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나의 불안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이는 바로 새로운 날이 태어나는 것은 생각지 않고 그 밤을 영원한 것이라 믿으며, 그 어둠 속에서 지체한 데서 왔다! 반올림 ‘도‘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것이 반내림 ‘레‘와 그토록 가깝다는것을, 또 칠음계의 맨 아래 음정인 ‘시‘에 의해 구별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이처럼 임박한 미래에 대한 생각은 겉보기에는 희망이라 불리는 감정과 비슷하나 실은 전혀 다른 것이다. 선과 악이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만큼이나 서로 뒤엉켜 있다고 보는 현자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악에서 선이, 반대로 선에서 악이 나올 것임을 알고 있다. 그가 도달하게 될 평정은 소위 말하는 불행과 반대되는 행복과는 닮은 점이 없을 것이다. 이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아마도 비인간적인 상태일 것이다. (38, 제1부 자연적 상관관계 - 1 선과 악의 상관관계)

그리하여 인간들은 ‘악의 문제‘를 상상력의 어휘로 제기해야 하는데도 이를 지성의 어휘로 제기함으로써 그 우둔함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들은 문제가 아니라 고통에 대해 말해야 하며, 해결책이 아니라 위안에 대해 말해야 한다. 만약 머리 하나를 갖는 행운을 얻을 수 있다면 두통을 앓게 된다는 것쯤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며, 왜 머리가 갖가지 기쁨을 낳는 기관이면서 왜 때로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지 자문한다는 것도 쓸데없는 짓이다. 그러나 당신은 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를 기다리면서, 우선 거기서 갖가지 치료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3-44, 제1부 자연적 상관관계 - 1 선과 악의 상관관계)

도스토예프스키가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서, 그리고 그 의도는 다르지만 조르주 바타유가 <니체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악을 저지르는 것, 그것은 그의 실존을 영위하는 것이다. 죄가 없다는 것, 그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조르주 바타유는 생각한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유란 그것이 악을 저지를 수있는 가능성, 그리고 분명한 것을 부정할 수조차 있는 가능성을 가져올 때에만 완벽하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범죄자가 정숙한 인간보다 더 성인에 가까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절대에 대한 욕망으로 파인 심연은 무언가 인간을 초월하는 곳으로 향하는 문을 열게할 것이다.
어쨌든 악이란 물리적 영역에서와 같이 도덕적 영역에서도 선과의 상관 관계 속에 있으며, 또 나쁘게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은 듯하다. (48-49, 제1부 자연적 상관관계 - 1 선과 악의 상관관계)

나는 사실상 그 어떤것도 ‘초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받아들인다는 것, 언뜻 쉽게 보이는 이것은 가장 어려운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 그 행위는 희망을 제거하는 것인데, 이 희망이 없는 행위를 완수하는 자는 인간으로 하여금 항상 다른 것이 되게끔 하는 이러한 대립을 지속시키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치 터키가 그리스를점령하던 날, 그리스의 사제가 성 소피아 성당 벽 속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존재의 덩어리 속으로 들어간다. (40, 제1부 자연적 상관관계 - 1 선과 악의 상관관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