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학생이여, 무식함을 깨달아라" 부드러운 진보논객, 홍세화와의 만남
박은(silver) 기자 홍세화는 뜨거운 사람이다. 지난 79년 파리로 망명한 뒤, 20년을 타국에서 보낸 그는 마치 그 동안의 부재를 메우려는 듯, 뜨겁고 치열하게 살아왔다. 한겨레 기획위원을 비롯하여, ‘학벌 없는 사회’ 대표,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지지하는 ‘전쟁 없는 세상’ 후원회장, 민주 노동당 위원, 진보 잡지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최근엔 EBS 교육 프로그램의 진행까지 맡아 그는 지금 20살의 청년처럼 성큼성큼 걷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매서운 2월 어느 날, 공덕동 한겨레 신문사 편집실에서 홍세화 기획위원을 만났다.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바쁘다는 그는 다소 피곤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끊임없이 전화가 걸려온다. 그럼에도 조용한 목소리에서 힘과 활기가 느껴졌다. 그 나이 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현재진행형의 활력이다. 사진을 몇 장 찍고, 제대로 인사도 나눌 겨를도 없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가짜 보수를 보수하라
-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극우와 수구 세력, 보수에 대해 일침을 가해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력과는 무관하게 한국 사회의 전근대적 정체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독 한국 사회가 현대 50여년간 이러한 늪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단의 질곡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역사 청산을 제대로 못한 것도 결국 이 때문이죠. 한국의 사회축이 일제부역세력에서 군사독재세력으로 이어지면서 사회의 모든 공적 부분을 이 세력들이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민주공화국’이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가치인 공익 개념이 이 세력들에 의해 대중과 공유할 기회조차 없어진 거지요. 그로 인해 공익, 자유, 평등, 연대 등의 긍정적 가치가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데 일찍부터 실패한 것입니다. 교육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민주공화국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인식해야 하는데 이 역시 잘 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죠.
진보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보수조차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게 된 겁니다. 수구세력, 지역 패권주의, 패거리 문화 등이 모두 '보수'를 포방하는, 즉 ‘가짜 보수’가 판을 치게 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 선생님께서 비판하시는 거대 언론(조ㆍ중ㆍ동)도 역시 가짜 보수라고 할 수 있겠군요.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 나라의 보수라 일컬어지는 세력을 대변하고 있으니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 중 하나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보수’라고 할 때에는 뭘 보수하는 것인가가 중요해요. 지금의 거대 언론 세력은 공화국의 가치인 자유나 평등을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기득권의 입장을 대변하고 보수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런 측면에서 그들은 보수를 단지 참칭하고 있을 뿐, 진정한 보수가 아닙니다. 진정한 보수의 대표적 인물로 김구 선생님 같은 분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진정한 보수층을 몰아낸 세력이 바로 일제 부역 세력들과 그에서 이어진 군사 독재 세력 아닙니까. 또 군사 독재 세력의 하위 수단에 불과했던 조선일보를 비롯한 거대 언론 세력들도 한 맥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익을 추구하고,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막는 세력을 어떻게 다양한 목소리 중 하나로 볼 수 있겠습니까. 이미 거대 언론사들은 보수라 볼 수 없는 철저한 사회축의 집단입니다. 권력과 자본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언론을 무기화하고 있고, 보수를 팔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선생님께서 민주노동당 당원인 동시에, 진보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한겨레신문>의 편집위원을 맡고 계시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긴장의 문제입니다. 현실과 지향점 사이의 긴장, 나와 한국 사회 대중의 의식 사이의 긴장…. 그 긴장의 역할을 누가 하느냐, 저는 <한겨레신문>이라고 봅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처럼 소수가 혁명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다수의 생각을 조금 바꾸는 것이 더 혁명적입니다. 소수가 아무리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회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다수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렇게 봤을 때, <한겨레신문>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그러한 면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 하지만 거대 언론에 비해 턱없이 적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면 한국 사회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 아닐까요. "기술과 자본력의 부족이 문제죠.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비해 공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불성실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에요. 그래서 바로 시민 의식이 필요한 거지요. 더 성실해야 하고, 더 참여해야 합니다.
현재 한국인의 정치 의식의 분포가 대부분이 사상적 반신불수의 상태라고 봅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 사민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것이 나쁘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는, 이상한 상태. 바로 우경화되어있다는 거죠. 신문은 시민의 사회의식의 반영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 최근의 보수학생연대나, 시대연대 등과 같은 청년보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청년보수가 진정한 의미의 보수로서, 지금까지의 보수를 참칭했던 것에 대한 성찰적 대안으로 나타난다면 참 고맙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요즘의 청년 보수를 보면 그다지 동기가 순수해 보이지 않습니다. 진정한 보수라면 한국 사회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에 대한 문제 제기가 제일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죠. 단순히 기득권 세력에 응한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그와 반대로 현재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보수 성향’을 드러내기 힘든 측면도 있습니다. 사이비 보수가 아니라면 합리적 보수도 존재해서 사회의 진보적인 면을 보완하는 기능도 할 텐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동안 한국에 가짜 보수 세력이 너무 강했고, 이념뿐 아니라 지역 패권주의와 맞물려 그 영향력은 실로 거대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보수가 나오기는 이미 어려운 주문이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단은 개혁 세력이라고 말하는 노무현 세력이 진정한 보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일차적인 바람입니다. 그보다도 진보 정치 세력이 제대로 확립되었을 때에 합리적 보수 세력을 견인해 낼 수 있다고 보고, 진보 정치 세력이 자리 잡기를 소망하고 있죠."
▲ 한겨레 기획위원 홍세화
ⓒ2004 이승희 한국 대학생들의 탈정치화
- 정치 이야기를 해볼까요? 요즘 총선 문제로 시끄러운데, 선생께서 대학생이던 70년대에는 우리나라 총선이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과의 차이가 분명 존재할 텐데 그 뚜렷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그때는 박정희 폭압 유신 체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선거권도 제대로 없었어요. 총선으로 국회의원을 선출하기보다는 의석의 3분의 1은 거의 대통령이 임명하는 구조였죠. 그에 비해 지금은 얼마나 열려 있습니까. 제가 20대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진보정당이 한국 땅에서 활동할 수 있을까.”
지금은 민노당과 사회당의 지지 세력도 크게 존재하고, 총선도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죠. 이렇게 변화된 사회 분위기에 비해 젊은 세력들이 친화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진보정치에 대한, 사회를 바꾸려는 치열성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 한국 정치와 사회를 바꾸는 주체인 현재 우리 나라 대학생들의 정치적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탈정치화입니다. 요즘의 사회 헤게모니는 물신주의이고, 그로 인해 많은 가치관의 붕괴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경제 동물화’되어 버린, 돈만 있으면 능력 있다는 풍토 속에서 젊은 세대들이 탈정치화로 귀결된 것이죠.
젊은 세대들이 인간이나 사회에 대해 관심도, 고민도 없다면 그것은 배부른 돼지에 불과합니다.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지면서 한총련과 같은 세력은 소수로 밀려나고, 그에 따라 보다 급진적이 되다 보니 오히려 대중에게서 유리되고 있죠.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 신자유주의, 물신주의는 세계적인 추세가 아닌가요? 다른 나라의 젊은이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 나라 대학생들의 탈정치화가 심각하다는 것입니까. "어느 정도는 그렇겠지만, 한국처럼 그런 모습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가령 프랑스의 경우를 보면 교육을 통해서도 사회적 연대, 시민의식 등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부의 크기로 재단하는 풍토는 절대 용납하지 않죠."
-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극복 방안이 있을까요. "이는 장기간에 걸친 문제입니다. 요즘 ‘학교보다 학원이 더 낫다’는 식의 사고가 자리잡힌 사회는 가치관이 이미 붕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을 중심에 둔 교육을 통해 나아져야 합니다. 왜 교육이 이토록 중요하냐면,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교육 과정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회를 규정할 때, 국민 소득이나, 국토, 산업 등 물적 토대도 한 요인이 되겠지만 국민의 의식 부분이 그 사회를 말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봅니다. 우리 나라 교육의 첫 번째 과제는 냉전, 반공, 친미 사대, 안보 등의 의식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국가주의 교육에 대한 탈의식화죠. 두 번째는 경쟁체제를 연대체제로 바꿔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학벌 타파가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 요즘 대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얘기도 있을 것 같은데요. "자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깨닫는 게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요즘 한국 대학생들은 인간과 사회, 그리고 한국에 대해 참담할 정도 무식합니다. 대학생, 엘리트 집단이라는 이유로 그걸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회문화적 소양을 쌓기 위해서 먼저 한국 현대사 공부를 하길 권합니다. 역사에 대한 공부는 지금까지 쌓아온 것에 대한 이해니까요. 두 번째는 대학 서열화를 통해 자기 규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규정이라는 게 참 무서운 일입니다. ‘내가 이 대학에 들어왔으니 한국 사회에서 이 정도의 위치다’라는 무의식. 결국 이는 자기 성숙의 모색을 대학 입시에서 끝낸 결과가 되거든요. 그래서 대학생들에게 자기 규정을 거부하고, 죽는 날까지 자기 완성의 기회를 열어두어라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다시 총선 얘기로 돌아가서, 올 총선이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 첫 선거라서 가지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 1년 노무현 정부에 대해 많은 실망을 했습니다. 노무현 정부가 한국 역사에서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봤는데, 제 역할을 못한 것이지요. 김대중 정권은 극우 헤게모니의 균열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지만, (예를 들면 민주노총, 전교조 등의 합법화를 들 수 있죠.) 사회의 다른 각 부분으로 그 개혁이 퍼지지는 못했습니다. 물적 토대는 여전히 기득권 세력이 가지고 있었죠.
그런 면에서 노무현 정권이 여러 가지 부분에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지난 1년, 과연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오히려 대북관계는 후퇴한 느낌입니다. 저는 노무현 정부의 1년을 보면서 진보 세력이 제대로 정치적 발판을 마련한 후, 목소리를 낼 때에, 합리적 보수도 함께 안착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 총선이 그러한 면에서 진보 세력이 국회에 진입하는 기회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 노무현 정부의 앞으로의 전망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동안 노무현 정부가 수구세력과의 쓸데없는 싸움을 하면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라크 파병 문제, 노사관계, 교육에서도 역사적 소명에서 벗어나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죠. 물론 기존의 권위주의적 정권과는 차별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이 정치 부분에 국한되었다는 점에서 아쉽습니다. 사회의 다른 면에서 변화, 그리고 서로 다른 세력간의 견제와 공존을 통해 잘 하길 기대합니다."
논쟁과 토론, 서로 다름의 존중
- 전에 한 인터뷰에서 진중권씨는 자신과 가장 비슷한 노선을 띠고 있는 분이 홍세화 선생님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최근 진중권씨의 '안티 성향'에 대해 비판여론도 많은데요,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은 그의 정서, 그의 스타일, 성격이기 때문에 존중해 줘야 한다고 봅니다. 스타일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어떻다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거죠. 최근 인터넷 게시판 문화를 보면 서로를 존중하는 것에 인색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에 대한 규정은 하지 않으면서 남에 대한 규정은 너무 쉽게 하거든요. 이 부분을 돌이켜 봐야 합니다. 자기규정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 근 몇 년 사이에 한국 사회에 대중적으로도 논쟁과 토론이 자리 잡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즘의 논쟁들을 보면 합의점을 찾기 위한 논쟁이 아니라, 비판 그 자체를 위한 비판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한국의 토론 문화는 이제 첫 발을 디디는 상황이라 봅니다. 토론을 대중화시켰다는 요즘 TV 토론 프로그램을 보세요. 그것은 토론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 주장을 펴기 위한 것, 자기주장만 끝없이 반복하죠. 그 속에서 합의점이나 해결책을 찾는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서로를 용인하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부정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작년부터 선생님께서 진행해 오신 EBS 프로그램 <똘레랑스, 차이 혹은 다름>이 다른 토론프로그램과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크게 다른 것은 없다고 보지만, 한국 사회에 문화와 이슈 중, 서로 충돌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똘레랑스, 나와 다른 남을 받아들이는 관용이 한국 사회에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거죠."
홍세화 선생과의 긴 대화를 끝내고 한겨레 신문사를 나왔다. 2월의 바람은 여전히 차갑지만 등에 내리쬐는 햇볕만은 따뜻하다. 벌써 봄이 다가오고 있는가. 이렇게 계절의 흐름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역사의 진보 역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홍세화가 바라는 부드럽고,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는 아직 저 너머에 있지만, 계절이 바뀌듯이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올 것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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