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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배철수의 나의 삶, 나의 음악 : 2회 (배철수)
어렸을 때 음악은 들은 것이 아니라 그냥 '들린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아버지 바지 핫바지' 하며 따라 불렀던 베니 굿맨(Benny Goodman)의 'Sing, sing, sing'이나 수 톰슨(Sue Thompson)의 'Sad movie(Makes me cry)' 등은 우리 가수들도 부르곤 해서 자동적으로 들린 것들이다.
내가 능동적 의식을 갖고 들은 최초의 노래는 경희중학교 1학년 때 접한
브라이언 하일런드(Brian Hyland)의 'Sealed with a kiss(키스로 봉한 편지)'였다. 멜로디를 듣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한 환희를 맛보았다. 사춘기 소년을 자극하는 키스란 언어가 그렇게 낭만적으로 들릴 수가 없었다. 나중 친구가 가사를 알려줘서 열심히 해석했던 일도 기억난다.
중학교와 고교(경희고) 때까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히트 팝송이 전부였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팝송을 거의 듣지 않지만 그 시절 청년들에게 향수할 대중문화의 으뜸은 팝송이었다. 청년과 기성세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팝송을 들었고 불렀다. 당시 최고 인기 팝가수가 탐 존스(Tom Jones)였는데, 고교 시절 한 친구가 그의 'Green green grass of home(고향의 푸른 잔디)'를 기타 치며 부르는데 너무 멋져 보여 나도 나중에는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한국항공대)에 가서 마침내 밴드를 시작하게 됐다. 교내 밴드인 활주로(런웨이)의 멤버로 음악을 실제로 하기 시작했을 때, 음악은 이전의 듣는 입장과는 천양지차였다. 팝송을 카피해서 연주한다는 것은 굉장한 변화였으며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고 할까. 이 때 가장 많이 카피한 팝이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reedence Clearwater Revival) 즉 C.C.R.로 이 밴드의 히트송인 'I put a spell on you' 'Proud Mary' 'Who'll stop the rain' 'Have you ever seen the rain' 등을 줄창 연습했다. 그들의 인기도 당대 최고인데다 음악도 쉬었기 때문이었다.
C.C.R.의 1970년 앨범 < Cosmo's Factory >는 잊을 수 없다. 런웨이를 하면서 듣는 음악과 카피하는 음악은 다르게 갔고 그것을 일치시키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하지만 대학시절 가정형편상 나는 집에서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돈이 없어서 음반도 살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전축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주요 음악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은 순전 고교 동창으로 지금은 회사원인 김태명 덕분이다. 집이 잘 살았던 그는 상당히 많은 음반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 날 때마다 그 친구 집에 음악 들으러 갔다.
거기서
제스로 툴(Jethro Tull), 산타나(Santana), 블랙 새버스(Black Sabbath),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등을 비롯해 정말 많은 음악을 들었다. 더욱이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록의 르네상스기인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중반의 명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난 지금도 그 시절의 음악을 그 당시에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이 때 솔직히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음악은 어려웠고 상대적으로 딥 퍼플(Deep Purple)을 더 들었던 것 같다. 내 돈 주고 처음 산 앨범도
딥 퍼플의 < Machine Head >(1972년)였다. 너무나도 갖고 싶어서 산 것인데 집에 전축이 없었음에도 구입했다. 아마 요즘 친구들은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음반을 트는 전축이 없는데 음반을 사는 심정.
환상적인 음악을 듣는 것은 좋으나 막상 음악을 하면서는 비참해졌다. 귀는 레드 제플린인데 실제 연주는 동네밴드였기 때문이다. 이 괴리감이 날 괴롭혔다. 그 콤플렉스가 너무도 커 나중에 그룹 송골매 시절, 가장 추구했던 것은 '어떻게든 연주력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몇 차례 이뤄진 밴드의 개편도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이제 음악을 그만두고 생각해보니 연주력이 중요한 것은 아니더라. 그러나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런웨이로 해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에 입상하면서 정식 가요계로 들어와서
프로 밴드 '사랑과 평화'를 보면 부러웠고 열등감이 가득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너무도 환상적인 연주였다. TV로 생중계된 MBC '78 대학가요제 공개방송에서 경연이 끝나고 게스트로 출연한 그들이 들려준
'한동안 뜸했었지'와 'A Fifth of Beethoven'(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월터 머피 밴드가 편곡한 것으로 1976년 빌보드 정상에 올랐다)에 우리 런웨이 멤버들은 넋을 잃었다.
'사랑과 평화'가 나왔으니 우리 음악을 꺼낸다면 중고교 때는 주류음악계가 성인가요 일변도였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들을 게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신중현선생을 알게 되면서 바뀌었다.
1972년 '신중현과 더 맨'의 '아름다운 강산'은 나로 하여금
'한국에도 이런 음악이 있나!'는 충격의 회오리를 불렀다. 음악의 구성을 비롯한 모든 게 종래의 가요와는 완전히 달랐다.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도 마찬가지였다. '미인'의 성공을 보면서 난
'한국에서 록을 한다면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는 영감을 받았다.
김민기의 유일한 1971년 앨범도 충격적이었다. 이것은 가사 측면의 쇼크였다.
'우리 글로 이렇게 좋은 노랫말을 쓸 수 있구나!' 이후 한동안은 충격이 없었다가
'산울림'의 1977년 데뷔앨범을 듣고 오랜만에 다시 놀랐다. 이전까지 가사에는 운율이 있어야 했지만 산울림은 산문적인 어법을 노랫말에 심은 것이었다. '3코드'라는 사실도 새로웠고.
'이런 식으로도 음악을 할 수 있구나!' 난 그들의 '아니 벌써'를 국내 최초의 펑크(punk) 히트송으로 간주한다.
난 상기했듯 활주로와 송골매 밴드 시절 연주력 중심의 접근을 한 영향으로 정규보다는 라이브 앨범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Grand Funk Railroad)의 1975년 두장짜리 라이브 앨범 < Caught In The Act >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이 밴드는 스튜디오 것보다 라이브를 더 잘한 것 같다.
유라이어 힙(Uriah Heep)도 라이브 앨범이 더 낫다.
1973년 라이브 앨범에 수록된 11분55초짜리의 곡 'July morning'은 전율을 일으킨다. 이 라이브를 듣고 정규 곡을 들으면 시시할 정도.
이것만을 들어라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비틀스(Beatles)다. 아이돌 밴드로 출발해서 아티스트 반열에 오른 그들은 록은 물론 모든 장르의 음악을 했다. 초보자나 지망생들은 우선 이들의 히트 곡부터 들어서 음악에 길이 들어야 한다. 이 점에서
1973년에 나온 각각 2장 짜리인 비틀스의 레드 앨범 < The Beatles/1962-1966 >과 블루 앨범 < The Beatles/1967-1970 >을 추천한다. 디스크자키를 하면서 세월이 가면 갈수록 비틀스의 광대한 흡수력을 절감한다.
음악분야의 종사자들은 뮤지션이나 평론가나 마케팅담당자나 나 같은 디스크자키나 한 가지 기본적 공통조건이 있다. 그것은 음악을 많이 들으라는 것이다. 음악을 들어 공력을 다지지 않으면 막상 음악을 하게 되더라도 진부하고 지루한 음악이 된다고 본다. 난 요즘 후배 아티스트들이 다들 잘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높은 점수는 독창성에 준다. IZM 5주년을 축하하며 모든 방문객들이 음악의 즐거움, 그 청취의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란다.
인터뷰, 정리 임진모
2006/09 임진모 (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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