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살, 갈팡질팡하던 그때, 난 참으로 암담했었다.
운명처럼 다가선 여인은 한줄기 빛이었다.
유치한 시이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기억되는 이유는 뭘까.
........ 비 와 女 人
......................... 현 종 헌
연 이틀을 잠 못 이루었다.
그대 생각에 내 몸의 힘이 빠지고
밖에선 비가 내린다.
단풍잎 부스러기 같은 졸음이 깔린 눈두덩이 위로
메마른 추억의 입자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때 맞추어 몰려든 바람 한 자락이
빗줄기를 비스듬히 뉘이며 창을 때린다.
비는 내려서 세상 깊은 곳을 적시고
바람의 벽에 나붙은 빛 바랜 초상화 한 점
얼룩은 지지 않는다
어·지·럽·다
사지를 뻗어 방바닥에 편히 몸을 눕힌다.
눈을 감는다.
느닷없이 과거의 의식 속으로 비가 들이칠 때
커다란 술잔 위로 빗물이 넘치고
생활에 실패한 젊은 사내는
비워낸 술잔에 눈물을 담아 마신다.
벌거벗은 시간의 주위로 맴돌며
아무 것도 사육할 수 없는 그래서
시 한 줄에 목숨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잘려져 나간 삶의 한 몫은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황무지로 내버려지며
한아름 낙엽과 함께 거름이 되었다.
의식 속에 생활을 묻고 그 거름으로 자라나면서
한 세월이 흘렀다.
서러운 스물 아홉 살,
그 안타까운 젊음의 끝자락에서
전장(戰場)으로 몰려오는 신의 바람(神風)처럼 (註)
구원의 끄나풀을 잡고 또 잡고
빗속에서 속삭이고 빗속에서 애무하다 빗속에서 헤어지던
그래서 만날 때마다 그녀의 몸 위로는 늘
기적과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잔 술에 취해 눈을 들면
아롱아롱 빛나는 별이 보인다.
길섶에서 일어나는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떨어져 내리는 별빛을 밀어내면서
소라껍데기 맞비비는 듯한 소리를 내면
난 잘 조제된 수면제를 타먹은 듯
잠결로 빠져 들어가고
시나브로 내 잠 속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몸 안에서 자란 햇빛 몇 가닥이
일어서는 바람의 빈 터에서 쓸려다니고 있을 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꼬옥 포옹해온다.
사내는 힘없이 하아얀 그녀
이력서 속의 길 위에 쓰러져 다시 시를 쓴다.
나 · 비 · 가 · 날 · 고 · 있 · 다
사라지는 길 저 너머 어제 버린 아픔을 숨기고
눈부신 광채의 날개를 흔들며
어둠은 습기찬 바람을 몰고 온다.
이내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린다.
내 잠 속으로 하염없이 비가 내린다.
커다란 술잔 위로 빗물이 넘치고
비워낸 술잔에 다시 눈물이 넘칠 때
그 위로 낙엽이 한 장 떨어진다.
연 사흘째 잠 못 이룬다.
그대 생각에 내 온몸의 힘이 빠지고
밖에선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註) 신의 바람(神風) : 13세기, 몽골족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 뜻하지 않에 불어온
.......... 기적같은 바람 때문에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때의 특공대
.......... 이름인 '가미가제'는 여기서의 '신의 바람(神風)'에 해당하는 일본어 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