사람이 에티엔 발리바르인데(Balibar 2001 Balibar 2005를 각각 참조), 는 국경을 민주주의의 반()민주주의적 조건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국경은 정상적인법질서에 대한 통제와 보증이 중지되는 대표적인 장소(국경이야말로 진정으로 근대 법치국가에서 민주주의의 반민주주의적 조건을 이루고 있다), ‘폭력의 합법적 독점예방적인 대항 폭력의 형태를 띠는 장소다.”(Balibar 2001, 329) 슈미트와 아감벤은 예외상태와 주권이라는 개념을 현대 정치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시킨 바 있는데, 발리바르는 이들을 염두에 두면서도 이들과 다소 다르게 예외상태의 대표적인 장소를 국경이라는 정치 제도에서 찾는다. 그는 특히 적과 동지, 예외상태에서의 결정을 본질로 지니는 슈미트 주권 개념의 실질적 핵심은 국경 개념에 있다고 주장한다.

 

슈미트에게 주권은 항상 국경 위에서 설립되고 무엇보다도 국경의 부과로 실행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주권 이론과, 친구와 적의 관점에서 정치를 정의하는 것(또한 이런 정의의 연장으로서, 내부의 적의 범죄화. 이는 외부의 적, 정당한 적(justus hostis)에 대한 정당화와 맞짝을 이루고 있다) 사이의 연관성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국경은 정상적인법질서에 대한 통제와 보증이 중지되는 대표적인 장소(국경이야말로 진정으로 근대 법치국가에서 민주주의의 반민주주의적 조건을 이루고 있다), “폭력의 합법적 독점예방적인 대항 폭력의 형태를 띠는 장소다. 따라서 대지의 노모스는 국경들의 질서 자체, 곧 국가적 합리성에 봉사하게 함으로써 폭력을 길들이는 것으로 간주되는 폭력이다.”(Balibar 2001, 329. 강조는 원문)

 

국경이 민주주의의 반민주주의적 조건이라는 것은 우선 국경이 정치 공동체, 특히 근대국가의 헤게모니적인 형태인 국민국가가 성립하고 존속하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국경의 설정을 통해 국민적 정체성이 물질적으로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경은 자신과 타자, 국민과 비국민을 구별하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며, 따라서 국민적 경계 바깥으로 외국인들을 배척하고 더 나아가 국민 성원들 중 일부를 이방인들(또는 외국인들의 첩자 내지 내통자. 우리나라의 경우는 빨갱이’, ‘종북’, ‘친일파)로 표상하여 억압하고 배제하기 위한 제도다. 이런 의미에서 국경은 탁월한 배제의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본격화된 국민국가의 위기는 국경의 약화를 낳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상상적으로 강화하기도 한다. 초국적 자본의 힘에 의해 국민국가의 경제 및 사회질서가 좌우되고 미국을 비롯한 초강대국의 군사적정치적 힘에 약소 국민국가들의 안보가 좌우되는 상황에서 대중들은 심각한 정체성 위협을 느끼며, 이런 공포 내지 외상을 상상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찾는다. 이 때문에 극우 정당들이 조장하는 극단적 국민주의(nationalism)가 쉽게 먹혀들게 되며, 특히 사회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개인들 및 집단들에게 더욱 더 쉽게 수용된다. 이들은 사회권 축소(곧 실업수당 삭감, 복지 예산 축소 등과 같은)의 직접적인 피해자이며, 이런 피해의 원인이 이주 노동자를 비롯한 외국인들에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포퓰리즘의 확산 속에서 이런 대중적인 국민주의 및 인종주의는 국가정책이 점점 더 제도적 인종주의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이것은 다시 국민과 외국인의 차별 및 배제 경향을 강화하게 되며, 유럽적인 수준에서(또는 더 나아가 지구 전체의 수준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의 경계를 구축하는 결과를 낳는다.


더 나아가 발리바르는 오늘날 국경은 더 이상 국가의 지리적 한계, 곧 국가와 국가가 지리적으로 맞닿은 지점에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국민국가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일차적으로 경제 영역과 문화 영역에서 사적인 관계들 및 사회적 관계들이 점점 더 ()-국민적(trans-national)이고 관()-국경적인(trans-border) 차원에서 전개되는 반면, 대부분의 공적 제도는 여전히 국민국가의 틀을 유지하는 데서 생겨나는 결과다. 이에 따라 세계화된 거대 도시들의 근교에서 다양한 인종들 간의 민족적인(ethnic) 경계들이 재생산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또한 아감벤이 특히 주목했던 것처럼 주요 국제공항에서 볼 수 있는 구류 지대 및 검색 체계가 탁월한 예외 상태, 곧 개인의 자유를 비롯한 권리들이 정지되는 장소가 되는 현상도 생겨난다.


이런 경향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발리바르의 답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장기적인 제도적 창조의 과제로, 인민과 주권, 시민권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근원적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국경이 영토와 인구, 주권 사이의 관계가 물질적제도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상징적 장소이며, 따라서 세계화가 강화하고 있는 국경의 모순과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의 틀에 대한 변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대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또한 제국에서 국민국가로 이행하는 과정과 비견될 만한 것이기 때문에 장기적이고 갈등적인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발리바르가 그 제도적 창안의 실마리 중 하나로 제시하는 것은 소속의 시민권을 거주의 시민권 내지 이산적 시민권”(diasporic citizenship)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전자가 혈통이나 언어, 문화, 국적 등과 같은 공통적인 기원과 소속을 중심으로 시민권을 사고하고 제도화하는 방식이라면, 후자는 출신의 차별 없이 외국인들에게도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대응 방안은 국경의 민주화에서 찾을 수 있다. 발리바르는 특히 국경의 강화 경향에 맞서기 위한 정치의 방향을 여기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국경의 무조건적인 철폐라는 무정부주의적 주장(이것의 다른 표현은 이른바 유목주의)과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테제다. 국경의 무조건적인 철폐는 오히려 경제적 세력들의 야만적인 경쟁에 좌우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Balibar 2001, 230)을 불러올 수 있다. 이런 섣부른 해법 대신 발리바르는 국경에 대한 표상을 탈신성화하고 국가와 행정 기관이 개인들에 대하여 국경을 활용하는 방식을 쌍무적인 통제의 대상으로 만드는것을 핵심으로 하는 국경의 민주화를 가능한 현실적인 해법으로 제시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국경의 민주화라는 발상은, 데리다가 말하는 환대의 법칙, 곧 무조건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 사이의 아포리아적인 협상의 논리와도 부합하는 발상이다.


국경의 민주화는 국민적인 것, 국민 문화의 상징적이고 상상적인 구성 및 재생산에 관해서도 의미 있는 화두를 제기한다. 알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라는 용어는 이제 상당히 보편화된 용어이며, 동시에 그 자체가 매우 차별적이고 내적 배제의 의미를 함축하는 용어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으로 보면 대외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곧 세계화의 과정 속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회는 정의상 다-문화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도 한 20여 년 사이에 더 이상 외국인들이 낯선 존재자들이 아닌 사회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다문화주의라는 것이 차별과 배제의 기표로 작용한다면,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Etienne Balibar, “Europe: Provincial, Common, Universal”, Annali di scienze religiose, Turnhout, no. 10, 2017 참조.첫째, 다문화주의는 한편으로 문화에 대해 매우 <정태적인> 관념을 함축하고 있다. 곧 문화라는 것은 어떤 집단의 고유한 생활양식이자 관습, 사고방식이자 행태이며, 따라서 정의상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한국의 문화는 한국인들(한국 민족’)의 고유한 생활양식과 관습, 사고방식, 행태를 표현하는 것이며, 중국 문화는 중국인들, 일본 문화는 일본인들, 미국 문화는 미국인들, 프랑스 문화는 프랑스인들 등과 같이 문화 자체의 불변성을 가정하고 있다. 둘째, 따라서 이는 어떤 문화의 <내적> 다양성 내지 혼성성(hybridity)을 처음부터 배제하고 있다. 마치 한국 문화라는 것은 단군 이래 수 천 년 동안 불변적인 정체성 내지 동일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따라서 김치는 단군 이래 한국인들이 계속 섭취해온 음식인 것처럼, 제사의 관습은 적어도 조선 시대 이래 아무런 변화 없이 계속 되어온 것처럼, 한국어는 처음부터 오늘날의 한국어로 존재해온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 미국이나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알다시피 오늘날 우리가 섭취하는 김치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이며, 오늘날 통용되는 여러 제사의 관습도 일제시대 또는 해방 이후에 형성된 기형적인 혼성물이다. 중국의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것 역시 매우 혼성적일 뿐더러 최근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두 가지 전제에 입각해보면, 다문화주의란, 불변적이고 단일한 한국의 문화, 한국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이러한 기본적인(정당하면서 보편적인) 문화의 바탕 위에, 오늘날의 조건에 맞춰 이러한 문화를 보존하고 강화하기 위한 행정적치안적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다문화주의는 사실 국민주의의 한 변형이자 그 방편인 셈이다. 이런 조건에서 다문화주의가 한국 문화에 이질적인 것들을 위계적으로 포섭하거나 차별적으로 배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국민적인 것의 논리 및 그것이 수반하는 폭력을 넘어서고 싶다면, 문화 자체에 대한 새로운 상상과 실천, 제도화가 필요하다. 그것을 상호문화”(interculturalism)라고 할 수도 있겠고, 아니면 다중문화”(poly-culturalism)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기존의 다문화주의가 기반을 둔 두 가지 전제를 깨뜨리는 것이다. 가령 한국어가 한국 사회의 유일한 보편적 언어로 기능한다면, 상호문화나 다중문화의 여지는 불가능할 것이다. 한편으로 한국어를 습득하고 한국어를 잘 사용할 수 있는 기반을 확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어 이외에 다른 언어들이 또 다른 공용어로 사용될 수 있게 만드는 노력도 중요할 것이다.[이점에 관해서는 Jacques Derrida, Le monolinguisme de l’autre ou la prothèse de l’origine, Paris: Galilée, 1996 참조.더 나아가 국적과 상관없이 더 많은 시민 대중들이 공론장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놓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지금 TV에서는 외국인들이 출연하는 여러 프로그램들이 제작되고 방영되고 있지만, 이것은 매우 제한적일 뿐더러 예능적인 성격에 한정되어 있다. ‘특별한 외국인이 아닌 이들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지만 사실은 부재하는 유령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스스로를 표현하고 재현/대표할(represent)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이것은 한편으로 국민적인 것의 경계에 갇혀 있는 시민성을 좀 더 보편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적인 것의 논리가 전제하는 획일적 정체성의 논리에서 벗어나 국민적인 것을 내적으로 더 다양하고 혼종적인 것으로, 따라서 관-국민적이고, -국경적인 것으로 전화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는 데리다가 말하는 주권의 자기면역, 데모스의 이중성에 대한 실천적 번역의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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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mhhh 2018-10-26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진태원 선생님. 데리다에 많은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는 한 대학원생입니다.(철학과는 아닙니다)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지금 데리다의 저서를 대부분 영어로 독서 중인데, 불어 원저로 공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까요? 이왕 데리다의 철학에 의지하기로 했다면 불어를 공부해서 원전을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대부분의 저서가 영어로 나와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드는게 사실입니다. 일종의 ‘결정 불가능‘한 상태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결정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금 즉시 결정해야겠지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balmas 2018-10-26 01:2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약간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답변할 수 있겠네요. 평범한 연구자가 되려면 영어로 만족하고 훌륭한 연구자가 되고 싶다면 불어를 공부해서 불어로 읽어보도록 하세요. :) 무엇을 전공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데리다 저서를 대부분 영어로 읽을 수 있다면, 상당한 언어적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데리다를 영어로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매우 많습니다. 실제로 읽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요.^^; 만약 데리다를 불어로 읽을 수 있고, 또 실제로 읽게 된다면, 영어로 만족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자원과 역량, 그리고 인내심과 자신감도 덤으로 얻게 되겠죠. 데리다 이외의 다른 사상가들이나 작가들도 접근할 수 있겠고요. 그러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당장 도전하십시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