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지나가다 소설, 향
조해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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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어머니가 됐다. 세상의 길로 자식들이 떠나는 걸 보는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 한구석 너무 오랫동안 포기하고 지내야만 했던 그 세월, 꿈 많은 스무 살 여인의 처녀 적 세월. 나는 어머니의 인생을 알지 못한다. 손등의 수많은 주름의 길들이 이제 얼굴로 눈가로, 그리고 힘없어진 눈빛까지 자글자글 주름 같은 길들이 쏟아져 들어가고 당신의 허리는 굽어 세월을 짊어지고 가신다.

조해진 작가의 <겨울을 지나가다>는 주인공 '정연과 남은 가족들은 어머니를 췌장암으로 잃은 후 큰 슬픔과 고통을 겪는다.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감정들과 만나는 고요의 시간을 보내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어머니가 남긴 따뜻한 마음으로 정연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게 된다.

"한 사람의 부재로 쌓여가는 마음이 집이 된다면 그 집의 내부는 너무도 많은 밤과 복잡한 복도와 수많은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리라. 수납공간마다 물건들이 가득하고 물건들 사이 거울은 폐허의 땅을 형상화한 것 같은 먼지로 얼룩진 곳, 암담하도록 캄캄한 곳과 폭력적일 만큼 환한 곳이 섞여 있고 창밖의 풍경엔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그런 집...." p19~20

누군가를 떠나보냈던 기억은 겨우 찾아온 행복을 의심하게 한다. 그렇게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한다는 변함없는 진실을 받아들이며, 있었던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전제가 된다. 잘 지내다가도 잘 지내지 못하겠는 이유가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약속한 적 한 번 없이 오는 일방적인 성질의 슬픔은 오고 싶으면 오고, 왔으면 가고 싶을 때까지 머무는, 배려 없는 사람처럼.

소설은 주인공의 슬픔의 크기를 나타내 듯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와 가장 추운 날인 '대한' 곧 봄이 다가옴을 알리는 '우수'에 이르며 절기의 변화에 따라 이어진다. 어제보다 더 슬프든 덜 슬프든 견뎌야만 하는 날의 연속일지라도, 그리고 견딜 만할 때 더 큰 슬픔이 찾아올지라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견디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운 차려서 다행이네"라는 말을 들을 만큼 슬픔을 견디며 사는 것은 정말 쉽지 않지만, 그것은 슬픔 다음의 더 큰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는 나의 마음이다.

"사실 옷은 시작에 불과했다. 엄마의 양말과 머플러, 엄마가 직접 겨자색의 굵은 실로 뜬 털 모자에도 내 손은 뻗어갔다. 엄마의 물건에서 구불거리는 흰 머리카락을 발견한 날이면 핀셋으로 조심조심 떼어내 빈 유리병에 모으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그건 그 나름대로 즐거운 취미가 됐다. 엄마가 쓰던 비누, 스킨과 로션, 영양크림을 나도 썼고 엄마에게는 애장품이던 금목걸이라든지 팔찌를 하고 산택을 나간 적도 있었다. 내 몸에서 엄마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고 만져지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엄마에게 보호받는 느낌을 받았고, 때로는 눈앞에 엄마가 있다는 듯 허공에 대고 어리광을 부리고도 싶었다." p75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는 사실이 삶을 응시하는 시선의 깊이를 가늠해 주는 척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아픈 경험 때문에 오히려 시선이 굴절되어 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게 울어본 사람으로서, 자기 삶의 어느 귀퉁이에서 혼자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해진 작가의 글이 큰 위로가 되어 삶은 새로운 문을 열어주기 위해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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