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정과 감성이 물질적인 성질을 띤다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알게 되었고, 온몸으로 그것들의 밀도와 형태뿐만 아니라, 내 의식의 제재를 받지 않는 그들의 독립성과 완벽한 행동의 자유를 느꼈다. 이러한 내면 상태에 견줄 만한 것들을 자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날뛰는 바다, 깎아지른 절벽의 붕괴, 심연, 해조류의 증식. 난 물과 불에 빗댄 비유와 은유의 필연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심지어 가장 닳고닳은 표현조차도, 어느 날 그 누군가가 실제 겪었던 것이다. (21)

사실, 열정의 폐해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만이 카타르시스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24)

그 당시에 나는 내 행동이, 그리고 내 욕망이 품위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문제삼지 않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확실하게 진실에 도달하기 위하여 치러야 할 대가가 바로 그런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36-37)

글쓰기를 통해 나의 강박증과 고통을 여기에 노출하고 있는 행위와, 랍 대로에 가면 그들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노출을 두려워하던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글쓰기,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서 행하는 것이다. (...) 지금은 내 강박증을 드러내고 헤집어보는 일이 전혀 거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반항심도 전혀 없다. 진실을 말하자면, 난 정말이지 아무 느낌도 없다. 나는 나를 본거지로 삼았던 그 질투가 꾸며내는 온갖 상상과 행동들을 묘사하려고만 애쓰며, 개인적이며 내밀한 것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실체로 변모시키려고만 애쓰고 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 형체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것들을 제 것으로 삼을 것이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더이상 나의 욕망, 나의 질투가 아니라 그저 욕망, 질투에 속하는 것이고,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43-44)

상대방과 다른 점은 모두 열등한 것으로 바꾸어놓으며 자아를 지워버리는 질투라는 감정을 겪으면서, 나의 육체, 나의 얼굴뿐만 아니라 나의 활동, 내 존재 전체가 평가 절하되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그 여자의 집에서 내 집에는 나오지 않는 파리 프르미에르 채널을 시청할 수 있단는 사실이 죽도록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그 여자가 운전할 줄 모르고 면허시험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지적 탁월함의 징표로, 실제적인 것들에 대한 무관심이 보여주는 우월성의 표지로 느껴졌다. (48-49)

가장 커다란 행복처럼 가장 커다란 고통도 타자로부터 오는 것 같다. 나는 두려움 때문에 그 고통을 피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그들은 그 고통을 두려워하여 적당히 사랑하거나, 음악이나 정치참여, 정원이 있는 집과 같은 관심사의 일치를 더 중시하거나, 혹은 삶과 유리된 쾌락의 대상으로 여러 명의 섹스 파트너를 둠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이 육체적 사회적 고통에 비하면 비이성적이며 심지어 물의를 일으킬 만한 것일지라도, 하나의 사치일지라도, 나는 생의 평온하고 유익했던 몇몇 순간보다도 그 고통을 더 사랑할 것이다. / 심지어 나는 학업과 악착스런 노동, 결혼, 출산의 시기를 거치면서 사회에 갚아야 할 몫을 다 지불하고 난 뒤, 청소년기 이래 시야에서 놓쳐버린 본질적인 것에 드디어 몰두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50)

어느 일요일 P의 텅 빈 중심가를 걷고 있었다. 카르멜 수도원의 문이 열려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그곳에 들어가보았다. 한 남자가 얼굴을 성상 앞 바닥에 대고 양팔을 십자가 모양으로 벌린 채 길게 엎드려 큰 소리로 시편을 읊고 있었다. 못박힌 듯 엎드린 남자의 고통을 지켜보고 있자니, 나의 고통은 진짜가 아닌 것 같았다. (60)

(학교에서 문학 텍스트의 구절들에 제목을 붙이듯이, 자기 삶의 순간들에 제목을 붙이는 것은 아마도 삶을 통제하는 수단이 아닐까?)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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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의 불안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이는 바로 새로운 날이 태어나는 것은 생각지 않고 그 밤을 영원한 것이라 믿으며, 그 어둠 속에서 지체한 데서 왔다! 반올림 ‘도‘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것이 반내림 ‘레‘와 그토록 가깝다는것을, 또 칠음계의 맨 아래 음정인 ‘시‘에 의해 구별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이처럼 임박한 미래에 대한 생각은 겉보기에는 희망이라 불리는 감정과 비슷하나 실은 전혀 다른 것이다. 선과 악이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만큼이나 서로 뒤엉켜 있다고 보는 현자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악에서 선이, 반대로 선에서 악이 나올 것임을 알고 있다. 그가 도달하게 될 평정은 소위 말하는 불행과 반대되는 행복과는 닮은 점이 없을 것이다. 이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아마도 비인간적인 상태일 것이다. (38, 제1부 자연적 상관관계 - 1 선과 악의 상관관계)

그리하여 인간들은 ‘악의 문제‘를 상상력의 어휘로 제기해야 하는데도 이를 지성의 어휘로 제기함으로써 그 우둔함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들은 문제가 아니라 고통에 대해 말해야 하며, 해결책이 아니라 위안에 대해 말해야 한다. 만약 머리 하나를 갖는 행운을 얻을 수 있다면 두통을 앓게 된다는 것쯤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며, 왜 머리가 갖가지 기쁨을 낳는 기관이면서 왜 때로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지 자문한다는 것도 쓸데없는 짓이다. 그러나 당신은 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를 기다리면서, 우선 거기서 갖가지 치료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3-44, 제1부 자연적 상관관계 - 1 선과 악의 상관관계)

도스토예프스키가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서, 그리고 그 의도는 다르지만 조르주 바타유가 <니체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악을 저지르는 것, 그것은 그의 실존을 영위하는 것이다. 죄가 없다는 것, 그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조르주 바타유는 생각한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유란 그것이 악을 저지를 수있는 가능성, 그리고 분명한 것을 부정할 수조차 있는 가능성을 가져올 때에만 완벽하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범죄자가 정숙한 인간보다 더 성인에 가까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절대에 대한 욕망으로 파인 심연은 무언가 인간을 초월하는 곳으로 향하는 문을 열게할 것이다.
어쨌든 악이란 물리적 영역에서와 같이 도덕적 영역에서도 선과의 상관 관계 속에 있으며, 또 나쁘게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은 듯하다. (48-49, 제1부 자연적 상관관계 - 1 선과 악의 상관관계)

나는 사실상 그 어떤것도 ‘초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받아들인다는 것, 언뜻 쉽게 보이는 이것은 가장 어려운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 그 행위는 희망을 제거하는 것인데, 이 희망이 없는 행위를 완수하는 자는 인간으로 하여금 항상 다른 것이 되게끔 하는 이러한 대립을 지속시키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치 터키가 그리스를점령하던 날, 그리스의 사제가 성 소피아 성당 벽 속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존재의 덩어리 속으로 들어간다. (40, 제1부 자연적 상관관계 - 1 선과 악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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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선 붕가붕가 파티가 열리고 있고 Q는 죽었고 나는 살아서 오줌을 쌌다. (52)

다짐이 허무가 되어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평론가 김이 애써 나를 매장시키는 수고를 기울일 필요도 없이, 나는 스스로 무너져내렸다. 그후로 퀴어 영화는커녕 그 어떤 시나리오도 쓰지 못했고, 애초에 내가 영화를 했던 사람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져버렸다.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페이드아웃.
어쩌면 나는 언제든지 스스로를 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꿈이나 희망, 기세 좋던 에너지 같은 것들은 그 저 근거 없는 자신감만을 양분으로 하고 있던 것일지도.
그리고 나는 지금, 그때 내 인생의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선택지를 모두 골라놓은 것처럼 살고 있다. 시작도 전에 완벽히 고갈된 창작력, 최저시급을 간신히 넘기는 임금, 불법 파일 공유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잠든 근육청년 탐하기‘를 검색하는 서른몇살의 인생. (183)

목요일 오후, 나는 총 일곱 명의 부지런한 관객과 함께 나의 영화를 감상했다. 오래된 공업사를 개조해 만들었다는 문화 공간은 소리가 많이 울렸다. 그래서인지 그간 숱하게 봐왔던 내 영화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그날 칠십팔 분짜리내 첫번째 장편영화를 보고 깨달은 진실은 단 하나였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내 영화는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사람들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사랑을 하다 맥빠지게 끝나버렸다. 주인공이 게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색도 가치도 없는 그런 영화. 굳이 장편 분량의 서사일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고작 이것을 위해, 그 모든 것들을 견디고 버티고, 또 버리며 여기까지 온 것이라니. 미자의 말이 옳았다. 내 영화는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저 나 자신에 취해 있었을 뿐, 실은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난 후 관객들이 밖으로 나갔다.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울었다. (207)

왕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목이 좀 잘못됐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마치 샴페인 잔으로 건배를 하는 것처럼 소주병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우리는 세상의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점은커녕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했다. 인생을 걸고 했던 일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어버렸다. 칸영화제를 가기는커녕 제대로 된 퀴어 영화를 찍지도 못했고, 현대무용가가 되지도 못했다. 보란듯이 사랑을 하지도 못했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어영부영 나이만 처먹었다. 동성애자이면서 제대로 동성애를 하지도 못했고 그것도 모자라 이성애자들로부터 마이크 하나조차 제대로 훔치지 못했다. 이토록 철저한 실패는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우리는 망했다.
망해먹은 채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우리는 웃고 떠들고 술 먹고 섹스하다 죽을 줄이나 아는 동성애자들일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213)

나는 언제부터인가 우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는데, 대개의 눈물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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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에피소드에 또 다른 에피소드를 추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그때 나는 거울을 모두 깨뜨려버렸다. (10)

그래, 프란츠가 말한다. 그래.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잊는다. 내가 그것을 잊지 않는다면, 내가 지금 프란츠에게 ‘그래‘가 무슨 의미냐고 묻는다면, 행복이 닿을 수 없는 것이라는 내 경솔한 주장이 옳았다고, 사랑은 현실 생활 밖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것은 어쩔 수없이 연인들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고 그는 말할 것이다. 트리스탄이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장애물을 하나씩 하나씩 설치했던 것이라고 그는 말할 것이다. 오르페우스가 사실은 에우리디케를 구할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던 것이라고,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자신의 불멸의 사랑을 죽도록 노래로 찬미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그는 말할 것이다. 프란츠에게 ‘그래‘가 무슨 의미냐고 내가 묻는다면 프란츠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알고 싶지 않다.
어떤 사람이 평범하게 성장한 자녀나 손자들까지 두고 있는 나이에,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지고 심장발작의 위험이 있는 그런 나이에 이제야 놓치고 살았던 청춘의 사랑을 만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면,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우스운 일로 여겼을 것이다. 나 자신도 사월 어느 날 저녁 뇌 안에서 양극이 바뀌기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공룡과도 같아서, 모든 세상이 그들의 죽음을 즐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 안나 카레니나, 펜테질레아, 항상 죽음만이 있고, 항상 불가능한 것에 대한 쾌락이 있다. 사람들이 핑계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에 무능력하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청춘의 사랑이 없는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일찍 죽음의 공포 속에서 소리치면서 그들의 사랑을 몸 밖으로 내보냈던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그렇게 믿도록 설득을 당하는 것이다. (47-48)

우리가 만났을 때 우리는 아직 늙지 않았었다. 어쨌든 나는 프란츠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프란츠도 나를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젊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젊지 않다는 것은 이야기할 것이 많다는 장점이 있었다. (82)

프란츠가 페를레베르크 선생님 같은 여자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날아간 토요일에 나는 아테에게 갔다. 아테 생각이 떠오르자 내 안에서 강렬한 그리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테를 향한 그리움이었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오히려 지나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만성적 포기 이전의 시절, 모든 이상이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시절, 보통의 출세와 보통의 결혼에 대한 기대가 아직은 혐오와 경멸을 불러일으켰던 시절,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꼭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았던, 시작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당시에 아테가 나를 알았다. 그녀는 과거의 나였던 인물을 아직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었다. 프란츠를 알게 된 이후로 나는 내가 그사이에 되어 있던 여자보다 과거의 나였던 인물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전부가 아니면 무(無)‘, ‘그것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격한 감정을 느꼈던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 그런 문장은 시작이 아니면 끝에 속하는 것이다. (116-117)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나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 하나야.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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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B가 사용하는 초기 단편이라거나 말년의 문제작이라는 식의 표현을 싫어했다. 종교가 무엇이냐는 단순한 질문에 여러 종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자신에게는 초기 불교의 소승주의가 맞는 것 같다고 대답하는 종류의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거부감과 비슷했다. 그런 사람들은 왕의 파티에 가서 오줌을 참다가 방광이 터져죽은 튀코 브라헤 같은 특이한 이름을 외우고 다닌다.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자신이 여섯살 칠개월과 일곱살 석달 사이였을 때의 후견인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고유명사나 특별한 숫자의 인용이나 디테일로 독자를 현혹할 뿐 자기만의 사유체계는 없다. 분명 책은 안 보고 서평만 볼 것이다. (92, 나쁜 남자들은 패턴과 싸운다)

그가 속해 있는 것과 같은 집단에서는 간혹 소수라는 사실을 도덕적 우월함으로 삼아 권력적이 되는 인간들이 있었다. 개를 키우는 게 곧바로 생태주의의 실천이 아니듯이 소수라는 것 자체가 곧바로 정당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주목하는 것은 다수에 의해 소외된 다양한 관점과 철학에 귀를 기울이고 개인의 고유한 권리를 존중하려는 의도일 뿐 소수라거나 소외된 사람의 의견이라서 무조건 중요한 건 아닌 것이다. 세상에는 ‘나는 나야 라는 아웃사이더 소수에서 시작하지만 ‘나는 남과 달라‘라는 권력적 소수가 되어버리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아무리 가르쳐줘봤자 못 알아들을 게 뻔하기 때문에 요셉은 빗방울이 약해진 것을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96, 나쁜 남자들은 패턴과 싸운다)

강사 시절 요셉은 인도에 관심이 많은 여학생을 종종 보았다. 그들은 자의식이 강한 만큼 자기 상처에 과잉반응을 보이고 자아도취적 성향이 있었다. 배신당한 경험이 있고 세상을 믿지 않는다면서도 치유를 위해 인도를 찾아가는 식이었다. 책과 여행, 인도까지 거친 뒤 지금 까페에 있다면 그 배우들은 틀림없이 요셉의 취향이었다.
- 언니 친구는 짧은 머리에 자전거와 수영을 좋아하고 떼낄라 를 즐겨 마시지 않나?
(99, 나쁜 남자들은 패턴과 싸운다)

그 다정한 웃음은 류를 슬프게 만들었다. 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세상의 끝은 S시가 아니었다. 열정이 끝나는 소실점이었다. 매혹은 지속되지 않으며 열정에는 일정한 분량이 있다. 그 한시성이 그들을 더욱 열렬하게 만든 것이었다. 류는 그들에게 주어진 매혹과 열정의 시간이 끝나버리는 날 자신이 혼자 비행기에 실려 돌아오리라는 걸 예감했다. 요셉과 다른 점은 그것이었다. 둘 다 뜨거웠지만 류는 요셉과 달리 자신을 속이지 못했다. 매혹이 사라진 이후의 사랑은 어머니처럼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틀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류는 자기기만의 부역보다는 상실을 택했다. 고통보다는 고독을 택한 것이다. (263-264, 류의 노래)

류는 또 생각했다. 낙관은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에게 주어진 작은 쾌활이었다. 아버지 삶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속에 자기 방식으로 소멸해갈 수 있는 사람에게 바치는 변형된 선망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265, 류의 노래)

류는 어머니의 이혼과 재혼 모두 고독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녀다운 이지적인 독립심으로 고독의 침전물 속에서 자유로움과 평화를 찾아냈고 그 범주 안에서 인생을 꾸려나가는 데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복수심 때문도 아니었다. 함께 사는 동안에도 이미 품위있고 차가운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아버지와 분리시켜왔다. 복수라면 아버지를 고독하게 만든 것으로 충분했다. 아버지를 향한 복수는 아니었다. 자신을 고독으로 이끈 매혹의 세계에 복수한 것이었다. 류의 아버지가 사랑에 빠진 것은 다른 남자와 통화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를 어머니에게로 이끌었던 매혹은 처음부터 배신 속에서 잉태되었다. 어머니는 그 매혹을 고독으로 환산함으로써 운명에게 갚아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될 때처럼 불현듯 끝났다. (258-259, 류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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