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여론조사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

한국인들은 어떤 사회에서 살기를 바랄까 <한겨레>가 창간 16돌을 맞아 여론조사전문기관인 리서치플러스에 의뢰해 7~9일 전국의 성인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그 얼개를 보여준다. ‘복지제도가 잘 갖춰져 있고, 그에 필요한 재원을 국가가 주로 부담하며, 해고 및 대기업·재벌 활동을 정부가 규제하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과 부자가 세금을 많이 내어, 힘없는 사람이 보호받는 사회’. 요컨대 ‘사회민주주의 지향의 복지국가’다.

응답자들은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압도적으로 ‘사회복지가 잘 갖춰진 사회’(78.4%)를 꼽았다. ‘경제적·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는 4분의 1수준인 20.8%였다. 구체적으로 ‘탁아·교육·의료·노후생활 보장 등 복지정책’에 따르는 재원은 국가가 주로 부담해야 한다는 의견(77.2%)이 다수였다. 개인부담이 많아야 한다는 의견은 22.2%였다. 복지재원 조달의 핵심 수단인 세금 부담과 관련해선 국민 10명 가운데 9명 이상이 고소득자(91.0%)와 부자(93.1%)가 지금보다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고 답했다. 이들의 세금부담을 지금보다 낮춰야 한다는 의견은 순서대로 0.7, 0.2%에 불과했다. 이런 답변 경향은 나이·성별·학력·직업·정당지지 성향 등 변수별로 차이가 없었다. 재산상속세율에 대해선 ‘올리자’는 의견이 67.2%였다( ‘유지’ 24.0%, ‘낮추자’ 6.1%).

“탁아·노후복지 재원 국가 부담”77%
“부자 세금 늘려 예산 확보”90% 넘어
절반 이상 “시장경제 정부역할 확대”
해고 “규제를”71% “자유롭게”26%
‘재벌활동제한’강화가 완화보다 높아

시장경제에서 정부의 구실과 관련해선 ‘역할을 유지·확대해야 한다’(57.7%)가 ‘완화·축소해야 한다’(36.1%)는 의견의 2배 가까이 나왔다. 농림수산업 종사자의 경우 정부 구실을 유지·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74.4%로 특히 높게 나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부담이 큼을 보여줬다. 고용·해고 문제와 관련해서는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의견(26.2%)을 ‘규제해야 한다’는 의견(71.3%)이 압도했다. 이 경우 나이와 학력이 낮을수록 규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았고, 화이트·블루 칼라와 민주노동당 지지자도 규제 선호도가 높았다.

직업에 따른 보수 차이에 대해선 ‘차이를 줄여야 한다’가 절반을 넘는 56.3%였고, ‘차이를 벌리자’는 9.4%에 불과했다. ‘지금 수준 유지’는 31.0%였다.

대기업·재벌 활동 규제 문제와 관련해선 ‘규제 강화’ 의견(54.0%)이 ‘완화’(41.6%)보다 조금 높았다. 그런데 지지정당과 정치적 귀속의식에 따라 답변이 크게 갈렸다. 스스로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및 한나라·민주당 지지자는 규제 완화쪽이 다수였고, 중도·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와 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 지지자는 규제 강화쪽이 많았다. 또 ‘힘없는 사람이 보호받는 사회’(51.3%)가 ‘능력있는 사람이 인정받는 사회’(44.6%)보다 바람직하다는 답변이 많았다.

응답자들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으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39.2%)보다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44.8%)를 선호했는데, 20~30대와 직장인, 대학생, 민주노동당 지지자,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특히 그랬다. 반면 한나라당 지지자는 ‘미국식’(46.8%)을 ‘북유럽식’(35.4%)보다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별기획팀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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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등 ㅋㅋ

84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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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im 2004-05-1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6등하셨군요~~~ 아쉬워라~~
 

 

[긴급 기고]

당파와 파벌로 찢긴 대한민국은 미쳤다
‘빨간 바이러스’ 진중권의 독설 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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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를 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라 한다. 그의 비판에는 아군과 적군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글에 대해 “가슴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이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사유를 심장으로 하나?” 최근 대통령 탄핵, 영부인 모독방송에 대한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있는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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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주위의 사람이 낯설게 느껴질 때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믿었던 이들에게서 문득 이질감을 느낄 때, 그 당혹감 속에서 주위의 세계 전체가 매우 낯설게 나타나게 된다. 요즘 그런 체험을 한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튄다’고 말한다. 내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하는 얘기는 지극히 온건하고 상식적인 주장들이다. 외려 내가 비판하는 것들이야말로 도를 넘는 주장이나 극단적 행태들이다. 그런데 왜 나보고 튄다고 하는 걸까. 나는 아직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겠다.

대한민국의 소통은 극단적이다. 대통령을 탄핵하는 정치권만 극단적인 게 아니다. 탄핵사태가 나자 명문사학의 교수라는 분이 군인들 앞에서 “이 나라를 구할 길은 쿠데타밖에 없다”는 극언을 하고, 그 반대편에서는 한 철학자가 느닷없이 ‘자연법’ 운운하며 시민의 함성으로 헌법을 바꾸자고 선동한다.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들면 다음 선거에서 자기들 마음에 드는 대통령을 뽑자고 하면 그만이다. 탄핵이 마음에 안 들면, 앞으로 탄핵요건을 법적으로 강화하자고 하면 그만이다. 그 얘기를 하는 데에 ‘쿠데타’라는 극단적 단어는 왜 필요하고, 개헌을 위해 거리로 나가라는 선동이 왜 필요한가.

군사 쿠데타 혹은 의회 쿠데타를 주장하는 하나의 극단이 있으면, 그 반대편에는 현행헌법을 ‘근원적 위헌’이라 부르는 또 다른 오버액션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극단적인 견해는 (각자 자기 진영에서) 지식인의 용기 있는 소신의 표명이라는 찬양을 받고, 이 엄청난 언어의 인플레이션을 뜯어말리는 나는 졸지에 쓸데없이 튀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얼마 전 MBC ‘신강균의 사실은’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탄핵에 찬성하는 시민들의 집회를 보여주었다. 거기에 모인 이들은 정상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과격한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굳이 극단적인 욕설이 필요한가.

그 방송이 나가자 이번엔 그 반대편에서 난리가 났다. 집회의 사회자는 묘하게 편집된 화면 때문에 시민들로부터 온갖 비방과 욕설과 협박을 들어야 했다. 듣자하니 그는 ‘영부인 모독죄’의 대가로 이틀 만에 3000통의 전화와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게 정상인가. 그런데도 그 편집의 극단성은 문제가 안 되고, 그 방송의 편파성을 지적하는 나는 졸지에 ‘튀고 싶어 환장한’ 놈이 된다.

군중 속의 럭비공

튀는 것은 공이다. 축구공, 농구공, 테니스공. 그 중에서 내 존재에 해당하는 것은 ‘럭비공’이다. 다른 공과 구별되는 럭비공의 고유한 성질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다.

나는 이것도 이해가 안 된다. 내게 중요한 것은 논리적 일관성이다. 그것을 가지고 보면 내가 특정한 사안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얼마든지 합리적 예측이 가능하다. 내가 보기에는 외려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럭비공이다. 상식적인 머리로는 그들이 특정한 사안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도대체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럭비공일까?

럭비공은 가끔 혼자서 거대한 네티즌 군단을 상대하곤 한다. 몇 년 전 부산대 여학생 몇이 인터넷 사이트에 대학 내 예비역들의 군사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전국의 예비역들이 궐기해 이들에게 끔찍한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그들의 개인정보를 빼내 포르노 사이트에 올리기까지 했다.

마침 ‘안티조선’ 운동을 하던 나는 조선일보의 극우성을 비판하는 네티즌들이라면 이런 군사문화와도 열렬히 맞서 싸워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네티즌들은 이 사태 앞에서 침묵하거나 심지어 그 몰상식한 폭력의 편에 섰다. 이 예상치 못한 사태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실존적’ 고독을 느꼈다.

또 하나의 예. 한동안 미군 장갑차의 사고로 죽은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을 촛불로 애도하던 이들이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여학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감성적 휴머니스트라면 서해교전 당시 북한의 발포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의 죽음에도 애도를 보내야 한다. 아울러 사람을 치어놓고 ‘나 몰라라’ 하는 미군의 무책임을 비난하는 사람이라면, 뚜렷한 이유 없이 총질을 하는 북한의 모험주의 노선도 소리 높여 비난해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응당 그러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깨졌다. 미군을 비난하는 것은 휴머니즘이나, 북한을 비난하는 것은 냉전수구세력의 음모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떻게 저런 모순을 머리에 담아놓고 살아갈 수 있을까?

최근에 벌어진 또 다른 사건의 예를 들어보자. 말 많은 조선일보의 편집예술을 열렬히 성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이번에 방송위로부터 ‘주의’를 받은 MBC의 프로그램(‘사실은’)을 보았을 것이다.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이 방송의 고약한 편집기술 또한 열렬히 비판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기대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기대는 무참히 배반당했다. 조선일보의 편집은 사태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편파보도이지만, MBC의 편집은 사태의 본질을 꼭 집어 드러내는 공정보도라는 것이다. 정합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분열된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당파성

저들에겐 내가 아직도 럭비공처럼 보일 것이나 그 동안 나는 나름대로 저들의 행동을 예측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먼저 나는 ‘저들도 호모 사피엔스인 이상 자기 행동을 규제하는 모종의 원리를 갖고 있을 것’이라 가정했다. 그리고 내 눈에 모순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행동 속에도 어떤 일관성이 감춰져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관찰해 보았더니, 과연 그들에게도 일관성은 있었다. 논리적 성격의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성격의 일관성. 말하자면 저들은 특정 사안을 놓고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에 ‘유리하냐, 불리하냐’로만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바라보면 그들의 언행 역시 대단히 일관적임이 드러난다.

우리 사회의 일관성은 논리적 일관성이 아니라 정치적 고해(political commitment)의 일관성이다.

내가 시대를 너무나 앞선 나머지 당대에는 이해받지 못하는 무슨 비범한 생각이라도 가지고 ‘왕따’를 당한다면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하는 얘기가 그렇게 비범한 얘기던가? 내 것은 하나도 특이하지 않은 얘기, 너무나 당연해 진부하기까지 한 얘기, 초등학교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얘기다.

유·불리를 떠나 사유와 언행의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게 뭐 대단한 주장인가? 이렇게 평범한 상식을 말하는 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사회. 내게는 이 사회야말로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왜들 그럴까? 과잉 정치의식 때문이다. 가령 신문을 보자. 일부 보수언론은 버젓이 “대통령 잘못 뽑았다”는 내용의 칼럼을 게재하고 대통령이 내뱉은 말 한마디를 1면 톱에 올린다. 신문이라면 독자가 판단을 내리는 데 필요한 객관적 자료들을 제시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신문들은 필요한 정보는 누락시키고, 불필요한 정보는 과장함으로써 독자가 내려야 할 판단을 대신 내려주려 한다. 이로써 독자는 정보의 수용자가 아니라 정치적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 반대편은 어떤가. 거기에도 문제가 있다. 당파적 저널리즘에 대해 또 다른 당파적 저널리즘으로 맞서려 한다. 몇몇 인터넷 신문은 거의 여당을 위한 선전매체라는 느낌을 준다. 야당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행적이 의심스러운 김대업씨를 졸지에 사회적 의인(義人)으로 만들고, 야당 후보 아들과 같은 몸매를 가진 사람을 찾는다는 이벤트를 벌이며, 개혁당의 유시민씨가 출마한 동네에 그의 사진을 실은 무가지를 살포하여 그의 당선을 돕기도 했다.

정치의 과잉, 조직의 쓴맛

정치적으로 오염된 매체를 통해 견해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온전할 리 없다. 언론이 당의 기관지가 되어버리면 그것을 읽는 독자들은 자연히 당 기관원으로 전락한다.

거기서 그치는가. 이렇게 과잉 정치의식을 갖게 된 독자들은 다시 자신의 흥미를 채워줄 당파적 기사를 요구하게 마련이다. 그럼 언론은 이런 소비자의 요구에 응하여 더욱 더 센세이셔널하게 당파적 저널리즘을 실천하고픈 유혹을 받게 된다. 한마디로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정치의 과잉이 정작 정치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정치의식이 차고 넘치는 사회에, 정작 제대로 된 ‘진성당원’은 거의 없지 않은가. 한마디로 모든 사안을 당파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과잉 정치의식이 시민을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한갓 동원의 ‘대상’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치의 과잉이 사회적 소통에는 도움이 되는가. 그럴 리 없다. 당파와 파벌로 찢어진 사회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은 합리적 소통이다. 아마겟돈의 전장 속에서 당파의 차이를 떠난 합의의 장은 설자리를 잃고, 객관성을 유지하며 그 ‘공론의 장’을 확보하려는 이들은 이 넓은 사회에서 졸지에 철거민 신세가 된다.

싸움은 있어도 심판은 없다. 신문방송학과 없는 학교 없고, 언론학회가 한 둘이 아니고, 언론학자의 칼럼을 안 싣는 신문이 없다. 그런데도 ‘미디어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학자들은 미디어가 제공해주는 ‘상징자본’을 먹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입술 서비스’나 해주고 있다. 이러니 언론감시라는 게 있을 수 없다. 송두율 교수 사건 때 보수언론은 검찰의 피의 사실을 마구 공개했다. 하지만 이 반칙을 제지하는 언론학 교수는 거의 없었다. 외려 그들은 칼럼을 통해 송두율을 성토하기에 바빴다. 이걸 보고 나는 경악했다.

‘공론의 장’을 수호하는 게 소위 ‘지식인’의 역할이다. 우리의 지식인들은 상당히 소심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기회주의적이다. 이미 200년 전에 쉴러는 “지식인은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하는 얘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적군’을 비판하는 것은 안전한 일이다. 적군의 반격을 받아도 그 반대편에는 자신을 지켜줄 ‘아군’이 있다. 적어도 자신의 진영을 가진 자는 그 안에서 안전하며 심지어 존경까지 받는다. 하지만 아군을 비판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른다. 적군으로부터는 이용당하고, 아군으로부터는 배척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인들마저 공론(公論)이 아니라 당론(黨論)을 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줄줄이 입당해서 공천이나 받고.

당파를 떠나서 이쪽저쪽에 쓴 소리 하는 것처럼 쉬워 보이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거기에는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 아군으로부터는 비난을 당하고, 적군으로부터 이용을 당하기 때문이다.

MBC ‘신강균의 사실은’ 프로그램을 비판하는 나의 글이 조선일보 사회면에 인용되자, 당장 ‘아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오마이뉴스에서는 대한민국 지식인이라면 “조선일보에 이용당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기사를 올렸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적을 이롭게 하는 자, 처벌받아야 한다.’ 이게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단체’ 규정과 뭐가 다른가. 적을 이롭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당연히 이쪽의 잘못에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나는 어떤 권력의 작동을 본다.

조선일보에서는 공익적 관점의 나의 문제제기를 자기들의 당리당략에 맞춰 악용하고, 오마이뉴스에서는 내부의 입단속을 위해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응징한다. 조선일보 독자의 눈에는 오마이뉴스의 잘못만 들어오고, 오마이뉴스의 독자에게는 조선일보의 잘못만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렇게 두 패로 갈린 사회에서 두 매체의 잘못을 동시에 보는 사람은 설자리를 잃고, 그 중 어느 한편을 들도록 강요받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진영 멘탈리티’가 강한 것은 그저 생각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오랜 사회 생활을 통해 한 진영에 확실하게 속하지 않을 경우 어떤 보복이 따르는지 몸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

도대체 이런 사회에서 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코드’를 공유해야 한다. 하지만 당파로 쪼개진 사회에서 합의된 코드가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와 갈등이 벌어지지 않겠는가.

그럼 그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되고, 그 갈등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 합의된 코드가 없는 한, 공공성의 영역이 없는 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합리’와 ‘정의’의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각자 자기의 ‘하리’와 자기의 ‘정의’를 갖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회적 문제는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없고, 사회적 갈등은 정의롭게 해결될 수 없다.

이런 사회에서 소통은 ‘정의’가 아니라 벌거벗은 ‘힘’의 대결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파시스트적이다. 오늘날 군부 독재와 같은 거시적 규모의 파시즘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하지만 군부 독재가 무너졌다고 그 잔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믿었던 파시스트들은 이 사회 곳곳에 제 형상을 복제해놓고, 그 작은 독재자들을 통해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힘을 찬양하는 미시(微視) 파시즘은 이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MBC에서 영부인 모독 발언 장면을 노컷으로 방영했을 때 그것을 보고 나는 모든 논란이 해결됐다고 믿었다. 제작진이 문맥을 고약하게 왜곡했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 사이트에 들어가니 네티즌 상대로 여론조사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응한 네티즌의 90%는 문제의 화면이 왜곡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기가 막혔다. 이쯤 되면 종교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모든 종교는 그렇게 포교에 열을 올리는가. 그것은 종교적 진리성은 그것을 신봉하는 신도의 수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왜곡도 90%가 왜곡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공정보도가 된다고 믿는 것일까.

오마이뉴스가 내 인성을 문제삼았을 때, 나는 거꾸로 그들의 인성구조에 관심을 갖게 됐다. 솔직히 나는 그들의 인성이 대단히 ‘중세적’이라 느낀다.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지적하듯이, 합리적 사유가 등장하기 전 서양 사람들의 인성은 대단히 불안정했다. 우리가 아직도 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이를 처음 느낀 것은 강준만이라는 분을 통해서였다. 이 언론학자는 자기가 조선일보와 외롭게 싸울 때 제 편을 들어줬다고 나를 ‘이 사회의 의인’ 반열에 올려놓았다. 도대체 이 시대에 의인이 어디 있고, 악인이 어디에 있는가. 다 고만고만하지. 그러다가 내가 그를 비판하자, 그는 책 두 권 분량의 욕설을 퍼부으며 나를 천하의 악당으로 격하시켰다.

이것은 그의 개인적 인성이 아니라 이 사회에 널리 퍼진 어떤 보편적 인성이다. 왜 이렇게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 걸까. 천국과 지옥의 두 극단 사이에는 합리성의 현세가 존재한다. 그러나 적(敵)과 아(我)로 갈린 사회는 중간의 영역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인간은 천사 아니면 악마로 분류된다. 물론 자기편은 천사요, 상대편은 악마다.

천사가 하는 일은 그 어떤 것도 용서되고, 악마의 역사는 그 어떤 것도 응징의 대상이 된다. 세계는 선과 악이 부딪치는 종말론의 상황으로 빠져들고, 4, 5년마다 반복되는 선거는 매번 어떤 궁극적 사건, 즉 인류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아마겟돈의 최후결전이 된다. 종교적 광신으로 차 있던 중세 말의 상황과 뭐가 다른가.

그들은 나를 보고 “가슴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사유를 심장으로 하는지 몰라도, 나는 사유를 머리로만 한다. 아마도 그들은 나와 다른 해부학적 구조를 가졌거나, 심장과 뇌를 오가는 공감각의 능력을 가진 모양이다. 그들은 내 글에 “감동이 없다”고 말한다. 당연한 일이다. 내 글은 감동을 위한 게 아니라 생각을 위한 것이다. 그들이 연출하는 값싼 키치는 내게 역겨움을 주고, 그들이 표출하는 파토스의 과잉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런데 그렇게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감동’을 잘 먹는 그 섬세한 감성들이, 왜 노동자가 분신하고, 농민이 음독하고, 소녀가장이 투신할 때에는 발동하지 않는 걸까. 내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와 그들은 감정이입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동일시와 정체성

이런 사회의 인간은 자신을 집단과 동일시함으로써 정체성을 획득한다. 이때 개인은 완벽하게 집단에 종속되어, 권력체의 톱니바퀴가 된다. 정체성의 획득이 자아의 ‘발견’이 아니라 자아의 ‘소외’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집단은 개인이 자신에게 충성을 할 때 그에게 상을 내린다. 하지만 거역하는 자에게는 가혹한 벌을 내린다. 피아를 가릴 것 없이 이게 권력의 일반적 속성이다. 권력은 내부의 이물질을 제거하여 내적 동질성을 극도로 강화하고, 다른 집단에는 강한 외적 배타성을 보인다. 내적 동질성과 외적 배타성이라는 권력의 속성은, 곧바로 개인의 개별적 속성으로 복제된다.

이것은 합리성이 등장하기 전의 전근대적인 인성구조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떠나, 일단 이 낡은 주형에서 벗어나야 한다. 당파성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공공성의 영역’을 인정하면서도 얼마든지 특정 당을 지지할 수 있다. 자기 당이라도 잘못하면 비판하고, 남의 당이라도 잘하면 인정하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가. 그럴 때 비로소 정당들이 건강함을 유지하고, 정치적 소통이 원활해지지 않겠는가.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자세를 지닌 진정한 당원이 아닐까. 제 당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감싸고, 남의 당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공격하니, 정치가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의 이전투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노예의 도덕, 주인의 도덕

‘안티조선’으로 시작된 언론운동은 그 동안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스포츠조선 노동조합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조선일보는 이 사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구석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이 사회 언론의 수준이 얼마나 향상되었는가. 당파적 저널리즘의 폐해는 외려 더 심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조선일보를 견제하는 데 성공했을지 몰라도 새로운 언론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제 언론비평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당파적 저널리즘의 폐해는 또 다른 당파적 저널리즘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떠나 비평의 공정한 기준부터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

푸코의 말대로 권력은 도처에 있다. 정말 중요한 권력은 바로 우리 몸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관계의 망이다. 진짜 억압은 여의도에서 오는 게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 오는 것이다. 악마는 한나라당도 아니고, 열린우리당도 아니다. 조선일보도 아니고 오마이뉴스도 아니다.

악마적인 것은 자기를 둘러싼 인간관계, 다시 말해 당신의 친구들과 나아가 당신 자신이다. 권력은 수많은 거미줄로 인간의 몸을 얽어매어 충성을 강요한다. 사람들은 권력에 충성함으로써 그것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바로 ‘노예의 도덕’이다. 진정한 권력이란 남에게 행사하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행사하는 것이다.

디오게네스의 말대로 제 존재를 배려하고, 저 자신을 다스리는 자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주인이다. 촘촘한 권력의 망을 비집고 다니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도처에서 싸움을 걸어야 하고, 또한 도처에서 걸려오는 싸움에 응해야 한다.

“싸움이, 싸움이 몹쓸 싸움이, 허망하다 말하지 마라.” 내가 벌이는 싸움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의 존재미학이 다른 것보다 더 강하고, 더 유연하고, 덜 폭력적이라 믿는다. 요즘은 하루라도 욕을 먹지 않으면 혀에 바늘이 돋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버티는 나의 뻔뻔함은, 언젠가는 나의 것이 이 사회의 보편적 윤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의 건방짐에서 나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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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초중고교의 구조가 병영을 그대로 본뜬 것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특별한 연구나 성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문 옆에 붙어 있는 수위실은 위병소이며, 운동장은 연병장이고 운동장 중앙 전면에 자리잡은 구령대는 사열대다. 우리네 학교는 민주적 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기존 권위와 질서에 스스로 복속하는 의식을 형성하기에 적합한 공간인 것이다. 한국의 주류 교육계는 학교 구조가 안고 있는 이러한 근본적 문제점에 대해 모르거나 알아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그러한 권위구조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국가 권력과 권위에 충성스런 마름 노릇을 잘해야 될 수 있는 교장은 권위구조가 강고하게 유지될수록 단위 학교에서 봉건영주처럼 군림할 수 있다.

이땅에 근대식 학교를 처음 세운 게 군국주의 일본이라는 점을 돌아보면, 국민 동원체제 아래의 학교 공간으로 병영보다 더 적합한 구조가 없었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작 일본은 패망 직후 곧 ‘국민학교’란 이름을 ‘소학교’로 바꿀 정도의 교육적 양심과 철학이 있었다면, 이땅의 ‘국민학교’는 1990년대에 와서야 겨우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그동안 일왕에게 충성하는 ‘국민’을 길러내는 학교에서 반공, 안보의식에 투철한 ‘국민’을 길러내는 학교로 바뀌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학교는 구조에서부터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대신 그대로 온존시켜 “우리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하고 …”,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따위의 국가주의 의식화의 장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학교에 처음 등교한 날 코흘리개 학생이 선생님에게서 처음 들어야 하는 소리는 ‘가나다라 …’나 ‘1 2 3 4’가 아닌 “앞으로 나란히!”라는 군대식 명령어다. 사회 구성원은 어렸을 때부터 줄서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고, 실제로 월요일 아침마다 병사들처럼 도열하여 부대장(학교장)으로부터 반공, 안보·질서·친미 의식화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국가주의 교육을 주입받고 한 주일을 시작했다.

최근 탈냉전과 사회 민주화와 더불어 학교에서 노골적인 반공·안보·친미 의식화 주입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학교는 여전히 질서의식을 주입하는 장소로 남아 비판적 시민의식 형성을 애당초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학교마다 곳곳에 “기초질서를 지키자!”는 표어를 붙여놓았지만, 구체적으로 기초질서가 무엇을 말하느냐고 물을 때 답변은 궁색하기 짝이 없다. ‘빨간 불에 멈추고, 좌측통행을 하고 …’가 고작이다. 남을 배려하는 자율적 질서의식은 찾아보기 어렵고 강제성이 있을 때만 마지못해 지키는 타율적 질서의식만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 질서의식은 한국사회의 간판 문화가 보여주듯이 기초적 형식미조차 담보하지 못한다.

그러면 학교에서 질서를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자유와 평등이나 인권, 연대와 같은 시민적 가치나 공동체적 가치보다 질서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인가 인류 역사상 질서 중에는 신분질서라는 무서운 질서가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신분을 규정하는 질서였는데, 이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근대적 시민사회는 열릴 수 없었고, 마침내 시민혁명을 필요로 했다. 자유와 평등사상으로 신분질서를 극복하고 태어난 것이 근대 시민사회인데 우리는 21세기 학교에서 여전히 질서를 가장 중요한 가치인 양 강조하고 있다. 왜 자율성과 자발성에 기초한 비판적 시민을 형성하는 대신 사회 구성원들에게 질서의식을 내면화하는, 그리하여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온존시키는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학교에서 비롯되고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오늘날 회자되는 실용주의는 과연 이땅의 학교마다 권위의 상징처럼 버티고 서 있는 구령대만이라도 철거할 수 있는 개혁성을 담보하는 것인가고.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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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값부터 내려놓으시죠"
"음반업자들의 폭리관행이 더 문제다." 四四九

냅스터가 네트워크 창설 1년 만에 가입자 수 7천만이라는 수치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 이제 겨우 2-3년 전의 일이다. 냅스터는 2001년에 법정에서 폐쇄 결정을 받은 뒤 한동안 잠수를 타다가 지난달에야 다시 컴백했다. 하지만 이번엔 유료 사이트라는 낯선 얼굴을 하고 온라인 세상에 등장했다.

▲미국의 파일공유 사이트 넵스터     ©네이버

 

냅스터는 쿠울한 이미지로 변신하여 짠~ 하고 등장했지만 지금의 냅스터 네트워크에는 썰렁한 기운만이 흘러 다닐 따름이다. 예전에는 냅스터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냅스터가 없어도 그만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온라인을 통한 음악의 복제와 전파가 냅스터에 대한 제재를 통해 사라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애당초 드물었다.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지만 냅스터가 유료화 된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즐겁게 MP3를 또 OGG를 저마다의 네트워크를 통해 자유롭게 복제하고 공유하면서 잘들 지내고 있다.

사실 이런 말 자체가 너무나도 상투적으로 느껴질 만큼 현실이 변화하는 모습은 쾌속정 같기만 하다.


▲'카자미디어'      ©네이버

카자[KaZaa]라고 들어는 봤는지 모르겠다.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카자[KaZaa] 네트워크는 2003년 5월 현재 P2P를 구현해주는 카자 프로그램이 전 세계적으로 2억3000만회의 다운로드를 넘어섰다고 한다. 2억 3000만회...... 물론 여기에는 버전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중복 다운도 포함되어 있는 숫자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지금 이 원고를 쓰는 와중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유저들이 카자를 통해 파일을 전파하고 있을까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무려 400만 가까운 친구들이 접속되어 있다. 내가 뭘 달라면 군말없이 집어줄 그 친구들.

카자 네트워크와 관련해서 더욱 재미있는 것은 온라인 네트워크 시대, 글로벌 시대에 걸맞는 이들 회사의 구성이다. 예컨대 법인의 등록은 태평양 남서부의 쪼그만 섬나라인 이름도 귀여운 바누아투(한국말로 하면 ‘우리들의 땅’이란 뜻이다.)에 해 두었고 프로그램의 개발자들은 네덜란드에 살고 있다.

게다가 서비스 서버는 덴마크에, 회사의 운영은 호주에서 하고 있다. 온라인과 카피레프트에 맞서 쌔가 빠지도록 싸돌아다니면서 시비를 걸고 다니는 미국의 음반 업자 협회[RIAA]는 이들을 두고 하루가 다르게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중이다.

이미 음반의 매출액은 30% 가까이 하락하였으며 만일 재수가 좋아 이들을 법적으로 제압한다고 하더라도 그들 뜻대로의 해결점에 이르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소리바다가 죽어 없어질 줄 알았더니 소리바다2로 리로디드 되어 재등장했으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소리바다2가 다시 사라지더라도 소리바다3이 또다시 나타나 디지털 혁명을 완성시킨다는 후문이 있다. 썰렁했다면 유감이다. 쩜프.

사실 온라인상의 MP3 공유에 의해 음반 제조 산업은 적잖은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2-3년 전에 비해 매출액이 거의 반토막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MP3를 나눔정신 하나로 공유해 오던 우리들이 이에 대해 무슨 책임의식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가끔씩 ‘음반이 안 팔리는 것은 표절 붕어 뷁 땐스뽕 저질 음악 때문이다, MP3를 듣는 사람들이 알고 보면 음반을 더 산다, MP3와 음반 판매와는 관련이 없다’며 목청을 높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이 말이 사실일거라고 자신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그런 말에서는 쓸데없는 도덕적 자책의 잔향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금만 오바해서 이야기하자면 MP3를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서 보면 ‘천부인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예 타고난 권리란 말이다. 왜냐구?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가 음반 업자들한테 돌려받아야 할 빚이 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음반 제조업자들은 그동안 순진한 소비자들을 속여서 부당한 폭리를 취해 왔다. 요즘 공씨디 한 장에 얼마 하는가 말이다. 실제로 테이프와 씨디는 제작비용에서 별다른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업자들은 씨디라는 음악 껍데기에 영구성, 뭐 또 잡음 제로, 뭐 또 무슨 음질 해가면서 테이프에 비해 두 배 가까운 높은 폭리를 취해 왔다.

▲    ©네이버

한마디로 소비자를 기만하는 불공정 거래를 해왔다는 뜻이다. 게다가 예전 가수들의 음반을 땡전 한 푼 들이지 않고 씨디로 재발매해서, 또, 만원 얼마, 뭐 이렇게 팔아먹는 것은 폭리중의 폭리였다. 그걸 쥬라기 공원 어쩌구 하면서 무등 태워주던 놈은 또 따로 있다.

 쥬라기 공원 본다고 해서 관객이 부자되는 것도 아니다. 음반 제조업자들은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우선 씨디값부터 반절쯤 후려놓고 다시 시작할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세계 5대 메이저 음반사의 하나인 유니버설 레코드가 음반 가격 30% 인하를 전격 단행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에 대해 동정할 것 하나도 없다. 그들을 걱정하기엔 우리 꼴이 말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찬란함은 모두 우리들 덕택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음반 업자들만 해도 2002년 10월, 씨디 가격 담합을 통해 소비자를 기만하고 폭리를 취했다는 이유로 대략 1억 5천만 불에 이르는 돈을 토해내야 했던 것이다. “가격을 인제서야 내리다니, 이 나쁜...”이 더 정상적인 반응이다.

두 번째. 씨디는 사용이 영구적이라는 명목으로 높은 비용을 소비자로부터 징발해서 음반 제조업자들에게 갖다 바치기도 했는데, 일부 오디오 전문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당혹스럽게도 씨디는 이미 수명이 다 했다는 것이다.

음반 업계는 이미 DVD나 SUPER AUDIO CD쪽으로 오디오 표준을 이동하려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들은 어쩔 수 없이 차세대 표준을 위한 하드웨어를 목돈을 들여 구입해야 한다. 게다가 과거의 씨디 플레이어는 ‘순돌이네 집’에서만 취급 가능한 품목이 되고 결국, 씨디롬 자체는 반영구적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들의 수명은 그에 비해 훨씬 짧기 때문에 씨디의 수명은 이제 거의 끝나간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또 우릴 속여서 폭리를 취해 온 셈이다.

세 번째. 소비자들의 딱한 사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부 비평가들에 따르면 우리들은 이미 MP3와 같은 ‘공짜’ 물건들에 대한 비용을 지불했다는 것이다. 인민들의 기본적인 권리라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비싼 온라인 접속 요금에 이미 비용이 간접적으로 다 담겨 있다는 것이다.

국내의 인터넷 사용자에 대한 통계 자료를 보면 정보검색, 이메일, 오락(음악), 쇼핑 서비스가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위의 서비스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상당한 비용을 정기적으로 제공하면서 온라인에 접속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음반 제조업자들은 온라인 서비스 회사로부터 자신의 이익을 빼앗기고는 엉뚱하게도 힘없는 일반 소비자들을 상대로 그 부족분을 메우려 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4000억 원대에서 2000억 원대로 음반 제조 산업이 반토막 났다고 울상을 짓는 그들 주머니 속에서는 매출 연 3000억원이라는 벨소리와 컬러링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금테 두른 빈 밥그릇은 또다시 소비자를 향해 내밀고 있다.

어쨌든 요즈음 음반 회사들은 다 문 닫는다고 난리도 아니다. 근데 내가 보기에는 한참 더 닫아야 한다. 뭔가 통계의 기준에 차이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정부 통계에 의하면 등록된 음반 제작사의 숫자는 96년 98개에서 2002년에 이르면 무려 938개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들은 IMF의 여파로 전국의 인민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동안에도 표절 붕어 뷁 땐스뽕 저질 음악, 거기에 뇌물을 더해서 자신들의 윤택하고 고귀한 삶을 유지했으며 그러한 지난날에 대한 반성도 없이 소비자들의 주머니에 코를 더욱 집요하게 들이대고서 지금도 킁킁거리면서 뭐가 어떻고 또 뭐가 어떻고 하면서 떠들어대고 있다.

아, 싫다.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음반 제조업자들은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우선 그놈의 가증스런 씨디 값부터 절반쯤 후려놓고 말을 걸어올 일이다. 비록 씨디의 목숨마저도 이제는 가물가물 할 테지만 최소한 ‘유종의 미’는 거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영상미디어센터 이메일진 ACT 5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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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xov 2004-04-27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이프 가격은 얼마에 하면 좋을까.

Xoxov 2004-04-27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긴 나같은 인간은 평생 시디 한장 못사고 디지지..ㅋㅋㅋ

Xoxov 2004-04-27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대략 동의하고 앞으로 아티스트 기타줄 대라고 어쩌고 저쩌고 씨부렁 거리는 씹쎈지들을 경멸하기로 했음.아울러 기타줄이 끊기면 사회안전망 확충부터 주장하고 재랄떠시길.

Xoxov 2004-04-27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것도 있다.소리바다가 없었다면,벅스의 스트리밍 서비스가 없었다면,내가 과연 '슬레이어'를 알았을까?아마 평생 누군지 모르고 죽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