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退溪) 녀던 길 좇아

 고인도 날 못 보고 나 또한 고인 못뵈/고인을 내 못 보고/녀던 길 앞에 있네/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녀고 어쩌리
-퇴계 이황(李滉)의 '도산 십이곡' 중에서

 녀던 길(예던 길)이란 걷던 길이라고 한다.
 일찌기 퇴계선생은 청량산을 사랑하시어 오가산(吾家山)이라고 하셨다는데 그만큼 즐겨 아끼고 오르내리셨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죽 했으면 유산(遊山)은 독서와 같다고 하셨을까. 어려서는 '청량정사'에서 숙부인 송재 이우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나이 들어서는 '도산십이곡'을 청량산에서 지었다고 한다. 아마 그런 연유로 산에 오르는 것 자체가 인격을 쌓고 마음가짐을 정갈하게 하고 학문을 닦는 방편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청량산 가는 길은 진정 아름다웠다.
 일찌기 옛 성인이 걸어가신 길, 그 정신의 깊이와 학문의 업적을 흠모해 기꺼이 보고 배우고 사랑하고자 나선 발걸음이 가벼웠다.
 산 첩첩 물 겹겹 하고 먼 길
 바특이 바라뵈는 왼 산 초록이 지쳐 산빛 물빛 속절없이 깊어가는데 가슴은 또 왜 그렇게 두방망이질 쳐 두근대던 것이랴
 앞서거니 뒤서거니 괜시리 마음만 바빠 허둥되고 내 저만치 잠시 두고 온 세상은 또 얼마나 멀리있던 것이랴.

 청량산 초입에 자리한 농암 이현보의 종택은 정비가 다 되지는 않은 듯 했다. 안동댐 이후 산지사방 수몰되고 흩어진 유적들을 옮기고 30년 만에 다시 짓고 하느라 마음 고생과 시름 꽤나 깊었겠다.

 농암 이현보(1467~1555)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속세를 떠나 자연속에서 여유롭게 사는 삶을 노래한 강호문학(江湖文學)으로 유명한데 '농암가'나 '효빈가'와 같은 단시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노래로 부를 수 있는 악부시를 '어부가'로 재창작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나는 이현보의 농암(籠巖)이라는 호가 지닌 뜻에 주목했다. 물소리가 귀먹을 정도로 거센 집앞 냇가의 바위에서 연유했다는데, 어쩌면 세속의 시류와 헛되고 하잘 것 없는 평판이나 이목에 귀막고 살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된 것 같아서다.

   농암종택의 가옥들은 최근에 복원하거나 옮겨 지은 것들이다.
 그 중 긍구당은 용케 훼손되지 않고 애써 옮겨온 것인데 몇 백년 고단하고 신산한 세월의 흔적을 많이 갖고있는 건물이라 알 수 없는 애정을 갖게 했다.  특히 긍구당이라는 현판 글씨는 신잠(申潛)공이 썼다는데 단아하고 유연하면서도 한껏 멋이 깃들어 있다. 그 넘치는 풍류가 저 원교 이광사의 글씨체와 방불해 내 멀리서 보고는 잠시 착각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 반 팔작집 지붕의 외씨버선 같은 날렵한 처마도 글씨체를 닮았구나.


 나는 아무래도 오래된 옛 유물이나 물질문화에 빠져들기를 잘 하는지라 이현보의 신도비에 잠시 마음을 빼았겼다.
 용 모양이었을 비머리는 어디가고 비신만 비석받침을 일컫는 귀부(龜趺)위에 얹혀 있었는데 어느 하세월을 견뎌낸 것인지 알 수 없어도 좋았다.
 늙수구레한 표정의 목을 두른 겹주름이며 쌍꺼풀진 눈이며 헤식은 웃음을 짓고 있는 입이며 목뒤 어깨에 새겨 넣은 다섯잎의 꽃잎이 만들어내는 익숙하고 농익은 친근감은 전혀 낯선 모습이 아니다.
 거북이는 일찌기 미래를 예언하고 신의 뜻을 전달하거나 장수를 상징하기도 하고 지혜로운 동물로 알려져 왔다. 거북이는 우리 민족에게 매우 상서로운 동물인 것이다.

 
 종택에 왔다는 느낌을 갖게 한 것은 두 쌍의 문인석에서도 묻어 났는데, 어느 무덤앞을 지키던 것인지는 몰라도 세월의 이끼 덧앉고 물때 낀 석물이 주는 느낌이 정겹고 따스하다.
 더러는 바람찬 노숙의 시간도 있었으리. 태무심 하고 버려져 곰팡이 돌꽃 피는 잊혀진 세월도 흘렀으리. 돌아보는 이 없고 하릴없이 깊은 산속 새똥이나 찌리다 가고, 이른 봄날의 할미꽃이나 빈 바지랑대 받쳐들듯 섭섭하던 가을날의 안부없는 기다림도 있었으리.
 그러나 자세히 보면 돌에도 따스한 온기와 맥박이 뛰는 것임을 알겠다. 혹 아시는가 그대! 익숙하고 낯익은 모습의 석상 표정에서 이제는 잊혀진 오래된 이야기나 앞니 빠진 외할아버지의 정겨운 사투리나 어릴 때 죽은 동무의 천진한 웃음이 묻어나던 것을......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별채 앞 흰고무신이 주는 느낌은 30년도 더 오래전 어느 봄날의 시무룩한 내 표정같다. 오래 간직한 말 고백하러 갔다 한마디 못하고 발길 되돌려 정처없이 한 사나흘 일없이 싸돌아 다니고프던 날의 숫기없는 망설임같다. 무리한 표정으로 층층대를 올라가 문고리만 만지작거리다 차마 떨치고 돌아서던 후회같다. 옷섶에 방울지던, 단추구멍 쬐그만 그녀의 눈물같다. 기억도 가물거리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첫사랑 비내리던 필름같다.
 
 아마 농암종택에서 민박을 하는 탓으로 누군가를 위해 마련해 둔 고무신이리라.
 허락된다면, 세상잡사에 빠트린 발목 잠시 빼어 머물 수 있다면, 한 사나흘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달밤을 거닐어 보리.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이어지는 녀던길(옛길) 되짚어 밤 도와 별 총총 더부러 가 보리.
 새벽 어스름에 피곤하여 처소에 들면 뒤따라온 물소리는 귓가에 출렁이고 개구리 소리는 턱밑으로 일개 소대쯤 지나가리. 일찌기 옛 선비 한 분은 책 한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컬레, 잠을 청할 베게 하나, 바람 통하는 창문 하나, 햇볕 쪼일 툇마루 하나, 차달일 화로 하나, 지팡이 하나와 봄경치 즐길 나귀 한마리로 족했다는데 나는 마침내 나흘 째부터는 뒹굴뒹굴 시집(詩集)이나 몇 권 읽으리. 하잘 것 없고 돈(?) 안되는 화집(畵集)이나 뒤적이며 대책없이 배깔고 엎드려 쓰잘데 없는 공상이나 하리. 오랫만에 안부없어도 좋을 편지나 길게 쓰리.
 

 
 사랑채에는 선조가 친필로 적선(積善)이라고 써준 현판 글씨가 걸려 있었다. 문 들어 올려 들쇠에 걸고 사방 문 다 열어젖히고 밖을 보면 마침내 보리라. 벽력암과 학소대 앞으로 휘어져 흐르는 낙동강 줄기 굽이 굽이 흘러간 물길을.

 사랑채에 딸린 뒷방에서 나는 여러 문집과 책들로 가득찬 책장을 만났는데 만 권 서적 가슴에 품을 듯한 욕심으로 몰래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모르긴 해도 현재 농암종택을 지키는 종손의 서재가 아닐까 짐작해 보았는데, 수백년 이어져 온 학문의 줄기가 현재도 저리 단단하고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보았다.
 농암종택을 뒤로 하고 떠나오는 내내 가송리(佳松里-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의 인상은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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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게시판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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