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초중고교의 구조가 병영을 그대로 본뜬 것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특별한 연구나 성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문 옆에 붙어 있는 수위실은 위병소이며, 운동장은 연병장이고 운동장 중앙 전면에 자리잡은 구령대는 사열대다. 우리네 학교는 민주적 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기존 권위와 질서에 스스로 복속하는 의식을 형성하기에 적합한 공간인 것이다. 한국의 주류 교육계는 학교 구조가 안고 있는 이러한 근본적 문제점에 대해 모르거나 알아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그러한 권위구조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국가 권력과 권위에 충성스런 마름 노릇을 잘해야 될 수 있는 교장은 권위구조가 강고하게 유지될수록 단위 학교에서 봉건영주처럼 군림할 수 있다.
이땅에 근대식 학교를 처음 세운 게 군국주의 일본이라는 점을 돌아보면, 국민 동원체제 아래의 학교 공간으로 병영보다 더 적합한 구조가 없었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작 일본은 패망 직후 곧 ‘국민학교’란 이름을 ‘소학교’로 바꿀 정도의 교육적 양심과 철학이 있었다면, 이땅의 ‘국민학교’는 1990년대에 와서야 겨우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그동안 일왕에게 충성하는 ‘국민’을 길러내는 학교에서 반공, 안보의식에 투철한 ‘국민’을 길러내는 학교로 바뀌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학교는 구조에서부터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대신 그대로 온존시켜 “우리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하고 …”,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따위의 국가주의 의식화의 장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학교에 처음 등교한 날 코흘리개 학생이 선생님에게서 처음 들어야 하는 소리는 ‘가나다라 …’나 ‘1 2 3 4’가 아닌 “앞으로 나란히!”라는 군대식 명령어다. 사회 구성원은 어렸을 때부터 줄서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고, 실제로 월요일 아침마다 병사들처럼 도열하여 부대장(학교장)으로부터 반공, 안보·질서·친미 의식화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국가주의 교육을 주입받고 한 주일을 시작했다.
최근 탈냉전과 사회 민주화와 더불어 학교에서 노골적인 반공·안보·친미 의식화 주입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학교는 여전히 질서의식을 주입하는 장소로 남아 비판적 시민의식 형성을 애당초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학교마다 곳곳에 “기초질서를 지키자!”는 표어를 붙여놓았지만, 구체적으로 기초질서가 무엇을 말하느냐고 물을 때 답변은 궁색하기 짝이 없다. ‘빨간 불에 멈추고, 좌측통행을 하고 …’가 고작이다. 남을 배려하는 자율적 질서의식은 찾아보기 어렵고 강제성이 있을 때만 마지못해 지키는 타율적 질서의식만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 질서의식은 한국사회의 간판 문화가 보여주듯이 기초적 형식미조차 담보하지 못한다.
그러면 학교에서 질서를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자유와 평등이나 인권, 연대와 같은 시민적 가치나 공동체적 가치보다 질서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인가 인류 역사상 질서 중에는 신분질서라는 무서운 질서가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신분을 규정하는 질서였는데, 이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근대적 시민사회는 열릴 수 없었고, 마침내 시민혁명을 필요로 했다. 자유와 평등사상으로 신분질서를 극복하고 태어난 것이 근대 시민사회인데 우리는 21세기 학교에서 여전히 질서를 가장 중요한 가치인 양 강조하고 있다. 왜 자율성과 자발성에 기초한 비판적 시민을 형성하는 대신 사회 구성원들에게 질서의식을 내면화하는, 그리하여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온존시키는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학교에서 비롯되고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오늘날 회자되는 실용주의는 과연 이땅의 학교마다 권위의 상징처럼 버티고 서 있는 구령대만이라도 철거할 수 있는 개혁성을 담보하는 것인가고.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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