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윗 프랑세즈
이렌 네미로프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세계사 / 201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소개를 우연히 보고 나는 "어머! 이건 꼭 사야해!"를 외쳤다.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작가가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유대인이고 사후 62년만에 세상에 나온 유작이라는 이유에서다.

게다가 이미 영화화되어 개봉을 앞두고 있다니! 게다가 주인공이 무려 미셸 윌리엄스! 내가 불안 연기의 일인자로 꼽는 마성의 매력을 지닌 미셸!!

 

 

당연히 전쟁동안 벌어진 유대인의 참상에 대해 쓴 소설이라고만 생각했던 나는 소설을 읽으며 조금 의아해졌다. 소설은 두개의 장 <6월의 폭풍>과 <돌체>로 구성되었는데, 280쪽에 달하는 <6월의 폭풍>을 읽는 내내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고난에 대한 것도 아니고, 영화 예고편을 보고 대충 어떤 내용일지 짐작해보았었는데 당췌 그런 내용도 아니라서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후반 <돌체>를 읽으며 영화는 이 부분을 영화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소설의 분위기는 예상과는 달랐다.

 

 

<6월의 폭풍>에서는 1940년 6월 파리에 폭탄이 떨어지고 설마설마 하던 사람들이 당황하며 피난길에 오르던 '집단탈주'를 그리고 있다. 다양한 인물들의 피난길을 묘사하며 전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들을 그렸다. 도도한 부자집 마나님 페리캉 부인,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소설가 가브리엘 코르트, 이기적인 예술애호가 샤를르 랑즐레, 자수성가했으나 기품이 없는 은행가 코르트 같은 돈 많고 명성이 높은 귀족들은 자만심에 도취되서 전혀 전쟁의 위협을 느끼지 못하다가 막상 전쟁의 냉혹한 현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들이 혐오해 마지 않는 예의없는 대중들과 똑같이, 때론 더 파렴치하게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귀족들의 파렴치한 모습과 대조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은 은행의 하급 직원 부부인 잔과 모리스 미쇼 부부다. 그들은 은행장 코르트의 차를 같이 타고 피난을 가게 되어 다행이라고 안도하지만 막상 피난을 나서려고 보니 그 은행장의 차에는 은행장의 정부(精婦)와 강아지가 타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밀려난 그들 부부는 기차도 이용할 수 없어서 걸어서 피난을 가야만 했다. 이미 거리를 가득 메운 군중들, 그들은  사실 어딘가로 달아나더라도 어디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걷다가 지쳐 쓰러지면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고 말하지만, 하늘에 비행기가 다가오면 제일 먼저 일어나 옆 사람들을 부축하며 함께 걸었다. 귀족들의 구역질나는 피난길보다 이 민초들의 힘든 피난길을 읽으며 더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은 그들은 '풀잎' 같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리라.

 

책을 읽으며 너무 좋은 장면들이 많아서 엄청나게 메모를 해 두었지만 여기에 다 옮기려면 밤을 새도 모자랄것이기에 아쉽지만 생략한다.

 

<돌체>는 처음엔 <6월의 폭풍>과는 다른 소설인가 했는데 읽다보니 등장인물들이 미묘하게 연결되는 부분이 있었다. 독일군이 점령한 마을 뷔시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6월의 폭풍>에서 전쟁이 삶을 위협하는 폭격이라면, 이제 뷔시에서 전쟁은 적과의 동침이다. 마을의 청년과 가장들이 전쟁터로 불려가 포로가 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그곳을 점령한 독일군이다. 당연히 독일군은 그들의 원수이자 처단하고 싶은 존재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점차 그들에게서 안쓰러움을 느끼고 오히려 점령지의 평화를 즐기게 된다. 적에게 협력하여 평화를 유지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하는 사회적인 갈등을 작가는 뷔시 마을 앙젤리에 가 부인들, 포로로 잡혀간 가스통의 아내 뤼실 앙젤리에와 가스통의 어머니 앙젤리에 부인의 갈등으로 묘사한다.

 

가스통과 애정없는 결혼 생활을 하던 뤼실은 꼼짝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지겹기만 한데,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독일 장교가 그녀의 집에 거주하게 되면서 그녀는 가슴떨리는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마을의 시선은 그들을 매우 엄격하게 감시한다. 독일군에게 조금이라도 웃음을 흘리는 여자들에게는 마을 사람들의 가차없는 비난이 주어진다. 뤼실은 누구보다 그걸 잘 알기에 갈등하지만 전쟁 때문에 자신에게 비로소 찾아온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다.

 

'벌통정신'이라고 표현되는 집단주의, 알지 못할 목적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무리, 내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함께 살고 함께 사랑하고 함께 생각해야만 하는 공동체 정신이 싫다. 그들은 서로의 처지를 알기에 고백도 입맞춤도 없이 예의를 갖춰 그저 함께 걷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뿐이지만 서로의 고향, 가족, 책과 음악을 이야기하며 묘한 행복감을 느낀다. 오히려 그토록 혐오하는 독일군을 이용해 편의를 얻으려고 뤼실에게 이런 저런 부탁을 해대는 (너는 독일 장교와 친하지? 그러니까 이것 좀 부탁해줘 제발....) 이웃과 시어머니가 더욱 가식적이다.

 

 

 

 

 

책은 여기에서 끝이 났다. 작가가 아우슈비츠에서 처형당한 유대인이라고 해서 전쟁의 참상과 독일군의 비열함을 묘사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작가는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보여진 인간 군상의 여러 모습들을 낱낱이 파헤졌다. 어떤 면에서는 사회풍자극을 보는 듯한 재미도 있다. 오히려 독일군에 대해서는 그들도 전쟁의 소모품일 뿐 인간이기는 마찬가지라는 따뜻한 시선도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더욱 안타깝다. 작가 스스로 유대인이라는 민족주의나 공동체주의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은 듯 보이므로. "사람들이 믿는 것과는 반대로, 전체는 사라지고 부분은 남는다. 공동체 운명은 단순한 개인의 운명보다 훨씬 짧다."라는 작가의 메모를 보고 알 수 있듯이. 그러나 그녀는 그런 전체주의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책 뒤편에 작가 메모를 보니 작가는 이 작품을 모두 5개의 장으로 구성하려고 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시킬건지, 어떤 부분을 보충할 건지. 어떤 자료들을 더 모아야 할 지 등이 메모 되어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버금가는 대작으로 완성하고 싶었으나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시간이 너무나 없었던 것이다. 미완성의 소설을 읽으며 내가 무너져버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끝까지 더 보고 싶다. 그들 프랑스인들이 어떻게 되는지, 러시아로 가게 된 독일 장교는 어떻게 되는지, 뤼실은, 브누아는, 장-마리는, 미쇼부부는 어떻게 되는지....

작가는 너무나 급하게 쓴 나머지 등장인물의 이름을 스스로도 헷갈리기도 하는데 이 책의 편집자는 일부러 고치지 않고 그대로 출판했다. 나도 처음 읽으면서 6월의 폭풍 1장에만 '전쟁' 이라는 제목이 있고 나머지는 번호만 매겨져 있어서 의아했는데 이것도 작가가 미처 마무리 할 시간이 없어서인듯 했다. 전쟁이라는 상황과 게다가 러시아에서 이민 온 무국적 유대인이라는 그녀의 존재가 얼마나 위태로웠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예술적으로 완벽한 작품을 남기고 싶어 했는지 깨닫게 된다. 그녀의 말처럼 광기의 시대는 사라졌지만 그녀가 전해준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과 믿음,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 부끄럽고 슬픈 기억들은 영원히 남았다.

 

 

 

 

기독교의 자비심, 수세기에 걸친 문명사회의 너그러움이 헛된 장식처럼 벗겨지고 그녀의 메마른 영혼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적대적인 세상에 오로지 아이들과 그녀뿐이었다. 새끼들을 먹이고 보호해야만 했다. 나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91쪽)

그래놓고도 이제 곧 한바탕 거짓말 놀음이 벌어질 테고, 프랑스 역사의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를 조작해내겠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헌신적인 애국자, 불굴의 영웅들을 찾느라 헛고생을 해가면서 말이야. 맙소사! 난 다 봤어! 물 한 잔만 달라며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들, 닥치는 대로 약탈하는 피난민들, 어디서나, 위에서 아래까지, 무질서, 비열함, 허영심, 무지! 아! 그 잘난 꼬락서니들이라니! (217쪽)

도대체 왜 고통은 늘 우리들 몫이죠? 우리와 같은 사람, 평범한 사람, 서민들 말이에요. 전쟁이 일어나거나, 프랑화 가치가 떨어지거나, 실업률이 올라가거나, 위기나 혁명이 닥치면, 다른 사람들은 멀쩡하지만 우린 늘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아요! 왜죠? 우리가 도대체 뭘 어쨌기에? (247쪽)

몇몇 독일군들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약을 올리나 싶을 정도로 깍듯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울분에 차 굴욕감을 곱씹고 있는 패배자들의 눈에만 그렇게 보였던 걸까?) 그것은 같은 인간에 대한 예절이 아니라, 방금 처형한 사람의 시신에 `받들어 총`을 하는 것처럼 시체에 대해 보이는 정중함이었다. (307쪽)

도대체 뱃속에 뭐가 든거야? 왜 가만히들 못 있는 거지? 내가 어려운 걸 요구했나? 그저 입다물고 가만히만 있으라고 했잖아. 하지만 천만에! 투덜대고, 트집잡고, 대들고,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해! 그래서 어쩌겠다고? 우린 전쟁에 패했어. 안 그래? 그럼 고분고분하게 지내야지. 그 사람들 마치 날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 난 힘겨운 노력끝에 독일군과 좋은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어. (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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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1-26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너져 ㅡ내리는 ㅡ그 절절함이 제게 고스란히 전해져 와요!^^
고생한 글 잘읽고 가요!^^
춥습니다 ㅡ오늘은 ...

살리미 2015-11-26 20:14   좋아요 2 | URL
고생했어요... 타이핑 하느라... ㅋ
한권 다 읽고나니 머리가 묵직해지더라고요.
컴퓨터가 거실 베란다 근처에 있다보니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도 발이 시려요 ㅠㅠ
내일은 더 춥다네요. 그장소님도 추위 조심하세요~

[그장소] 2015-11-26 20:26   좋아요 2 | URL
오로라 ㅡ님도요!^^
정말 너무 추워요 ㅡ겨울 내내 기다리긴 했는데
아무래도 즐길 세 없이...떨다 보내겠어요...

달팽이개미 2015-11-26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곰이 또 읽어보게 되는 리뷰에요~~~정말 그 다음 얘기들이 궁금해요...첫 눈은 설레지만 날이 많이 추워져서..ㅠ 감기 조심하세요~^^

살리미 2015-11-26 21:24   좋아요 0 | URL
제가 있는 곳엔 첫눈이 시시하게 왔어요. 온것도 안온것도 아닌...
펑펑 와줘야 첫눈이라고 좋아하면서 뛰어다닐텐데요 ㅎㅎ
책은 훨씬 더 재밌는데, 너무 많은 걸 얘기하려다보니 리뷰는 오히려 엉성해진 듯 해요. 차근 차근 하고 싶은 말 다 했다간 소설 한권 쓰겠더라고요. 날은 추워지고 발은 시리고... 급 마무리 ㅎㅎ

달팽이개미 2015-11-26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한 권 쓸뻔하셨다는 그 맘이 궁금하여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져요~~ㅎㅎ

살리미 2015-11-26 21:31   좋아요 1 | URL
말이 그렇지 사실 소설은 또 어찌 쓰겠어요 ㅋㅋ 리뷰도 겨우 쓰는데 ㅋㅋ
하고 싶은 말을 글 속에 짧게 쏘옥~ 담아내지 못하는게 아쉬울 뿐이랍니다 ㅠㅠ

달팽이개미 2015-11-26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맘은 충분히 알 것 같아요~제 맘과 꼭 같아서요..ㅋ 그래도 오로라님 리뷰는 늘 읽고 싶은걸요~ㅎㅎ 날은 춥지만 따뜻한 밤 보내세요~^^

살리미 2015-11-26 21:37   좋아요 2 | URL
눈물나게 고마워요^^ 마음이 벌써 따뜻해졌어요!

서니데이 2015-11-26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개봉할 거라고 들었는데, 한 주일만 있으면 만날 수 있는 영화네요.
영화가 있으면 원작이 되는 책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오로라님, 편안한 밤 되세요.^^

살리미 2015-11-26 23:18   좋아요 2 | URL
네^^ 다음주 개봉이더라고요~ 영화평을 미리 봤더니 좋다는 사람도 있고, 별로라는 사람도 있지만 역시나 배우들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는 듯 해요!
저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거의 대부분 영화보다 소설이 더 좋지만, 어떻게 만들었나 궁금해서 영화도 왠만하면 꼭 찾아보거든요. 사실 둘 다 보면 제일 좋은거 같아요 ㅎㅎ
그러고보니 서니데이님 오늘의 마무리 글을 아직 못 읽었네요. 얼른 읽고 저도 하루를 마무리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