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아 료타르는 학창시절 마르틴 하이데거를 직접 보고 '경악'을 했다고 술회했다. 초특급 두뇌에 초보수적 성향이 결합된 노 철학자의 형상이 괴물로 보인 모양이다. 한스 제들마이어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나치에 협력한 전력을 가진 노 철학자 하이데거처럼 제들마이어 역시 한때 나치 이데올로기와 연관을 의심받아 잠시 대학을 떠나야 했다.

<중심의 상실>에는 이 문화보수주의자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예술사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은 '모던'에 대한 입장. 제들마이어는 현대예술을 낳은 '모던'의 시대정신을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그 비난은 현대예술을 '퇴폐예술'이라 부르며 경멸했던 나치를 연상시키나, '인간성의 상실'을 한탄하는 그의 비난은 어디까지나 휴머니즘, 곧 보수적 휴머니즘의 표현으로 봐야 한다.

꿈을 읽는 프로이트처럼 제들마이어는 "시대의 꿈"인 예술에서 모던의 병적 '징후'를 읽는다. "고차원적인 정신상태를 희생시켜 얻은 한층 저하된 정신상태의 비대증." 이를 그는 "중심의 상실"이라 부른다. 잃어버린 그 중심은 신. 모던은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는 미적, 윤리적 이상을 잃어버렸다. 이에 대한 처방은 "새로운 상태 안에서 인간의 영원한 상을 재형성"하는 것이다.

주로 건축을 중심으로 모던의 탄생과정을 밝히는 이 책의 백미는 시대의 주요한 예술적 과제가 정원→기념물→미술관→극장→전시장→'기계의 집'의 건축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앞부분이다. 과거에 주요한 과제를 담당한 것은 교회건축이었다. 성당은 건축·조각·회화를 아우르는 "통합예술사상"의 구현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예술에 의미를 주던 이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예술은 각각 자율적인 장르로 원자화하고, 이는 우연히도 모던의 인간들, 곧 전통과 고향에서 분리되어 떠도는 자율적 단자들을 닮았다.

이 '자율성'이 바로 모던의 징후를 낳은 원죄다. 그 대가로 현대인은 "신을 닮은 인간"이라는 미적, 윤리적 이념을 잃는다. 현대예술에서 인간은 인간 이하로 내려간다. 그 속에서 인간은 동물이 되고, 유기체 이전으로 돌아가 기계를 닮는다. "예술의 비인간화." 이미 오르테가 이 가세트도 모던 예술에 같은 진단을 내린 바 있다. 다만 가세트는 같은 보수주의자이면서도 제들마이어와 달리 이 비인간화된 모던의 예술을 환영했다. 엘리트에게만 이해되는 예술이기 때문이었다.

이 책을 읽지 않고 모던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모던 예술의 특징과 그 탄생에 대한 그의 묘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다만 그에 대한 주관적 평가만은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눈에 거슬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모던 이전을 그리워하는 이 문화적 보수성이 역설적으로 모던 이후를 내다보는 진보성이 된다면 현대예술의 비인간성에 대한 그의 보수적 비판은 모던 예술의 반인간주의에 대한 포스트모던 예술의 비판을 선취하고 있다. 우연일까?

진중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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