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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2월
평점 :
며칠 전에 알라딘에서 22권의 책을 한꺼번에 주문했는데, 지난 화요일에 도착했다. 책은, 몇가지 단계를 가지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데, 첫 번째는 포장 박스를 뜯을 때, 두 번째는 첫 장을 넘길 때, 세 번째는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마지막은 책장에서 이 책의 위치를 결정할 때. 나는 가능한 한, 크기를 맞추어서 비슷한 책들끼리 꽂아두려 노력하는 편인데, 책의 크기는 대부분 비슷비슷하니까. 그 안에서도 자리는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마음에 드는 책은 가까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책은 멀리.
이 책은 포장박스를 뜯을 때부터 나를 특별하게 즐겁게 해 준 책이다. 장정이 몹시 이쁘다. 사실 미적 감각이 매우 떨어지는 편이라 책의 외모(?)에 까지 신경을 쓴다는 것을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심각하게 엉망이지 않으면 책의 외모에 신경 써 본 일이 없다.) 이렇게 책이 이뻐서 즐거워 해 본 경험도 새로운 것이다.
이 책은 외모만큼이나 문체도 나를 기쁘게 했다. 이 책의 문체는 잘 다듬어진 은빛이다. 정철의 관동별곡 중 한 구절을 빌어서 말하자면 "은하수 한 구비를 촌촌히 버혀 내어, 실같이 풀어내어 베같이 걸어둔" 것과 같은 아름다움이다. 이 글의 문장은 흐르는 물(은하수)와 같이 맑고 투명하며,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내용 여하를 떠나 문체만으로 사람을 이렇게 매혹시키는 글도 찾아보기 힘들 터인데.
더구나 소설의 서사성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문체에 매혹되는 일이 드물다. 최근에 김훈의 문체에 매료된 일이 있기는 했지만.
또한 이 글은 문체만이 투명하고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도 투명하게 반짝인다. 뭐, 그만큼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는 점에서는 경박함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을 탓하고 싶지 않을 만큼 이 소설의 인물들의 투명한 반짝임은 사랑스럽다. 악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 미운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 쇼코와 무츠키의 부모님은 그 부박함으로 인하여 현실성을 상실하고 현실성이 상실됨에 따라 미워지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사람을 미워하기란 어려운 일 아닐까.
소설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은사자'들처럼, 멀리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해 나가려고 하는 이 세 사람, 쇼코, 무츠키, 곤. 소설은 그것에서 끝난다. 공동체 생활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리고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아아, 그들의 공동체에 아무도 개입하지 말고 그냥 그들을 내버려 둬 주었으면(사실 무작정 이런 생각을 하기에는 '곤' 이라는 존재가 조금 애매하기는 하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저들대로 행복해, 당신들의 잣대를 들이대어 그들의 행복을 파괴하지 말아. 하는 생각. 이 생각은 그들의 투명한 은빛 맑음에서 기인한다.
삶을 영위하는 방법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구나, 하는.
PS. 차라리, 무츠키, 쇼코, 곤은 이해하겠는데 그들의 부모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 역시 '일본적 부모'인 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