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축제자랑 - 이상한데 진심인 K-축제 탐험기
김혼비.박태하 지음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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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런 글 너무 좋아! 전국축제자랑by. 김혼비, 박태하

 

읽은 날 : 2024. 9. 16

 

김혼비 작가의 이름은 자주 들어보았지만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난 작가에 낯가림이 심하다니까. 게다가 월드컵은 좋아하지만 축구는 좋아하지 않고(정확히는 A매치라는 국가대항전은 보지만 K-리그는 아예 안 보는. 아마도 축구 그 자체보다는 A매치가 가지고 있는 비장미와 호전성을 좋아하는 거다. 누가 그랬지? 현대국가에서 축구 A매치는 전쟁을 대신하는 거라고. 아 이거 되게 유명한 작가가 한 말인데.) 그 중에서도 여자 축구는 더더욱 더 관심이 없기에(나에게 김혼비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의 작가였다.) 젖혀 놓은 작가였다, 김혼비. 다만 혼비라는 이름이 하도 특이해서, 대체 무슨 뜻인가, 이 작가의 부모님은 무슨 의미를 담아 이 이름을 아이에게 지어줬을까, 한자는 뭘 썼나. 하는 궁금증을 혼자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궁리해보게 했다. 혼비가 작가가 지은 필명이고,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영국작가 닉 혼비(축덕으로 유명한)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해 쓴 거라는 걸 알았을 때의 허무함이란. 호기심이 해결된 것은 다행이었고 한편으로 이 친구, 축구에 진짜로 진심이구나 싶었다.

 

그렇게 넘겼던 작가의 책을 읽게 된 건 이상한데 진심인이란 부제 때문이었다. ‘이상한데, 진심인이란 말인가 이상한 데 진심인이란 말인가. 띄어쓰기 하나로 뜻이 달라지는 우리말의 언어유희. 물론 부제는 이상한데라고 붙여 부사어로 썼다. 근데 이상한 데라고 띄어 써 관형어와 의존명사로 써도 뜻이 다르면서 또 같은 듯한 재기발랄한 언어구사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내내 폭소했다. , 이 작가 진짜 유머러스하게 언어를 잘 가지고 노는 작가구나. 박민규급인데, 이쯤이면. 내가 읽으며 하도 큭큭대며 웃어서 남편도 아이도 물을 정도였다. 결국 남편은 다음 독서목록에 이 책을 추가했고.

 

이 책에서 소개(자랑)하고 있는 12개의 전국 축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의 우리와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축제의 한마음 큰잔치”(p.103)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에 일관되게 일관성이 없으면 일관성이 생긴다는 점’(p.104)도 배울 수 있고 “‘어쩌라고어쩌려고를 넘어 어쩌자고하는 기분”(p.106)이 뭔지도 알게 된다. 이렇게 교훈적!(K스러운)인 책인 거다, 이 책이.

 

여기까지 읽다가 문득, 성석제의 음식 에세이에서 읽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냉면인 성석제에게는 같은 냉면인 친구가 여럿 있는데 그 중 L은 오륙년 전부터 지방 소도시 농촌마을에 살게 된다. 그는 인구 삼사만의 읍에 최소한 하나쯤은 제대로 된 냉면집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탐색에 탐색을 거듭한 끝에 그럴싸한 식당을 하나 발견했다. 1)가정집을 개조한 곳으로 2)재래시장의 뒷골목에 있었고 3)아주 낡았으며 4)대머리인데다 늘 얼굴에 웃음기가 감도는 주인 등의 요인이 그가 이 식당을 제대로 된 냉면집으로 판단한 계기다. 결정적으로 그 가게는 냉면 전문이라는 깃발을 꽂고 있었다. 자신이 진짜 제대로 된 냉면집을 발견했다고 확신한 L은 그 냉면집에 들어가 평양식 물냉면을 주문한다. 그리고 화장실을 가느라 식당 뒤편 주방을 지나게 되며 그 장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냄비에는 물이 끓고 있었고 그 물에 주인이 막 집어넣은 면이 삶기고 있었다. 나 혼자만을 위해서 특별한 도구를 쓰는구나 하는 감동에서 그가 빠져나오기도 전에 주인은 면을 꺼냈던 비닐봉지를 머리 높이의 선반에 턱 얹어 놓았다. 그리고 그 봉지에서 꺼낸 또다른 자그마한 봉지-우리가 라면을 끓일 때 함께 첨부된 자그마한 봉지와 비슷한 크기의 봉지를 토끼를 연상케하는 큰 앞니로 찢었다. 이어 냉면 그릇에 수돗물을 따르고 봉지 안의 가루를 넣고는 굵직한 손가락으로 휘젓기 시작했다. 한손을 허리에 얹고 도닦는 사람처럼 지그시 먼산을 보며 손가락을 휘젓는 그 모습을 말로 표현하자면 내 입에 들어갈 거 아니니까라고 한다. 그는 선반 위의 비닐봉지에 적힌 글자까지 보고 말았는데 그건 그가 가끔 집에서 해 먹던 ㅊㅅ냉면이었다.

성석제, 소풍, 창비, 2006, p.152-153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L그래도 그 상표가 면에서 메밀 함량이 기중 높은 기라.”는 변명을 해 주고, 여기에 성석제가 그래도 함량이 십 퍼센트 미만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메밀이 중국산이라는 것도라는 해석을 달아주는 데까지가 이 이야기의 완성이다.

 

이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한손을 허리에 얹고 도닦는 사람처럼 지그시 먼산을 보며 손가락을 휘젓는 그 모습이다. 김혼비 박태하 부부가 찾아다닌 전국 축제의 모습이 거기에 덧씌워진다. 무려 냉면전문의 깃발을 건 식당에서 시판 냉면을 끓여 팔면서 도닦는사람처럼 먼산을 지그시 바라보는 늘 얼굴에 웃음기가 감도는 대머리 주인장의 모습. 박태하가 요약한 무맥락-탈미학-테크니컬-키치’(p.104)가 뭔지를 한방에 보여주는 장면이어서 바로 연상되었던 거다. “‘있어 보이는말들을 때려 넣었을 뿐인 실로 정성스러운 아무말’”(p.98)과도 그 궤를 같이 한다. 거기에 끝내 메밀함량을 따져 변명을 해 주고 싶어하는 L의 발언까지.

 

다시, 이 책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김혼비와 박태하의 책을 찾아 읽어보고 싶을만큼 유머러스한 언어를 구사하는 작가다. 지방축제가 뭔지를 알면서(나는 어린 시절 거의 해마다 진해군항제를 몸소 구경하셨다. 에헴) 이 책을 읽고는 그 축제들에 가 보고 싶었다. 축제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진짜 이런다고?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지 떼별 그지 같은 것들이 그득그득 들어차”(p.129)있다잖아.

 

첫 꼭지를 읽은 뒤엔 모든 글이 다 어떤 종류의 끈적끈적함과 어떤 종류의 매끈함이 세련되지 못하게 결합한 K스러움’(p.7)에 대한 비아냥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잠깐 했는데 김혼비 박태하 부부의 사랑스러움은 그래도 그 상표가 면에서 메밀 함량이 기중 높은 기라.”는 변명을 굳이 해 주던 L과 닮아있다. 친구들은 홍대와 이태원에서 불타는 핼러윈을 보낼 이 시간에 자기는 의좋은 형제공원에서 핑크퐁의 상어가족EDM에 맞춰 리듬을 타고 있는 것을 핼러윈의 거대한 장난처럼 느낄 줄도 알고 내 인생 최고의 핼러윈이야!” 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그 사랑스러움. 이 책을 읽는 내내 눈길 닿는 어느 하나 심란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있을 법했지만 어색하고, 어색할 법했지만 그러려니 하게 되는 어떤 비현실. 이럴거 같았고 그래서 왔지만 또 이렇게까지 이럴 줄은 몰랐던 광경’(p.87-88)을 앞에두고도 그들은 이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내내 폭소를 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떤 세계에서는 여전히 절실하고 또 많은 이들의 생계나 자부심을 떠받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p.280) 비웃는 건 너무 미안하잖아. 그런데 글을 쓰는 작가가 그것들에 대한 경의를 잃지 않았기에 그 유머러스한 단어와 아이러니, 패러독스, 키치, 등등의 단어를 아무러나 다 갖다 써도 될 것 같은 장면들에 끊임없이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거리낌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 이 글의 가장 큰 장점이다. 아마도 이 글을 쓰는 작가가 처음부터 몰라도 일상생활에 하등 지장 없고 그래서 알 필요 없는 것들을 기록하고 기억해 두고 싶어서이 글을 썼기 때문일지도.

 

작가는 그 축제들을 보고 의병탑 앞에 들러 잠시 참배를 했다. 국가주의의 색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징물 앞에서는 실로 오랜만에.’(p.89) 하거나, ‘시간의 흐름과 사회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누구도 너무 멀리는 뒤떨어지지 않기를, 아무도 너무 갑자기는 외로워지지 않기를’(p.135) 빌기도 하고 축제장에서 가져온 여러 농장의 명함을 늘어놓고 하나씩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이왕이면 인터넷 주문이 안 되는,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판로가 더 좁은 생산자를 찾아 전화로 주문을’(p.284) 했다. , 이 착한 사람들.

 

착한 사람들의 악의 없이 빵빵 터지는 유머 덕에 읽는 내내 정말로 즐거웠다. 내년 12일엔 나도 산청곶감축제나 가 볼까.

 

2024. 9. 16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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