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은 B가 사용하는 초기 단편이라거나 말년의 문제작이라는 식의 표현을 싫어했다. 종교가 무엇이냐는 단순한 질문에 여러 종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자신에게는 초기 불교의 소승주의가 맞는 것 같다고 대답하는 종류의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거부감과 비슷했다. 그런 사람들은 왕의 파티에 가서 오줌을 참다가 방광이 터져죽은 튀코 브라헤 같은 특이한 이름을 외우고 다닌다.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자신이 여섯살 칠개월과 일곱살 석달 사이였을 때의 후견인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고유명사나 특별한 숫자의 인용이나 디테일로 독자를 현혹할 뿐 자기만의 사유체계는 없다. 분명 책은 안 보고 서평만 볼 것이다. (92, 나쁜 남자들은 패턴과 싸운다)
그가 속해 있는 것과 같은 집단에서는 간혹 소수라는 사실을 도덕적 우월함으로 삼아 권력적이 되는 인간들이 있었다. 개를 키우는 게 곧바로 생태주의의 실천이 아니듯이 소수라는 것 자체가 곧바로 정당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주목하는 것은 다수에 의해 소외된 다양한 관점과 철학에 귀를 기울이고 개인의 고유한 권리를 존중하려는 의도일 뿐 소수라거나 소외된 사람의 의견이라서 무조건 중요한 건 아닌 것이다. 세상에는 ‘나는 나야 라는 아웃사이더 소수에서 시작하지만 ‘나는 남과 달라‘라는 권력적 소수가 되어버리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아무리 가르쳐줘봤자 못 알아들을 게 뻔하기 때문에 요셉은 빗방울이 약해진 것을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96, 나쁜 남자들은 패턴과 싸운다)
강사 시절 요셉은 인도에 관심이 많은 여학생을 종종 보았다. 그들은 자의식이 강한 만큼 자기 상처에 과잉반응을 보이고 자아도취적 성향이 있었다. 배신당한 경험이 있고 세상을 믿지 않는다면서도 치유를 위해 인도를 찾아가는 식이었다. 책과 여행, 인도까지 거친 뒤 지금 까페에 있다면 그 배우들은 틀림없이 요셉의 취향이었다. - 언니 친구는 짧은 머리에 자전거와 수영을 좋아하고 떼낄라 를 즐겨 마시지 않나? (99, 나쁜 남자들은 패턴과 싸운다)
그 다정한 웃음은 류를 슬프게 만들었다. 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세상의 끝은 S시가 아니었다. 열정이 끝나는 소실점이었다. 매혹은 지속되지 않으며 열정에는 일정한 분량이 있다. 그 한시성이 그들을 더욱 열렬하게 만든 것이었다. 류는 그들에게 주어진 매혹과 열정의 시간이 끝나버리는 날 자신이 혼자 비행기에 실려 돌아오리라는 걸 예감했다. 요셉과 다른 점은 그것이었다. 둘 다 뜨거웠지만 류는 요셉과 달리 자신을 속이지 못했다. 매혹이 사라진 이후의 사랑은 어머니처럼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틀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류는 자기기만의 부역보다는 상실을 택했다. 고통보다는 고독을 택한 것이다. (263-264, 류의 노래)
류는 또 생각했다. 낙관은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에게 주어진 작은 쾌활이었다. 아버지 삶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속에 자기 방식으로 소멸해갈 수 있는 사람에게 바치는 변형된 선망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265, 류의 노래)
류는 어머니의 이혼과 재혼 모두 고독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녀다운 이지적인 독립심으로 고독의 침전물 속에서 자유로움과 평화를 찾아냈고 그 범주 안에서 인생을 꾸려나가는 데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복수심 때문도 아니었다. 함께 사는 동안에도 이미 품위있고 차가운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아버지와 분리시켜왔다. 복수라면 아버지를 고독하게 만든 것으로 충분했다. 아버지를 향한 복수는 아니었다. 자신을 고독으로 이끈 매혹의 세계에 복수한 것이었다. 류의 아버지가 사랑에 빠진 것은 다른 남자와 통화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를 어머니에게로 이끌었던 매혹은 처음부터 배신 속에서 잉태되었다. 어머니는 그 매혹을 고독으로 환산함으로써 운명에게 갚아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될 때처럼 불현듯 끝났다. (258-259, 류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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