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홍라희 컬렉션 - 강력하고도 내밀한 취향
손영옥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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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은 사실 '이건희 컬렉션'이 아니다

수집은 개인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어떤 한 개인을 들여다보는데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삼성가의 행보는 오래전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병철 회장에서 시작된 삼성가의 수집은 이건희 회장을 통해 이미 2대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고 그의 부인 홍라희 여사 역시 전문성을 갖춘 수집가로 삼성가의 며느리가 될 때부터 수집가의 훈련을 받아왔다. 굳이 박물관과 미술관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이미 국내 전무후무한 미술 수집을 완성하였고,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미술계 최고의 이슈로 자리 잡은 세기의 기증을 실행하였다.

지금껏 전례가 없었던 이 기증은 경제적 가치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규모이다. 이병철 회장 때부터 모아온 고미술품과 국내 근대 미술품 및 세계적인 서양화는 2만 3천여 점에 달하고 고미술품과 근현대 미술품을 합친 경제적 가치는 3조 원으로 추산된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체 미술관이 100년 동안 사야 할 미술품을 한 번에 구한 것과 같은 양이다.

이건희 컬렉션이라 불리는 지금의 미술 수집은 넓게 표현한다면 이건희, 홍라희 컬렉션이라 칭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이 책은 이건희 컬렉션이라고 불려왔던 구축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아내 홍라희의 뒷이야기, 수십 년간의 수집 과정에서 그들 부부가 믿고 의지했던 화상의 이야기와 컬렉션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들과 그것을 창조한 화가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가려진 이름 '홍라희'

이건희 컬렉션이 불리는 이 엄청난 수집품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결재권자가 이건희 회장이었다고 해도 아내 홍라희 여사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홍라희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 미술학과를 나왔고, 1995년부터 호암미술관 관장을, 그리고 2004년 리움미술관을 개관하고 오랜 시간을 관장 자리에 머물렀다. 선대부터 내려온 고미술 중심의 삼성가에서 홍라희 여사의 전문성은 삼성가의 컬렉션을 다양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건희 컬렉션의 대부분의 수집 활동을 부부가 함께 해왔다.


"저희 부부가 최초로 산 미술품은 서예가 소전 손재형 씨의 소장품들이었는데,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나 <금강전도> 같은 명품들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행운이었지요. 회화나 도자기의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요. 그때부터 전문가들에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 회장은 1970년대 내내 거의 매일 저녁 미술품을 보고 사들이곤 했습니다."

전체 컬렉션에서 3분의 2 이상이 1970년에서 1980년까지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여사가 사들 수집품이다. 그녀는 한국의 미술뿐만 아니라 서양의 현대미술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고 마크 로스코, 애드 라인하르트, 프랭크 스텔라 등 지금의 컬렉션을 갖추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가장 가까운 조력자 '이호재와 박명자'

책에서는 미술계를 뒤흔든 삼성가와 수십 년간 함께한 두 화상을 소개한다. 바로 가나아트의 이호재 회장과 현대화랑의 박명자 회장이다. 1970년에 인사동에서 현대미술을 취급하며 본격적인 상업 화랑을 경영하고 있었던 박명자 회장과 1983년에 만 29세의 나이로 최연소 사장이 되며 가나화랑을 차린 이호재 회장. 박명자 회장이 당대 최고의 작가의 작품을 위주로 삼성가에 신작을 공급했다면, 이호재 회장은 생존 작가나 작고 작가의 구작과 명품 고미술을 공급해 주었다고 한다.


유명한 일화로 1979년 겨울 25살의 이호재 회장은 삼성 본관을 찾아가 막무가내로 이건희 부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고 수차례나 문전 박대를 당했지만 그 끈기에 감동한 것인지 이건희 부회장은 그를 들여보내라고 한다. 이것이 이호재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 20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나며 그들의 관계는 계속됐다.

그들이 사랑한 작품들

고미술의 관심에서 출발한 이건희 회장의 수집은 근현대미술 작가로 관심이 넓어진 건 아내 홍라희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중섭, 박수근, 권옥연 등의 구상계열 작품 외 유영국, 김환기, 김흥수 등의 추상 계열의 그림은 아내 홍라희의 조언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의 컬렉션의 특징이라면 단순 가격이 비싼 그림들이 아닌 학술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대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피해로 척박한 근대미술에 삼성가의 컬렉션으로 들어온 작품은 1400점의 근대미술은 당시 미술계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남을 것이다.



저자가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에서 느낀 부러움은 나 또한 유학 당시 느꼈다. 마츠가타 고우지로가 수집한 미술품이 국립서양미술관의 근간이 되었는데 마네, 세잔, 모네, 고갱, 고흐에 이르기까지 유럽이 아닌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츠카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가와사키 조선소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는 그림을 사기 위해 런던에 사무실을 만들고 자주 파리로 가서 그림을 골랐다고 한다. <수련> 역시 모네가 살아 있을 당시 마츠카타가 직접 가서 산 그림으로 그의 열정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일본이 소장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의 컬렉션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삼성가의 기증으로 우리나라도 모네의 수련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구매조차 쉽지 않았을 고갱, 샤갈, 미로 달리, 피사로, 르누아르에 이르기까지 서양 근대미술의 소장이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기증은 숭고한 일이다. 자신의 안목과 시간, 막대한 노력을 들여 애써 수집한 소장품을 사회를 위해 내놓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영원히 기억되고, 존경받아 마땅하다.

세기의 기증으로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건희. 홍라희 부부의 컬렉션으로 국내 미술계는 다시 활력을 찾고 있다. 그들의 기증의 가장 큰 의미 중 하나는 빠져있던 컬렉션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엄청난 가격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던 김환기 작가의 작품들과 박수근, 이중섭 작가의 대작들을 기증받음으로써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손영옥 미술평론가의 <이건히. 홍라희. 컬렉션>으로 그들의 컬렉션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와 그들이 사랑한 그림과 작가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시간이었다. 삼성가의 컬렉션을 이해할 가장 흥미로운 도서로 남을 거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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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시간표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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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없는 척, 모르는 척해야 해요. 그래야 우리가 계속 일하고 살 수 있어요."

우리 곁을 맴도는 괴담의 매력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토록 호기심과 오감을 자극하며 빠져들게 하는 걸까? 아마 그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스럽지만 누구나 겪을 만한 일은 아니기에 더욱 특별하고 오싹한 거라 생각한다. 다음이 궁금해지는 묘한 분위기로 우리를 낯설고 기이한 곳으로 데려간다.

지난해 <저주 토끼>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큰 화제를 모았던 정보라 작가의 <한밤의 시간표>는 제대로 된 귀신 이야기를 쓰겠다던 그녀의 예고대로 그녀만의 독특한 귀신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번 작품은 연작소설의 형태를 띤 이야기로 귀신들인 물건을 보관한 연구소에서 직원들이 겪은 각종 기묘한 이야기와 그 귀물에 얽힌 사연을 풀어놓았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우리 일상에서 있음 직한 도시괴담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더욱 섬뜩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올라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계단, 소설에서 가장 큰 소재로 자리 잡은 귀신들인 물건이라는 매력적인 소재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귀신 들린 물건들을 모아놓은 연구소에서 한밤의 시간표에 따라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복도를 돌며 반복적으로 잠긴 문들을 확인하는 이 일은 찬이 이른바 '정상적'이라는 사람들과 지나치게 접촉하지 않으면서도 경제활동을 하고, 아주 최소한이나마 사회활동을 하고 일과를 정해 움직이고, 생활의 규칙과 질서를 조금씩 다시 정립해나가는 첫걸음이었다." p23

정체불명의 물건을 관리하는 연구소에서 귀신들린 물건들에 얽힌 일곱 편의 이야기는 귀신들이 깨어나는 밤의 연구소에서 이루어진다. 주로 주인공이 선배에게 연구소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 주된 구성이다. 첫 단편인<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에서부터 보여준 계단과 터널이라는 공간이 주는 공포감과 <저주 양>에서 느꼈던 권선징악 뒤의 애틋함, <고양이는 왜>에서 등장하는 한 인간의 집착까지 단편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다가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져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정보라 작가의 이야기들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작품들 속에 사연들은 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떳떳하지 못한 만남과 힘없는 여성의 학대와 성폭력 등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상에 맞서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그녀 다운 전개였다.

저자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독자들에게 연구소라는 기묘한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연구소의 잠겨진 방을 하나씩 돌아다니며 들을 수 있는 서늘한 이야기 이면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정보라 작가의 <한밤의 시간표>는 우리를 더욱 다채로운 호러의 세계로 안내하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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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스파이 -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필사적으로 막은 과학자와 스파이들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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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월요일 오전 8시경. 미국의 B-29 전투기가 일본 히로시마 시에 원자 폭탄 하나를 투하했다. 길이 3m, 무게 약 4t의 이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8만여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도시는 전부 잿더미로 변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8월 9일, 또 다른 B-29 미국 전투기가 이번에는 나가사키 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약 4만 명이 즉사했다. 이후 두 도시에서 방사능 노출과 관련해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연합군의 항복 요구에 끝까지 버티던 일본 왕 히로히토는 결국 나가사키 공격 6일 만인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이로써 약 6년간의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2차 세계대전은 인류사 최초로 원자 폭탄이 전쟁에 사용됐고, 수백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참혹한 전쟁이었다. 만약 미국인 아닌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가 먼저 개발해 전쟁에 사용하였다면 2차 세계대전의 판도는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베스트셀러 작가 샘 킨의 다섯 번째 책인 <원자 스파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손에 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과학자와 스파이로 구성된 인원들이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내용이다.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2차 세계 대전의 뒷이야기.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첫 등장인물로는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 출신에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으로 스파이가 된 모 버그와 독일의 원자폭탄 벙커를 파괴하기 위해 자폭한 조 케네디 주니어, 부역자로 위장해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마리 퀴리의 사이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알소스 부대의 수장으로 파견되어 활약했던 보리스 패시 등 2차 세계대전의 숨겨진 영웅들의 활약을 그려내고 있다.

원자폭탄 개발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중수를 둘러싼 사건들, 원자폭탄의 정보를 얻으려고 적진에서 활약하는 첩보원들의 모험담도 흥미로웠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역시 독일 원자 폭탄의 주역이었던 하이젠베르크의 이야기였다.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원자 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우라늄 클럽의 중심인물이었다. 도덕적인 문제로 논쟁했던 연합군 과학자들과 나아가 나치의 원자폭탄 프로젝트에서 애국심과 인류애 사이의 갈등으로 괴로워했던 하이젠베르크와 독일 과학자들의 고민 등 원자폭탄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느끼게 될 도덕적 딜레마를 생각할 수 있었다.

원자폭탄 개발에 연루된 많은 인물들은 자신들이 만들게 될 살상 무기의 파괴력을 심각하게 따져보지 못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도리어 그것이 정말 가능한지에 대한 호기심을 풀고 싶어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히틀러는 저지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면죄부를 애초부터 가능하게 했고, 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크리스퍼 놀란 감독의 12번째 영화 <오펜하이머>가 곧 개봉이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미국의 핵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여 원자폭탄을 개발한 역사에 대한 전기 영화로 원자 스파이를 읽은 독자라면 반가워할 만한 소식이다. 개봉 전 샘킨의 <원자 스파이>를 읽고 관람한다면 더욱 의미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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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 인간 - 좋아하는 마음에서 더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정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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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그저 그런 지루한 삶을 살았다고 불평해대도 모든 순간이 예측한 대로 흘러가는 이는 없을 것이다. 기대와 어긋난 순간의 마주침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못내 불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소나기가 항상 미운 것은 아닌 것처럼, 그 당혹스러운 마주침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출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은 낯선 환경으로의 끊임없는 환승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낯선 환경에 발을 딛고 선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익숙한 모든 풍경을 등져야 하는 일이고, 낯선 시선을 한몸에 받아야 하는 일이다. 겨우 그 위에 발을 딛고 선다 해도,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처음 보는 건물과 거리, 사람과 시선, 모든 것이 한 사람 외부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낯선 환경에 발을 딛는 일을 꿈꿀 때 설렘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는 왜 낯선 곳에 가는 일에 가슴이 뛰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우리가 매일 겪는 하루는 같아 보이지만 실은 다른 것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일상이라는 이름에 가려졌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낯선 플랫폼을 밟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은 모두 다 매일 새로운 시간을 살아가는 여행자인 것. 낯선 환경으로의 환승은 운명이고 본능이다.

"환승하는 삶.

환승할 수밖에 없는 삶.

좋아하는 것에서 좋아하는 것으로 환승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좋아해야만 하는 것을 만들고 좋아하게 만들어야 살아지는 삶도 있다. 마음과 사랑이라는 것을 손쉽게 쓰지만 사실 요즘은 그런 것마저 만들어내야만 견딜 수 있는 삶도 많다고 느낀다. 그런 삶의 환승의 수가 빈번하게 높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무수한 환승을 경험하면서도 순간 나 자신의 바깥에 놓인 삶에는 또 한 번 무감했던 것 같다." - 프롤로그

그동안 효율적인 삶을 교육받아왔고, 때론 강요당했고, 그렇게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가능한 더 빠르게, 가능한 더 많이, 질이 안 되면 양이라도, 살아남기 위해 경쟁을 배웠다. 그래서일까, 효율적인 삶과 속도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방향을 쉽게 잃었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그래서 속이 비어버린 사람. 깊이가 없는 껍데기를 부여잡고 올 수밖에 없었다.

한정현 작가의 <환승 인간>에서는 오롯이 자신으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해왔던 수많은 환승들을 통해 삶에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사랑에 대한 단상도, 생각지도 못한 유학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느낀 삶에 대해서도, 그녀가 좋아하는 문학, 영화를 통해 작가 한정현으로의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진정 원하는 삶을 위하여 무수한 환승과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나의 모든 진심이자 진실이다"라는 선언이었다. 그건 내 삶의 자세이기도 하다. 자꾸만 자주 휘발되는 가치에 관한 것, 내가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나가는 시간에 의해 가치 없음이 되어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소설 속에서 지켜보고자 했던 나. 여전히 내 아에서 가치로 남겨져 있지만 타인들에 의해 무가치해지는 무언가에 대해 써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쓴 "이제 가자, 아키코"라는 문장은 내 인생의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려는 마음이었다." - 이제 가자 아키코 중에서

수많은 인생의 환승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경험적 근거를 바탕으로 단언한다.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각각 살아온 인생에 따라, 각자 다른 눈으로 목격한 세상에 따라, 그리고 각자 온몸으로 느꼈던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발현된다.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내 삶의 형편에 따라, 또 누구와 함께했으며,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왔는가에 따라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삶의 희로애락, 온전히 나만이 느낄 수 있고,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 의미를 어떻게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생을 찬탄하고 긍정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다. 하루를 버티고 하루를 살아낼 뿐이다.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해 나가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내가 나로 산다는 것이 조금 미안하고, 많이 불편하지만 수심을 알 수 없는 검은 밤바다가 있고, 태양을 품은 뜨거운 아침의 금빛 바다가 있듯 각자의 삶이 수시로 변화는 일들로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닐까? 남들은 발견할 수 없는 커다란 돌비석 하나를 가슴에 묻고 생의 끝까지 그것을 지표 삼아 걷는 일. 그 끝이 희망이 되는 일로 여기며 살아가는 동안에는 희망이 야박하더라도 우리는 힘을 내어 끊임없이 환승하며 돌비석으로 나아가는 일. 만약 벼랑 끝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하며 웃을 수 있는 삶으로.

모든 것이 변화고 새로운 모든 것이 시작되는 그 환승의 갈림길에서 각자의 꿈이라던가 작은 희망 같은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마음 한구석에 세워 놓고 살아갈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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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위드 X 창비교육 성장소설 9
권여름 외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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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의 계절이다. 열대야에 잠 못 이루는 밤 펼친 공포 소설에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마른 자국엔 서늘함까지 느껴진다.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사위에 위화감을 느껴 괜스레 두리번거린다. 80~90년대만 하더라도 여름철 극장가의 주연은 공포 영화였다. 지금은 그 자리를 블록버스터가 꿰차고 있다. 물론 제작비 대비 흥행 신화를 쓴 소수의 화제작들이 호러 영화 명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전성기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서점가는 다르다. 절대적인 수는 많지 않아도 탄탄한 장르문학의 독자층은 좋은 작품들이 꾸준히 출간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지난해 출간된 전체 소설 분야 도서 중 3.1%가 추리, 공포, 스릴러, 미스터리 소설로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왜 사람들은 호러 소설에 매료될까. 특히 학교 괴담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은 어느 나라에서든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아이들의 첫 집단생활의 규칙, 규율 및 학습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여, 입학을 앞두고 아이의 긴장과 불안이 서려 있는 곳. 이곳에서의 생활 중 이상한 일 한두 개쯤은 일어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스터디 위드 X>는 6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단편으로 어쩌면 표제가 되는 <스터디 위드 미>에서는 자신의 공부하는 모습을 유튜브에 업로드하는 전교 1등 '수아'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주인공. 언젠가부터 수아의 영상에서 정체 모를 두 명의 귀신이 찍히게 되고 수아는 점점 야위어간다.

집단 괴롭힘과 학교 폭력으로 고통받던 '준우'는 그를 괴롭히던 강병세에게 벗어나려 집에서 꽤 멀리 있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입학 첫날 교과서를 받던 곳에서 상현이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고 그들은 빠르게 친해져갔다. 어느 날 상현은 준우를 괴롭히던 녀석들에게 복수할 방법이 있다며 그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고 하고 준우를 괴롭히던 녀석들은 한 번 들어오면 두 번 다시 빠져나올 수 없는 카톡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독특한 소재의 <카톡 감옥>.

<벗어나고 싶어서>에는 윤재는 수업 중에 교사인 미진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른다. 마지못해 미진은 학창 시절 때 만났던 친구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전학 간 학교에서의 첫날에 자신에게 다가와 도시락을 같이 먹자던 '우리' 뚱뚱하지도 않는데 방울토마토만을 가져와 점심을 먹고는 자신을 돼지라고 칭하는 이 아이에게는 어떤 사연이 가지고 있는 걸까.

<영고1830>은 지역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 영고에 주인공 희준은 진학하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재직 중이던 학교인 영고에서는 괴담이 존재했는데 매년 1학년 8반 30번에게 불행이 닥치기 때문이다. 중간만 하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공부해 보지만 성적순으로 번호가 매겨지던 영고에서 최하위 등수인 1학년 8반 30번이 되고 만다.

<그런 애>에서는 예나의 가장 친한 친구 솔희는 배우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녀의 SNS에 노출이 심한 사진을 올리게 되고 학교 친구들로부터 조롱 받게 되는데 그러던 어느 날 예나는 학교 뒤편 소원을 들어 준다는 구덩이에서 솔희의 USB를 발견하게 된다.

<하수구 아이>에서는 학교 후문 하수구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있었는데 주인공이 초등학교 때 '하수구 아이'라고 불렸던 친구를 떠올리게 되고 속마음까지 털어놓았던 친한 친구였지만 주위의 시선과 친구들의 놀림으로 인해 모른 척 방관하게 되는데 잊고 지냈던 그 아이와의 관계를 떠올리며 숨기고 싶었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 성적으로 인한 스트레스 다가왔었던 학창 시절의 꿈을 꾸곤 한다. 가까운 친구들과의 입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 바둥되던 고교 시절의 꿈을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때의 스트레스를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면서 가장 혹독했던 그 시절 가슴 설레며 친구들과 함께 듣던 추억의 괴담들.

가장 익숙한 공간이자 누구나 거쳐가는 곳 학교라는 공간에서 오싹한 괴담들의 소재가 변화고 있다. 단순 귀신의 등장이 아닌 경쟁 교육과 학교 폭력으로 인한 시기와 복수라는 소재가 늘고 있다. 경쟁 교육은 학생들에게 위선적, 가식적 태도를 심어 주며 그에 따라 학생들의 호전성도 증대된다. 나아가 폐쇄적,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심어준다. 친구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고립적으로 살아가며 그런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의 문제로 우리를 자멸케 할 수 있다. 지나친 경쟁 교육의 폐단을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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