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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느리게 매혹되다
최예선 지음 / 모요사 / 2009년 4월
평점 :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말이있다. 일본에서 주로 쓰는 말인데, 한국어로 말을 하자면 일생에 단 한번의 만남 쯤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정확히는 일본의 다도에서, 어떤 만남이든 일생의 단 한번 뿐인 기회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이란다. 일본인들은 사람과의 만남에서 이 말을 주로 쓴다.
나에게 차와의 일기일회는 1999년 12월, 아니면 2000년 1월쯤이다. 그 겨울의 첫폭설(첫눈이 아니다)이 내린 날이었다. 내 기억에 서울에 그런식의 폭설이 내리기 시작한 건 그 겨울부터였다. 눈이 드문 고장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그때까지 눈이란 드물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야말로 백설이 난분분(亂紛紛) 하던 그날 오후, 나는 선생님댁의 거실에 있었다. 넓고 잘 가꾸어진 정원에 고즈넉히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선생님과 나는 재스민차를 마셨다. 기가막힌 맛이었다. 그날의 드문드문했던 대화도 기억나지만 더 명확하게 기억나는 건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재스민의 향기와 입술에 와 닿던 찻물의 온기다. 눈 내리는 날, 창밖으로 그 풍경을 바라보며 따스하고 안락한 거실에서 마시는 차라니. 지금 생각해도 꿈결같다. 일기일회. 그 날 그 시간, 그 장소, 그리고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맛. 그 뒤 내가 마시는 모든 차는 그날의 오마쥬다.
거기서 시작한 나의 차 사랑은 처음엔 녹차였다. 5년간의 해외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니 없어져 버린 인사동 쌍계제다가 나의 단골 차가게였다. 그 겨울 이후 거기서 매년 햇차를 샀다. 곡우 이전에 따는 우전과 우전 다음에 나오는 작설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차였다. 쌍계차(화개차)는 같은 지리산에서 나는 보성차와는 맛이 달랐다. 좀 더 섬세한 맛이랄까.
한국의 녹차를 구하기 힘들어지자 허브차로 넘어갔다. 온갖 허브를 두루 섭렵한 뒤 도착한 곳에 홍차가 있었다.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얼그레이, 다즐링.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홍차는 다즐링이다. 가향홍차중에는 유일하게 얼그레이만 좋아한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는 남들이 술을 찾을 때 차를 찾았고, 남들이 맛있는 술을 찾아 이것저것 품목을 바꿔가며 마실 때 맛있는 차를 찾아 이것저것 품목을 바꿔가며 마셨다. 한때 나의 혈관에는 피대신 녹차와 커피, 홍차가 흘렀다.
당연히(나에게는 이게 당연한 일) 차와 커피에 대한 책도 섭렵했다. 괜찮은 책도 있고 그저그런 책도 있었다. 사실은, 그저그런 시시한 책이 더 많았다. 이 책도 차에 관련된 책들을 사 들일 때 함께 쓸려들어 온 책이었다. 시시한 몇몇 책들을 읽다가 이 책도 그저그렇겠거니 젖혀놓은 책인데, 아이허브 홍차 관련 검색을 하다 걸려든 한 블로그의 글이 인연이 되어 꺼내 읽었다. 그런데 호오- 이거 꽤 괜찮다.
작가 최예선은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잡지사 에디터로 일을 했다. 즉, 글 쓰기 훈련이 되어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내용과 정보의 정확성에도 불구하고 글쓰기 훈련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전문가의 책들은 얼마나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던가. 그 지루한 책들 속에서 이 책은 반짝반짝 빛이난다. 차에 대한 정보와 역사적인 사실을 제대로 썩 잘 버무려서 재미있는 글을 썼다.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작가는 차와 예술을 잘 접목시켜 그저 그런 찻집 탐방기와는 전혀 다른 글이 나온다.
작가의 차와의 일기일회는 어느해 여름 고창 선운사에서 였다. 무더운 한낮 선운사 문턱에 다다른 작가는 대웅전 옆의 자그마한 다실에서 차를 마신다. 그 무더운 날에 뜨거운 차를.
이 무더운 날에 뜨거운 차가 웬 말이냐 싶었지만, 뜨거운 물이 차를 만들어내는 2,3분의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짜증스런 마음도 서서히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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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신 후에는 다음에 마실 사람을 위해 정갈하게 차 도구들을 헹구고 정돈해두었다. 뒷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조심조심 걸어 나오니 뜨거운 햇살이 어느덧 살며시 누그러져 있었다. 산을 내려가는 발길에 힘이 생겼다.
차가 주는 치유의 힘은 이런 것이리라. 사람을 좀 더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것. 세상을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 그리하여 미약한 인간의 힘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것.
p.30
아름다운 책이었다. 읽는 내내 그녀가 소개하는 홍차들을 맛보고 싶어졌다. 비록, 가향홍차는 별로고, 그녀가 무척 좋아한다는 시나몬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향신료중 하나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