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괴물과의 사투
[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우리나라 사람들은 숫자에 약하다. ‘1000만’ 관객을 ‘단 21일만’에 돌파한 괴물의 괴력에 혀를 내두르며 너도나도 ‘괴물 보자’고 달려가는 지금의 현상은 숫자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것은 괴물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숫자라는 괴물에게 쫓기는 형국이다. 괴물을 보지 않으면 수준 낮은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 어딜 가도 화제가 되는 그 이야기에서 소외될 것 같은 두려움. 결과적으로는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비주류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그 기저에는 존재한다.
그 두려움은 일반관객들만의 것이 아니다. 전문가 집단이라고 하는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개봉하기 이전부터 날아온 ‘영화제에서의 호평’이라는 외신은 전문가 집단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기대감이 대부분이었겠지만 한 편으로는 강박적인 두려움도 한 몫 했다. 그저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면 그런 두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호평을 받았다면 그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봉준호 감독의 작품 앞에는 새로운 수식어가 붙는다. ‘대중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작품’, 블록버스터이지만 ‘의미 있는 블록버스터’. 여기서 ‘대중적’이라는 수식어가 주는 힘은 기자들에게 지대하다. 모두들 달려가 보는 영화에 적어도 전문가인데 한 마디 곁들여야 전문가로서 소외 받지 않는다는 의식 때문이다. 이렇게 전문가 집단이 여기저기서 강박적으로 쓴 기사들은 온통 매체들을 뒤덮는다.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는 ‘괴물’의 존재감을 느낀다. ‘보지 않으면 수준이 떨어진다는’ 이 이상한 의식의 괴물이 우리 마음 속의 한강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식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영화 ‘괴물’ 속에 등장하는 괴물의 탄생처럼, 우리 의식의 한강 속에 누군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한 것은 아닐까.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부터 우리를 들뜨게 했던 수치들, 수출목표, 아시아 몇 위라고 하는 GNP, GDP 수치, 툭하면 등수를 매기는 경제지표들에서부터, 올림픽 메달 수와 월드컵 몇 강이라는 스포츠의 수치들, 그리고 그 저변에 죽 깔려왔던 성적표와 등수와 점수로 일관되는 입시교육, 그로 인해 의식화된 엘리트주의. 그 소수에 들기 위한 안간힘들…. 그렇게 숫자로 대변되는 소수엘리트주의라는 포름알데히드는 우리 의식 속에 괴물을 키워왔던 건 아닐까. 포름알데히드 방류에 난색을 표하는 김의 모습은 우리가 숫자라는 괴물에 포획되기 이전, ‘이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라며 망설였던 그 때를 생각나게 한다. 그럴 때 입시교육의 선봉에 서야 했던 선생님들은 이런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 “인생은 길다. (지금 몇 년은 짧다.) 보다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지자.” 저 영화 속의 더글라스 부소장이 “한강 큽니다,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집시다”라고 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 마음 속에 자라난 숫자라는 괴물은 백주대낮에 영화가를 습격해 아수라장을 만든다. 전국 1400여 개의 상영관 중 620개를 싹쓸이한 것이다. 거의 영화관 2개 중 하나는 괴물을 틀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괴물의 등장 이면에는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뉴스는 연일 괴물의 기록행진, 그 선정적인 수치보도에만 열을 올렸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백주대낮에 버젓이 괴물이 등장(사실 괴물은 과거에도 있었으나 그 실체는 밤에 가려져 있었다)하면서 그간 그토록 괴물의 실재를 호소하며, 자신들이 겪은 상처를 토로하는 영화인들도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피해자 가족들 중에는 김기덕 감독도 있었다.
괴물의 실재와 딸 현서의 생존을 토로하는 박강두를 이상하게만 보는 것처럼, 김기덕 감독의 발언은 곡해됐다. 김기덕 감독은 말을 극도로 아꼈고, 그러다 보니 해석이 분분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과거 10년 동안 12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총 관객이 100만 명이 되지 않았던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그것도 해외에서는 각광받는 영화가!). 그것은 마치 박강두네 가족이 그 한강변의 매점으로까지 떠밀려 내려온 사연과 비슷하다. 박희봉이 아무리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떠들어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쿨쿨 잠만 잘 테니. 오히려 수치를 들어 얘기하면 이해가 될까. 제목 - 괴물 : 활(김기덕 감독의 이전 작품). 개봉관수 - 620 : 1 관객수 - 1000만+∝ : 1398명! 그는 극장이 자신의 영화를 틀어주지 않는 현실을 통탄했다.
그런데 김기덕 감독이 나서서 수치라는 괴물과 싸우는 방식은 영화 속 강두네 가족의 경우처럼 여러모로 실패의 요소를 안고 있다. 가장 첨예했던 발언은 영화 ‘괴물’에 대해 “우리나라 관객 수준과 영화 수준이 최고점에서 만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의 해석을 두고 “우리나라 관객 수준이 낮다는 것이냐”, 혹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수준이 높다는 것이냐”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뒤늦게 김기덕 감독은 ‘최고점’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으면서 그 말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뉘앙스를 전달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의 발화점은 높고 낮다는 의미의 해석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수준’이라는 단어에 있다. 그 단어는 저 마음 속 은신처에 숨어있던 괴물을 꿈틀대게 만들면서 저마다 분분한 해석을 하게 만든다.
김기덕 감독의 이 발언에는 함정이 있다. 그 발언을 긍정적으로 읽어 이 영화가 최고점에서 관객과 만났다고 해석한다면 스스로의 수준을 높이는 결과가 된다. 하지만 반대로 그 발언을 부정적으로 읽는다면 스스로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물론 김기덕 감독은 “괴물은 훌륭한 영화”라고(100분 토론에서) 함으로써 스스로의 수준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00분 토론에 나와 편중된 수치게임과 사투를 벌이는 인물들(김기덕 감독, 강한섭 교수)은 저 영화 속 박강두 가족처럼 무기력해만 보인다. 그들은 영화 속 강두네 가족처럼 각자의 얘기만 할 뿐, 어떤 연대의식을 전혀 갖지 않는다. 특히 강한섭 교수는 “그 부분은 김기덕 감독님이 해결하시고….”라는 식으로 각자의 선을 그어놓는다.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입장만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며, 강한섭 교수는 이해할 수 없는 권위적 태도를 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저 마음 속에 굳게 뿌리내린 괴물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영화 ‘괴물’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치 강두네 가족이 괴물과의 사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강두 가족의 괴물과의 사투에서 주목해보지 않은 한 인물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영화 끝 무렵에 느닷없이 나타난 행려자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괴물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인물은 바로 그이다(괴물은 화살 한방으로 죽진 않는다. 여기에는 휘발유와 불이 필요했다.). 그는 괴물에게 어떤 피해를 입은 적도 없는 방외인이다. 그는 이 사태의 이해 당사자가 아니다. 이 인물은 도대체 누구며 왜 갑자기 등장한 것일까.
이것은 갑작스런 봉준호 감독의 개입이랄 수밖에 없다. 봉준호 감독의 사회인식은 어둡고 비관적이며 냉소적이다. 그는 전혀 힘없는 한 인물을 집어넣어 괴물을 해치운다. 이것은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냉소적 시선이자 스스로 만들어 놓은 괴물을 없애야만 한다는 책임감의 발로다. 그런데 괴물이 죽었으니 강두네 가족의 승리일까. 여기서 봉준호 감독은 사실 괴물의 죽음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강두네 가족이 원한 것은 괴물의 죽음이 아닌 잡혀간 현서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괴물은 죽었지만 현서 역시 구할 수 없었다. 만일 이 영화가 작금의 영화현실에 어떠한 정치적 태도를 알게 모르게 풍기고 있다면 그 전망은 밝지 않다. 봉준호 감독에게 있어 숫자는 허상이고(괴물은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 중요한 영화(살아있는 현서)는 구하지 못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그다지 어둡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은 괴물을 경험한 후의 강두의 변화이다. 그는 거기 괴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또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졸고만 지내던 그가 총을 옆에 두고 늘 경계를 하고 있다는 것. 영화 ‘괴물’이 일으킨 싹쓸이 논란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 속에 수치와 엘리트주의가 뒤범벅된 괴물이 꿈틀거린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해주듯 허상이라는 것.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영화라는 것.
이런 면에서 보면 다시금 괴물이라는 영화가 얼마나 대단하며 놀라운 작품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스스로 블록버스터라는 괴물이 되어버린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이, 자신 같은 괴물과 싸우고, 그 존재에 대한 경각심은 늦추지 말라는 것이니 말이다. 이 정도가 되면 괴물이란 영화는 영화의 장르를 넘어서 하나의 행위예술이 된다.
/OSEN 대중문화 평론가 mansuri@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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