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솔로중에

유승준만큼 노래잘하고

춤잘추고 잘 생긴 가수가

한국에 있을까?

비와 세븐을 합쳐도

유승준 절대 못 따라간다.

http://news.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200608/19/jes/v13737338.html?_right_popular=R10

결론:승준이는 넘 착하고 마음이 여리다.좀 더 건방져지기를.100분 토론에 나온 김기덕 봐라.얼마나 보기 좋냐?ㅋㅋㅋ

이하 진중권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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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1986년 2월의 어느 새벽. 나는 군용열차 안에 앉아 있었다. 이놈의 기차는 재미있게도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다시 앞으로 가기를 반복한다. 창문은 차단막으로 가려져 있어,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종잡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병력을 떨어뜨려놓으며 달린 지 10시간. 드디어 ‘내릴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기차가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심하게 덜컹거린다. 철교. 꽤 길다. 이렇게 긴 철교는 한강에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곳은 서울! 뛸 듯이 기뻤다.

용산역. 노랗고 뿌연 나트륨 등 아래로 호송을 맡은 하사관의 뒤를 따라 더플백을 지고 플랫폼 위를 걷는다. 이때 내리지 못한 아이들이 차단막을 슬쩍 들추고 그 조그만 틈으로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왈칵 눈물이 난다. 불쌍한 녀석들. 걔들은 거기서 더 북쪽으로 가야 한다. 서울의 북쪽이라면 전방밖에 없다. 요즘도 길에서 가축을 운반하는 트럭을 보면 그때 그 열차가 생각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끌려가는 신세야 어차피 마찬가지가 아닌가.

서울에 떨어졌다고 팔자가 펴는 건 아니다. 대기실 안으로 족히 190cm는 되는 건장한 몸뚱이 하나가 들어온다. 검은 베레를 쓴 공수부대 하사관이 명단을 들고 이름을 부른다. 이름이 불린 신병들은 “예!”라고 외치며 스프링처럼 자리에서 튀어 일어난다. “따라와!” 이번엔 가축 호송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도살장행이다. 대기실 문을 나서며 검은 베레의 사내가 그 날카로운 눈으로 슬쩍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 툭 던진다. “너희들은 이제 죽었다.”

군대가 많이 좋아졌다 하나, 여전히 주거환경이 썩 좋은 동네는 못 된다. 나야 팔자가 좋아 서울 한복판 국방부에 떨어졌지만, 그 ‘천국’의 일상도 그리 행복하지는 못했다. 처음으로 내무반이라는 곳에 들어가니, 마침 반쯤 미쳐버린 병장 하나가 졸병 둘을 바닥에 엎어놓고 쇠로 된 야전삽으로 엉덩이를 마구 난타하고 있었다. 세상에, 군대의 천국은 고문실이었던 것이다. ‘오, 주여, 내 앞에 무슨 시련을 준비해놓고 계시나이까…’

졸병 시절, 정말 무서웠다. 이렇게 공포를 체험한 사람들은 이와 연관된 사안 앞에서는 이성을 잃는 모양이다. 솔직히 나는 유승준이 왜 입국을 거부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가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은 지극히 합법적인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인정하고, 비양심적 병역거부는 솎아내면 될 일. 양심도 아니고, 비양심도 아니고, 그냥 군대 안 갈 형편이 되어 안 가는 게 왜 비난의 대상이 되며, 심지어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전인민의 공인화? 가수는 공인이 아니며, 연예질은 공직활동이 아니다. 유승준이 어디 출마하러 나오는가, 아니면 청와대의 전화를 받고 입각하러 들어오는가? 그냥 연예활동을 하겠다는데, 그걸 왜 막는가? 물론 팬들에게 ‘군대에 가겠노라’고 거짓말한 것은 문제겠지만, 이 국방색 사회에서 군대 안 간다고 말하면 어디 살아남을 수나 있는가? 따라서 병역의무를 하겠다던 그의 약속도 실은 강요된 것이다.

이중국적으로 병역의무를 피해가는 것을 혹 윤리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을지는 모르겠다. 비난할 자 마음대로 비난하라. 하지만 그 차원을 넘어 거기에 법적, 제도적 제재를 가하는 것은 분명히 도를 지나친 것이다. 심지어 인권침해의 소지마저 있다. 나는 이런 무지막지함이 싫다. 한 개인에게 안 해도 될 일을 굳이 하라고 공동체 전체가 나서서 강요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올바른 의미의 평등이 아니다.

군대문제만 나오면 왜들 그렇게 흥분하는가? ‘평등’을 얘기하는 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평등’이 곧 빨갱이를 의미하는 사회에서 평등을 얘기하는 안전한 방식. 그게 바로 병역의 평등만 외치는 것이다. 병역의무, 그것은 저 지배자들마저 ‘신성하다’고 늘 주장하지 않는가. 이 평등은 저들에 의해 유일하게 허용된 평등. 이 때문에 민초들은 이 사회 속에서 받은 그 모든 정치적, 경제적 차별의 분노를 거기에 실어 폭발적으로 발산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불쌍하다.

진중권/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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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배두나의 해구나.

린다린다린다에 이어 괴물 대박과

책까지..얼마전에는 건국대에 붙었다던데.

걍 최강희처럼 학교 확 때려치우지 뭘 또 다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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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그는 왜 괴물과 싸우나
[OSEN 2006-08-19 08:11]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괴물과의 사투

[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우리나라 사람들은 숫자에 약하다. ‘1000만’ 관객을 ‘단 21일만’에 돌파한 괴물의 괴력에 혀를 내두르며 너도나도 ‘괴물 보자’고 달려가는 지금의 현상은 숫자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것은 괴물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숫자라는 괴물에게 쫓기는 형국이다. 괴물을 보지 않으면 수준 낮은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 어딜 가도 화제가 되는 그 이야기에서 소외될 것 같은 두려움. 결과적으로는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비주류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그 기저에는 존재한다.

그 두려움은 일반관객들만의 것이 아니다. 전문가 집단이라고 하는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개봉하기 이전부터 날아온 ‘영화제에서의 호평’이라는 외신은 전문가 집단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기대감이 대부분이었겠지만 한 편으로는 강박적인 두려움도 한 몫 했다. 그저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면 그런 두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호평을 받았다면 그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봉준호 감독의 작품 앞에는 새로운 수식어가 붙는다. ‘대중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작품’, 블록버스터이지만 ‘의미 있는 블록버스터’. 여기서 ‘대중적’이라는 수식어가 주는 힘은 기자들에게 지대하다. 모두들 달려가 보는 영화에 적어도 전문가인데 한 마디 곁들여야 전문가로서 소외 받지 않는다는 의식 때문이다. 이렇게 전문가 집단이 여기저기서 강박적으로 쓴 기사들은 온통 매체들을 뒤덮는다.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는 ‘괴물’의 존재감을 느낀다. ‘보지 않으면 수준이 떨어진다는’ 이 이상한 의식의 괴물이 우리 마음 속의 한강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식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영화 ‘괴물’ 속에 등장하는 괴물의 탄생처럼, 우리 의식의 한강 속에 누군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한 것은 아닐까.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부터 우리를 들뜨게 했던 수치들, 수출목표, 아시아 몇 위라고 하는 GNP, GDP 수치, 툭하면 등수를 매기는 경제지표들에서부터, 올림픽 메달 수와 월드컵 몇 강이라는 스포츠의 수치들, 그리고 그 저변에 죽 깔려왔던 성적표와 등수와 점수로 일관되는 입시교육, 그로 인해 의식화된 엘리트주의. 그 소수에 들기 위한 안간힘들…. 그렇게 숫자로 대변되는 소수엘리트주의라는 포름알데히드는 우리 의식 속에 괴물을 키워왔던 건 아닐까. 포름알데히드 방류에 난색을 표하는 김의 모습은 우리가 숫자라는 괴물에 포획되기 이전, ‘이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라며 망설였던 그 때를 생각나게 한다. 그럴 때 입시교육의 선봉에 서야 했던 선생님들은 이런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 “인생은 길다. (지금 몇 년은 짧다.) 보다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지자.” 저 영화 속의 더글라스 부소장이 “한강 큽니다,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집시다”라고 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 마음 속에 자라난 숫자라는 괴물은 백주대낮에 영화가를 습격해 아수라장을 만든다. 전국 1400여 개의 상영관 중 620개를 싹쓸이한 것이다. 거의 영화관 2개 중 하나는 괴물을 틀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괴물의 등장 이면에는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뉴스는 연일 괴물의 기록행진, 그 선정적인 수치보도에만 열을 올렸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백주대낮에 버젓이 괴물이 등장(사실 괴물은 과거에도 있었으나 그 실체는 밤에 가려져 있었다)하면서 그간 그토록 괴물의 실재를 호소하며, 자신들이 겪은 상처를 토로하는 영화인들도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피해자 가족들 중에는 김기덕 감독도 있었다.

괴물의 실재와 딸 현서의 생존을 토로하는 박강두를 이상하게만 보는 것처럼, 김기덕 감독의 발언은 곡해됐다. 김기덕 감독은 말을 극도로 아꼈고, 그러다 보니 해석이 분분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과거 10년 동안 12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총 관객이 100만 명이 되지 않았던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그것도 해외에서는 각광받는 영화가!). 그것은 마치 박강두네 가족이 그 한강변의 매점으로까지 떠밀려 내려온 사연과 비슷하다. 박희봉이 아무리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떠들어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쿨쿨 잠만 잘 테니. 오히려 수치를 들어 얘기하면 이해가 될까. 제목 - 괴물 : 활(김기덕 감독의 이전 작품). 개봉관수 - 620 : 1 관객수 - 1000만+∝ : 1398명! 그는 극장이 자신의 영화를 틀어주지 않는 현실을 통탄했다.


그런데 김기덕 감독이 나서서 수치라는 괴물과 싸우는 방식은 영화 속 강두네 가족의 경우처럼 여러모로 실패의 요소를 안고 있다. 가장 첨예했던 발언은 영화 ‘괴물’에 대해 “우리나라 관객 수준과 영화 수준이 최고점에서 만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의 해석을 두고 “우리나라 관객 수준이 낮다는 것이냐”, 혹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수준이 높다는 것이냐”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뒤늦게 김기덕 감독은 ‘최고점’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으면서 그 말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뉘앙스를 전달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의 발화점은 높고 낮다는 의미의 해석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수준’이라는 단어에 있다. 그 단어는 저 마음 속 은신처에 숨어있던 괴물을 꿈틀대게 만들면서 저마다 분분한 해석을 하게 만든다.

김기덕 감독의 이 발언에는 함정이 있다. 그 발언을 긍정적으로 읽어 이 영화가 최고점에서 관객과 만났다고 해석한다면 스스로의 수준을 높이는 결과가 된다. 하지만 반대로 그 발언을 부정적으로 읽는다면 스스로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물론 김기덕 감독은 “괴물은 훌륭한 영화”라고(100분 토론에서) 함으로써 스스로의 수준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00분 토론에 나와 편중된 수치게임과 사투를 벌이는 인물들(김기덕 감독, 강한섭 교수)은 저 영화 속 박강두 가족처럼 무기력해만 보인다. 그들은 영화 속 강두네 가족처럼 각자의 얘기만 할 뿐, 어떤 연대의식을 전혀 갖지 않는다. 특히 강한섭 교수는 “그 부분은 김기덕 감독님이 해결하시고….”라는 식으로 각자의 선을 그어놓는다.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입장만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며, 강한섭 교수는 이해할 수 없는 권위적 태도를 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저 마음 속에 굳게 뿌리내린 괴물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영화 ‘괴물’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치 강두네 가족이 괴물과의 사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강두 가족의 괴물과의 사투에서 주목해보지 않은 한 인물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영화 끝 무렵에 느닷없이 나타난 행려자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괴물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인물은 바로 그이다(괴물은 화살 한방으로 죽진 않는다. 여기에는 휘발유와 불이 필요했다.). 그는 괴물에게 어떤 피해를 입은 적도 없는 방외인이다. 그는 이 사태의 이해 당사자가 아니다. 이 인물은 도대체 누구며 왜 갑자기 등장한 것일까.

이것은 갑작스런 봉준호 감독의 개입이랄 수밖에 없다. 봉준호 감독의 사회인식은 어둡고 비관적이며 냉소적이다. 그는 전혀 힘없는 한 인물을 집어넣어 괴물을 해치운다. 이것은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냉소적 시선이자 스스로 만들어 놓은 괴물을 없애야만 한다는 책임감의 발로다. 그런데 괴물이 죽었으니 강두네 가족의 승리일까. 여기서 봉준호 감독은 사실 괴물의 죽음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강두네 가족이 원한 것은 괴물의 죽음이 아닌 잡혀간 현서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괴물은 죽었지만 현서 역시 구할 수 없었다. 만일 이 영화가 작금의 영화현실에 어떠한 정치적 태도를 알게 모르게 풍기고 있다면 그 전망은 밝지 않다. 봉준호 감독에게 있어 숫자는 허상이고(괴물은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 중요한 영화(살아있는 현서)는 구하지 못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그다지 어둡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은 괴물을 경험한 후의 강두의 변화이다. 그는 거기 괴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또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졸고만 지내던 그가 총을 옆에 두고 늘 경계를 하고 있다는 것. 영화 ‘괴물’이 일으킨 싹쓸이 논란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 속에 수치와 엘리트주의가 뒤범벅된 괴물이 꿈틀거린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해주듯 허상이라는 것.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영화라는 것.


이런 면에서 보면 다시금 괴물이라는 영화가 얼마나 대단하며 놀라운 작품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스스로 블록버스터라는 괴물이 되어버린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이, 자신 같은 괴물과 싸우고, 그 존재에 대한 경각심은 늦추지 말라는 것이니 말이다. 이 정도가 되면 괴물이란 영화는 영화의 장르를 넘어서 하나의 행위예술이 된다.

/OSEN 대중문화 평론가 mansuri@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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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xov 2006-08-19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허접한 글쓰는 애도 평론가라고 나섰네.ㅋㅋ
 

정말 소설 읽고 나면 남는 게 없다.

특히 한국소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졸라 읽어야 한다.

잘 쓰기 위해선 잘 읽어야 한다나?

결국 읽기와 쓰기는 따로 떨어져 있는게 아니라

하나로 붙어있다고 할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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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우리 집은 너무나 많다. 어떤 기억에서는 뒤뜰에 옥수수가 자라고, 어떤 기억에서는 마당에 수세미 넝쿨이 자라고, 어떤 기억에서는 집 바로 앞에 커다란 돼지 축사가 있다. 워낙 이사를 많이 다니는 바람에 동사무소에 비치된 주민등록표의 주소란이 모자랄 정도. 아버지가 가난한 개척 교회의 목사였으니 남의 집에 세 사는 주제에 우리 집 문 앞에는 늘 교회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 교회 간판이 어린 시절에는 늘 창피해 했던 것 같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우리 집을 갖게 된 게 1970년, 그러니까 만 일곱 살 때의 일이다. 그 해의 추석날 밤 여기저기에 철근이 죽순처럼 삐져나온 집터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송편을 먹으며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봤다. 어렸을 적에 기억이 대부분 밝지 못하지만, 그날 저녁만큼은 정말로 행복했다. 제 집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도 모를 때이니, 그 행복감은 아마 아버지, 어머니가 느끼던 게 덩달아 묻어난 것일 게다.

집이 완성되어 입주하던 날의 기억은 없다. 어쨌든 새로 지은 집은 그 동네에서는 그래도 가장 근사해 보였다. 붉은 벽돌로 벽을 쌓고, 목조 골조의 지붕에 단단한 기와를 올리고, 시멘트 벽돌로 된 담장 안에는 작은 마당도 있었다. 아버지는 거기에 산에서 뜯어온 야생의 잔디 옷을 입혔다. 담장 밑 화단에는 봉숭아, 채송화, 나팔꽃, 과꽃, 분꽃, 맨드라미, 코스모스가 피고, 장독대 옆에선 호박이 자라던 게 생각난다.

제비의 영아살해

어느 날 처마 밑으로 제비가 날아들었다. 우리가 '도끼다시'라 불렀던 매끈한 콘크리트 바닥 위로 흙과 똥을 떨어뜨리던 제비는 집을 다 짓고 그 안에 예쁜 알을 낳은 모양이다. 어느 날 보니 새끼 제비들이 흙집 위로 주둥이를 내밀고 있었다. 장마가 진 어느 날 새끼 제비   한 마리가 바닥에 떨어져 버둥댄다. 사다리를 갖다 대고 다시 제비집 안에 넣어주었지만, 잠시 후에 그 놈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다.

장마철이라 먹이가 없어서 그랬을까? 아무래도 어미가 약한 놈을 일부러 떨어뜨리는 듯했다. 제비 새끼들도 약아서, 가만히 보면 늘 먹는 놈만 먹고, 약한 놈은 밀려나 계속 제 차례를 못 찾아먹는다. 못 먹을수록 힘이 약해지니 도태당할 수밖에. 높은 곳에서 다시 떨어진 불쌍한 녀석은 이번엔 숨이 끊어져 있었다. '파람초'라는 이름의 시큼한 캔디의 플라스틱 원통에 불쌍한 놈의 사체를 담아, 꽃밭 한쪽 구석에 고이 묻어주었다.

지금이야 그게 나머지 새끼라도 잘 기르려는 자연의 섭리려니 하고 이해를 하지만, 당시에는 어미가 제 새끼를 죽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어쨌든 떨어진 제비의 다리를 고쳐주면 박씨를 물어다 준다는 얘기가 아마도 순전한 허구일 것이다. 그 후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제비집을 철거해버렸고, 이렇게 한번 집을 치워버리자 제비들끼리도 서로 연락이 되는지 다시는 제비가 날아들지 않았다.

오징어의 자살

어린 시절 또래의 아이들이 너무 거칠고 드세다고 느꼈다. 같이 놀면서도 그 아이들에게 속한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못했고, 실제로도 약간의 따돌림이 있었다. 특히 편을 둘로 갈라 놀이를 할 때가 문제였다. 인원이 짝수가 아니라 홀수로 걸리는 수학적으로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면, 아이들은 나를 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그걸 나는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당시에 나는 내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게 목사 아들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옆 동네 아이들과 축구를 할 때의 일. 그 동네 아이들보다 우리 쪽이 한 명이 더 많다. 이럴 때는 또 내가 빠져야 한다. 이런 식으로 출장할 기회를 놓치다 보면 당연히 공을 차는 실력도 안 늘고, 그러면 다시금 선발의 기회는 다시 멀어진다. 아이들 세계에도 무자비한 자연의 법칙은 그대로 적용되어, 나는 또 다시 덩치 작은 새끼 제비 꼴이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순진하다는 말을 안 믿는다.

따돌림을 당하다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단에게 잘 보이고 싶어진다. '오징어'라는 놀이를 할 때의 일. 나는 있으나마나한 '깍두기' 신세였다. 이때 상대편의 에이스 철모가 깽깽이 발을 하고 옆을 지나간다. 순간, 나는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나 하나 죽어 상대의 에이스를 잡을 수 있다면, 팀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이 카미카제 공격은 분명 규칙의 위반은 아니지만 분명 정상적인 것도 아니다. 그날 나는 우리 팀 애들에게까지 욕을 먹었다.

사라짐의 미학

밖에서 놀다가 집으로 들어오면 집구석이 조용한 날이 없다. 특히 큰 누나가 문제였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매일 싸돌아다녀 아버지가 거의 매일 난리를 쳤다. 나 같으면 그렇게 매를 맞는다면 귀찮아서라도 그냥 집에서 공부하고 있겠다. 그렇게 혼나고도 기회만 생기면 다시 밖으로 샌다. 공부 못해 한이 맺힌 아버지는 하라는 공부도 안 하는 딸이 이해가 안 됐던 모양이다. 그렇게 굿판이 벌어지면 자기만 괴로운 게 아니라 온 집안이 다 괴롭다.

그래서 가끔은 고아가 부러웠다. 왜 사람은 태어나기 위해 부모를 가져야 할까? 그냥 엄지공주처럼 혼자 꽃에서 태어나면 안 되나? 게다가 인구도 많은 나라에 웬 놈의 아이들을 이렇게 줄줄이 낳았는지. 또 낳으려면 좀 인간성 좋은 것들만 골라 낳을 것이지, 형제들이라고 하나 같이 얼굴만 봐도 지겨웠다. 나를 위해서 세상에서 좀 없어지면 안 되나? 물론 그 자들도 살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 내 소망이 아무리 간절해도 그걸 들어줄 리 없다.

그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끝내 거부한다면, 방법은 단 하나, 내가 사라지면 된다. 어디로? 새로 지은 우리 집에는 그럴 공간이 있었다. 바로 다락방. 부엌 위에 판자를 올려 만든 그 조그만 공간은 나처럼 세파에 지칠 대로 지쳐(?) 현실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낡은 물건들이 모여 있었다. 세상이 피곤해지면 다락방에 올라가 이 잡동사니들 틈에서 묘한 연대의식을 느끼며 나만의 놀이와 공상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다락방

뿌옇게 쌓인 먼지와 낡은 물건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로 가득 찬 다락방에는 백열전등이 하나 걸려 있었다. 하지만 낮에는 조그만 창밖으로 흘러들어오는 자연광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닥의 판자들 새로 난 조그만 틈으로 아래 부엌을 감시할 수 있었고, 신문지로 도배된 다락방 천장의 구멍을 통해 목조로 된 천장의 구조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면 네 개의 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시할 수도 있으나, 그 입구에 쥐똥이 잔뜩 널려 있어 그 너머로 가는 일은 드물었다.

다락방의 창문 너머로는 골목이 보였다. 가끔 황당한 일도 있었는데, 아직까지 선명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다. 어느날 다락방에 있는데 골목에서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후다닥 나가보니, 한 아가씨가 혼비백산해 도망가고 있고, 흑인병사 하나가 까만 얼굴에 하얀 이빨을 드러낸 채 징그럽게 웃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시커먼 물건이 들려있었는데, 아마도 골목에서 소변을 보다가 지나가는 아가씨에게 그 물건을 들이댔던 모양이다.

다락방 창 바로 앞에는 초가집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집 살던 누나가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어느 날 피아노를 치는데 내 옆에 와 앉더니 "나는 피아노 치는 애가 좋다"고 했다. 그때 너무 가까이서 느껴지는 숨결이 좀 부담스러웠었다. 나보다 겨우 한 살 위였지만, 그 나이에는 여자들이 발육이 더 빠르다. 그 누나는 분명히 '이성'의 코드로 나를 대했고, 아직 발육이 덜 된 나는 그게 꼭 싫지는 않았지만 좀 이상했다.

콜라주와 몽타주

다락방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어 상상을 하기에는 딱 좋다. 천장은 신문지로 도배가 되어 있다. 일종의 '파피에 콜레'인 셈이다. 그곳에는 평소에는 같이 있지 않을 물건들이 어지럽게 엉켜 있다. 물건은 보통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연상은 거의 강제적이다. 하지만 용도를 잃어버린 물건들은 다르다. 그것들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물건들과 자유롭게 교제를 할 수 있다. 여기엔 모종의 초현실주의가 있다.

다락방 밖에서는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된다. 특히 만년필이나 손목시계가 문제인데, 내가 분해는 곧 잘 하는데 조립을 잘 못해 가끔 불편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다락방 안에서는 다르다. 그 안의 모든 것은 전적으로 내 자유로운 처분에 맡겨져 있다. 헌 책과 헌 구두와 낡은 가재도구들을 갖고 내가 뭘 하든 뭐라 그럴 사람이 없다. 제 용도를 잃을 때 물건들은 버림을 받으나, 바로 그때 제 임무에서 풀려나 자유로이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다락방 전체는 나의 공작소였다. 재료는 충분하다. 게다가 칼과 가위, 자와 콤파스, 본드와 아교, 톱과 망치 대패, 집 짓다가 쓰고 남은 연장과 재료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낡은 책꽂이로 썰매를 만들고, 망가진 비닐우산으로 꼬리 연을 만들고, 나무젓가락을 이어 붙여 고무줄 총을 만들고, 낡은 편지더미에서 오려낸 우표들을 깡통에 붙여 연필꽂이도 만들었다. 다락방 안에서 낡은 질서는 무너진다. 무너진 질서의 파편들을 모아 다시 조립하면 새로운 현실이 탄생한다.

비행기 디자인

그 당시에 우리 동네에서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수준 높은 사건이 두 건 있었다. 하나는 우체국에 근무하는 어느 아저씨가 사람 몸집만한 커다란 연을 만들어 날린 것. 다른 하나는 어떤 청년이 사람이 타는 글라이더를 만든 사건이다. 듣자 하니 그는 여의도 5.16 광장에서 트럭에 그 글라이더를 끌어 띄우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물건을 보는 순간, 왠지 뜰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고, 역시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사건은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언젠가 사람이 타는 글라이더를 만들겠다는 꿈을 품고 내가 탈 글라이더 모형의 제작에 들어갔다. 김밥 싸는 나무 도시락을 사서, 거기에 연필로 도안을 한 후, 면도칼로 오리고 본드로 붙여서 여러 모양의 글라이더 모형을 만들어냈다. 물론 내가 본 그 글라이더를 원형 삼아, 그것을 이리저리 변형시킨 것들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글라이더는 라이트 형제가 만든 최초의 비행기를 닮은 것 같다. 아마 그걸 참고해서 만들었던 모양이다.

종이로 비행기를 만들기도 했다. 과자상자의 판지를 동체와 날개 모양으로 오려서 거기에 하얀 백지를 입혀서 도색을 한다. 이어 동체에 앞날개와 꼬리날개, 랜딩기어를 붙이면 종이로 된 3D 비행기 모형이 탄생한다. 이 아이디어는 상업화되어 어느 날 학교 앞 문방구에 근사하게 인쇄된  F-4 팬텀기의 종이모형이 걸려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에 앞서 종이비행기 모형의 실험을 끝내놓은 상태였다.

다락방의 공방에서 내가 생산한 기종은 영국의 스핏파이어, 독일의 메서슈미트, 그리고 미국의 무스탕이었다. 이걸 만들어서 나눠주면, 아이들은 그것을 손에 들고 서로 공중전을 벌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생 형이 와서 한 아이의 손에 들린 내 비행기를 빼앗더니, 성냥으로 꼬리에 불을 붙여 날렸다. "피요오옹~ 격추." 힘만 있으면 정말로 그 놈을 때려주고 싶었는데, 힘이 없어 그냥 너그럽게 용서해줬다.

나의 세계대전

질료의 저항을 극복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래서 그 시절 손에는 항상 상처가 나 있었다. 대개는 칼로 자르다가 손가락을 베는 경우다. 얇게 베이면 찰과상처럼 따갑지만, 깊숙이 베이면 타박상처럼 느껴진다. 거의 매일 손을 베다 보니 지혈법도 저절로 익혔다. 일단 손가락을 베면 실이나 고무줄로 아랫부분을 동여매어 피가 안 통하게 하면 된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풀어주면 피는 멈추어 있다.

다락방의 창문 앞에는 낮은 앉은뱅이책상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다가 플라모델을 만들어 디스플레이를 해놓곤 했었다. 주로 35:1 짜리 독일군과 미군의 모형이었다. 이쪽에는 독일군 공수부대, 기마병과 기관총 사수와 하노버 장갑차와 타이거 전차. 저쪽에는 패튼 전차와 톰슨 기관단총을 든 미군 보병과 화염방사기 사수. 이때 심정적으로는 미군의 대의에 공감했지만, 디자인 측면에서는 외려 독일군의 군복과 장비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봐도 역시 순수하게 디자인만 보면 독일군 것이 더 멋있다.

당시에는 미도파 백화점에서만 팔던 일제 에나멜을 사다가 도색을 하고, 나무와 차단막과 같은 지형지물의 모형까지 갖추어서 멋지게 디스플레이를 해놓으면, 이제 감상을 할 차례. 이건 나만이 아는 비밀인데, 플라모델을 보는 방식이 따로 있다. 육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좀 떨어져서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는 거다. 그럼 플라스틱 모델들이 정말 실물처럼 보인다. 이로써 다락방 안은 시공을 초월하여 2차대전의 전쟁터가 된다.

전자와 광학

건전지 위에 조그만 전구를 연결해 만든 간단한 플래시. 보기에는 허술해도 밤에 숨바꼭질 할 때에는 막강한 성능을 자랑한다. 코일을 둘둘 감아서 만든 전자석. 이것으로는 통신을 할 수가 있다. 원래 옆집까지 코일을 연결해 통신 실험을 하려 했으나, 코일이 길어지면 1.5V 건전지로 작동이 될지 의심스러웠고, 게다가 실제로는 '도-스-'라는 소리가 잘 나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코일 값이 비싸서 이 실험은 끝내 해보지를 못 했다.

납땜인두로 전자 키트를 조립하기도 했다. 대개 초인종의 새소리를 내는 등 간단한 것이었는데, 납땜을 할 때 뜨거운 열로 다이오드가 망가지지 않게 하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광석 라디오라는 게 있는데, 이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손바닥 반만한 크기의 라디오에 달린 집게로 금속을 집으면, 전원이 없어도 리시버를 통해 방송을 들을 수가 있다. 나는 아직도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환등기 키트를 조립한 적도 있다. 널빤지 몇 개에 전구를 끼는 소켓 하나, 그리고 집광렌즈가 전부였다. 아교로 널빤지를 이어붙이고, 전구를 사다 끼운 다음 그 안에 3류 무협 영화 필름 조각을 집어넣으니, 희미하지만 정말로 벽에 영상이 나타난다. 얼마나 신기하던지. 당시에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게 바로 이 싸구려 환등기였다. 다락방엔 현미경도 있었는데, 이건 별로 재미가 없었던 것 같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공책의 뒷장은 늘 만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반공 만화였는데, 학교에 가면 더러 내 만화의 팬들도 있었다. 교과서는 훌륭한 애니메이션의 도구였다. 종이에 힘을 주어 그림을 그리면 다음 장엔 자국이 남는다. 그 자국에서 조금 벗어나게 그림을 그려 나가면, 움직이는 그림이 탄생한다. 책이란 게 두껍지 못하니 대개 비행기 두 대가 공중전을 벌이다가 한 대가 격추되는 아주 짤막한 콘티.

그때 나의 우상은 만화가 권웅이었다. 그의 화풍을 흉내 내기 위해선 그의 만화책이 필요했다. 물론 대본소에서 빌릴 수도 있지만, 하루만 지나면 반납해야 한다. 하지만 대가의 화법을 모방하는 게 더이 하루 이틀에 될 일인가? 어느 날 나는 그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보다가 슬쩍 한 권을 훔쳐 갖고 나왔다. 그 가게는 우리 반 아이의 엄마가 하던 곳이었는데, 마침 그 애가 소아마비 수술을 해서 누워있을 때 내가 <어깨동무> 한 권을 갖다 준 적이 있었다.

"한 권 주고, 한 권 받았으니 문제가 없다"는 논리로 죄책감을 억누르고 습작을 하는데, 동생 녀석이 다락방에 올라왔다가 눈치를 채버렸다. 이 녀석이 엄마에게 고자질을 했고, 나는 그길로 만화가게에 가서 자수를 해야 했다. 목사 아들이 도둑질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 그날 엄청나게 얻어맞았는데, 놀라운 것은 그 아줌마가 내가 책을 훔쳐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어떻게 알았을까? 이때 어른들은 정말로 전지전능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섹슈얼 환타지

다락방에는 헌 책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중에 기억나는 것은 미군부대에서 사용하던 성경책. 영어로 된 신약성서에는 흑백의 그래픽으로 예수가 수난을 받는 삽화가 실려 있었는데, 그 그림을 보고 또 보곤 했었다. 그것은 모종의 성적 흥분이었다. 동네의 사내아이들이 여자 아이들의 종아리를 때리는 장난을 치거나, TV 드라마에서 예쁜 여자 탤런트가 종아리 맞는 장면을 보며 침을 삼키는 것을 보면서, “지금 쟤들도 내가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를 테면 유아 사디즘인 셈인데, 그런 일을 몇 번 목격한 다음, 엄마가 빌려온 동화책에 실린 소녀의 그림 위에 습자지를 대고 형을 뜬 다음에, 종아리를 맞는 장면으로 고쳐 그리곤 했다. 애들에게 보여주면 좋아할 것 같은데, 뭔가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끝내 그러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일종의 포르노 작가 노릇을 한 것 같다. 그런 그림들은 다락방이라는 은밀한 공간에서만 그려질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다락방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집에 피아노를 배우러 오던 동갑내기 소녀가 있었다. 그 애가 뛰어가는 모습은 마치 미끈한 사슴이 달리는 것 같았다. 은근히 걔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가끔 다락방에서 그 애와 단둘이 같이 있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망측하게도 상상 속에서 우리 둘은 옷을 홀딱 벗은 채 알몸으로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때는 '섹스'라는 것의 개념도 모를 때였으니, '성'이란 유전자 수준에서 어린 몸에까지 미리 입력되어 있는 모양이다.

다락방에서 나오기

초등학교 6학년을 지날 때쯤 애들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먼저 변화가 생긴 것은 계집아이들이었다. 어느 날 무슨 일인지 옆집에 살던 애와 시비가 붙어서 실랑이를 하다가 그의 가슴을 확 밀었다. 그런데 손에 뭔가 뭉클한 게 잡힌다. 화들짝 놀라서 손을 떼고, 그 다음부터는 걔를 슬슬 피해 다녔다. 그 아이는 중성의 소녀에서 이미 여자가 되기 시작했고, 아직 내가 들어 사는 아이들 세계의 바깥에 사는 외계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내아이들이 변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다. 변한 것은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서로 끌어안고 가슴을 주무르며 내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얘기들을 했다. 아이들이 너무나 징그러웠지만,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쯤에는 내 몸에서도 징그러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성기 주위에 솜털이 자라나는 게 아닌가. 그게 너무 혐오스러웠지만, 신체적 변화를 멈출 방법은 없었다. 소년시절은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5월경. 성기가 근질거려 계속 만졌더니 기분이 묘해진다. 계속 만지작거렸더니 앞이 캄캄해지면서 성기에서 맑은 액체가 두 세 방울이 나온다. 분명히 오줌은 아니었다. 그 후로는 이 신기한 장난에 재미를 붙여 한 동안은 틈만 나면 그곳을 만져댔고, 그 맑은 액체는 차츰 뿌연 우유 빛으로 변해갔다. 한 동안 다락방은 용도가 변했지만, 얼마 후 내 취미는 야구로 옮아갔고, 그 후 다락방에 올라갈 일은 없어졌다.

다시 다락방으로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다락방의 기억은 고등학교 때의 일. 같은 반이면서 이웃 동네에 사는 순기라는 녀석은 발육이 늦어 아직도 ‘딸딸이’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 녀석을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 아랫도리를 벗겨놓고 ‘딸딸이’라는 낱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현상학적 질의 충만함 속에서 직접 체험시켜 주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에 다락방에 올라간 기억은 없다.

얼마 전에 내가 살던 동네에 다시 가보았다. 동네는 모든 것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간혹 예전 그대로 남아 있는 집을 기준으로 간신히 동네의 옛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독일로 유학을 가기 전만 해도 우리 집은 그대로 남아 있어, 언젠가 저 집을 다시 사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 집은 간 데가 없고 그 자리에는 연립주택이라는 흉물이 들어서 있다. 집 앞에 있던 교회건물도 사라졌다.

남의 추억을 지우는 것만큼 잔인한 것도 없다. 건물을 지어도 하필 원래 우리 집이 놓여 있던 방향과는 삐딱하게 지어놓았다. 그 때문에 다락방이 있던 그 공간이 어느 지점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대충 눈대중으로 다락방에 있던 공간을 짐작하고, 거기에 마음속으로 작별의 인사를 보내고 발길을 돌렸다. 그때는 내가 참 못났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그 시절의 나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아서 그렇지 꽤 매력적인 소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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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xov 2006-08-18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초등학교 들어가기전에 만지작거렸는데............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