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본적인 물음에서 시작해 보자. 그림이란 뭘까? 그림은 명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동사이기도 한 말이다. 나는 이런 구조의 말들이 좋다. 꿈을 꿈. 삶을 삶. 그림을 그림, 이런 말들에는 결과와 과정을 동등하게 중시하는 뜻이 읽힌다. 이런 의미에서, 그림이라고 하면 대개 종이에 남는 결과물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나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동, 더 자세히 말해 그리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변화이다. 자동차로 말하자면 기어 변환을 하듯, 그림을 그리는 동안 사람은 다른 시간 속을 걷게 된다. 이 변화를 경험하는 과정이 종이에 그럴싸한 무엇을 남기는 결과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누군가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요.‘라고 말하면 나는 ‘아, 이 사람은 지금 다른 시간을 필요로 하는구나.‘라고 받아들인다. (11) - P11

초라함만이 줄 수 있는 둘도 없는 소중함과 재미는 초라함에 대한 감각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만 향유가 가능하다. 초라함에 대한 세상의 통념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람은 정말로 초라해진다. (61) - P61

이게 모두 괜한 고민이다. 그냥 멋대로, 그리고 싶은 부분만 그리면 된다. 색깔도 그냥 있는 물감을 쓰면 된다. 건축스케치계의 일인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림이란 그저 대상을 조금 더 깊이 즐기기 위한 수단이니, 비례가 안 맞든, 형태가 엉터리든 그저 손이가는 대로 멋대로 그리면 그뿐이다. (72) - P72

그 사람을 잘 그리기 위해 관찰한다기보다 그 사람을 잘 관찰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157)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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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방해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불안이에요. (184)

우선 살아보자고요. 라벨은 그 후에 붙이고. (198)

두 가지 중에서 선택을 하기 위해선, 두 가지 모두를 알아야 해요. 나는 선과 악 중에 선택을 할 수 없어요. 아마 선만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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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함은 젊음의 소산이고, 지혜는 노년의 소산일세. (56)

체력이 떨어진 것은 늙은 탓이라기보다는 젊은 시절에 방탕한 삶을 보낸 탓인 경우가 더 많네. 젊은 시절의 방탕은 노년에게 허약한 몸을 넘겨주는 법이네. (73)

노년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기 권리를 지키고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자기 영역을 지배할 경우에만 존중받는다네. 나는 노인 같은 데가 있는 젊은이를 좋게 보네. 마찬가지로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노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네. 그런 사람은 육체는 늙어도 정신은 결코 늙지 않는다네. (87)

내가 이 모든 것을 하는 원동력은 정신의 힘이네. 물론 이 일들을 하기에는 힘에 부칠 수도 있고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을 걸세. 그렇더라도 긴 의자에 누워서 더는 할 수 없게 된 그 일들에 대해 생각은 할 수 있지 않겠나. 내가 그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그런 종류의 일을 계속해왔기 때문이네. 평생을 공부하고 열심히 활동한 사람은 노년이 다가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네. 어느 날 갑자기 노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힘 들이지 않고 서서히 인생의 말년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88)

배우가 연극이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무대 위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네. 필요한 장면에만 등장하면 되네. 마찬가지로 현명한 사람은 관객이 마지막에 박수갈채를 보낼 때까지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있을 필요가 없네. (148)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이 짧더라도, 진실되고 올바르게 살기에는 충분히 기네. (148)

삶의 여정에서 그때그때 즐길 것을 모두 즐겼으면 살 만큼 산 것이네.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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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예전에 국민군 복장을 걸치고 나폴레옹 시절 근위병 흉내를 내느라 무진 애를 썼는데, 지금은 시골 사람을 흉내내느라 애쓰고 있다. (제8장 귀농 부르주아,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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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로운 표시 체계의 목적은 몇몇 비평가들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환상과는 달리, 책들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 지속적이고 동질적인 과정이 아니요 우리 자신에 대한 투명한 인식이 이루어지는 장(場)도 아니며, 오히려 갖가지 추억의 조각들이 집요하게 들러붙는 어떤 모호한 공간이요, 그것의 가치(창조적 가치도 포함하여) 또한 그곳을 배회하고 있는 불분명한 유령들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부단히 상기시키는 데 있다. (18-19)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안다. 불행하게도 교양을 쌓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으나, 교양인들은 교양이란 무엇보다 우선 ‘오리엔테이션‘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 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내부는 외부보다 덜 중요하다. 혹은, 책의 내부는 바로 책의 외부요, 각각의책에서 중요한 것은 나란히 있는 책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저런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건 교양인에게 별로 중요하지않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그 책의 ‘내용‘ 을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종종 그 책의 ‘상황‘, 즉 그 책이 다른 책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알수 있기 때문이다. (31)

발레리는 이러한 비평 전통과 단절하여, 사람들이 흔히 하는 생각과는 달리 저자는 작품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제기한다. 작품은 저자의 내부에서 자라나지만 저자를 초월하는 어떤 창작 과정의 소산이므로 그것을 저자에게 환원시키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어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별로 득이 될 게 없다. 결국 작품에게 저자란 그저 지나쳐가는 하나의 장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8)

책들이 단지 지식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기억 상실, 즉 정체성의 상실과도 관계된 것이라는 사실은 독서에 관한 모든 고찰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요소다. 이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텍스트 접촉의 긍정적이고 축적적인 측면만 헤아리게 될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단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는 것 어쩌면ㅡ이 점이 더 크다ㅡ이기도하다. 말하자면 우리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망각과 대면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몽테뉴의 글들에서 드러나는 ‘독서 주체‘ 의 이미지는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단일화된 주체가 아니라 자신이 알아볼 수 없는 텍스트 조각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불확실한 존재다. (88)

맥락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 그것은 책이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유동적인 오브제이며 그 유동성은 책을 중심으로 짜이는 권력 관계 전체와 관련이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다. (193)

타자가 알 거라는 생각이 주는 두려움은 책들에 대한 진정한 모든 창작을 가로막는 족쇄와 같다. 타자가 읽었으리라는 생각, 그가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창작을, 비독자가 궁지를 모면하기 위해 부득이 의존하는 수단으로 환원시켜버린다. 사실은 비독자나 독자 모두가 그들이 원해서건 그렇지 않건 이미 책들을 꾸며나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으며,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런 과정의 폭과 역동성을 증가시키느냐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205)

이상에서 보듯 우리가 얘기하는 책들은 가상의 어떤 완전한 독서를 통해 그 객관적 실제 내용을 되찾을 수 있는 실재하는 책들인 것만은 아니며, 각각의 책과 우리 무의식의 여러 잠재적 가능성의 교차에서 솟아오르는 ‘유령 책들‘이기도 하다. 이 ‘유령 책들‘은 물론 실재하는책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재하는 책들보다 훨씬 더 우리의 대화와 몽상을 풍요롭게 해준다. (208)

비평에 대한 자신의 변론을 계속하면서, 뭔가를 행하는 것보다는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주장하는 길버트는 우선 역사상의 여러 가지 예를 들어, 고대 영웅들의 수훈을 이야기한 시인들이 그 영웅들보다 더 훌륭하다는 점을 제시한다. 행위라는 것은 "그것을 탄생시킨 충동과 더불어 끝나" 버리는 "사실에의 비겁한 양보"지만, "세계는 몽상가들을 위해 시인이 구성했다"는 것이다. (221)

그럼, 독립적인 것이야. 시인이나 조각가의 작품이 그렇듯이, 비평 역시 모방이나 유추의 저급한 척도에 의해 판단되는 게 아닐세. 형태와 색채의 물질적 세계 앞에서나, 혹은 정열 및 사상의 보이지 않는 세계 앞에서 예술가가 담당하는 역할과 똑같은 역할을 비평은 예술작품 앞에서 담당하게 되는 거라네. 그가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는 데는 굳이 최고로 섬세한 재료가 필요한 것도 아니네. 그는 무엇이건 자신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이용하지.

그러므로 비평 대상이 되는 작품은 완전히 흥미 없는 것일 수도 있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만큼 비평에 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작품은 단지 구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222-223)

어쨌든 작품은 담론 속에서 증발하면서 어떤 덧없는 환각적 오브제에 자기 자리를 내어준다. 다시 말하면, 온갖 심리적 투사(投射)를 유인하기 쉽고 사람들의 견해 표명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령 작품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작품을 자기 탐구의 매체로 사용하고, 이용 가능한 그 몇 안 되는 요소들에 입각하여 그 요소들이 대체 불가능한, 내밀한 우리 자신에 관해 말해주는 바에 유의하면서 자신의 내면 책의 부분 원고들을 편찬하고자 하는 편이 더 낫다. 요컨대 우리는 "실재"하는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며ㅡ물론 실재 책은 모티브의 계기로 쓰일 수는 있다ㅡ이 일을 저버리는일이 없도록 유념하면서 자기를 서술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230)

어떤 말이나 글의 맥락에 맞춰 적절한 책을 꾸며내는 일은 거기에 주체의 진실이 더 많이 실릴수록 그리고 그것이 그의 내면세계의 연장선상에서 기술될수록 그만큼 더 믿을 만한 것이 될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텍스트에 대한 거짓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이다. (230)

책이란 읽을 때마다 다시 꾸며지는 것이란 점을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일은 곧 별 피해 없이, 심지어는 이득을 얻기까지 하며 여러 가지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그들에게 제공해주는 것이라 할수 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통찰력 있게 말할 줄 안다는 것은 책들의 세계를 훨씬 웃도는 가치가 있다. 많은 작가들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교양 전체는 담론과 그 대상 간의 연관을 끊고 자기 얘기를 하는 능력을 보이는 이들에게 열리는 것이다. (236)

그런 혼란은 책을 신성시하는 태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역할을 교육이 충분히 수행하지 못해 ‘책을 꾸며낼‘ 권리가 학생들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텍스트에 대한 존중과 수정 불가의 금기에 마비당하는 데다 텍스트를 암송하거나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알아야 한다는 속박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내적 일탈 능력을 상실하고 상상력이 유익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것을 스스로 금해버린다.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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