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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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자꾸 밖으로만 나가려던 마음이 이제는 멀리 떠나보냈던 연을 감아들이듯 안쪽으로 다가온다. 햇빛은 이제 눈이 부시거나 따스하다는 말들보다 권태롭다는 말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오래된 숲속 어딘가에서 혼자 고요하게 있고 싶고 번거로운 일들을 피하고 싶을 때가 많다. 이제 삶은 적당히 두렵고 적당히 기분 좋은 이중적 감정의 연속이다. 두렵다는 것은 과연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고, 기분 좋다는 것은 아직도 변화와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재희 작가는 서른세 살에 결핵성 뇌수막염이라는 치사율 높은 병에 걸렸었다. <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에서는 그녀의 삶의 커다란 변곡점이 되어버린 사건 이후로 한결 가볍고 자유로운 삶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다가가본 이라면 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작고 소박한 일상의 길 위에서 발견하는 감사가 또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언젠가 한순간의 방심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갈 뻔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자연 시간에 올챙이가 개구리로 변하는 과정에 대해 배웠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집에 오자마자 깡통을 들고 동네 어귀에 있는 못으로 향했다. 그 못은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는 꽤 큰못이었고 가장자리 한쪽에는 웅덩이가 몇 개 있었다. 나는 올챙이를 잡기 위해 웅덩이 주위를 맴돌다 그만 다리가 미끄러져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곳은 꽤 깊은 곳이었고 물속에서 한두 번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나무 그늘 밑에 누워 있었고 옆에 아버지가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로 인해 나는 또 한 번의 인생을 사는 셈이다. 물속에서 쑥 올랐다 내려올 때의 기억이 아직도 뚜렷하다.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찰나의 짧은 순간에서 느낀 미지의 감정에는 두려움과 그리움이 공존하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어쩌면 죽음은 항상 우리와 마주하고 있어 그 순간이 오면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보았다. 이게 내 인생일까? 그러곤 한참 후에 스스로 대답한다. 맞아. 이게 내 인생이지. 그런 자문자답을 하다 보면 사실은 내가 어떻게 살든 무엇을 하든 그게 전부 다 내 인생이었다는 것을 언젠가 알게 된다. 내가 꿈꾸기만 했던 어떤 일, 내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놀라운 행운,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고통,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괴상한 일, 무수히 많이 들어보았지만 그게 바로 나 자신의 일이 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사건과 사고들. 그런 일들이 어느 날 아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다. 마음의 준비 같은 것은 하지도 못한 채로 그런 일들을 맞게 된다. 닥치면 어떤 식으로든 나는 살아낸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인생이 된다. 진짜 내 인생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 있었다." p87

한순간에 죽음으로 이어지는 우리 삶에서 명성을 좇는 것은 인간의 속성일 테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는 행동인가. 그러나 각각 꿈꾸는 성공은 조금씩 다르리라. 번드레한 직함을 늘어놓고자 무리수를 두며, 인생의 자랑으로 취하고자 했던 사람도 결국은 자기 것이 되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그들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허무하다. 허명을 앞세우다 그 속에 갇혀 버린다. 얻으려고 해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기 삶이 오롯이 이웃을 위해 내어놓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기 일에 충실했으며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일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부끄럽지 않은지 우리에게 길을 알려준다. 그러기에 값어치 있는 이름이 되었다. 진정한 이름은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묵묵한 삶 뒤에 따라올 때 빛난다.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재능은 나에게 없다. 넓디넓은 천사 같은 큰마음도 내겐 없어 보인다. 지극히 평범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보통 사람이다. 오래도록 기억될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무명으로 살 일이다. 작자 미상이라 적힌 옛 그림에서 더 진한 정감을 느끼는 것처럼. 이름 있는 화려한 꽃보다는 이름을 알지 못해 풀꽃이라 부르는 은은한 꽃잎이 더 오래 가슴에 남아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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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최선
문진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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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삶의 행보로부터 거리를 둔, 천천히 움직이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계의 한쪽을 받치는 그들은 어둠 속에서 암순응을 하는 것에 익숙하며, 사람들 앞에 나서기보다는 가만히 듣고, 관찰하며 상대를 이해하는 이들이에요. - <최소한의 최선>으로 들어가는 글

문진영 작가의 글에는 화려한 서사나 극적인 스토리보다는 인물과 일상의 결에서 잔잔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불행의 어떤 근원을 다룰 때도 그 근원들이 깊은 시간 속에서 새로운 이해의 장으로 강하게 견인되는데,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어도 선명한 현실로 구체화되면 아주 미묘하고 복잡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최소한의 최선>은 그런 특징들이 잘 표현된 소설집이다.

[미노리와 테츠]에서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주위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던 친구 수민과 떠난 일본 여행에서 미노리와 테츠 부부를 만나 친해진다. 그 후 수민에게서 그들 부부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어느 날 미노리에게서 수민과 함께가 아닌 단둘이 보기를 청하는 메시지를 받게된다. 그렇게 미도리와 만남에서 두 가지 사실을 듣게 되는데 수민이 일본에 놀러왔을 때마다 수민 앞에서 테츠는 미노리가 처음 보는 얼굴을 짓고 했다는 것과 미노리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둘 사이엔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무언가 특별한 분위기를 머금고 있는 수민으로 인해 둘의 사이가 멀어진 것이리라.

"빛이 환할수록 더 짙어지는 그림자에 관해. 임계점에 닿기도 전에 쉽게 무너져버리는 마음에 관해." p31

[오!상그리아]에서는 여행작가의 삶을 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집을 비우는 엄마.할머니의 품에서 자란 '나'는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그간 알 수 없었던 아버지에 대해 들려준다. 엄마의 출생도 평범하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셨던 할아버지가 어느 날 할머니에게 갓난 아기를 덥썩 안겼고 그렇게 친모를 모른 체 성장해 온 엄마의 이야기.

[지나가는 바람]에서는 갭 이어를 갖기로 한 '나'는 일년전에 퇴사한 입사동기인 민지씨의 반짝이는 인생을 부러워한다. 한편 평범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후배 우림과의 만남에서 시간에 흐름에 몸을 맡기는 평범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린 아마 평생 이러고 살겠지. 갈대처럼 흔들리면서.

근데 갈대 괜찮지 않나. 지나가는 바람에 한껏 몸을 누이면 되니까. 한참 엎어져 있다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고, 또 엎어지고. 누가 누구를 일으켜줄 수는 없지만, 같이 엎어져 있는 건 참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우림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냥 속으로 생각만 했다." p225

주목받는 화려한 인생이 아니라도 희미한 온기를 머금고 살아가는 이들. 주목받는 이들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들의 삶의 방식보다는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이어나가는 사람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존재들 곁에서 일어나는, 우리 삶에서 늘 일어났고 일어날 일이지만 가만히 되짚지 않으면 함부로 잊히거나 지워지고 말 순간들이 마음 한곳에 스며드는 그 감동이라는 것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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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지나간다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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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숨김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삶과 가능한 숨기고 싶은 모습이 공존한다. 지극히 당연한, 본능적인 일이다. 내면의 갈등, 어둠과의 싸움은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것은 특별히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 있는 자들에게서 두드러지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작중 인물이 품고 있는 본능에 가까운 감정이나 불안 등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저자의 이번 소설은 '비밀'에 관한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야행>에서는 죽은 남편의 수첩을 보며 비밀 없는 평범한 삶에 허무함을 느끼고, <밤의 마침>에서는 한순간 실수였다고 하지만 자신의 인생에 치명적일 수 있는 비밀이 추문으로 폭로되는 것을 거짓으로 막아내고, <비밀의 호의>에서는 50년 전 여동생이 자신의 방에서 잔 후 나흘간 집에 돌아가지 않고 주위에 다그침에도 침묵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나흘간은 적어도 한 사람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수첩을 보며 가졌던 긴장감, 남편의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기대감과 혹시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남편을 의심한 죄책감에서 벗어났다. 일생 성실하고 가족에 충실했던 남편에게 감사했다. 남편이 아무런 비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세상을 떠난 남편이 애틋하고 그리웠다.

하지만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실망감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편 역시 이렇다 할 비밀이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열정이나 정념 같은 것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문에 자신의 인생마저 더욱 시시해지고 심드렁해지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야행 P25

절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비밀, 스스로에게도 엄격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무언가. 숨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의 차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 비밀.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원천적으로 타자와 공유가 불가능한 비밀에서 보이는 것은 인간이기에 한없이 허무하고 고독하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모든 소설이 그러하겠지만 소설이란 무의미에 맞서 삶의 의미를 발굴하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미화라는 강박 그 자체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 이 둘 사이의 쉽게 잡히지 않는 균형을 찾아가면서 요약이나 개념화의 욕망 밖으로 버려지고 흘러나가는 삶의 순간들을 쉼 없이 붙잡고 있는 작가들의 노력이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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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박물관
이수경 지음 / 강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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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을 하다 보면 소설을 보는 눈이 달라 놀라곤 하는 일이 잦다. 한정된 틀 안에서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 아닐까 싶지만, 예상하지 못하게 돌출해 나온 그런 차이들은 숙려의 시간을 갖게 한다. 그래서 선택의 시간이란 자주, 독서모임에 임하는 동료들과 그들이 읽어낸 작가에게 배우는 시간이 되곤 한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각자 다른 취향을 가진 회원들이 골라낸 몇 권의 작품들이 올라왔다. 이미 각자의 안목에서 충분한 절차를 거친 작품들이기에 이 중 어떤 작품이 선택되더라도 이상할 것 없다. 그러니 이 작품들을 두고 생겨난 견해차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서로 다른 생각들의 존재는 분명했고, 그 속에서 생겨난 차이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 틈을 메워보느라 머리와 마음이 바빴다.

삶답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문학

결국 모두가 선택한 소설은 이수경 작가의 '자연사박물관'이었다. 22년에 별세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작가를 연상하게 하는 이 소설은 한국 사회의 약자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들의 처지를 알리는 소설이다. 분쇄기에 손을 잃고 목을 매 자살한 방글라데시 노동자 아불의 죽음 그 부조리한 회사의 운영 방침에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감행하지만 회사가 고용한 용역 직원들에게 폭행을 당하며 결국, 해고되어 굴뚝에 오르고, 폭력을 일삼았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겨우 지옥을 벗어난 '나'가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난이라는 또 다른 지옥이라는 이야기, 회사를 상대로 승산 없는 싸움을 시작하려는 남편을 지지하면서도 생계를 걱정하는 아내의 심정을 담은 이야기도 조세희 작가가 그러했듯 우울하고 암울한 노동자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왜 손발을 그리지 않는 거야?" 낮에 재이에게 물었을 때 재이는, "그게 없으면 힘들지 않을 테니까, 실수도 안 할 테니까...."더듬거리며 말했다. p164

이수경 작가의 소설 속을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맥점은 다음의 두 가지이며, 그것은 이수경의 문학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이다. 그 하나는 그녀에게서 소설을 쓰는 일이란 근본적으로 '어둠 속의 진실'을 밝혀내는 작업이라는 점, 그 둘은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삶답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 '어둠'이 현실 혹은 삶에서의 정치, 경제, 사회적 의미의 부정적 측면들을 암시하는 것임을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고, 그렇게 볼 때 그 속에서 삶답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계층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는 너무도 명백하다.

기초 생활수급비 43만 원으로 생활할 수 없다며 연탄을 피워 자살한 60대 부부, 쌍용차 구조조정 때 희망퇴직했던 30대 남성이 자신의 차 안에서 자살하고,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었던 한 여성은 안양의 월세방에서 숨을 거뒀다. 그녀는 이웃집에 " 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라는 쪽지를 붙여놓은지 며칠 지난 뒤에 죽어 있었다. 그리고 강릉의 한 원룸에서는 대학생이 번개탄을 피워놓고 죽었다. 방에는 즉석복권 여러 장과 학자금 대출 서류가 있었다.

이들의 행동 밑바닥에는, 서민들 일반이 가지는, 정부의 정책이나 사회, 경제적인 상황 등의 외부적인 힘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불안정한 생활 터전에 대한 불안감에 비례하여 품게 되는 외부적인 힘에 대한 절망이 담겨 있다. 현실에서 죽음을 선택한 이들도, 소설 안에서 등장하는 이들도 모두 절박한 현실에서, 생존 문제라는 하나의 공통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줄곧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에 관심을 보여온 이수경 작가의 <자연사박물관>은 가난한 소외 계층의 일상을 날카롭게 파헤침으로써 노동 문학으로 불리는 조세희 작가의 작품을 이은 우리 사회의 무력한 소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보석 같은 작품으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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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룸 소설, 잇다 3
이선희.천희란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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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대한민국 여성들은 여전히 차별받고 있다. 남녀평등의 시대가 왔다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이다. 여성들은 이 평등하다는 세상에서 오히려 일상에서 겪는 불안과 고통들을 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마무리해가는 여성들은 '나'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다. 나보다는 가족과 아이, 타인에게 맞추는 삶이 더 익숙했고, 그게 여자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전통적 가치가 중시되던 시대에 자라며 아이다움, 여성성과 같은 자연스러운 내면의 특성을 억압했기에 더욱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려웠다.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에 담아내어 두 여성 작가의 소설이 하나의 가능성과 희망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기획된 잇다의 화려한 첫 막을 연 <백신애 최진영의 천천히 오래오래>를 인상 깊게 읽어서인지 <이선희와 천희란 작가의 '백룸'> 또한 강한 인상을 주었다. 이 책에는 불의의 사고로 다리가 절단되어 불구가 된 주인공은 남편의 애정이 감소되자 신경병적인 증세를 보이며 불안의 나날을 보내며 결혼으로 인한 인생의 상처에 대한 보상으로 남편의 목숨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이선희 작가의 대표작 <계산서>와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시대에 한 여성의 몰락을 그려나간 <여인 명령>, 그리고 이 책의 표제이자 천희란 작가의 소설인 <백룸>은 게임 스트리머인 그녀가 성소수자로서, 여성으로서의 불쾌하고 막막한 일상을 그려낸 이야기가 실려있다.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이전에도 있었지만 자본주의 아래서 더욱 강화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발생하고 있다. 강간, 강제 결혼, 여성 매매, 강제 성매매, 여성에 대한 고문, 소녀 매매, 여성에 대한 공공연한 모욕 등은 가부장적 폭력의 형태들이다. 상징적 폭력과 매체, 인터넷, 컴퓨터게임, 광고, 패션 산업 등에서 여성 몸을 상품화하는 것은 이윤을 위한 경쟁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 왔다.

무작위로 생성된 방들이 끝없이 나열된 미로를 묘사하는 백룸을 표제로 삼은 건 남성중심주의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이 가지는 공포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폐쇄된 공간에서 자신을 압박해오는 사회적 편견으로 숨죽여야 했던 그녀들의 입장이 되어 보면 마치 백룸에서 헤매고 있는 모습과 겹쳐진다.

"변호사의 정체가 확인되자 피의자가 올바른 법의 심판을 받았다는 소식에 대한 축하보다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여성의 퀴어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정의로운 변호사에 대한 말들이 훨씬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p439

소설에서 언급하던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여주인공의 레즈비언 논란으로 떠들썩하던 시기를 기억한다. 나 역시 주인공 엘리만큼은 모두가 상상하던 평범한 행복을 찾아 살아간다는 엔딩을 기대하고 있었다. 여기서 평범한 행복, 보통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동성이 아닌 이성과의 만남이 당연하다고 단정 짓던 내 안에 깊게 뿌리박혀 있던 편견과 고정관념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질적인 존재라고 레즈비언을 본질화, 규범화한 남성우월주의 사회 분위기 역시 따져볼 문제다. 나는 동성애를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실제로 동성애자를 만나거나 함께 지낸다면, 분명히 동성애를 떠올려 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하던 배려, 소통, 공감, 연대, 정의 등은 말해질 수 있고 활자로도 적힐 수 있지만 그렇게 간단히 언급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일상적 실천이 어렵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천을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차별과 편견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의 내밀한 삶이 녹아 있다. 여성의 삶을 안팎으로 규정짓는 시선과 사회적 압박,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목소리들이 중첩되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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