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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숙만필
황인숙 지음 / 마음산책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고종석의 황인숙에 대한 찬사는 부럽기 그지없다. "황인숙은 기품있는 여자다" 라니. 고종석은 이 말을 황인숙의 책 <인숙만필>의 발문으로 쓰는 것으로 모자라, 그의 책 <고종석의 여자들>에서 또한번 황인숙에 대해 말을 한다. 기품있는 여자라고. 기품이라니, 기품이라니! 그 얼마나 우아한 찬사인가 말이다. 그렇게 우아한 찬사를 듣는 황인숙이 과연 어떤 여자인지 정말 궁금해지지 않는가?
며칠전에,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아, 이 상투적인 표현이라니. ㅠ.ㅠ) 서정희의 쇼핑몰 사건을 들여다보면서 피식피식 웃다가, 누군가의 댓글에서 "서정희씨 우아하고 기품있게 사는 것 같아 좋아했는데," 운운 하는 댓글을 읽고서 불현듯 황인숙이 떠올랐다. 황인숙은 서정희와 정확한 대척점에 서 있다. 기품이라는 단어를 아무데나 갖다붙이면 안된다.
그녀는 미혼이고, 가난하며, 크리스천이 아니고, 친구가 많고, 솔직하다. 인테리어하고는 상관 없는 남산 어귀의 옥탑방에 살고 있고, "내" 고양이를 기르고 있지는 않지만 동네 고양이를 거둬먹이는 일도 한다. 이 책은 그런, 고종석의 표현을 빌자면 "기품있는 황인숙 아씨"의 소소한 일상에 관한 이야기다. 특별난 일도 없고, 그냥 어제 만난 친구 오늘 또 만나 따뜻한 아랫목에 발묻고 고구마라도 까먹으며 도란도란 하는 이야기다. 이야기들은 전혀 두서없이 흘러나온다. 그야말로 꼭 친구들간의 수다처럼. 어린시절의 이야기, 날씨 이야기, 가족 이야기, 나이 이야기, 건강 이야기, 체중 이야기, 하고 있는 일에 관한 이야기, TV 이야기도 나오고, 만난 사람들 이야기. 그런거 있지 않은가. 친구들끼리 만나서 또는 전화로 막 이야기하다 문득 시계를 보고, 어머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어! 우리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자, 라고 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
끓인 물을 큼지막한 사발에 붓는다. 잠시 식힌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에 분유를 넣고 젓는다. 평화롭고 달콤한 냄새가 김을 타고 올라온다. 사발 가장자리에 잘 풀어져 녹은 분유의 순한 거품이 자디잔 레이스처럼 둘러쳐진다. 뜨거운 물에 탄 분유는 데운 우유와 또다른 맛이다. 우윳빛 맛, 유순하고 무구한 맛, 따듯하고 바보같은 맛이다.
p. 57
사실 나는 황인숙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이 있다. (이럴때는 차마 '황인숙을'이라고 말을 못하겠다.) 직접 뵈고 말을 해 본 황인숙 선생님은 바로 저 글의 분유같은 분이셨다. 유순하고 무구한 눈매의 따듯하고 좋은 의미의 바보같은 그런 분이셨다. 이런 친구 하나 있으면 참 좋겠구나, 싶은. 가식이 없고 솔직하니까 사람을 깊이 끌어당긴다. 한편으로는 한없이 천진한 느낌이기도 했다. 아마도 고종석이 말한 기품이란 여기서 온 것 아닐까. 아무런 꾸밈이 없이도 매력적인 그 천부의 무엇. 서정희에게 기품이라니... 말도.
특별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책이다. 무언가 대단한 곳, 유명한 곳에 여행을 가지도 않았고, 스스로도 말하는 바 글쓰는 것 외에는 직업도 없고 산책을 취미로 가지고 있는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가난한 노처녀의 일상인데도, 마치 분유처럼 그렇게 그리운 무언가가 있다.
아랫목에 발을 묻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친구가 없거나, 지금당장 만날수 없는 곳에 있다면, 강력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