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선 붕가붕가 파티가 열리고 있고 Q는 죽었고 나는 살아서 오줌을 쌌다. (52)

다짐이 허무가 되어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평론가 김이 애써 나를 매장시키는 수고를 기울일 필요도 없이, 나는 스스로 무너져내렸다. 그후로 퀴어 영화는커녕 그 어떤 시나리오도 쓰지 못했고, 애초에 내가 영화를 했던 사람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져버렸다.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페이드아웃.
어쩌면 나는 언제든지 스스로를 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꿈이나 희망, 기세 좋던 에너지 같은 것들은 그 저 근거 없는 자신감만을 양분으로 하고 있던 것일지도.
그리고 나는 지금, 그때 내 인생의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선택지를 모두 골라놓은 것처럼 살고 있다. 시작도 전에 완벽히 고갈된 창작력, 최저시급을 간신히 넘기는 임금, 불법 파일 공유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잠든 근육청년 탐하기‘를 검색하는 서른몇살의 인생. (183)

목요일 오후, 나는 총 일곱 명의 부지런한 관객과 함께 나의 영화를 감상했다. 오래된 공업사를 개조해 만들었다는 문화 공간은 소리가 많이 울렸다. 그래서인지 그간 숱하게 봐왔던 내 영화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그날 칠십팔 분짜리내 첫번째 장편영화를 보고 깨달은 진실은 단 하나였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내 영화는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사람들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사랑을 하다 맥빠지게 끝나버렸다. 주인공이 게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색도 가치도 없는 그런 영화. 굳이 장편 분량의 서사일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고작 이것을 위해, 그 모든 것들을 견디고 버티고, 또 버리며 여기까지 온 것이라니. 미자의 말이 옳았다. 내 영화는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저 나 자신에 취해 있었을 뿐, 실은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난 후 관객들이 밖으로 나갔다.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울었다. (207)

왕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목이 좀 잘못됐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마치 샴페인 잔으로 건배를 하는 것처럼 소주병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우리는 세상의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점은커녕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했다. 인생을 걸고 했던 일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어버렸다. 칸영화제를 가기는커녕 제대로 된 퀴어 영화를 찍지도 못했고, 현대무용가가 되지도 못했다. 보란듯이 사랑을 하지도 못했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어영부영 나이만 처먹었다. 동성애자이면서 제대로 동성애를 하지도 못했고 그것도 모자라 이성애자들로부터 마이크 하나조차 제대로 훔치지 못했다. 이토록 철저한 실패는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우리는 망했다.
망해먹은 채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우리는 웃고 떠들고 술 먹고 섹스하다 죽을 줄이나 아는 동성애자들일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213)

나는 언제부터인가 우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는데, 대개의 눈물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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