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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평점 :
"나는 사라지고 싶었다. 삶으로부터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삶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p451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태어났을 때는 자신의 몸조차 스스로 가누지 못하는 존재로서 철저히 타인에게 의지하여 생존하여야 하며, 이후 점차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간다. 처음부터 타인에게 의존하여 자라기 때문에 타인의 영향을 받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완성시켜 나가는 존재이다. 물론 유전적으로 영향을 받아 개인의 한 부분이 형성되어 있지만 이후 성장 과정에서 타인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인간은 성장해 나간다.
이창래 작가의 여섯 번째 장편 소설 <타국에서의 일 년>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동양인의 피가 아주 조금 섞이고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아픔을 가지고 있던 백인 남성의 성장 이야기다. 이 소설은 퐁 로우와 만나 하와이, 홍콩, 마카오 등의 비즈니스 여행으로 보낸 일 년과 그의 연인인 싱글맘 밸과 그의 아들 빅터 주니어를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다.
"흔히 사람들은 순간을 살라고 조언한다. 끊임없이 미래나 과거를 보려 들지 말고, 그 모든 걸 더해 보지도 말고, 현재라는 풍성하게 무르익은 과일을 맛보라고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면 인간은 그 순간에 머물게 된다. 중독자처럼 자신을 속이고 포기해 버린다. 그 모든 달콤함이 썩는 것 외에는 변화도 일으킬 수 없게 될 때까지." p29
친구의 부탁으로 골프 캐디를 하다가 만난 중국계 사업가인 퐁 로우를 만나고 틸러의 좋은 인상에 퐁은 그가 거느리고 있는 여러 가게에서 시식을 하고 평을 남겨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퐁은 틸러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그에게 자신의 사업에 필요한 비즈니스 여행의 동반을 부탁한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퐁과의 여행은 틸러에게 커다란 아픔으로 남는다. 모든 것을 버려둔 채 퐁에게 모든 것을 맡긴 틸러의 타국에서의 일 년으로 후 틸러는 밸이라는 자신과 전혀 다른 낯선 여자와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나는 퐁을 잘 몰랐지만, 그의 말투와 움직임에는 충실함이 있었다. 동네를 자기 마당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로지르는 태도에서 확신이 느껴졌다. 그는 테라스의 갈라진 모든 틈을 새로 피어난 모든 수국 꽃송이를 소유한 듯했다. 흩날리는 나뭇잎 한 장이나 자갈 한 개도 예외 없이 그 모든 게 퐁이라는 사람의 존재 안에 섞여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p65
"오랜만에 처음으로, 나는 완전한 만족감을 느꼈다. 혼자 있었는데도 내가 딱히 내 자리를 찾은 것은 아니라도 최소한 지속적인 상황을 기다리는 동안 새로운 존재 방법을 찾았으니까." p550
이창래 작가의 소설 속에서 그려내는 인물들은 대게 화해롭지 못하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하고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여기에서 인간과 인간의 근본적인 괴리와 최근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직접적인 인간관계 측면이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비대면적이고 개인적인 측면이 늘어나는 방향으로 환경이 변화한 문제, 그로 인해 매우 이기적인 관계만을 추구하거나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는 상처들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들의 모습이 그렇다.
"나는 핀으로 꽂힌 귀뚜라미였다. 비즈는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말이다. 나는 반박했다. "노력은 했지." 내 노력으로 뭐가 달라진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여기서든, 타국에서든 모든 일이 잦아든 지금은 내가 좀 괜찮아졌는지 모르겠다. 나는 과거의 자도 구동 모드로 전화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그 디폴트 상태의 소년, 그 디폴트 상태의 영혼이 되지 않을 것이다. 피도, 사랑도 묽어진 녀석. 자기의 머릿속에서만 노래를 보를 수 있는 녀석." p685
나의 타국에서의 긴 유학 생활 동안 하던 고민들과 일던 분노, 받은 상처와 고마움 같은 감정들로 무엇이 달라졌을까? 일본어가 서툴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책을 훔친 도둑으로 몰려 몸수색을 받아야 했던 안 좋은 기억도, 형편이 좋지 않은 유학생들에게는 유난히 차갑게 굴던 교수의 구역질 나는 편견, 마지막 학기 학비를 낼 수 없어 귀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나에게 아무런 조건도, 기한도 없이 큰돈을 빌려준 아르바이트 가게의 일본인 점장님의 친절도 지금의 나로 성장하기까지의 하나의 과정이었을까?
삶의 이유와 감각을 잃어버린 타국에서의 일 년을 통해 틸러는 또 다른 타인으로 그것을 회복하려는 변화의 과정을 담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타인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신을 형성해 나간다. 인간이란 한없이 연약하고 무른 존재이므로 끊임없이 타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그 되찾을 길 없는 타인과의 유대와 상실이 꼭 비관적이고 슬픈 것만은 아닌 것을, 그 상실 속에 참으로 깊은 인생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성찰해 주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