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하는 소설 - 미디어로 만나는 우리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김애란 외 지음, 배우리.김보경.윤제영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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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미디어란 생활의 필수재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드는 순간까지 우리의 일상 곳곳에 미디어가 스며들어 있다. 미디어는 모든 정보의 원천이자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셜미디어 중독, 사이버불링, 가짜 뉴스 등 악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결국 이 문명의 도구를 어떻게 다룰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로부터 건네받은 불로 문명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 불의 힘으로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불을 선물 받은 우리 역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반드시 고민해 보아야 한다.

우리 삶에서 유용한 도구가 되어 준 것들은 어느 것이든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현대 미디어의 기반이 되고 있는 인터넷도 편리함 이상으로 많은 악영향을 낳고 있다. 즐겁고 유익한 콘텐츠뿐 아니라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콘텐츠도 넘쳐난다. 특히 SNS는 인간관계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인신공격과 혐오 표현이 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우리 삶 곳곳에 뿌리내린 인터넷을 외면할 수 있을까? 통제하고 막는 것만이 능사일까?

<연결하는 소설>은 김애란, 구소현, 오소영, 서이제, 김혜지, 임현석, 김보영, 전혜진까지 일상의 소통을 의미하는 미디어를 주제로 한 단편들을 수록한 책이다. 이 책은 미디어의 탄생으로 인해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수많은 것들 중 일부분을 표현하고 있다. 그 중 개인적으로 와닿은 세 편의 소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문을 장식하고 있는 소설은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김애란 작가의 <침묵의 미래>는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생성과 그 사멸의 과정을 인간 자신의 운명처럼 그려내고 있는 일종의 관념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라져 가는 언어의 마지막 화자들을 전시한 '소수 언어 박물관'이라는 독특한 배경을 이 소설은 지금까지 김애란 작가가 보여주었던 매력적이고 견고한 이야기체의 구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관념적 세계를 내보이는 듯한 뜻밖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종족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는 언어, 그리고 공포스럽게 찾아오는 침묵의 미래는 절대적으로 외롭고 고독하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되는 소멸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0%를 향하여>를 특이한 문체로 적응이 힘들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읽게 만드는 마법같은 매력을 가진 서이제 작가. <연결하는 소설>을 구성하는 작가 중 가장 주제와 어울리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단편<위시리스트>는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어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알라딘 위시리스트에는 몇 백만원치의 책을 담아두는 자신을 돌아보며 결국 끊임없이 채워가는 행위란 오늘날의 필연적인 질병 '저장 강박'이 아닐까. 물건의 소유 여부가 내 존재를 빛나게 한다고 믿고 있는 현대인들이 소유욕에 대해 사유할 의미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임현석 작가의 <무료나눔 대화법> 역시 일상 생활에서 널리 이용되는 중고거래 어플의 사용으로 자신의 편견에 변화가 생긴다는 내용이다. 자신의 조건에서 어긋난 불편하고 피하고 싶었던 대화를 해오던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편협했던 자신의 사고를 돌아보며 비로소 타인과의 대화를 이어나간다. 급격하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개성에 대해 존중과 이해야 말로 타인을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일임을 깨닫는 하는 소설이었다.

근대에는 언어를 습득하는 능력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기본 소양이었다면, 이제는 미디어 환경을 전방위적으로 이해하고 맥락을 파악하며 비언어적 요소를 캐치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해졌다. 미디어는 이제 지식과 정보를 매개하는 중요한 도구가 됐다. 언어라는 미디어의 본질에서 파생된 수많은 미디어 속에서 함께 살아갈 사회 구성원들간에 지켜져야 할 미디어의 무게와 중요성을 생각하며 미디어로 전달되는 내용의 의미를 정확하게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참된 쓰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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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들
진하리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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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게 지내며 정이 들어 사촌과 다를 바 없는 가까운 이웃을 '이웃사촌'이라 한다. 이 말속에는 이웃은 사촌처럼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규범적, 윤리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한곳에 머물러 토지를 경작하며 생활하던 농경사회에서는 이웃 간의 협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이러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오늘날은 아파트가 보편화되면서 주거형태도 이동성이 높은 사회로 변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한 곳에만 평생 살지 않는다. 유목민은 가축을 방목하기 위해 좋은 목초지를 찾아 이동생활을 하듯 오늘날 사람들도 일과 직장 재산 증식 등 주가가치, 교통, 문화 환경 등의 다양한 이유에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 살기 때문에 평생을 함께 해왔던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어버렸다.

진하리 소설가의 첫 번째 소설집 <이웃들>은 가깝게 지내는 친구, 이웃, 가족 간의 내비치는 심리를 섬세하게 소설로 심훈문학상을 수상하였다.

6편의 단편은 <휴가> 제외하고는 모두 연작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작가가 이야기하는 주제의식을 생각하면 모두 같은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남들과 다른 소수자를 질시하고 배척하는 자신의 편협함을 정의감으로 포장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의 일그러진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 이해관계로 얽혀 서로에게 예의는 갖추지만 정있는 이웃이라고 하기에는 냉정한 관계.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맺어진 이름뿐인 다정한 이웃들은 동일한 세계관 안에서 때로는 주연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은 서정인 작가의 '원무'와도 닮아 있다.

어쩌면 이해관계로 묶인 타인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피로 연결된 가족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휴가>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주의 시선에서 본 가족들은 화목한 것처럼 보이지만 준왕이 두 살이던 해에 단체 가족 휴가에서 준왕의 누나 준희의 죽음을 중심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있었다. 진실을 알고 있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모른 척 살아가는 가족들 역시 타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예증하고 있다.

신인 작가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탄탄하면서 섬세한 심리묘사는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손홍규 소설가의 말처럼 이토록 무시무시해도 되는 걸까. 나 역시 진하리라는 이름을 결코 잊지 못하게 될 것 같다. 인간의 본성과 인간 사회의 여러 모습을 돌아보게 만들며 이것은 소설 속의 중산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지금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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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악녀 이야기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시부사와 다쓰히코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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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를 떠올리며 신약성서 마가복음 6장 17~29절에 기록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가 떠오른다. 헤롯 왕이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요한은 이를 유대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비난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헤로디아는 요한을 죽이려 했지만 선지자로 추앙받던 요한을 두려워한 헤롯의 반대로 죽이지 못한다. 요한의 죽임만을 생각하던 어느 날, 헤롯의 생일이 되어 연회가 벌어졌을 때 헤로디아가 어린 딸 살로메를 불러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게 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였고, 같이 크게 기뻐했던 헤롯은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는 맹세를 하게 된다. 헤로디아의 지시를 받은 살로메는 요한의 목을 원했고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던 헤롯은 결국 요한을 참수하고 만다.

성경에서의 살로메는 어머니인 헤로디아의 지시를 받고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과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서는 요한에게 반해 그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헤롯을 유혹하는 팜 파탈로 묘사되고 있다.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악녀란 어떤 존재들일까? 시부사와 다쓰히코가 정의한 문고판 후기를 보면 악녀란 "미모와 권력을 가지고 악의 극한까지 간 여성, 혹은 애욕과 범죄로 스스로를 망가뜨린 여성이라고 칭하고 있다. 악녀를 칭하는 기준 정확히 구분 짓기는 힘들지만 후세에 오래 전해질 만큼의 강한 인상을 남기며 남성의 운명을 더 나아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악행을 저지른 여성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동, 서양을 합쳐 12명을 선정해 소개하고 있다. 루크레치아 보르자 엘리자베스 여왕, 메리 스튜어트, 마리 앙투아네트, 클레오파트라, 측천무후 등 다양한 시대와 국가의 여성의 삶을 그만의 스타일로 풀어내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였고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었다는 매리 스튜어트를 둘러싼 얽힌 비극적인 비운의 삶과 폭군 네로의 어머니로서 그의 인생 전반부를 공포로 지배했던 아그리피나와 남존여비 봉건사회에서 일개 여성이 지존의 자리에 올라 모든 남자들의 무릎을 굻게 만들었던 측천무후의 이야기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극단적인 로맨티시스트 기질을 지닌 메리라는 이름의 이 여성을 과연 '악녀'라고 불러야 할지 무척이나 의문스럽다. 어떤 사람은 그녀를 순교자로 찬미하고, 어떤 사람은 그녀를 남편을 살해한 음탕한 여성이라고 비난한다. 많은 역사가나 시인에게 이토록 다양하게 묘사되는 여인도 드물 것이다. p78

대부분의 전제군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그리피나 역시 자신의 지위가 언제든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상 신음했다. 황제에게는 메살리나가 낳은 브리타니쿠스라는 적자가 존재했다. 아그리피나의 친아들 네로는 황제에게는 남의 자식이나 매한가지였다. 장래에 대한 그녀의 불안감이 싹을 틔우고 있었던 이유다. p136

무후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강인한 의지력과 정치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미신에 대한 맹신이 존재하던 시대에 미륵의 화신이라느니, 주 왕실의 자손이라느니 하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감쪽같이 미혹시켰기 때문이다. 화려한 의식이나 사원 건립도 보기에 따라서는 백성을 홀리는 선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이 예상을 뛰어넘은 효력을 발휘해 결국 그녀는 전대미문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p198

때로는 개혁의 주체로 때로는 정의의 집행자로 번번이 자행돼온 극단적인 행동들의 실체는 무엇일까? 인간이 문명을 이룬 이래 계속해서 나타난 수많은 폭정의 밑바탕에는 무엇이 깔려 있을까? 지금까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행해야 했던 수많은 정치적 행위들의 밑바탕에는 자신들 이외의 사람은 새로운 세상과 함께할 수 없는 정화의 대상일 뿐이다.

저자가 풀어내고 있는 악녀들은 찬미와 증오를 동시에 받고 있으며 저자 또한 여전히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단순 선과 악의 개념을 초월해 한 시대를 뒤흔든 여성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껴졌던 건 권력이 갖는 양면성인 것인가? 인간에게 권력욕이 있는 한 폭정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권력자는 잠재적인 폭군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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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이향규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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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하게 깎인 연필이 필통에 가지런히 있으면 뿌듯하던 시절이 있었다. 책가방을 메고 짧지 않은 거리를 가다 보면 필통의 연필은 흐트러지고 까만 연필심은 고단함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필통 뚜껑만 열면 늘 잠자던 나무 향이 배시시 깨어났다. 그 향은 들뜬 마음을 안정시켜 주곤 했었다. 나무 안에 감춰진 까만 속심. 최근, 레트로 열풍으로 인해 형형색색이다. 한번 검정 연필이면 평생 검은색으로만 써진다. 사람으로 치면 고지식하지만 올곧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눈 뜨면 가족들을 위해 일밖에 모르던 아버지 같다. 부러진 연필을 깎고 또 깎아서 짧아진 몽당연필을 볼펜 껍데기에 끼워 공책에 삐뚤삐뚤 써 내려가던 그 시절이 아련하다.

며칠 전, 동호회에서 볼펜도, 샤프도 아닌 몇 자루의 연필을 지인분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어떤 뜻으로 연필을 주셨을까. 철학적 안목으로 하얀 종이에 세상살이의 희로애락을 엮어내라는 의미일까. 생의 행로를 한 글자 한 글자 까만 속심 닳아 없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쓰라는 의미일까.

선물로 받은 연필을 깎아본다. 초등학교 시절 책상에 앉아 칼로 연필을 깎는 일은 대단히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러 연필을 깎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연필을 깎는 것은 먹을가는 것처럼 들떴던 마음을 다스리며 한곳으로 모으는 훈련이다. 적당한 힘들고 칼을 잡고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사르륵사르륵 육각형의 나무를 깎아내고, 뾰족하게 까만 심을 갈아내는 일은 마음에 굳게 박힌 아집을 갈아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 마음을 연하게 그려내는 연필은 수수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을 연필로 적는다면 선물 받은 네 자루 면 가능할까. 쓰다가 마음에 안 들면 지우개로 지우고 마음 가는 대로 다시 써도 된다. 볼펜처럼 한번 써 놓으면 절대 지울 수 없는 고집이 아니다. 잘못 쓰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써도 절대로 화내는 일이 없다. 나에게만큼은 연필은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포용과 배려의 상징인 것이다.

이향규 작가의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에서는 사물에 담긴 사적이면서도 친밀한 감정들은 들여다볼 수 있었다. 파킨슨병을 알리는 남편의 파란색 팔찌와 영국으로 처음 이주하고 힘들고 외로웠던 가족들에게 따뜻함을 나눠주웠던 교회와 펍,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마을 안의 공동묘지 등 일상에서 평범하게 마주칠 수 있는 여러 사물과 장소를 통해 지금까지의 삶에서 느꼈던 삶의 온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토니 몸은 이제 누가 보더라도 떨린다. 움직임은 현저히 느려졌다. 지난가을부터 고무 팔찌를 오른 손목에 끼고 다닌다. 파란색과 하얀색으로 된 팔찌에는 파킨슨병 지원 단체 연락처와 함께 이런 문구가 있었다.

"저는 파킨슨병 환자입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세요" 사람이 있으면 이걸 보여 주면 되겠다며 좋아했다. 토니는 몇 달간 팔찌를 벗은 적이 없다. 샤워할 때는 물론이고 잘 때도 끼고 있다." p24

"펍은 진짜 동네 '허브' 같아. 중요한 일을 하네." 에이드리언은 펍이 동네 네트워크의 중심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계산대 아래 선반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보여 줬다. 코팅까지 해서 제법 잘 간수하고 있었던 오래된 신문 기사 제목은 이랬다.

"커뮤니티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은 학교, 교회, 그리고 펍이다."

맞다 한국에서 이주해 온 우리를 반겨 준(굳이 반기지 않더라도 우리가 어딘가 속할 수 있게 해 준) 곳도 딱 그 세 곳이었다. 아이들은 학교, 나는 교회, 남편은 펍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p134

"여기에서는 누군가가 죽은 이를 생각하며 남긴 기억 조각을 만나는 것이 아주 흔한 일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은 떠나간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거리에 벤치를 만들고 공원에 나무를 심는다 마을 곳곳에 있는 나무 의자의 등받이에는 보통 '사랑하는 기억을 담아'로 시작해서 그 사람의 이름과 생몰 일을 적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이 많다. 나는 그런 벤치를 보면 천천히 걷게 된다. p189

일상의 익숙한 물건을 통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느꼈던 소소한 이야기의 이면에는 장애인, 돌봄 노동, 전쟁, 남북 분단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저자의 생각 또한 드러나 있었다. 지금까지 세계는 물질적인 방식으로 사회 전체적인 부를 상승시키는 방식을 우리 사회에 집중해왔다. 그나마 사회 발전의 성과로 전반적인 복지수준도 함께 높아졌지만 "앞으로도 사회가 지속 가능한가?"라는 포용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저자는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희생과 실천들이 세상을 바꿔왔음을 말하며 서로를 보살피는 공동체의 따뜻한 손길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이 책을 읽게 될, 읽은 모든 이들이 앞으로도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될 사회의 변화에 장애, 나이, 경재 능력 등이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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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설계사
단요 지음 / 아작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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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 GPT의 출현으로 세계는 또 다른 시대를 맞이했다. 새 시대의 경이로움도 잠시, 지금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다가올 것인지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이해해야 할 시점도 같이 찾아온 것이다. AI가 만든 뛰어난 결과물에 감탄하며 실용적인 사용법에 주목하고 있는 오늘날, 이 신기술이 인류에게 끼칠 철학, 전략적 영향에 관한 논의는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를 대신해 생각과 판단을 해주는 인공지능을 당연하게 여기는 다음 세대의 등장이 예고된 가운데, 걷잡을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지금 당장 모든 인류가 위와 같은 질문과 마주하여 AI의 효용과 한계를 합의해야 한다. 아직 인간이 미래의 주도권을 쥐고 있지만 과연 인간 이상의 스펙을 가진 AI 로봇이 등장한다면 인간들의 우위는 유지될 수 있는 걸까?

물에 잠긴 서울의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의 소설<다이브>로 독자들에게 다가온 단요 작가는 제3회 문윤성 SF 문학상 장편 대상을 받은 <개의 설계사>로 돌아왔다. 지금의 기술력으로 보아 멀지 않은 미래에 인공지능 설계사 도하에게 톱스타 릴리와 그녀의 AI 로봇 개의 방문, 그 후 릴리의 전 애인 백해나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들.

"말하고 위로하고 웃는 기계들은 산업 발전의 부산물이에요. 패턴 처리와 시행착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을 위해, 진짜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하는 전자뇌가 만들어진 거죠.

그런데 이런 산업용 인공지능에게는 자의식이랄 게 없어요.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도 않고요. 주어진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할 뿐이죠. 일관적인 감정처리에는, 의지와 편향을 갖추고 사안을 해석하는 능력에는 별도의 연산이 필요하거든요. 산업 현장에 덤으로 끼워 넣기엔 부담이 큰 기능이죠.

요컨대 여러분의 곁에 있는 기계 친구들은, 신형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성능으로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p117

가법게 생각했던 단요 작가의 이번 작품은 전혀 가볍 않았다.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 로봇이 가지는 고뇌와 AI가 가지고 있는 윤리적 딜레마는 소설에 깊이를 더해 갔지만 한편으로는 무겁게 다가왔다. 사람이 아닌 기계라는 점에서 AI의 판단에는 인간 행동의 기초인 '도덕적 감정'이 반영될 수 없다. 설사 인간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기계라는 점에서 도덕적인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조차 결국 자신의 연산상에서 가장 유리한 결론을 도출하게 될 것이고, 이는 인간 기준에서 윤리적 문제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기계들이 감정의 고저를 아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느끼도록 만들어지는 것부터가 사용자의 편의를 위한 강압이라고 봐요. 이용하는 거죠. 쾌락과 고통에 무감각하고 무엇도 욕망하지 않는 기계, 끔찍한 사건에도 평정을 유지하는 기계, 완벽히 객관적이고 정의로운 기계는 산업현장이나 경영전략실에 놓일 뿐이지 인간의 친구는 되지 못하니까요. 우리네 설계사의 업무란 결국 인간이 아닐 수 있는 존재에게 인간의 염증을 주입하는 것이고요." p214

다양한 형태의 인공지능은 현재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게다가 지금보다 더 고도로 발전된 인공지능 로봇들의 상용화 또한 머지않아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만큼 인공지능을 설계하는 오늘날의 설계사에게 도덕 윤리가 중요해지고 있다. 그동안 공상과학 소설과 영화를 통해 꾸준히 제기되어온 기계의 도덕성은, 지능이 있는 기계의 출현으로 이제 현실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단요 작가의 <개의 설계사>는 기계의 윤리적 고찰뿐만 아니라 개발자의 윤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계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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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ran8200 2023-07-11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정확하게 잘쓰신것 같아요~
담세대가 고민하고겪어야할 고민을 미리예견하고 대비해야할것을 정확히 짚어주신것 같아요~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