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언어의 무용함에 관한 영화다.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짓는 기준은 언어이다. 말, 특히 문자의 발명은 획기적 수단이었다. 문자로 생각을 기록할 수 있고,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도 있어서 인류는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고 시간을 절약하고 문명을 발달 시킬 수 있었다. 또 언어는 인간을 다른 종들에서 분리되어 언어를 공유하는 이들과 결속시킨다. 언어는 하나의 권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는 글을 읽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기도 했다. 글을 읽고 사고하는 힘은 인간을 분열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언어의 유익성과 유용함에만 몰두해 있다. 기능적 면에서 언어는 확실히 발명품이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으로 넘어오면 언어는 위력을 잃어버린다. 언어는 인간의 감정을 백만분의 일도 전달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감정을 언어화하는 작업은 아주 작은 부분만을 옮기는 게 가능하고, 그것 마저도 때로는 오해를 일으킨다. 발신자와 수신자의 감정 체계가 다르다면 언어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이끄는 수단이 된다.

<쉐이프 오브 워터>의 여주인공 엘라이자가 듣기는 하는데 말을 하지 못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언어 체계로 사고 하는 인간이 아니라 감정 체계로 사고하는 인간의 상징이다. 그녀는 비언어권에 속해 있고, 인간의 언어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체의 비언어적 체계에 익숙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괴생물체가 그녀에게는 그냥 자신과 같은 생명체일 뿐이다. 언어 쳬계에 속한 인간에게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인 생물체라 해부를 해야한다고 결정한다. 수수께끼를 푸는 인간의 방식은 상대가 언어적 정보를 보내야하는데 비언어적 단서들은 인간에게는 때로는 위협적인 것으로 보이고, 때로는 하등한 것으로도 보이고, 때로는 성가신 것으로도 보인다. 이런 인간의 결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스트릭랜드이다. 언어계, 즉 선명한 기호체계에 종속되어 있는 인물이다. 스트릭랜드는 희귀한 초록색 캐딜락을 타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 혹은 멋진 사람이라는 기호를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에게 괴생물체는 그야말로 '괴'기스러운 것일 뿐이고 성공을 위한 임무이다.

반면에 그와 대척점에 있는 엘라이자는 인간계와 생물계의 경계에 있다. 그래서 괴생물체를 보자마자 친근함을 느끼고 인간의 학대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을 한다. 그저 보살펴주고 사랑을 주는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단번에 교감을 느끼는 게 가능하지, 하면서 흥미가 급감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아늑한 카페에 앉아서 소통의 어려움에 대해 영화를 같이 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는 이 영화를  스트릭랜드처럼 보려고 했다. 스트릭랜드같은 사고 쳬계에 속한다면 이 영화는 재미없는 그저 잘 만든 영화로 보인다.

엘라이자는 괴생물체를 학대와 죽음에서 구출하기로 하고, 영화는 판타지라 엘라이자의 결정을 도와주는 이들이 곁에 있다. 인간의 언어계에 속해 있지만 마음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다. 현실에서도 마음의 움직임에 귀를 움직이는 이들이 드물게 있다. 다행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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