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품]-김기중
유품이라고 하면 나는 그냥
오래된 낡은 물건이거니 했다
아주 오래된 낡은 안경, 둥글고 검은 돋보기
손때가 묻은 흑갈색 염주
조지훈 전집의 속표지에 나오던 물건들
혹은 누가 일생동안 쓰던 만년필
세상의 오랜 연륜이 새겨져
고달프고 위대했던 생애의 흔적이 지문처럼
묻어 있던 유품들
그 외의 유품들을 나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른 새벽
책상서랍을 열다 문득 손에 잡히는
작은 공작 가위 하나
동그란 손잡이엔 이름표가 채 떨어지지도 않은
일곱 살 아이의 유품
유품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작고 쓸쓸한
유품
금방이라도 아이는 눈 비비며
내 방 문열고 들어와
내 꺼야
유치원 공작 가위를
손에 쥘 것 같은데
모두 태워버린 사진과 장남감들 속에서
우연히 빠져나와
새벽 내 책상위에 놓인 일곱 살
어린 유품
작은 공작 가위 하나
*내게도 남겨진 유품이 있던가.
'登同和錄'이라 음각된 아직도 날이 선 접었다 펼 수 있도록 된 면도칼, 당신 가신 세월 만큼이나 닳아진 낡은 가죽지갑 하나, 하이칼라 머리에 유행 지난 양복을 입거나 코트를 걸친 혹은 런닝셔츠 바람으로 역기를 들거나 팬츠 차림으로 권투를 하는 빛바랜 사진들.
살아가면서, 새삼 자라지 않을 것만 같던 당신과 비슷한 나이를 먹으면서 떠오르는 추억을 만지작거리나니
새벽 한 시를 넘어
불면의 두 시를 지나
영영 안잊히는 그리운 모습에 새삼 뭉클한 가슴을 하고 거실을 서성이는 때가 있다.
그리고 내게도 또 나에게도
옛날 사람들은 개구리알이라고도 했다던데
전치태반처럼 잘못 착상되 채 태어나지 못한 세 번 째 아이에 대한, 진작에 아무렇게나 쉽게 잊은 낙태의 추억이 있다.
차마 쉬 떨칠 수 없는 어린 유품
목이 메이는 시인에게 가만가만 손내밀어 잡아 주고 싶다
허락된다면 소박한 메밀묵 안주에 막걸리 한 잔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