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알라딘도서팀님의 "[질문 공모 이벤트] 김중만에게 질문하면, 답변과 함께 선물이!"

1)김중만님 당신에게 '사진'은 무엇입니까? 2)김중만님 당신에게 피사체는 어떤 의미입니까? 3)김중만님 예전에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한장의 만족할만한 사진을 얻기 위해 수천수만번(?)의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그러한 작업을 하십니까? 4)김중만님 예술가는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섬세한 감식안을 위해 따로 연마하시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5)김중만님 디지털카메라가 보편화되면서 대중들이 사진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앞으로 사진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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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marius.net/bbs.html

미국에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 스탠포드대학(Stanford University) 같은 연구대학(research university)이외에도, 우리에겐 이름도 낯선 수많은 4년제 칼리지(college)들이 있어서, 작은 규모로 학부교육에만 전념하고 있다. 이런 대학의 교수들은 "(논문)출판 안하면 망한다"(Publish or perish!)는 강박관념에서 조금은 자유스럽고, 대부분의 시간과 정렬을 학생 개개인과 접촉하고 이들을 지도하는데 쓰고 있다. 학생들은 큰 대학에서 느끼는 비인간적인 경쟁 없이, 작은 규모의 커뮤니티에서 인간적인 유대를 쌓아가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

대학의 국제 경쟁력도 좋고 교수들을 연구하라고 들볶는 것도 좋지만, 대학이 연구소와 다른 것은 대학이 기본적으로 대학생을 교육시키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대학생을 비판적인 시민으로 키우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대학생을 예비 교수처럼 키우고 있는가? 교수들과 대학은 이런 문제를 얼마나 심각히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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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이 누군가 했다.홍기빈-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이랑 순간적으로 헷갈렸다.역시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보는 눈을 탁월한 것 같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2년전에 괜찮게 본 책인데-지금 생각하면 다소 깊이가 낮은 것 같지만-그래도 한번 쓰윽 읽어볼만은 하다.하이브리드 세상 읽기.그나저나 린킨파크는 언제나오나?올해 나올때 된 것 같은데.ㅋ

 

ps.간만에 페이퍼를 올리는 것 같다.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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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스크랩] 어린이와 함께 읽는 영상동화 108편

 출처 : 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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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발터 벤야민의 대중매체에 관한 철학

□  발터 벤야민의 대중매체에 관한 철학
* 아래 자료는 강의 내용이 녹취된 자료입니다.
 
심혜련 (철학 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 도  입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우리 사회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있으나 근접하기 어려운 철학자이며 미학자이다. 따라서 단편적으로 이해되고 언급되고 있는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다고 보여진다. 본 강의에서는 그가 대중매체에 관해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 지 사진과 영화를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2. 벤야민의 생애와 저작

벤야민은 1892년 6월 15일 독일 베를린에서 유태인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런데 그가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벤야민이 그 일생에서 지고 가는 사상적 짐이 되었다. 그는 베를린에서의 유년시절을 보냈고 이후 1911-1912년에 걸쳐 독일 남부에 위치한 프라이부르크에서 철학과 문화를 공부하고 베를린으로 다시 오게 된다.

1915년 그는 숄렘과(각주1) 교분을 갖기 시작했는데 그와 벤야민은 사후 출간된 [벤야민 전집]을 발행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벤야민은 그를 알게됨으로써(이 사람도 유태인) 그 스스로가 유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지 못했던 유대 사상을 체계적으로 접하게 된다. 특히 유대교의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는 그의 사상적 한 축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그의 사상이 신비주의적 요소를 띠게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벤야민은 1917년 결혼하고 스위스 베른에서 계속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독일 낭만주의 예술 비평 개념]이라는 제목으로 학위논문을 수여받는다. 1923년 벤야민 사상의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하는 아도르노(T. Adorno)를 알게된다. 아도르노 역시 벤야민 사후에 숄렘과 같이 전집 간행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벤야민의 지인이다.

1923년에는 교수자격 취득논문으로 [독일 비극의 기원]을 제출했으나 당시 프랑크푸르트 대학은 보수적 학풍을 이유로 벤야민의 논문을 거절했다(각주2).

1924년에는 카프리 섬에서 장기간 거주하게되었는데, 이때 그는 브레히트와 라시스를 알게 된다. 라시스는 여류감독으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벤야민은 그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벤야민의 사상은 이전에 쓰여졌던 논문과는 구분되는 후기 예술사상이 정립되기 시작한다. 이전의 사상이 문학적이고 문화사적이었다면, 이후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고, 마르크스주의 예술을 형성하고 있다.

벤야민의 저술은 대체로 체계적인 긴 논문이라기보다는 짧은 형식의 글들이 많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그가 생계를 위한 글쓰기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27년에는 {파사겐베르크}를 착수하기 시작했으나 완성되지 못한 원고로 남아있다. 이 책은 매우 두꺼운 원고로 되어 있는데, 이 책의 특징은 여기서 자기 스스로의 글은 남기지 않은 채, 오히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수많은 '인용문'들로만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정리되지 않은 원고이기는 하지만 그의 사상적 진수를 엿볼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1928년에는 {독일비극의 기원과 일방통로}를 출판했고, 1933년에는 나치를 피해 파리로 이주하게 된다. 벤야민은 개인적으로 파리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파리라는 도시는 그에게 '도시'로서 다가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욕구, 시련, 만족들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였다(각주3). 여기서 아도르노와 벤야민간의 대중문화에 관한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아도르노가 대중문화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면, 벤야민은 매우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각주4).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연구소가 뉴욕으로 가게되고, 집으로부터의 원조가 끊어짐으로써 벤야민은 경제적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예술 이론에 대한 완성을 이루었다. 1926년 그의 대표작 {기술 재생산 시대의 예술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좀 더 미루기로 한다.

1940년에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스페인으로의 남진이 이뤄지자, 아도르노를 통해 벤야민은 미국으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스페인 국경에서 결국 출국을 거절당하게 된다. 이때 벤야민이 의도적으로 몰핀을 과다 복용하고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 그의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각주5).

3. 벤야민의 사상은 어떻게 수용되었는가

68운동 이전까지 벤야민은 유럽 지성인들에게는 잊혀진 존재나 다를 바 없었다. 이런 데에는 그가 대학과 아무런 연계가 없었다는 점이 한 몫하고 있다. 그러나 68운동 이후에 다른 이론적 대안들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벤야민의 이론이 재발견되었다. 특히 후기 벤야민 이론이 갖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적 성향과 문화나 예술에 대해서 잘 다루지 않았던 부분들을 그의 이론에서 찾음으로서 문화·사회운동의 이론적 대안으로서 벤야민이 읽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벤야민의 이론은 유럽사회에서 새롭게 수용되었고,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하버마스는 "벤야민에서 우리의 정신이 갈라진다"라고(각주6) 언급할 만큼 유럽 사회에서 벤야민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4. 벤야민의 대중 문화에 대한 이론적 고찰

이상이 벤야민의 생애와 주요 저작들, 그리고 유럽 사회에서 차지하는 그의 사상적 비중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시 논의의 중심인 대중문화에 대한 이론적 고찰로 돌아가기로 하자.

'대중문화'라는 주제는 영국의 버밍햄(Birmingham) 학파에 의해 이론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후 근 30년 간 대중문화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어왔다. 논의의 중심은 '그것이 갖고 있는 사회적 역할에 관한 것이었는데, 대중문화가 일반적 지식이나 '인식을 넓혀주는 새로운 자료원'인가, 아니면 대중을 속이는 '조작의 도구'인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논의가 진행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지금의 논의되고 있는 논의 구조가 그들에게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아도르노의 대중문화이론과 벤야민의 이론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4-1. 기술 재생산과 아우라의 몰락

벤야민은 대중문화를 철학적·미학적 분야에서 학문적 주제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그가 파리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였는 지를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7). 1930년대 당시 많은 이론가들이 대중문화의 역할과 의의를 과소 평가하여 논의조차하지 않았던 점과 매우 대조되는 사실이다. 그는 대중문화를 하급문화로 차치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관한 심도 깊은 연구를 진행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과정은 대중문화가 갖고 있는 현실성, 영향력을 문화적 흐름 속에서 읽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벤야민 사상의 주된 개념은 [기술재생산]과 [아우라의 몰락]으로 구성된다. 기술 재생산 시대에 갖고 있는 특징을 그는 [아우라의 몰락]에 있다고 보고 있다. '아우라'는 원래 종교적 개념(유대교)이지만, 이것이 철학적으로 전화된 것은 벤야민에 의해서이다(각주8).

4-2. 아우라의 의미

벤야민에게 있어 아우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예술작품이 갖고 있는 객관적 특성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작품을 수용자가 갖게되는 주관적 경험 요소이다. 객관적 특성으로서의 아우라는 기술 재생산 시대 이전의 예술작품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술 재생산 시대 이전에는 재생산, 복재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원본성'을 의미한다. 또한 한번 생산하면 끝나고 비록 다시 똑같은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결코 같은 그림이 될 수 없다는 '일회성'도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기술 재생산 시대 이전에는 복제된다고 하더라도 '복제된 것'과 '진품'은 확연히 구별될뿐더러 그 의미조차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시되는 것은 작품의 '진품성'이다. 전통적 예술작품이 갖고 있는 아우라는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이다. 이것은 바로 예술작품의 일회적인 현존재를 규정하며, 바로 아우라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것들만으로 아우라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우라는 객관적 속성 외에도 인간의 경험과 주관에 의해 형성되는 주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시대 아우라는 '귀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때문에 종교적 권위를 보장받아야 하는 중세시대에는 종교적 차원에서 이것을 사용하였다.

성당에서 마리아 상을 생각해 보자. 이 작품은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을 갖고 성당에 서 있다(객관적 속성). 그러나 성당으로 들어가면 성스러운 그림들과 오묘한 빛깔을 그려내는 스테인드글래스로 둘러 쌓여 있고, 장중한 파이프 오르건 음악이 흐른다. 이 공간에 한 기도자가 들어간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공간적 분위기는 마리아 상 앞에 있는 수용자에게는 마리아 상이 단순히 하나의 물리적 존재로서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수용자가 신비적·종교적 차원의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는 존재로서 다가오게 된다. 그는 아마 마리아가 현현하였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종교적·제의적 가치가 전통적 예술작품이 갖고 있는 모든 아우라의 근본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아우라에 관해서 벤야민은 매우 서사적인 기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름날 햇볕이 빛날 때 먼 등성이에 있는 나뭇가지에 햇볕이 반짝이고, 이것을 보면서 자신이 무언가를 느낄 때, 이것이 바로 아우라이다" 이때 아우라는 자연과 관찰자간의 지각 가능성을 의미한다. 또한 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낄 때 다시 되돌아 볼 수 있는 것으로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감정의 상호교류성과 상호 관련성으로서의 아우라를 의미한다.

4-3. 기술 재생산 시대와 아우라의 몰락이 갖는 의미

아도르노적인 입장에서(대중문화 비판적 입장 ― 옮긴이 주) 벤야민을 수용하는 사람은 아우라의 이중성 가운데 주관성을 강조하면서 아우라의 몰락을 비판하고 있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객관적 특성으로서 아우라를 강조하고 있다. 기술 재생산 시대에서는 예술작품이 수 없는 복사가 가능해 졌을 때, 전통적 예술작품이 갖고 있었던 아우라는 몰락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매체 미학 논쟁의 양 대 줄기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가 벤야민에게 있다고 본다. 현대 미학논의인 매체미학에서는 벤야민에게 아우라의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아우라의 몰락은 무엇인가? 객관적 특성으로서는 기술 재생산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형식의 예술, 원본의 부재, 일회성이 아닌 '다수성' ― 사진 및 영화는 진품성을 묻지 않으며(대량복제가 가능하기 때문) 따라서 기술 재생산 시대에 아우라는 몰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관적 입장을 보면, 경험으로서의 아우라이기 때문에 아우라의 몰락과 더불어 기술 재생산 시대의 예술작품을 분석하면서 이것의 특징만을 분석한 것은 아니다.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이 없어진 것 뿐 아니라, 기술 재생산 시대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지각방식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전에는 '집중성'을 요구했다면, 이후 나타나는 사진, 영화, 광고에서는 촉각적 지각과 정신 ― 예술작품에 따라서 그것을 이해하는 인간의 지각구조의 변화도 함께 요구한다고 보고 있다. 아우라의 몰락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기술 재생산은 해체되어야 한다.

벤야민은 기술이 새로운 예술을 현실화시키고 변화시키는 수단이 아닌 매체 그 자체로 보고 있다. 기계 자체가 새로운 예술을 형상화 할 때 계기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아우라의 몰락은 벤야민에게 기술 재생산 시대의 긍정적이고 필연적인 현상, 예술일반의 몰락이 아닌 새로운 예술의 시작(대중예술)인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뜻을 갖고 있는 아우라의 몰락은 먼저 예술의 가치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생산의 논리에 따라 더 이상 예술작품은 성당이나 궁전, 귀족의 정원에 숨어져 있는 '은닉의 대상'이 아니다(예술작품의 민주성 확보). 그리고 예술의 자율성에 의해 탈신비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예술의 기능변화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예술이 종교적 기능을 수행하였다면, 오늘날에는 정치적·오락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더 이상 예술이 숭배의 대상이 아닌 유희의 대상으로 전환된 것을 의미한다.

5. 구체적 예

5-1. 사진

사진은 예술작품을 향한 민주적 접근 가능성을 확대시켰다.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을 접근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벤야민은 사진의 등장을 전통적 회화와의 관계에서 '투쟁적' 존재로 상정하고 있는데, 이는 {사진의 작은 역사}라는 책에서 당시 사진에 관한 논쟁이 '예술이냐 아니냐'라는 논쟁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고 진정으로 물어야 할 것은 사진으로서의 예술(복제품)이 아니라 예술로서의 사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벤야민이 사진의 등장에 부여했던 의미는 예술작품의 기계적 복제 가능성이다. 이것은 예술작품을 향한 민주적 접근 가능성의 확대를 의미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어떤 예술작품이 있을 때, 이것은 예전에는 늘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 사진이 가져온 예술작품의 접근성은 매우 확대되게 되었다. 예술작품에 대해 가질 수 없었던 막연한 두려움, 신비감, 이를 통한 아우라적 권위가 사진의 등장과 더불어 흔들리게 된 것이다. 사진의 등장으로부터 예술작품의 탈아우라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은 사진을 이야기하면서 크게 초기 사진과 후기사진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예술작품의 기계적 복제 가능성으로 인해 예술작품으로서의 사진은 몰락했으나 아우라적 가능성은 있다고 봤다. 초기 사진에 남아있는 아우라의 잔재는 초기 사진이 갖는 기술적 한계에 기인한다.

당시에는 사진을 찍을 때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고 또한 인공조명기가 없었기 때문에 공동묘지 같은 을씨년스러운 공간이 사진관으로 사용되었다. 이 곳에서 여러 시점들의 모습이 하나의 평면에 대입된 것이 이 당시 사진이라는 것이다. 당시 사진의 이러한 모습은 전통적 회화에서 갖고 있었던 미묘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고 보고 있다. 초기 사진의 대상은 인간의 얼굴이었다. 따라서 사진이 등장하면서 전통 회화의 희생자가 되는 것은 바로 초상화일 수밖에 없었다. 회화가 갖고 있던 초상화의 기능을 사진이 빼앗은 것이다. 초기 사진이 담아내는 얼굴, 바로 여기에는 기술적 한계로 인해 씌워질 수밖에 없었던 아우라적 모습이 담겨있다고 벤야민은 보고 있다.

그러나 후기 사진 시대로 접어들면서 아우라는 몰락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몰락은 19세기 프랑스의 사진작가 아뜨제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다. 아뜨제는 '텅 빈 거리', '스산한 거리'를 주로 자신의 사진에 담아내었는데, 기술의 발달로 인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은 탓에 그의 사진에는 빛의 미묘함이 제거된 구분성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인간만의 얼굴을 담아내는 사진의 역할로부터 벗어나. 일상적인 모습들을 담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사진 속에 담겨져 있던 아우라는 제거되고 숭배적 가치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벤야민은 아뜨제로부터 진정한 아우라의 몰락이 시작됐다고 말하고 있다. {작은 사진의 역사}에서 벤야민은 아뜨제의 사진을 구체적으로 "아우라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사라지고 현실에 덧칠된 아우라의 모습을 제거했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아뜨제로부터 아우라적인 대상이 진정한 해방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5-2. 영화

벤야민에게 있어 영화는 새로운 미학적 대상이었다. 영화의 등장으로 벤야민이 주목한 것은 대중적 수용이라는 형식이었다. 이전의 예술작품은 대중적이지 않았지만 영화는 그 속성상 대중적 수용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목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영화는 곧 '대도시의 등장'을 의미하고, 또한 '영화관'은 대중 다수가 이용할 수 있는 '놀이공간'이라는 점이다.

개인적 수용과 예술작품에 대한 집중은 동일화 될 수 있지만(침잠과 집중을 통해 예술작품에 빠져드는 것) 비판적이기 위해서는 그 작품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필요성이 있다. 대중적 수용은 비판적 계기를 확장시키는 방법으로 그는 받아들이고 있다(이 점에서 아도르노와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 정리자 註). 벤야민 시대의 다른 학자들이 영화가 갖고 있는 '대중 조작적 측면'을 고민했을 때, 벤야민은 이것이 오히려 대중비판성을 확보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대중에 대해 스며있는 벤야민의 유토피아(대중에 대한 믿음)를 엿볼 수 있다(각주9).

벤야민의 영화이론은 기술 재생산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지각작용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의 예술작품이 침잠적·집중적 태도를 요구했다면, 기술 재생산 시대에는 정신 오락적·분산적 지각을 요구한다는 차이를 지닌다. 이런 지각작용이 가장 적합한 분야가 바로 영화인 것이다.

정신 오락적·분산적 체험에서 중요시한 것은 영화에서의 몽타주 기법이다. 영화등장 이전, 연극과 문학에서는 논리적이고 연대기적으로 시·공간이 배열되었다. 그러나 몽타주 기법의 도입으로 인해 비논리적이며, 또한 시·공간에 대해서 임의적인 재배열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기에 당연한 구조 같지만, 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혁명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진은 정적이지만 영화는 동적이다. 기차의 발명되고 그리고 기차 여행을 통해 이미 사람들은 파노라마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당시 예술은 이런 신비한 경험을 담아낼 수가 없었다. 요컨대 체험은 이미 동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예술은 이것을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로지 영화만이 이것을 담아낼 수 있었다. 기차여행을 통해 얻은 경험을 영화가 담아낸 것이다.

몽타주 기법은 관객에게 '쇼크'를 줄 수 있다고 벤야민은 말하고 있다. 이 쇼크는 그가 말하는 새로운 지각 중 일부로서 텍스트로부터의 '거리두기'를 유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영화에 몰입되지 않으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식자층만이 작품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그들과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할 수 있음을 강변하고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진정한 미적 향유가 기술 재생산 시대의 새로운 지각 요구로 인해 가능해 진 것이다. .

6. 벤야민 고찰이 갖고 있는 의미

벤야민의 사상이 현대 사회에 던져주는 의미는 매우 크다. 다른 연구자들과는 달리 대중문화 안에서 대중문화를 고찰하려고 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안고 있는 폭발적인 힘을 그는 인정하고 있다(각주10). 그는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해서 이들이 갖고 있던 대중들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프롤레타리아를 스스로가 지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고급문화를 향유하려는 이중적 태도(멜랑꼴)를 갖고 있다고 일침을 놓고 있다. 대중문화에는 큰 힘이 있음을 인정하고 오히려 역으로 교육적인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주장이 바로 벤야민의 사상이다. 그는 이 점을 가장 잘 활용한 영화가들로 러시아의 아이젠슈타인과 미국의 찰리 채플린을 꼽고 있다.

이후 에코가 대중문화에 대한 입장을 두 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부정적인 입장, 다른 하나는 대중문화 안에서 분석하려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 중 후자의 선구자가 바로 벤야민이다. 그리고 현대에서는 컴퓨터라던가 다양한 영상매체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다양한 영상매체가 갖고 있는 영향이나 미학적·철학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루는 것이 매체미학이며 여기의 선구자가 벤야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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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정치연구회(ckps@ckps.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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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아 료타르는 학창시절 마르틴 하이데거를 직접 보고 '경악'을 했다고 술회했다. 초특급 두뇌에 초보수적 성향이 결합된 노 철학자의 형상이 괴물로 보인 모양이다. 한스 제들마이어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나치에 협력한 전력을 가진 노 철학자 하이데거처럼 제들마이어 역시 한때 나치 이데올로기와 연관을 의심받아 잠시 대학을 떠나야 했다.

<중심의 상실>에는 이 문화보수주의자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예술사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은 '모던'에 대한 입장. 제들마이어는 현대예술을 낳은 '모던'의 시대정신을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그 비난은 현대예술을 '퇴폐예술'이라 부르며 경멸했던 나치를 연상시키나, '인간성의 상실'을 한탄하는 그의 비난은 어디까지나 휴머니즘, 곧 보수적 휴머니즘의 표현으로 봐야 한다.

꿈을 읽는 프로이트처럼 제들마이어는 "시대의 꿈"인 예술에서 모던의 병적 '징후'를 읽는다. "고차원적인 정신상태를 희생시켜 얻은 한층 저하된 정신상태의 비대증." 이를 그는 "중심의 상실"이라 부른다. 잃어버린 그 중심은 신. 모던은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는 미적, 윤리적 이상을 잃어버렸다. 이에 대한 처방은 "새로운 상태 안에서 인간의 영원한 상을 재형성"하는 것이다.

주로 건축을 중심으로 모던의 탄생과정을 밝히는 이 책의 백미는 시대의 주요한 예술적 과제가 정원→기념물→미술관→극장→전시장→'기계의 집'의 건축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앞부분이다. 과거에 주요한 과제를 담당한 것은 교회건축이었다. 성당은 건축·조각·회화를 아우르는 "통합예술사상"의 구현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예술에 의미를 주던 이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예술은 각각 자율적인 장르로 원자화하고, 이는 우연히도 모던의 인간들, 곧 전통과 고향에서 분리되어 떠도는 자율적 단자들을 닮았다.

이 '자율성'이 바로 모던의 징후를 낳은 원죄다. 그 대가로 현대인은 "신을 닮은 인간"이라는 미적, 윤리적 이념을 잃는다. 현대예술에서 인간은 인간 이하로 내려간다. 그 속에서 인간은 동물이 되고, 유기체 이전으로 돌아가 기계를 닮는다. "예술의 비인간화." 이미 오르테가 이 가세트도 모던 예술에 같은 진단을 내린 바 있다. 다만 가세트는 같은 보수주의자이면서도 제들마이어와 달리 이 비인간화된 모던의 예술을 환영했다. 엘리트에게만 이해되는 예술이기 때문이었다.

이 책을 읽지 않고 모던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모던 예술의 특징과 그 탄생에 대한 그의 묘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다만 그에 대한 주관적 평가만은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눈에 거슬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모던 이전을 그리워하는 이 문화적 보수성이 역설적으로 모던 이후를 내다보는 진보성이 된다면 현대예술의 비인간성에 대한 그의 보수적 비판은 모던 예술의 반인간주의에 대한 포스트모던 예술의 비판을 선취하고 있다. 우연일까?

진중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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