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적고 싶은 영화를 오랜만에 봤다. 용산참사 후 그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사람마다 사건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용산참사에는 두 연대 주체가 있었다. 용산철거민연대와 다른 지역철거연대. 두 주체는 공동의 목적이 있었고, 연대했다. 하지만 공권력 앞에서 무기력했다. 4층 건물에 망루를 세우고 저항을 하고 공권력은 점점 그들을 압박했다. 화염과 폭발, 그리고 사이렌의 혼돈 속에서 현장에 있던 이들의 공포 진원은 각기 달랐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같았다. 건물에서 뛰어내리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공포심. 생사를 오가는 공포 속에서 살려는 의지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본능이다.
용산철거민연대를 이끈 당시 위원장은 망루로 진격을 외치고 가장 먼저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그로 인해 그는 몇몇 동지와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기지 못했지만 이성이 지배하는 시간에는 감정을 억누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다른 철거민 집회에 나가 용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먼저 뛰어내려 산 것에 대한 죄책감을 치유하는 자신만의 방식이다. 하지만 다른 지역철거민연대는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공동정범으로 형기를 마치고 출소 후 무기력하고, 트라우마 속에 살다가 감정적 연대를 필요로 한다. 소주 한 잔 기울이며 분노를 나누고 서로 다독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다. 현장에 있던 이들만이 잊을 수 없는 공포와 분노를 마주하는 방식이다.
트라우마를 바라보는 이 두 방식이 충돌한다. 공동목표를 위해 출범했고, 정권의 그릇된 시선으로 목표는 좌절되고 공동정범이란 죄목을 달고 어찌보면 평생 보이지 않지만 같은 배를 타고 나아가야하는 운명에 처했다.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지만 내부 갈등은 곪아있다. 감정적 연대가 부재한데 감정적 연대는 대의명분을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게 아닐까. 이미 한 배를 탔고 거친 폭풍우를 만나 좌초되었고 남은 건 잔해다. 잔해를 주워담으려면 이성도 필요하지만 그 전에 잔해를 왜 맞춰야하는지에 대한 논리가 필요하다. 용산은 이미 참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상황을 원상복구하는 게 아니라 억울함을 알리기 위한 규명이고,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정권의 잘못이고, 공동정범으로 몬 검찰의 잘못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저항할 수 밖에 없었던 절박한 당시의 상황을 당사자가 아닌 타자에게 이해시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미디어가 더 이상 보도를 하지 않으면 그 어떤 타인의 고통도 잊혀지기 마련이니까. 특히 약자의 고통은 더 잊혀지기 쉽다.
용산철거민연대위원장과 타지역연대참여자들이 6년 만에 만나서 감정을 골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위원장에게 말한다. 죽음이라는 공포 속에서 뛰어내린 것을 탓하는 게 아니다. 위원장에게 너무나 필요했던 한 마디였다. 고통을 마주하고 대처하는 방식이 다른 연대가 감정적 연대를 이루는 지점이기도 하다. 진상이 규명되고 그 억울함이 밝혀지기를. 우리가 할 일은 잊지 않는 일이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고 잊지 말고 다시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었으면 좋겠다. 잊지 않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그들과 감정적 연대를 이루는 게 아닐까.
<코코>에 이런 말이 나온다. 가장 슬픈 일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일이라고.