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세계사는 강대국 중심의 서사라서 작은 나라들의 역사는 묻히기 쉽다. 하긴 이제는 문과반 학생들도 거의 선택하지 않는 과목이 되어버렸으니 그 방대한 역사를 교과서 한권에 담으려면 작은 나라들은 한줄 끼워넣기도 힘겨울 것이고 그마저도 공부하는 학생이 드물것이다. 나도 세계사에 대한 지식은 학교다닐때 시험 공부하느라 외운 것하고 국제 뉴스에 나오는 정도가 대부분인데 그나마 책을 읽다가 그 시대 배경에 관심이 가서 조금 더 알아보는 정도다.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 분쟁으로 최근 뉴스에 자주 등장하였지만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잘 알지는 못했다. 체르노빌에 대한 책을 읽다가 조금 알게 되고, 그러다가 지난번에 <차일드44>라는 소설을 읽으며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아픈 역사에 관심이 가서 이 책도 사보게 되었다. 이탈리아 최우수 그래픽노블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니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것 같았다. 이 책은 작가의 2년간 우크라이나 여행의 기록이다. 나처럼 작가에게도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의 하늘에 속해있는, 구름에 덮힌 듯 모호한 곳이었다. 그곳에 2년간 살면서 만난, `철의 장막`의 품에 갇힌 채 채어나고 살아갈 운명을 가졌던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알려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례를 읽다보면 어떻게 그런 세월을 살아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20세기초는 우리만 일제강점으로 수난을 겪은 것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끔찍한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 힘든 시기를 겪어낸 오늘날에도 여전히 과거에 발목잡혀 있는 현실을 보게 된다. 그런 끔찍했던 과거가 그림으로 되살아나서 더 가슴아프게 다가오는 책이다.
사랑스런 내 아이가 일을 저질렀다. 현금인출기박스안에서 자고 있던 노숙자를 폭행하고 방화까지 저질렀다. CCTV에 찍혀서 증거가 남아있는 바람에 뉴스에도 보도될 만큼 사회적으로 파장을 불러 온 일이지만 흐릿한 화면때문에 그게 내 아이라는 건 부모만이 알아볼 수 있다. 즉 나만 입을 닫는다면 이 사건은 조만간 잊혀지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자식을 보호하기 위한 부모의 행동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처음엔 무슨 이런 상황이 다 있나 싶었지만 읽을수록 나도 확실한 선택을 하기가 어려울것 같다.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세상에 아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아들에게 죄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싶다가도 혹시 그게 나의 양심만을 위한 일은 아닌가, 진정으로 아들의 장래를 위한 길인가 고민하게 될 것이다. 보기에 따라 다르지만 그 사건에 고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느정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죽이려는 의도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노숙자가 죽긴 했지만. 사회에서는 청소년들의 과격한 행동에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내 자식을 생각하면 희생양을 원하는 군중들에게 선뜻 내 자식을 내어주긴 힘들 것이다. 처음엔 아이에게 책임을 지는 태도를 가르쳐야 한다는 명분으로 로만부부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나라면 과연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볼수록 혼란스러워진다. 나도 자식을 엄청 사랑하면서도 충분히 이기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정찬을 잘 차려 먹고나서 `소화제`까지 필요할 만큼 읽고나면 속이 더부룩해지는 소설이다.
처음 도전해 본 미미여사의 책. 항상 엄청난 분량에 압도되어 감히 도전해보기가 어려웠던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이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칭찬을 하는지 꼭 한번 읽어보고 싶었지만 엄두를 못내다가 이번에 신작이 나왔다기에, 북스피어 창간 10주년 기념 르지라시 특대호도 서비스로 준다길래 (사실 이게 더 탐나서) 과감하게 질렀다. 소문대로 미미여사의 책은 가독성이 좋아서 팬이라면 어마어마한 두께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술술 넘어가겠으나 애초에 다른 사심이 있어 구입한 내게는 분량이 좀 버거웠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꿈마저 앗아가는 다단계 사기를 소재로 한 이야기라서 최근 다단계 사업에 심취해있는 언니의 이야기와 겹쳐지며 은근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다시 한번 읽어보며 어디가 복선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지만 역시나 엄두가 나질 않는다.
황정은의 독특한 문체의 매력에 빠져들며 읽었다. 그녀의 소설은 소리내어 읽기에 참 좋다. 그녀만의 독특한 의성어와 그녀만의 호흡이 소설에 푹 빠져들게 한다. 소라 나나 나기가 내게 이야기를 들려 주는 듯한 착각에 빠져서 그들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고 빠져들다보면 인간이란 참 덧없고 하찮고 , 인생의 본질은 허망하고, 그러므로 무엇에도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그래서 계속해보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어차피 큰 기대가 없다면 더 나빠질 것도 없을테니까. 세상엔 좋은 것이 많지는 않지만 (좋은 것이란 것은 어차피 귀한것, 귀해서 좋은것이므로) 계속 되는 삶에서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인연들을 만나고 그 사랑으로 또 하루 살아갈 힘을 얻을 테니까.
#소수의견 : 대법원 등의 합의체 재판부에서 판결을 도출하는 다수 법관의 의견에 반하는 법관의 의견. 영화가 우여곡절 끝에 개봉된다는 소식을 듣고 원작소설이 있다는 말에 부랴부랴 찾아 읽어보았다. 2009년 용산 사건을 소재로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뿐 작가에 대해서나 소설에 대해서도 전혀 사전 지식이 없었다. 그래선지 처음엔 바로 몰입되지는 않았다. 법정소설인지라 어려운 법률용어들이 있어서 편하게 읽히지도 않았다. 나는 편한 자세로 읽기를 포기하고 책상앞에 앉았다. 메모도 해가며 소설 속 상황에 적극적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다. 사실 2009년 용산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외침을 본의아니게 외면하고 말았던 죄책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어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용산 사건이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왜곡되고은폐될 때,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눈과 귀를 똑바로 열지 않으면 진실을 볼 수 없겠다고. 그리고 아직까지도 우리는 진실을 보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소설이 직접적으로 용산을 거론하진 않지만 읽는 동안 내내 용산이 오버랩된다. 범죄를 조작하려는 자, 말장난같은 법조문을 가지고 흔들림 없는 견고한 삶을 추구하는 자, 그들 틈에서 약자들의 소수의견은 살아남기 어렵다. 진실은 권력을 쥔 자와 가진 자의 해석에 의해 달라지는 것. 그것을 뒤엎기 위해선 세가지가 필요하다. ˝국민의 법감정에 기반한 강력한 여론의 지지, 유능한 변호사, 시대의 변화˝이 책에서 사건은 `소설처럼` 어려운 고비마다 의인들이 나타나서 예상보다 쉽게 풀린다. 검사가 당황하고 재판관이 곤란해질때마다 통쾌해지기도 하지만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세상이 쉽게 달라지지는 않을거라고 여전히 가진자들은 견고하고 대다수의 약자들은 세상이 두려워 차라리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소설에서도 볼 수있기 때문이다. ˝기척없이 뿌려진 무수히 많은 질문들. 기억은 시간 속으로 제각기 흩어졌지만 질문들의 몸통은 결국 하나였다. 어떻게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의 문제.˝결국 이 사회를 정의롭게 만드는 것은 국가나 법률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슴에 새기고 진실을 은폐하고 묵인하며 부와 권력을 지키기에만 급급한 자들의 만행을 똑똑히 기억해주는 우리들의 몫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유일하게 감동의 눈물이 터져 나왔던 순간이 법조문으로 무장된 변호사의 통쾌한 변론이 아니라 어려운 순간에도 바른 삶의 태도를 보여준 죽은 경찰관 아버지의 진술에서였다. 법은 차갑지만 정의는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